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꼬 16,9-15)
He appeared to them and rebuked them
for their unbelief and hardness of heart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기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의 전 생애를 받아들이고, 그분 삶의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본 것을 말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날 오후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알리지만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불신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랑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이 마침내 승리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하고 누리고 싶으나, 삶에 그 고난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아직 완고한 것은 아닐까요?
어느 신부님이 마르코 복음서에 관한 글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길은 정해 놓고 몇 년만 고생하면 끝나는 것이 아닌 힘든 길이라고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한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글에 대해 비평만 했습니다. 그런데 비평과 문제점만 말하다 보니, 모임은 언제나 얼굴을 붉히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진 모임도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는 혹평보다 상대에게 최대한 좋은 부분을 찾아서 격려해주고 칭찬했습니다.
10년이 지난 뒤, 깜짝 놀랄만한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격려하고 칭찬했던 모임의 학생들은 대부분 훌륭한 작가로 성공했지만, 비평과 문제점만 말했던 모임의 학생 중에는 뛰어난 작가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95%의 좋은 점과 5%의 나쁜 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95%의 좋은 점보다 5%의 나쁜 점에 더 주목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95%의 좋은 점을 보는 사람은 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게 살아갑니다.
비판과 문제점만 말하는 5%의 나쁜 점만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 격려하고 칭하는 95%의 좋은 점을 바라보는 ‘나’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마리아는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지요. 그러나 이 여인의 기쁜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이들 역시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렸지만,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크게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러나 결국은 부활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었음에도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 예수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부정적이고 불만이 가득한 암흑의 시간을 보내면서 인상을 쓰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그 자리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시골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쁨을 받아들였기에 제자들과 세상에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커다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 사명은 긍정적인 믿음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전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제게 사람들은 “신부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신부이니 당연히 미사와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종일 신부 역할만 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일반 직장인도 일만 하지 않겠지요. 단 하나의 일만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열정을 줄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행, 독서, 운동, 영화 보기….
저 역시 딴짓을 많이 하기에 신부로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대표적인 딴짓은 책 읽기와 글쓰기입니다. 전문 작가가 아니니 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부’라는 호칭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일이라 할 수 있는 미사와 기도, 묵상 등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와 강의하는 것으로 저 자신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딴짓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닌, 의미로써 내게 다가오는 ‘딴짓’을 통해 지금을 더 활기차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도 ‘일’일 때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의미로 받아들일 때는 기쁨이 넘칩니다.

신앙체험 나눔은 교만이 아닙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그 이전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였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차피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렇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면 되지 굳이 다른 증인들을 보내셔서 증언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본래 교회 공동체가 당신을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여러 증언을 통해 형성된 믿음으로도 복음을 전할 근거가 충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약점 중의 하나가 신앙체험을 나누기를 장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나의 신앙체험을 말하는 것이 교만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개신교 신앙체험 간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가톨릭 신앙 간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앙 간증이 많지 않아서 신앙체험이 많지 않은 것인지, 신앙체험이 많지 않아서 간증이 많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따르면 분명히 각자가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교회 내에서 공유되기가 장려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증의 힘은 잘난 척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당신도 나와 다를 바가 없어요. 내가 했다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는 영어로 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 신앙체험 나눔이 장려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에서 한 거지가 동냥하며 앉아있었습니다. 동냥을 받고 연필 한 자루를 주고 있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다른 사람들처럼 1달러를 주고는 남들처럼 연필을 가져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합니다.
“1달러를 냈으니 연필을 가져가야죠. 왜 가져가라고 말하지 않죠?”
거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여러 개의 연필을 들어 보였습니다. 사업가는 그중 제일 좋아 보이는 것으로 골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거지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업가입니다.”
거지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거지가 아니고 사업가라고?’
