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4. 26. 06:49

2021년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10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and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팔레스티나 지역의 목동들에게는 두 종류의 큰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리나 늑대 같은 야생 짐승의 출몰이고, 다른 하나는 순식간에 나타나 양을 둘러메고 사라지는 강도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양 떼를 이끄는 목동들은, 어두워지면 임시 울타리를 세워 만든 우리에 양들을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양 떼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문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불을 피우거나, 개를 풀어 두거나, 목동이 문지기가 되어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이신 당신을 통하여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들짐승이나 강도들로부터 보호받아 생명을 얻고, 또 문으로 드나들며 풀을 찾아 먹게 됨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문은 양들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양들에게 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나의 기준에만 맞추어 양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욕심과 수준에 맞추어 양들을 대하고 사랑한다면, 그 양들을 풀밭으로 보내 양식을 얻게 하거나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 양들에게 상처만 줄 것입니다. 마치 강도처럼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씨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곧 아픈 이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애끊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이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착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의 기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글을 써야 하는데 도무지 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노트북과 책 몇 권을 들고서 카페를 찾아갑니다. 익숙한 제 방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가면 써지지 않던 글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그날도 글이 써지지 않아서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가지고 간 노트북과 책을 펼쳐놓는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친한 신부의 문자였습니다. 다음은 그 신부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뭐 해?”

“일해.”

“어딘데?”

“카페.”

“일하는 것 아니네. 쉬는 거네.”

글 쓰는 것은 제게 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페에 앉아 있다는 것을 친한 신부는 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디에 있느냐보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저 역시도 이런 식으로 섣부르게 바라보고 판단할 때가 많았음을 반성합니다.

사람에게도 또 하느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하는 우리였습니다. 그 판단이 맞을 때도 있겠지만, 틀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좀 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읍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양들인 우리를 인도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역할을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십니다. 그렇다면 양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실하게 착한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를 따라서 우리 역시 성실히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목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판단하고 단죄하는 역할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따라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런 역할에 충실한 이에게만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 방식, 판단 기준, 우리 선택의 가치들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관계의 열쇠.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는 자신을 적대하는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경쟁자와의 관계를 늘 풀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편지를 써서 정중하게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당신이 소장한 책 한 권을 빌려주십시오.”

그는 곧바로 책 한 권을 받았고, 며칠 뒤에 고맙다는 메모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 경쟁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백악관에서 만나면 그 경쟁자가 먼저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평생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경쟁자가 마음을 연 것은 프랭클린이 먼저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상대방이 내게 ‘친화적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느낄 수 있게 되고 기쁜 마음으로 도와준다는 것이지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낮춰서 무엇인가를 먼저 부탁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겸손과 용기가 관계의 열쇠가 됩니다.

 자녀를세례명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이름 안에 방향이 있기 때문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가 아니라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안전한 풀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앞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이름을 아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우리 이름을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세례명입니다.

 

    세례명은 다른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께로 나아가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지만, 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유혹에 쉽게 흔들립니다. 나침반이 없는 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노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어디로 나아갈지 명확하게 압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면 아무에게나 끌려갑니다.

 

    요즘 연예 뉴스 중 ‘서예지, 김정현 노예처럼 조종’이란 기사 제목이 있습니다. 읽어보니 서예지와 김정현이 사귈 때 서예지는 김정현을 노예처럼 조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스킨쉽을 다 빼고 여배우 앞에서는 나무토막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정현도 상대역 여배우가 민망할 정도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대했고 드라마 감독에게는 멜로 로맨스를 싹 지워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
    결국, 드라마는 산으로 갔고 김정현은 건강상 이유로 중도하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사적인 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애인과의 관계 때문에 더 휘둘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에 많이 휘둘리고 죄에 떨어짐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을 잊었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이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가 부르는 이름을 듣는다면 놀다가도 바로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름 안에는 이렇듯 ‘방향’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나의 이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 받은 이름보다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가진 이름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정해준 부모의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세례 때 우리 이름을 정해주시고 우리가 유혹에 휩쓸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당신 쪽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세례명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도 세상 유혹에 휩쓸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유혹에 빠져 죄를 짓더라도 다시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은 이름이 곧 삶의 방향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 시골에 사는 한 여학생과 도쿄에 사는 한 남학생은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몸이 뒤바뀜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어느 순간 이후 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쿄에 사는 남학생은 자신과 몸이 뒤바뀌었던 그 여학생을 찾아 꿈에 본 시골 마을을 찾아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마을에 도착해보니 마을은 3년 전에 유성이 떨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쿄에 사는 남자는 여자보다 3년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한 번 더 꿈을 꾸게 됩니다. 둘은 꿈속에서 서로 만납니다.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바로 오늘 그 마을에 유성이 떨어질 테니 빨리 사람들을 피신시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꿈을 깹니다.

