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요한 6,16-21)
"It is I. Do not be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사제품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 수 있을까? 제의를 입은 채 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 없어지고 두려움만 점점 커져 갔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저의 첫 질문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았는가? 그 말씀을 외우고 되새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가?
그렇게 성경을 다시 읽어 나가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병자들의 치유와 빵의 기적을 옆에서 직접 보았음에도 큰 파도에, 또 그 어둠 속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고 소리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이 만나 주셨는데도 ‘사제품’이라는 큰 관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네가 울부짖을 때마다, 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마다 만나주었던 나다.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이 말씀이 마음속에서 울리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고, 가끔 스멀스멀 그 두려움이 피어올라 올 때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묵상하던 가운데 ‘그렇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려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려는 곳, 하느님 품 안에 가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어느덧 사제로 산 지 26년이 되어 갑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이 가겠지요.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려고 노력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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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학창 시절에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가 기억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명절 때에 단골로 방송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인기 있는 영화입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한 소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봤었음에도 제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같은 영화인데 다른 관점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다시 이 영화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관점으로 영화를 보니 또다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영화를 새롭게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 가득하신 모습,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모습, 언제나 내 편이신 분으로 생각하면서 하늘에서 우리를 인자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는 모습을 떠올리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꼭 우리의 생각 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랍고 신비스러운 표징들을 기억한다면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모습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주님의 모습을 한정 지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을 짓는 순간, 주님을 알아보는 우리의 시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에 대해서도 놀라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시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아 뵙고 주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곧바로 가려던 곳에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알아 뵙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려는 곳,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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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형제님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잉꼬부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내와의 대화가 불편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질문에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신문에서 요즘 중년 중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내도 혹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시험해봤습니다.
먼저 방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소리로 아내에게 “내 말이 들려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불렀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고, 더 가까이 가서 불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슬픈 마음에 아내 바로 뒤로 가서 아내를 부르자, 아내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잘 들려요. 네 번이나 대답하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내가 아니라 바로 남편 본인이었습니다. 자기가 들리지 않는 것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만 원망을 쏟아붓게 됩니다.
자신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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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있는 만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관점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과정은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매우 짧게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을 배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를 설명하는 내용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을 먹인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역시 성체성사의 예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도 이 내용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두려움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고,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였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세상이란 바다의 풍랑에 휘둘리며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가는 한 척의 배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며 세상을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셔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무언가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자녀, 재물 등을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리스도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지게 만들어 나를 온전히 내어주게 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내가 있으면 사랑은 그만큼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모셨다면 당연히 내가 죽었으니 두려움을 느낄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나와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것을 잃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사랑은 적극적으로 나를 잊고 남을 위해 바치게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들어왔는데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윤발은 1955년 홍콩 라마섬의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절한 가난을 겪으며 유년 시절을 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무와 고구마를 먹으며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점 직원과 집배원 등의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갑니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연극을 시작하고 연기 생활에 접어듭니다. 워낙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이 있었기에 그는 점차 감독들의 시선을 받게 됩니다. 1980년 ‘상해탄’이란 영화로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그때부터 신문에서 우연히 본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선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 기사를 보고 감명을 받은 오우삼 감독은 그를 캐스팅하여 영화를 찍는데 그것이 바로 주윤발의 인생 최고작 ‘영웅본색’입니다. 오우삼 감독은 주윤발이 영화 속 인물보다 더 의리가 넘치는 인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래에 8,100억 원의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홍콩 반환 반대 시위에 동조하는 의미로 나라에서 금지한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위 현장에 나타나서 중국 TV나 영화 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검소한 주윤발은 “괜찮습니다. 돈을 좀 적게 벌면 되죠.”라며 웃어넘겼습니다.
최근 태권도와 김치의 종주국이 중국이라는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이 8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김포공항에서부터 김치 냄새가 났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온 동네 아이들이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논란에 대해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처럼 공항에서 김치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거리에서는 태권도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의 두려움 없는 행보는 인간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얼마 전 간암으로 70세에 사망한 유명 배우 ‘오맹달’과의 사연입니다.