이 말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고 불과 몇 년 만에 사업가가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업가가 나를 사업가로 불러주었기에 내가 사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출처: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말 한마디’, 유튜브 채널, ‘최불꽃TV’]
간증은 바로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는 베드로만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보면 많은 이가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할 수 있다면 더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신앙체험 나눔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1마일을 4분 안에 뛸 수 없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심장이 터질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육상에서 통용되는 말이었고 누구도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54년 5월, 의사 지망생으로 수련의 과정을 밟던 로저 배니스터가 1마일을 3분 59초4 만에 주파했습니다. 배니스터가 3분대 기록을 쓴 날 이후 1년 동안에는 37명이 기록을 세웠고 2년 동안에는 300여 명의 선수가 4분 벽을 돌파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스포츠 학자들은 “배니스터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 예수님은 당신을 만난 이들에게 교회 안에서 증언하라고 시켰고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앙체험 소통의 장이어야 하고 그래서 "저 사람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저 사람이 했는데, 나는 왜 못 해?”라는 생각으로 서로 자극을 주어야 하며, 또한 이런 체험들이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감독 거스 히딩크는 축구 선수들 간에 선후배 문화로 소통이 되지 않음을 인식하고 선후배끼리 분리해서 앉던 습관을 바꿔 자신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하게 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4강까지 갈 수 있었고, 이것을 이어받은 홍명보 감독도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같은 방법으로 동메달을 따게 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팀은 망할 수밖에 없지만,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는 팀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체험 나눔은 교만이 아닙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그런 체험들을 모으는 그릇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공동체 모임에서 그러한 체험들을 나누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유튜브 채널 ‘함께 고민해요’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 나눔을 통해 신앙도 커지고 자극도 받습니다. 우리 소공동체에서 비록 큰 체험이 아닐지라도 일상에서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 세상에 나가 뿌릴 복음의 씨앗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매달 ME 모임을 ZOOM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4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3시부터 행복해!” 매달 두 번째 토요일에 모임이 있습니다. 다들 모임이 있는 날은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비록 대면으로 하는 모임은 아니지만 영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면으로 하는 모임에는 찾아가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영상으로 하는 모임은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모임에서 꼭 빠지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10분 동안 글을 쓰고, 10분 동안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번 나눔의 주제는 “나는 배우자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을 때 행복한가!”였습니다. 30년, 40년 함께 살고 있는 부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서 말을 하고, 행동했을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집안 청소를 해 주는 배우자, 맛있는 음식을 해 주는 배우자,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배우자,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배우자, 칭찬과 격려를 해 주는 배우자가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둘이 같은 곳을 볼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같이 묵주기도를 할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같이 산책을 할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같이 성당에 갈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서 먼가를 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곳을 바라보니 서운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화를 들으면서 연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것을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는 사순시기에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교우들과 함께 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소홀히 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성당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2021년 사순시기에는 매주 십자가의 길 기도를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전을 하지 않지만 교우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성체강복을 받았고, 신부님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강의를 하는 것도 기쁨이지만 강의를 듣는 것도 행복입니다. 전례를 집전할 때는 잘 몰랐습니다. 전례에 참례하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2처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을 묵상하면서 모두가 무릎을 꿇을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의 잘못과,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함께 하시면서 성경에 나타난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가슴에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느꼈고, 빵을 함께 나눌 때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배자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은 이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다시금 치열한 삶의 자리로 전진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한마디의 위로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이제 영광의 표징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토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토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완전히 주님께 의탁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담대하게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도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신다는 강렬한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다섯번째 책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지속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이자 제3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제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예수님의 애제자였던 요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기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정식 율법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총명했다. 특히 전문직 어부로서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꿰뚫고 있었으며,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사가는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두 사람의 출신배경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와 경륜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대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진솔하고 강력했으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난다긴다 하는 율법학자들도 사도들의 논리정연하고 탁월한 가르침 앞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의를 하거나 듣다보면 즉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잘 준비되고 진지하게 숙고된 강의인지, 아니며 그저 현란한 말재간과 품위가 떨어지는 천박한 유머로 포장된 영양가가 조금도 없는 강의인지.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우선 힘이 있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담대했습니다. 애써 포장하거나 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위축되거나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외쳤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도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고,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강렬한 현존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전처럼 뒤로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배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 안에 굳건히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저 역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며,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이영근신부-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더구나 이 날은 인간에게 가장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입니다. 곧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오직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런데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아멘.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조욱현신부-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한상우신부-
우리를
살리는
복음이다.
복음은
이미 여기에서
힘차게
시작되었다.
피조물의
허무를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생명의 참된
복음이다.
생명이 있기에
복음이 있다.
복음 선포는
부활의
선포이다.
복음의 핵심은
다름아닌
부활의 참된
진리이다.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우리 신앙인은
부활의
산증인들이다.
부활의 선포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부활은
믿음의 삶이다.
힘찬 삶이
힘찬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우리들 삶이
복음의 삶이다.
우리가
삶으로
복음을
믿을 때
복음은
강력한
생명이 된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이다.
복음으로
모든 피조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삶은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시작이다.
매일의 삶이
복음이고
매순간의
나눔이
복음 선포이다.
우리를 위한
복음 선포임을
진실로 믿는다.
새 삶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가 목격됩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마르코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전혀 미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학자는 앎으로 말하고 운동선수는 기록으로 말하며 신자는 믿음으로 말해야 할 터인데, 예수님의 최측근에게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불신과 완고함이 이처럼 폭로되어도 괜찮은 걸까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런데 믿지 않는 제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믿음을 확인받거나 맹세를 시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거두절미하고 소명을 부여하시니까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제1독서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히 발언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 4,13)
베드로는 확실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나 그 추종자들을 적대하던 이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면 과장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겪은 제자들은 서서히 자신의 완고한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화룡정점이 될 결정적 사건인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체험하지요.(사도 2, 1-12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
베드로의 말에는 한치의 두려움도 의혹도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굳은 신념과 확신이 가득하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합지졸처럼 갈팡질팡 나약했던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 자녀로서의 충만하고 온전한 완성의 상태를 관상하시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신뢰는 사도행전이 증명하듯, 결국 제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되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사랑을 쏟아 주신다는 이야기는 믿음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니 그렇습니다.
세속적 번영과 성공을 누릴 때는 믿을 만하다고 여기다가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믿음을 거두고 돌아서길 반복하면서, 믿음과 불신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성이고 있다면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은 거래가 아니라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됩니다.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지해 주고 힘이 되어 주신 스승의 놀라운 믿음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결국 그분 믿음에 대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을 성대히 경축하고 기뻐하는 부활 팔일 축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더 소중히 즐기고 누리면 좋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을 아낌없이 내어드리고, 우리를 믿어 주시는 그분께 큰 감사와 사랑을 올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큼 자라나길 희망하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8부 토요일-영적인 의젓함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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