    여자아이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마치 꿈의 기억이 사라지듯 지금 자신이 왜 빠르게 뛰고 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누군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때 비탈길에서 넘어져 떼굴떼굴 구릅니다. 옷은 찢어지고 무릎과 머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뛰고 있지…? 아! 그 아이….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다행히도 남자아이는 여자아이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이것을 기억하고 손을 펴 손바닥을 쳐다봅니다.

    “나 너 좋아해!”

    이름을 써 준 것은 아니지만 왜 자신이 그렇게 피멍이 들어가면서까지 마을에 가서 모두 피신해야 산다고 소리쳐야 함을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소녀는 다시 일어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피신하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믿지 않던 모든 사람이 그 소녀의 확신에 기가 눌려 피신을 하게 되고 다행히 그날 밤 그 마을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자아이는 도쿄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학생과 마주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부모가 사랑해서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우리에게 당신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세례명이 ‘요셉’입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죄를 짓고 있었다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자녀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    진정 자녀를 주님께 나아가게 하고 싶다면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야!” 하실 때,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알아본 것처럼 자녀들도 자신의 세례명을 들으며 주님이 이끄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의 대통령이 대학의 졸업식에서 하는 연설을 들었습니다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백인흑인아시안히스패닉이 함께 만들었습니다비록 피부의 색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의 피는 붉은 색입니다.” 우리 모두의 피는 같은 붉은 색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역설적으로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을 생각하게 됩니다작년에는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많이 들었습니다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뜻입니다경찰의 과도한 폭력으로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올해는 "Stop Asian Hate"라는 구호가 등장했습니다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1세기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면 이는 미성숙한 행위이며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봄이 오면 여기저기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꽃들은 아무런 차별 없이 꽃밭을 만들고 있습니다사람도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름답고 푸른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태양계는 우리은하에 속해있습니다이런 은하가 우주에는 참 많다고 합니다그러니 지구는 우주에서 보면 너무나 작은 먼지와 같습니다이렇게 작은 지구에서 피부의 색으로이념으로세대로계층으로성별로 차별을 하고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부질없는 행동입니다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같은 유대인이었고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초대교회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사람을 해치지 않고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이 같은 결정을 통해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나는 착한 목자다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한 사람의 착한 목자에게서 또 다른 착한 목자가 탄생합니다!

 -양승국신부-

 

형제들과 나눈 대화 중에 일본인 사제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님(1932~)에 대한 에피소드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모든 것이 파괴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45년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시절,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소년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건축중이던 살레시오 수도원에 대못을 훔치러 들어갔습니다. 당시 반짝 반짝 빛나는 멋진 대못은 꽤 고가로 팔수 있었습니다.

  

몰래 창고로 들어간 시리에다 마사유끼가 황급히 보따리에 대못을 집어넣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수단을 입은 외국인이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그 신부님의 이름은 이탈리아 출신 보비오 신부님이었습니다.

 

 ‘이제 난 죽었구나. 난 이제 소년 교도소 직행이로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보비오 신부님은 화를 내지도, 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 있던 보따리를 달라고 하시더니, 허리를 굽혀 못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꽤나 묵직한 보따리를 소년의 손에 들려준 신부님께서는 수도원 대문까지 배웅을 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못이 부족하면 또 오너라!” 