오맹달은 왕년에 술과 여자,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끝에 거액의 도박 빚까지 지는 바람에 중국의 최대 조직인 삼합회의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오맹달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한 주윤발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주윤발은 평소 의리남 행보와는 다르게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며 차갑게 단칼로 오맹달의 부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이미 부와 명성을 크게 쌓은 주윤발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오맹달은 주윤발이 1원 한 푼 주지 않자 그때부터 크게 원망하기 시작하며 분노심을 원동력 삼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본업에 매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화계에서 오맹달은 술과 도박에 빠져 자기관리가 안 되는 문제아라고 찍혀버리는 바람에 그의 바람만큼 복귀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신히 영화 ‘천장지구’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는 인생 연기를 펼치며 그해 홍콩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타내는 쾌거를 거두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오맹달은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주윤발을 시상식에서 마주치자 아직 앙심이 풀리지 않아 주윤발의 축하 인사마저 냉랭하게 무시했고 이후로도 주윤발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계속 주위 사람들에게 비췄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맹달을 구해준 작품인 천장지구의 진목승 감독이 술자리에서 오맹달을 부르며 그가 몰랐던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맹달씨, 나는 사실 당신을 캐스팅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 또한 당신이 도박과 술에 빠진 망한 배우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그대를 내게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우리 영화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내게 사실 부탁이 아니라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고요. 그리고 주윤발은 당신에게 미움받을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은 당신을 캐스팅한 내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 주윤발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고맙다고 말하세요.”
이 얘기를 듣자마자 오맹달은 그 길로 눈물을 흘리며 찾아가 사과를 했고 주윤발의 인성과 큰 그릇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주윤발 마침내 태권도와 김치 중국 논란에 대해 입을 열다’, 유튜브 채널 ‘비지이지TV’]
만약 주윤발 씨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비난받기 싫어 돈을 얼마 주었다면 오맹달은 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만큼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돈과 명예, 심지어 우정까지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주윤발 씨 안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윤발 씨와 다르게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는 게 두렵고, 미움받고 멸시받는 게 두렵고, 조금 고통받는 게 두렵다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모신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이미 두려움의 바다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자아에게 말입니다. 그러니 그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다른 두려움은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위험에 있는데 아이 시험 성적 떨어지는 게 두렵겠습니까? 성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사랑이 들어오시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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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동료신부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땜빵사목’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본당 사목은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사제는 가끔 피정도 가야하고, 휴가도 가야하고, 아프면 입원도 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피로와 갈등 때문에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대신할 사제를 찾아야 합니다. 교구에서 그런 문제까지는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은 문제가 없지만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할 때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제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걱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에 있는 스페어타이어처럼 항상 준비가 되어있는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사목 경험이 있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주고, 강론도 잘하는 사제입니다. 911에 전화를 하면 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듯이 교구에 연락하면 ‘땜빵사제’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거리사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나 식당에 사제가 머물 장소를 마련합니다. 오랫동안 학생사목을 했던 사제면 좋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열정으로 학생들이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제는 카페나 식당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강의를 해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미사를 해도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고민, 아픔, 희망을 들어줍니다. 고백성사를 원하면 즉석에서 성사를 줍니다. 책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같이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 청년이 없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청년을 기다리기보다는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낚시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고기를 잡지 못하면 장소를 옮기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땜빵사목과 거리사목’을 시도한다면 인사적체로 힘든 교구에 ‘숨구멍’이 생길 것 같습니다.
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땜빵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부터 시작되어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는 코로나19의 영향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현장을 찾아가는 ‘홍보’입니다. 그런데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말에 사무실이 쉬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한인 성당의 사제가 몸이 아파서 한국으로 돌아갔고, 후임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3개월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어느덧 7개월이 넘었습니다. 비자문제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본당의 주일 미사도 도와주었습니다. 병자성사, 장례미사, 혼인성사, 세례성사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누었던 ‘땜빵사목’을 여지없이 이곳 뉴욕에서 하고 있습니다. 부르클린과 롱아일랜드에서 주일미사를 집전하고, 오후에는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점심은 차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땜빵사목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사도들은 ‘땜빵사목’을 할 수 있는 부제들을 선발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커지면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 마귀를 쫓아내는 일, 병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커지면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났습니다.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업무입니다. 음식을 나누고, 재산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돌보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조직의 관리와 운영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협조자인 부제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땜빵사목과 거리사목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었습니다. 교구가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사목의 주체라면 수도회는 교구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교우들의 어려움을 들어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회는 ‘재속회’를 두고 있습니다. 재속회는 수도회의 후원자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교우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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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기도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양승국신부-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수려한 금강산의 풍경도 쫄쫄 굶은 상태로 바라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크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피정오신 분들을 동반할 때 자주 체험합니다. 음식이 아주 중요하더군요. 일단 맛갈진 음식으로 배를 잘 채우고 나면, 그 뒤는 만사 오케이입니다. 여정이 순조롭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상처입고 소외감 느끼는 이유는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먹는 것에서 차별대우 당한다고 느낄때 받게되는 상처는 만만치 않습니다.
