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Margaret K 2021. 4. 8. 06:57

2021년 4월 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루가 24,35-48)
 
 

"Peace be with you."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무서워 떨며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함께하면서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배웠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죄책감과 비참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오는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만난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도 헛소리라 여기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이런 제자들 한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서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 한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이나 실패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하고 말씀하시어 당신과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풍랑을 만나 힘들어 할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인 줄 알고 기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다. 너희와 함께 했고,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나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인 손과 발을 보라고, 그 못 자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한 식탁에 함께 앉아 드시고 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그들을 일깨워 주십니다. 아픈 이들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더 울고 웃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아픈 이들을 더 사랑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가 사랑이었기에,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당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수님께서는 늘 사랑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자신에게 잘못했는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진짜로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님께 계속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답니다.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늘 사과를 먼저 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볼 수가 없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춘 잘잘못만 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사과를 먼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는 사과는 누가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주님의 사랑에 거리를 두는 사람인가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제자들이 보여줬던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화를 내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자신들도 십자가 죽임을 당할까 봐 도망치고 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잘못한 것을 책망하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하느님을 다시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계속 의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자, 자신의 손과 발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으로도 믿지 못하자, 구운 물고기를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도 합니다.

굳이 당신이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고 의심하기만 하는 제자들에게 큰 벌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큰 사랑이고 성숙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기준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닌, 오히려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어떤 잘잘못에서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고, 죄에 대해 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품으로 안아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증인이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으로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루이스 스티븐슨).


하느님께 맡기면 돼!!

오랫동안 자녀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부는 오랜 시간을 힘들어했지만, 결혼 10년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기에 정말로 잘 키우겠다고 부부는 함께 두 손을 꼭 잡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사춘기를 지내면서부터 부모 속을 계속 썩이는 것입니다. 혼내기도 하고 두 손을 빌며 사정하기도 했지만, 아들은 부모 곁을 떠나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군대에 다녀온 뒤, 혼자서 멀리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부부는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 싫다고 떠난 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서운한 마음을 친한 성당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냥 둬. 하느님께 맡기면 돼.”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자식을 내 마음대로 하면 내 수준으로 키울 수밖에 없어. 그러나 하느님께 하시면 하느님 수준이 되는 거야. 그러니 하느님께 맡겨!”

성인이 되었으면 이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내 수준이 아닌 하느님 수준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도 낮은 수준인 내 수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목적이 아닌 믿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경을 통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이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유령을 보는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 손발을 만져보게 하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십니다. 유령이 아닌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 육체가 아닌 유령을 보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경의 주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만드는 가장 좋은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찾아내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섭리에 놀라고 믿게 됩니다.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도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깜짝 놀랐던 적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바오로 전통에 따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낸 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피와 물은 좁은 의미로는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이 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연히 죽으셔야 하고 부활하셔야 함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학자들처럼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말씀 안에서 무언가 찾아내려 했다면 이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 말하면 어떤 성서학자들은 분노합니다. 성경은 선입관 없이 문자에서부터 연구하여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라는 사실을 연구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미 아시는 교수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믿게 된 이유는 그 성경을 설명해 주신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다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마치 악기와 같아서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냅니다. 악기 가격에 매료되지 말고 악기 자체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본래의 악기 연주법이 아닌데도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2020)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음악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운 좋게 자신이 연주하고 싶어 하던 유명 연주자인 도로시 밴드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기쁜 나머지 길을 걷다 맨홀에 빠져 죽고 맙니다.

    죽어서도 그는 평생소원이었던 연주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다시 살아나서 그날 저녁에 있는 연주회를 멋지게 장식합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도로시는 조를 자신의 밴드의 정식 단원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뭔가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언가 더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이 연주해야 하는 삶이 이어집니다. 연주가 잘 되는 경우는 100번 가운데 1번.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려오느라 놓친 행복들이 너무 컸습니다. 그는 바다에 살고 있으면서도 평생 바다를 보고 싶다던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성경이 이 재즈 연주와 같습니다. 성경을 다 암기하고 훌륭한 성경 학자가 된다고 해도 결국엔 자신이 속한 팀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재즈 연주를 바라면서도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도로시의 일상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밴드에 들어가면 그녀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오직 그것을 쓰신 분만 그 의미를 알고 최고의 해석자가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그려보세요.”

    반 아이들은 가족, 동물, 자연 등 각자가 원하는 것을 도화지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는 도화지를 온통 검게 칠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부모들도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십 장의 도화지를 그저 빈틈없이 검게 칠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의사들에게도 무엇을 그리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릴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도화지에 검게 칠했습니다. 이제 수백 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의 책상에서 커다란 고래의 그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다 맞춰보니 커다란 고래의 모양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저 고래를 고래의 크기에 맞춰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가 높은 위치에서 그것이 고래의 그림임을 알고 내려다보지 않으면 성경 말씀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화지 한 장 한 장 연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미리 알고 설명하지 못하면 성경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경을 권위 있게 가르치실 수 있으십니다.

​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예수님께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교회만이 그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요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이 곧 교리입니다. 누구든 성경을 통해 그 가르치는 이가 가진 교리로 수렴되게 되어 있습니다.