 

그날 밤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단 한 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보비오 신부님께서 자신에게 한 행동을 복기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반문에 반문을 거듭했습니다. 하얗게 밤을 지새운 그는 새벽녘 닭울음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10리가 넘는 수도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보비오 신부님을 발견한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그분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실 제 장래 희망은 육군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어제 성소 주일에 이어 오늘 복음 역시 착한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얼마나 많은 착한 목자들이 자신의 양떼를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는지 모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로 인해 다들 힘겨워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보비오 신부님 같은 착한 목자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큰 부족함이나 나약함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껄껄 웃으며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목자, 양들의 방황과 일탈 앞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착한 목자 보비오 신부님의 사랑과 배려에 힘입어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또 다른 착한 목자로 거듭났습니다. 그의 한 평생은 보비오 신부님의 판박이였습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의 착한 목자에게서 또 다른 착한 목자가 탄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보다 많은 착한 목자들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님의 고백은 오늘 우리 모든 사목자들에게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제가 독신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사제가 철저히 고독하기를 바라셨지요. 철저히 고독한 후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고독을 찾아내는 눈과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길러지는 것이니까요.

 나는 양들의 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다른 한 방향은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편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곧 이 “문”을 통해서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말합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해줍니다그렇습니다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당신을 통해 들어가고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예수님이란 이 “문”은 들어오는 문이요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그러기에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그것은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생명의 복음을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먹이는 일입니다사실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우리는 분명“(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아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이 말씀은, 거짓 메시아, 거짓 사도, 거짓 목자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의(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너희는 목자의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너희는 목자의 뒤만 따라가야 한다.”로,

“낯선 사람은 피해 달아난다.”는 “너희는 목자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낯선 사람’이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개인의 주장들,

사이비종교의 이론들, 이단 사상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태 24,4-5).”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광야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마라.

‘보라, 골방에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마태 24,23-26).”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 자칭 재림 예수가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속이는 자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이고, 속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신 분이며,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구세주도 없고, 다른 목자도 없습니다.

즉 다른 문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도둑이며 강도인 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킵니다.

 

가짜 메시아, 또는 거짓 예언자들이 도둑이며 강도인 이유는,

1) 목자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고 ‘멸망의 길’로 데리고 감으로써,

‘구원의 길’로 간다면 얻게 될 생명을 얻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단자, 가짜 메시아, 거짓 예언자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생겨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이들은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에 정신이 팔려 믿음을 저버릴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위선 때문입니다(1티모 4,1-2).”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2티모 4,3-4).”

 

세속의 물질주의 풍조에 물들어서 영혼 구원보다는 몸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더 찾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듣기 싫은 말은 안 들으려고 하다가

이단 사상에 빠지거나, 거짓 교사들의 말에 현혹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말만 듣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런 주제로만 강의를 하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문제(상황)에 대해서 ‘성경공부’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성경공부에도 위험성이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2베드 3,16-17).”

(이 말은 원래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한 말인데,

성경공부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은,

‘주님 말씀’을 모독하는 죄, 즉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뿐만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로 빠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단자들이 항상 성경 해석을 앞세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마태 4,1-10).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 안에서, 그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욱현신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 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며 인도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3절) 문지기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문이시며 진리이시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이 목자는 양들을 앞에서 이끄신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친다.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한상우신부-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문(門)이시다.

양들을
돌보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이라는
문(門)을 통하여
나와 너는
우리로
연결되며
우리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을 통하여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자아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조화와 균형의
삶이었다.

빛과 어둠
강점과 약함까지
아우르는
삶이셨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건강한 삶을
다시금
배워나가게 된다.

마음의
안과 밖을
보게 된다.

신뢰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또한
구분하게 된다.

문(門)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상호적인
관계이다.

양과 주님의
관계처럼
존중과 사랑의
관계이다.

존중과 사랑은
양들의 문처럼
분리가 아닌
풍요로운
나눔이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양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며
양들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양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양들과 함께
지내시는
예수님이 계신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일치를
이루게 된다.

좋은 관계가
된다.