언젠가 한 축하연에 갔었는데, 일반석, 특별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차려진 음식들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별석에 앉아있는데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에다, 부담스런 마음에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주최측 담당자에게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첫번째 독서로 낭독되고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천국을 앞당겨 살았던 공동체, 세상 모든 공동체들의 모델인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상이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풍경 하나를 전해줍니다.
이상적인 공동체였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만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발단은 바로 음식에서의 차별대우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접할 때 마다 속으로 웃습니다. 초대교회도 별것 아니었구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6장 1~7절)
당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외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공동체 안에는 본토 유다인들, 즉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본토 유다인들의 텃세가 좀 있었겠지요. 더구나 두 유다인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생기는 오해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부류 사이에 은근 알력도 발생했을 것입니다. 하필 그런 순간 그리스계 과부 배급 차별 사건이 발생합니다. 화가 잔뜩 난 그리스계 신자들이 사도들을 찾아와 강력한 항의를 했습니다.
그 순간 사도들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계 신자들의 민원을 일단 접수합니다. 사도들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겠지요.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한 그리스계 그리스도 신자들의 민원 앞에 사도들이 미적거리지 않고 초스피드하게 대응한 것이 눈에 띕니다. 사도들의 제안 앞에 온 공동체가 기쁘게 동의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한계와 약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사도들은 과부나 환자들 같은 약자들을 돌보는 자선행위를 개별적으로 관리감독해왔습니다.
사도들은 보다 본질적인 직무에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하며, 식탁 봉사나 배급, 자선 행위를 일곱 부제들에게 일임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기도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임무라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식량배급이나 식탁봉사가 차원 낮은 일이라고 여긴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보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가장 근본적인 사명, 1차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사람 참 많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반드시 해야될 일은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만 골라하고 있습니다. 그 둘을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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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오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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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은 최선을 다할 기회
-반영억신부-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하셨지만 나는 밖에서 허둥거렸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 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 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포기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십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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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조욱현신부-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상황은 적어도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밟고 인간의 모든 교만을 내리누르며 물 위를 걸어오신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며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재난이 찾아오고 이런 일이 많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밟고 건너오신다. 그러나 너무 어려움이 커서 끝까지 견뎌내려 노력하는 이들마저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복음과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신다. 당신의 권능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것을 실현하게 해 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하시며 귀에 익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을 똑똑히 보도록 배 위에 오르시지 않고 물 위를 걸으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배에 모시려고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배와 주님께서 모두 뭍에 닿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다고 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의탁할 때, “어느새”(21절) 바람이 걷히고 목적지에 닿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파의 난관, 박해자의 손길, 그 안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려 노력하는 삶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항상 목적지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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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20)
-한상우신부-
내면의
거센 풍랑이
필요한 우리들
여정이다.
삶의
풍랑속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풍랑으로
고집스러운
자아가 드디어
거센 물결처럼
부서진다.
부서져야
내려놓게 된다.
부서져야
길이 보인다.
풍랑처럼
예수님은
살아계신다.
꿈틀대는
욕망의
거센 물결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
피할 수 없는
풍랑이다.
풍랑에서
믿음을
발견한다.
내면의 풍랑이
예수님을 통해
고요를 체험한다.
풍랑을 통과하는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의 바탕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두려움을
건너간다.
풍랑의 방향은
믿음의 방향이다.
믿음은
내려놓는
생명의
길이다.