​    성경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게 만드는 다리입니다. 도구를 보지 말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을 배워야만 구원의 교회 일원이 됩니다. 성경보다 항상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교리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정호승 시인은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만 집을 짓는다.’라고 하였습니다높은 나무 가지 위에 위태롭게 보이는 둥지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배우지 않았어도새들은 바람이 없는 날에 편하게 집을 지으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둥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고치에 있는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밖에서 고치를 열어주면 나비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스스로 고치를 열고 나와야만 날개에 힘이 생겨서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엉덩이가 아프기 마련입니다다리의 근육도팔의 근육도 아프기 마련입니다그러나 자전거를 타려면 그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습니다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엉덩이가 아팠는데 어느덧 아픈 줄 모르고 타게 되었습니다다리와 팔이 아파서 경치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쁜 꽃도 보고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그렇습니다새들이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짓듯이삶은 폭풍우 속에서도 항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잔잔한 파도는 결코 강한 항해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도 모두 지난겨울 눈보라를 맞으면서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삼보일배오체투지, 108와 같은 고행이 있습니다이는 깨달음을 얻어 구원받으려는 염원입니다묵주기도에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교회에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내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우리말에 수고(受苦)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타인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지금 나의 삶이 세상의 것들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의 부활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려했던 율법학자와 대사제의 삶은 아닐까요지금 나의 삶이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면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와 같은 삶은 아닐까요지금 나의 삶이 베드로 사도처럼 변화된 삶이 아니라면 타인을 위한 수고의 삶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지금 나의 삶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기쁨의 삶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찾으려는 열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지금 나의 삶이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처럼 가슴 벅찬 감동의 삶이 아니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은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발현하신 분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부활후 제자 공동체에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장난끼가 발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야 이 겁쟁이들아!”로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참교육을 실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지들 말어라. 결정적인 순간에 다들 36계 줄행랑을 놓고 말이야! 도망가고 숨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그게 인간으로 할짓이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애제자 요한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들 요한 좀 본받아라! 특히 베드로 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몰아부치지 않았습니다. 질책하거나 공개적인 챙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산란한 제자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이나 정령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필사본에 따르면 부활 예수님을 공상의 선물, 악마의 환영으로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은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환시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목격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발현하신 분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다.” 그분의 손과 발이 그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선명하게 나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짜 육체의 모습을 지니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즉시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드셨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순전한 환영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볼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지니고 발현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육체적 실재에 관한 모든 의구심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루카 24,35-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하였다. 부활은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신다.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하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제자들의 사명을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오늘 복음의 대목은 어제 우리가 들었던 엠마오 제자들의 일화 뒤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오시어 평화를 베푸십니다.

지난 며칠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예수님은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영육으로 평화를 되찾아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평화를 말씀하시지요. 평화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심어주신 자기다움을 가장 충만히 누릴 때 존재적으로 느끼는 행복일 테니까요.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39)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 몸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십니다. 이 접촉은 지금 그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이 실제 현존하심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분과 제자들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내면의 심정적 죄의식도 녹여 주는 배려가 될 터이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41)
예수님께서 정말로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셔서 먹을 것을 요청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스승과 제자가 동고동락한 세월 동안 그들이 가장 빈번히, 허물없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나누었던 행위가 바로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계심과 의혹,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주시려 여러 모로 애쓰시는 듯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예수님은 생전에 누차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메시아의 소명을 깨닫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인간적 지식과 욕망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신비니까요. 스승의 부활까지 체험한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제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비로소 제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그분 존재와 가르침, 행적과 부활의 영광까지 맛보고 누리고 체험한 진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인"은 세상 사건의 증인과 사뭇 다른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증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체험한 바를 객관적 입장에서 진술하고 증거하는 역할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사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사명까지 부여받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만납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
굳이 반복할 필요없이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치유 능력이나 언변이 아니라, 모든 일이 성경에 근거해 이루어이진 것이며 자신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증인은 그저 증인일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증인입니다. 곧 그분의 판박이, 따라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증인은 말과 행동, 선포와 능력 등 자기 존재를 총동원해 주님의 영광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무수한 증인들, 증거자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상승과 추락과 충돌의 충격으로 온 존재가 들썩이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님 사랑의 증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빕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자책도 자랑도

 -김찬선신부-


제가 지난 3월부터 청담동 성당 영성학교에서 10주간 특강을 하고 있는데

지지난 주일 특강은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하고 했는데도 강의를 망치고 나니 무척 속상하고,

더 나아가서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자책까지 드는데

자책하는 내가 또 자책이 되는 거였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책하니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수도생활도 할만큼 한 사람으로서 어찌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저를 또 자책한 것이지요.

 

자책하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거나 적어도

자책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자책이 문제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반성은 해야 하고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게는 해야겠지요.

이런 반성은 그래서 겸손에 가깝지만 그러나 자책은 교만에 가깝습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자책은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자의 행위이기 때문이고,

성공했을 경우엔 틀림 없이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 자만하고

자랑도 하고 의기양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이런 것을 넘어선 차원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불구자를 고쳐주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경탄할 때 그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그는 프란치스코처럼 인간의 것이란 죄와 악습뿐이고

온갖 좋은 것은 다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출세를 위해 갈릴래아 시골구석에서 주님을

따라나섰고,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그 바라던 출세가 이루어지리라

믿었는데 주님께서 허무하게 돌아가시게 되자 배반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은 자기를,

이런 믿음의 소유자인 자기를 부활의 증인으로 만드시고

죄가 아니라 주님처럼 치유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베드로는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자책이나 자랑이나 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자기 앞에 있는 자의 행위이고,

베드로처럼 꿈꾸던 성공과 출세가 좌절되고,

그 좌절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실패도 자책 않고 성공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다시 하느님 앞에 겸손히 서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1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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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만드는 가장 좋은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찾아내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섭리에 놀라고 믿게 됩니다.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도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깜짝 놀랐던 적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바오로 전통에 따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낸 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피와 물은 좁은 의미로는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이 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연히 죽으셔야 하고 부활하셔야 함을 믿게 되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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