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6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4. 16. 06:52

2021 4월 16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요한 6,1-15)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의 도시 벳사이다로 가십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던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요한 5,9 참조) 목격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욕망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시험하시며 당신의 길을 뚜렷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필립보는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으며, 그 돈을 누가 내어놓을 것이며, 그렇게 한들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계산하는 세상의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가진 보잘것없이 적은 것으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논리를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특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혼자 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시는데, 부자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이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내어놓음, 감사의 기도, 그리고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회 심리학자 패터슨은 정상적인 사람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수가 20~30명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경우는 10~12명 정도,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은 경우에는 4명 이하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의 숫자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다른 이와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관계 안에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자기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인생에 왜 연관을 짓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힘이 없던 인간이 만유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하는 관계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의미 있는 관계의 수를 늘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기적 모습이 아닌 이타적인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즉, 사랑의 삶만이 자신을 정상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의미 있게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가 모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는 사람들이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나눔과 희생이 동반되는 관계를 통해서 만든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가 주님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아이가 보여준 나눔과 희생이 주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었음에도 남긴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어놓을 수 있는 나눔과 희생, 이것이 주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해야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의미 있는 관계가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공자).


공부할 자유

공부를 싫어한다면서 전혀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보면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공부를 어떻게든 시켰습니다. 공부해야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른들은 공부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당사자인 학생은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서 힘들게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도 세계 안에는 ‘공부할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는 신발도 사치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부분 맨발로 다닌다고 합니다. 이 절대적 가난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공부의 기회가 주어지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 자유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 밖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인데, 그 조건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것…. 행복해질 자유가 있다는 것….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과감히 기적에 도전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은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믿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필립보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당신께서 먹여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에게 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절대 못 한다는 의미로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조금 믿음이 있었던 사도는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본 것으로 보아 불가능하다고만 하는 필립보보다는 믿음이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적을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은 누구의 믿음으로 이뤄진 것일까요?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오늘 복음으로 말하자면, “저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 당신이 좀 먹여주시지요.”라고 당신이 먼저 청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일까요? 가장 완전한 믿음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본인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해주십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그 믿음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었기에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많은 이들을 먹일 양식을 얻어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수준의 믿음이 내가 곧 그리스도이기에 불가능이 없다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 관한 사례를 찾다가 한 개신교 선교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짧은 설교 내용 동안 어떻게 이렇게 맞는 말만 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옮겨봅니다. 오늘 기적을 행하라고 했을 때 제자들의 심정을 이입시켜보며 읽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기적의 대상은 5천 명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호주에 가서 말씀을 전할 일이 있었어요. 몇몇 교회를 다니는 가운데 많은 교회에서 부활에 대해서도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도 믿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보통은 제가 그렇게 안 하는데 가야 할 교회 목사님하고 아침 식사를 할 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분들에게 정말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몸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좀 치유 기도를 할까요?’ 했더니 목사님께서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저녁에 몸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오늘 하느님께서 일해주시겠다는 그런 어떤 기대감이나 감동이 생기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기도는 없는 거로 하고 조용히 들어가자.’ 집회 때 나와서 말씀을 전하고 나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앞자리에 앉아계신 담임 목사님이 ‘아픈 사람들 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 빨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큰 소리로 무조건 기도하세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오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일깨워줄까?’ 했던 사람이었는데 보니까 제가요, 믿음이 없더라고요. 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믿음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솔직히 저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 고백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하느님은 이 믿음 없는 저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렸어요. 그날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셔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제가 믿음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장벽. 이것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길이 평탄케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도 믿음의 역사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역사가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요, 여러분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자기에 대한 관심, 내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 어떻게든 나를 지켜야 한다는 집착’, 그것이 뿌리째 뽑혀서 바다로 던져지는 것. 그게 진짜 믿음의 기적이에요. 왜냐하면요, 나에 대해서 갇혀 있고, 나에 대한 관심이 나를 이끌어가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 믿음의 역사를 향해서 한발을 떼지 못하게 돼요. 내가 어떻게 내일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내 앞길을 챙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게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이에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출처: ‘믿음에 대하여’,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CGNTV SOON, 3분 메시지’]
 