내려놓으면
예수님이
보인다.
풍랑도
예수님 안에
있다.
내려놓음이
은총이다.
내면의
풍랑을
치유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부활은
우리의
내면안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다.
바깥만
바라보는
우리들이
풍랑으로
우리 내면을
제대로 볼 때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주님이시다.
풍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들
사랑이다.
거센 풍랑도
예수님을
만나면
사랑이 되고
믿음이 된다.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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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삶의 풍랑에 개입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 6,17)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6,18)
물 일에 익숙한 제자들이 큰 바람을 예견 못하고 배에 오릅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환경적 어려움을 맞닥뜨린 것이 오늘 제자들을 뒤흔든 첫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요한 6,19)
두 번째 두려움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옵니다. 사람이 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물에 잠기거나 헤엄치거나 둘 중 하나니까요. 체험했든 전해 들었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월적으로 보면 신비일 테지만 기괴하게 보면 유령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시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주님의 소리가 물 위에 머물고 ... 주님께서 크나큰 물 위에 계시네."(시편 29,3)라는 시편작가의 고백처럼, 물 위를 걸어 호수의 성난 힘 위에 우뚝 서신 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의 내적 동요까지 가라앉혀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부재가 그분 현존의 권능과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여정이 되기도 하지요. 없어 보아야, 잃어 보아야 현존의 행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영성생활에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주님의 부재 상황이 우리를 갈증과 두려움으로 삼켜 버리게 허락하지 않으려면,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성난 힘 위를 당당히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리라는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며 유다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이들 안에 갈등과 소요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뜨거운 마음과 선의로 시작한 길이어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도 새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들이 느낀 차별과 불공정은 공동체의 수치스런 흠집이 아니라, 개선하여 더 나아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오늘의 독서 대목은 사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를 잘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지요.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지키면서, 다른 선량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봉사의 직무로 초대합니다. 주님의 지체가 저마다 받은 모든 소명이 소중하고 가치로우며, 사람들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참여함을 한 걸음씩 익혀 나가는 여정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세상 안이든 교회 안이든 왜 불일치와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어려움의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고 지혜를 모아 찾아나가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잠시의 혼돈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사도 6,7)는 놀라운 체험까지 덤으로 받을 겁니다.
교회는 넘실거리는 어둠의 물 위를 항해하는 배입니다. 우리는 그 배 안에서 외부적 어둠과 바람과 파도는 물론, 내부적 갈등과 충돌의 아픔까지 떠안고 가야 하지요.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분 몸의 지체인 서로를 믿고 기다려 주며 무지와 의혹의 밤바다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등대와 같은 위로이고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위로와 힘을 받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문제들을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압도해 짓밟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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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두려움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없이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제자들 얘기인데
올해는 다른 주제로도 묵상할 수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묵상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어떤 두려움이 있으며
왜 있는지 뭐 이런 것들에 대한 묵상이지요.
두려움이란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라는
사전적 정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내게 닥칠까
꺼리는 극도의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는 만나게 될까 두려운 존재였지요.
그러니까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울 것까지 없지만 너무 싫어하면
싫어하는 일이 내게 닥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그 싫어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두려움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첫째는 존재적인 두려움입니다.
존재적인 두려움이란 존재의 안위와 생사와 관련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은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죽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같은 맥락에서 병고를 두려워하고 요즘 같으면 코로나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일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길 바라고,
특히 남자들은 일의 성공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데
그만큼 일의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자기 전부를 걸다시피 하고,
반대로 실패할까 봐 아예 일을 벌이지도 않거나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도 하지요.
셋째는 관계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관계의 단절이나 이별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거절이 두려워 부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밤에 두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밤이 볼 수 없게 하고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같고,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종합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필이면 어두운 밤에 길을 떠납니다.
풍랑이 일어 몽땅 죽을 지경입니다.
갖은 애를 써도 헛수고이고 그래서 기진맥진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시는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니 유령 같습니다.
낮이면 주님인 줄 금세 알아챘겠지만 밤이어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자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다다르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고 같이 계시면
두려움은 즉시 사라지며 우리는 목적지에도 어느새 도달케 됩니다.
주님 없이 길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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