건강한 관계가
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목자의 목소리를 들려 주십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목자도 자기 양들을 잘 알지만,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가 양들을 이끌 때 그 목소리에 귀를 쫑끗 세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를 잘 듣고 순히 따르면 풀밭도 나오고 샘터도 나왔지요. 맹수나 절벽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에게 목자의 목소리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게다가 목자는 아무리 양들의 수효가 많아도 하나하나를 구별할 만큼 애정이 깊습니다. 각자의 이름도 기억해,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붙여주고 각자의 필요에 맞게 돌보지요. 목자에게 양떼는 그저 한 무리의 집단이 아니라 개별적 관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압니다. 서로에 대한 이 앎은 사랑과 존중, 신뢰와 순종으로 탄탄히 엮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1,9)
베드로가 기도 중에 주님의 환시와 목소리를 체험합니다. 이방인과의 접촉이나 식사를 부정한 일이라 배워왔고 지켜온 독실한 유다인으로서 베드로는 적이 당황하고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 이 말씀에 순종하지요. 이 목소리가 주님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사도 11,13)
이탈리아 부대의 백인대장인 코르넬리우스도 천사를 통해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의 순종으로 베드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방인들도 성령을 체험하여 신앙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사도 11,17)
베드로의 이 물음은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하신 예수님의 의지와 연결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당신 양 우리 밖의 양들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그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안에는 착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목소리도 있지만, 빛의 천사를 가장한 악의 목소리도 끼어 있지요. 악은 목자와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선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데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이것이 착한 목자의 목소리가 지닌 특징입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이유는 탐욕이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오로지 양들을 위해서지요. 늘 듣기에 좋기만 한 감언이설이 아니기에 듣는 편에서 두려움이나 저항도 생길 수 있지만, 얕은 감정과 자기애를 넘어서 경청해 보면 압니다. 목자는 양들이 행복에 넘치고 넘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요.

아기가 좋아한다고 부모가 늘 단것만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 안의 "잡아먹어라." 하는 말씀도 율법을 어기라는 뜻처럼 들렸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믿음의 채로 걸러서 들으면 목소리에 깃든 그분의 사랑과 염려, 신뢰가 들립니다. 우리의 편협한 지식이나 아집, 욕망이 걸러지기 때문이지요. 그 목소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요로워지고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곧 성령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그분이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믿기만 하면 고통과 시련의 껍질 너머에 은총이 감추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힘 내어 목자를 따라나섭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생명의 샘으로 이끄시는 목자의 사랑을 믿고 순종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국경없는 사랑

 -김찬선신부-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났습니다.

 

이 말은 한 극우 인사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나라의 일부 좌파 민족주의의 주장은 건전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일 감정에 바탕을 둔 종족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이 인사가 얘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 덕분에

우리나라와 아시아 나라들이 근대화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나

위안부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위안부가 

된 사람도 있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인사의 비판대로 반일이 나쁘다면 친일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지적하는 반일 감정적 민족주의는 문제점이 있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고 저도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전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저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수주의자였고 

당연히 비 복음적이고 비 프란치스칸적이었지요.

 

자기 민족을 진정 사랑하는 올바른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도 존중하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고 일본이나 미국처럼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불행케 한 나라들은 증오까지 했습니다.

 

올바른 민족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그러니까 앞의 인사가 표현한 종족주의는

다른 민족 특히 우리를 불행케 한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혐오가 있거나

그런 나라는 망하기를 바라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요.

 

그래서 요즘 제가 매우 걱정하는 것이 한. 중. 일 삼국 간에 혐오주의가

커져 가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제가 조선족 동포를 포함한 이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관점에서 반중 감정 때문에 우리 조선족 동포에 대해 적대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특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 초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주의랄까 율법주의적인 선민의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과 율법에 금한 음식을 같이

먹은 것 때문에 베드로를 비난하고 나선 것인데 이들이 비록

일부 신자일지라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않으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방향성에서 결코, 작지 않은 큰 문제가 될 그런 거였지요.

 

앞으로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갇힐 것이냐,

이스라엘의 유대교를 넘어 이방인들과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될 것이냐, 그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초기 일부 신자들은 성령을 자기들만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감히 성령을 자기들 안에 가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비와 햇빛이 민족과 국경을 가르지 않고 내리듯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선물도 국경과 민족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이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국경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다시 한번 명심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4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