    과감히 기적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기적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자아를 죽이는 참 기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게 가장 완전한 기적입니다. 지금 은총의 통로로 쓰이는 내가 때가 묻어 막혀있는 것처럼 보여도 물이 많이, 그리고 오래 지나가면 그 더러운 오물은 물에 씻겨 깨끗하게 됩니다. 내가 이웃들에게 좋은 기적의 선물을 주려는 마음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나에게 더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왜 5천 명을 먹이실 때 먼저 제자들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누군가 치유의 기도나 병자 성사를 달라고 하면 저도 겁이 납니다. 치유가 되지 않으면 저의 믿음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합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겸손해져서 좋고 하느님과 청한 사람은 안 좋습니다. 하느님은 그러니 당신과 청하는 이를 위해서라도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그렇게 치유의 기도는 결국 나를 깨끗하게 하고 치유합니다. 그러니 되든 되지 않든, 기적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이 용기가 나의 믿음을 완성합니다.

 -조재형신부-


경로의존과 경로독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경로의존이란 기존의 관습과 질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마차를 모는 시대에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습니다채찍을 오른손으로 들고 마차를 몰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러한 관습과 질서 때문에 몇몇 나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을 오른쪽에 마련하였습니다자동차는 더 이상 채찍으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관습과 질서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대부분의 나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이 왼쪽에 있습니다그것이 편하고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경로에 의존하는 나라는 새로운 도전과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인터넷 시대에 도장은 더 이상 개인의 정보를 대변하지 못합니다그러나 아직도 도장에 의존하는 나라가 있습니다이로 인해 많은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역시 경로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코로나19는 경로에 의존해서는 쉽게 막을 수 없었습니다선진국들도 코로나19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코로나19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로에 의존하기 보다는 혁신을 도모하셨습니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 혁신이고발상의 전환입니다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마음을 움직이는 성전을 새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고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자매라고 하셨습니다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세리창녀나병환자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기존의 질서에서는 죄인으로 취급받고소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은 경론에 의존하기보다는 경로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이것이 복음입니다.

 

경로를 독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경로를 독점하였습니다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경로의 독점은 정치에서도 드러납니다많은 독재국가들은 경로의 독점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합니다그 결과 자유를 억압하고저항하는 사람을 탄압합니다미얀마의 군사독재도 경로의 독점에서 생겼습니다군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경로의 독점은 많은 경우에 부정과 부패에 이르게 됩니다작년에 미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Black Lives Matter'는 경로의 독점에 대한 저항입니다미국은 백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미국은 미국 국민들의 나라입니다그러나 아직도 미국사회에는 경로를 독점하려는 흐름이 있습니다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이유는 경로를 독점하려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경로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제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는 경로의 독점이 아닙니다나눔과 섬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우리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권력과 폭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나눔과 사랑으로는 충분히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언 땅을 녹이고파란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 햇살이면 충분합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이 단 한마디의 기도로 저는 치유받았습니다!

 -양승국신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펼쳐진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예표하는 은총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받았던 감동과 경이로움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래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몰려들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기적의 현장에 함께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은 잠깐동안이었지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실체를 목격했고 만끽했습니다. 그들이 확인한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풍요로움이었습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모든 것이 다 충만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쳤습니다. 가련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환대와 자상함이 흘러넘쳤습니다. 근본적 결핍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간을 향한 육적인 양식인 빵과 물고기가 원도 없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천상 대축제에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빵과 물고기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풍성히 나누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공평하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목격하게될 하느님 나라의 풍경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벅찬 감동을 넘어 황홀함에 휩싸인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시도했지만, 예수님께서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홀연히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고 보잘것 없는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으실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천상천하의 크신 왕, 만왕의 왕, 세세대대로 다스리실 영원한 왕이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나만의 예수님, 우리 공동체만 사랑하시는 예수님, 우리 민족만의 승승장구를 도우시는 예수님으로 여긴다면, 예수님의 본래 위치를 격하시키는 웃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셨을 때의 일 기억하십니까? 주님이심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털썩 엎드려 그분 두발을 꼭 끌어앉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 꼭 끌어앉았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을 붙잡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대신 속히 갈릴래아로 가서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바람같은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적 노력이나 지성으로 잡거나 포착할 수 없는 크고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베푸시는 기적 앞에 깊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이 찬미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 앞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밤 허무함이 극에 달하여 말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불현듯 제 영혼 깊은 곳에 기도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외치는 소리 같은 원초적인 기도로, 어쩌면 그때가 태어나 처음 절실하게 기도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면서 소리를 지르는 듯한 매우 자연스럽고 순간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때의 기도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이 단 한마디의 기도로 저는 치유받았습니다.”(하레사쿠 마시히데 신부,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77가지 기도’, 생활성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오천 명을 먹이시다.

 -송영진신부-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1-6).”

 

여기서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병을 고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만일에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고,

‘영혼 구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래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몰려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파스카’를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은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새로운 ‘파스카의 빵’이며, 새로운 ‘만나’”

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은,

빵을 판매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저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야 합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셨는지, 또 왜 그를 시험해 보려고 하셨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시험해 보다.’ 라는 말은, ‘믿음을 끌어올리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신 것은,

뒤의 14장에 나오는 필립보 사도의 요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9)”

(어쩌면 필립보 사도는 평소에 늘 ‘아버지’를 직접 뵙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하신 질문은

사실상 모든 제자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제자들의 믿음이

더욱 발전하고 성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계획하셨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 계시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7-9)”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과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 “저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신 일,

즉 ‘하느님의 권능’으로 일으키신 기적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의 힘’으로 해내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의 재료가 되긴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아이의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아이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응답한 일,

또는 일으키려고 하시는 기적에 동참한 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 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조를 재건할 왕,

바로 그런 인물이 당시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입니다(요한 18,36).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지만(루카 17,21) 세속의 나라들과는 다른 나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고 섬기면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묵시 22,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6,27).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인생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 짧은 과정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만 희망하면서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한상우신부-

빵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는
봄날 오늘이다.

건강한
삶을 위한
사랑의
성사이다.

관계라는
빵을
먹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배고픔을
나눔이라는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실행으로
옮기시는
분이시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삐걱거리면
사랑은 늘
목마르고
배 고프다.

성체성사는
건강한 관계의
초대이다.

생명의 빵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생명의 빵은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빵으로부터
참된 감사를
배운다.

빵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관계는
귀하고 소중하다.

하느님께서는
빵이 되심으로
당신 먼저
사랑의 빛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빵이
빛이 되는
신비이다.

하느님과
만남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이 되신
육화(肉化)는
빵의 여정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빵이 되어주는
관계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눔이
빠져버리면
죽어가는
관계가 된다.

나눔의 성사는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비추는
부활이다.

사랑과 용서의
빵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오늘을 제대로
만나고
보게하신다.

진짜 삶
진짜 오늘은
우리또한
빵이 되는
삶이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오늘을
모으니 생명의
빵이 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의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십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3)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빵의 표징이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일어났다고 시간적 배경을 특정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마지막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사건과 연관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군중은 그 수가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무리이고, 장소는 장터나 민가가 아닌 "산"입니다. 그 많은 군중을 먹이기 위해서 빵은 물론이고 돈도 있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예수님은  "어디"를 물으셨는데, 필립보는 빵값을 헤아리고 안드레아는 가진 소량의 것과 군중 수를 대비하며 회의적으로 답하지요. 그걸 보면, 어느 조건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불가능을 먼저 떠올리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장소가 어디건, 입이 몇이건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시려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신 피조물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현실적인 제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대한 현실 앞에서 주저하고 회의하는 인간의 조바심과 한계의식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 계획을 막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요한 6,10)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앉게 하신 곳에는 풀이 많았다고 합니다. 복음사가가 굳이 공간적 배경까지 기술한 이유는 이 말씀이 우리를 시편의 어느 아름다운 구절로 데려가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시편 23,1-2)
빵의 표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푸르른 목초지로 이끌어 쉬게 하시고 배불려 주시는 참 목자이심을 부각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유다인들에게 주님께서 한 현자의 입을 통해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
가말리엘의 이 말은 그가 감정적으로 사도들을 시기하거나 경계함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말리엘은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오로의 옛  사울 시절 스승이었지요(사도 22,3 참조).

유다인들이 아무리 금지하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도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의지가 이루어지는 순리이고 섭리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주님께서 무언가 하시려고 할 때 많은 장애물이 드러남을 체험합니다. 금전적으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현실적 한계가 크게 보이면 아무리 좋은 일이고 주님의 뜻으로 여겨져도 주저하고 회의에 빠져 서로 발목을 잡기도 하지요.

그럴 땐 한 걸음 물러나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고 그저 바라보는 것도 지혜이고 겸손일 겁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막으려 해도 어림없을 것이고, 그분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까요.

장정만도 오천 명에 다섯 개 빵과 두 마리 물고기는 분명 터무니없는 불균형이지만, 그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께 감사로 바쳐질 때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세대를 거듭해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는 양식이 되고, 그분과 우리를 일치시켜 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빵의 표징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의 방식과 하느님 방식의 차이를 마치 쐐기를 박듯 명백히 대조시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기들 욕망과 의도에 따라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 할 때가 종종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하지 않으면서요. 때로는 자신의 업적과 성취가 하느님 의지를 우선하는 것처럼 일단 밀어붙입니다. 주님께는 참 불편한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이 말씀에 머물러 하느님의 뜻을 관상하며 섭리에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일이라도 사심없이 기도하고 격려하며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바를 함께 기뻐하면 더욱 좋겠지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결국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시고,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요한 10,10) 해 주시려는 것이 그분 마음이니까요. 이것이야말로 참 목자의 양들인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대적하지 않기

 -김찬선신부-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저는 이곳 오류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수도자 그것도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을 사는 프란치스칸 수도자이기에

수없이 이사를 다녔고 그렇기에 이사한 것을 가지고 뭐 특별히 생각할 것

있을까 생각도 되지만 이번 이사는 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고 또

오늘 사도행전과 연관이 있을 것도 같기에 여러분과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수도원의 소임 이동에 따른 이사였고

인사이동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녔어도

이사의 설움을 몰랐는데 이번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그 이사의 설움을 저희도 좀 겪었고, 덕분에 집 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같이 느끼며 동병상련할 수 있었습니다.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말을 들었을 때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분노의 감정이 며칠 제 마음에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수도원의 인사 명령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왜 집주인의 퇴거 명령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반성이 되었고, 이어서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들이 리보또르또에서

쫓겨난 얘기가 생각나 이번 이사를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의 첫 공동체 장소가 보통 포르치운꿀라라고 하고,

그래서 우리가 포르치운꿀라 행진도 하곤 합니다만

엄밀히 얘기해서 첫 번째 공동체 장소는 리보또르또였지요.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들이 처음으로 리보또르또의 헛간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 농부가 소를 몰고 와서는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을 쫓아냈고.

그래서 쫓겨간 곳이 포르치운꿀라였던 것이고 그래서 이곳이

프란치스칸의  영원한 고향이자 못 자리가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의 많은 일이 순전히 인간이 한 짓 같지만

길게 보고 크게 보면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현재적으로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것을 다행히도 며칠 만에 깨달을 수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인을 통해 이곳으로 이사케 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하느님이 왜 이곳으로 보내셨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를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게 보고 크게 보면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힘이 있을 때는 그것이 그의 뜻대로 다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뭐든 다 대통령 뜻대로 될 것 같고 그래서 독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오래 갈 것 같은 권력도 풀잎 끝의 이슬입니다.

 

우리나라 군부 독재가 그랬고 미얀마의 군부 독재도 그리될 것이며,

백팔십 석을 차지하며 오래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현 정권도

국민의 뜻,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지금이라도 겸허히 받들지 않으면

이번 선거에서 볼 수 있었듯이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지 사람은 영원하지 않으며

사랑이 영원하지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 지도자들뿐 아니라 가정이든 직장이든 단체든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힘으로 뭣을 하려는 사람은 사랑과 대적하기에

하느님과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24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