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5일 부활 제4주일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18)
"I am the Good Shepherd"
A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소,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신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첫영성체를 하고 복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신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까지 신학생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그저 나만이 바라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에 휩싸여 신학교를 그만둘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밤낮으로 기도해 주시던 부모님과 교우들의 얼굴이 떠올라,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사제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 저는 죽어도 신부가 된 다음에 죽어야겠습니다. 처음부터 제 마음에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넣어 주지 마시지, 이제 와서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시면 어찌합니까?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박박 우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처럼 될까 봐 주님의 기도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악을 쓰며 한 달을 씨름하니 모든 힘이 빠져 나중에는 입을 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과의 일치, 성인이 되는 것이구나! 그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길이 여럿 있는데, 어떤 이는 사제성소, 어떤 이는 수도 성소, 어떤 이는 혼인 성소를 선물로 받는 것이구나. 그 선물은 더 귀하고 덜 귀하고,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느님이라는 큰 산을 오르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구나. 주님께서 ′너의 길은 이 길이 아니고 저 길이다.′ 하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면 되는구나. 다만 지금은 신학교에 있으니 내가 받은 선물은 사제의 길이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 선물에 합당한 이인가?’
그래서 그날부터 제가 받은 그 엄청난 선물에 합당한 이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하여 잘 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선물은 무엇이고, 그 선물에 합당한 이가 되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특별히 사제성소와 수도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받은 성소의 길을 잘 걸어가도록 기도하고 힘이 되어 줍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어가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은 언어의 장벽으로 힘듭니다. 간단한 대화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외국의 한 성지에서 혼자 있는데 한 외국인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묻습니다. 맞다고 하자, ‘나주 성모’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간단한 대화 이상은 불가능한 저에게 이단에 관한 대화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뒤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늘 긴장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대화 나누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입니다. 눈빛, 손짓 그리고 온몸으로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경청하려는 노력을 서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경청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경청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굳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필요한 말을 서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만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됩니다. 외국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 전체로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이런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는 성소주일입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모습과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의 시선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양들보다 자신의 안위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삯꾼과 같은 세상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라는 삯꾼은 내가 잘못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집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주님을 착한 목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따르는, 자신의 성소를 지키는 길입니다.


예전에 지방에 갔다가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빙판길에 제 차가 빙글빙글 돌아서 어느 담벼락에 그대로 충돌한 것입니다. 차는 곧바로 정비소로 향했고, 저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호출했던 보험사 직원은 렌터카를 불러준다고 하는데, 너무 놀라서 과연 운전해서 인천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이 순간, 정말로 운전하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대신 운전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인천에서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기 싫어도 운전을 해서 인천에 가야 합니다.
이 운전과 우리의 삶이 비슷하다고 생각해봅니다. 차를 직접 운전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제 삶도 제가 직접 이끌어야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기만 하면 진짜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힘들어도 해야지만 자신의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나만이 운전할 수 있는 나의 삶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내가 원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왜 목숨을 바쳐야만 사랑 받는가?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에
-전삼용신부-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 곧 성소 주일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삯꾼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우면 양들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만약 목숨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아드님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부모는 자녀가 잘났건, 못났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꼭 아드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조건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지 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도 오직 생명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면 곧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입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17_VscQdzLY).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그 물이 떨어지는 곳에 화분을 놓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중 손수레를 끌기가 힘들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도와줍니다.
음식을 먹는데 낯선 개가 배가 고픈 표정으로 이 남자를 바라봅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먹을 것의 반을 내어줍니다. 식당 가게 주인은 이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길을 가는데 가난한 어머니와 딸이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푯말을 놓고 구걸합니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보지만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록 적지만 소중한 돈을 두 모녀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웃집 할머니의 집 앞에 바나나를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친절을 베풉니다.
광고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매일매일 이런 친절을 베풀고 이 남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런 친절을 베풀며 자신은 가난하게 사는 이 남자를 탐탁지 않게 쳐다봅니다. 광고는 가난한 식탁에 앉아 혼자 외롭게 밥을 먹는 이 남자를 비춰주며 이런 결론을 내어줍니다.
“그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부자가 되지도 않을 거다. TV에 나와 유명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손수레를 밀어주며 아주머니와 한바탕 웃습니다. 힘들지만 같이 웃을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갈 때는 친구처럼 개가 따라와 줍니다. 구걸하던 어린 소녀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소녀는 교복을 입고 서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느새 이 가난한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릅니다. 바나나를 받은 할머니는 그를 따듯하게 안아줍니다. 그리고 그가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은 화분은 꽃을 피워 나비가 쉬게 합니다.
광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며 끝납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이러한 감정들입니다. 행복을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얻습니다. 그의 양식을 받은 개는 남자를 따르고, 놓아둔 화분에서는 꽃이 피어나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소녀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리어카상인 아주머니는 그런 온정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나요?”
사랑으로 받는 감동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입니다. 밥은 40일을 굶어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4일만 굶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죽고만 싶었던 주인공이 참사랑과 이해를 받게 되고는 다시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사랑받을 때 진정으로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게 생명이기에 사랑을 하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면 내가 그 사랑을 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면 생명이 올 수 없습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이든 내 생명을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만큼 하느님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유튜브에 ‘흙 묻은 아이’(https://www.youtube.com/watch?v=URQJAnENdrU)란 공익광고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옵니다. 아이들은 옷과 몸에 진흙이 묻어있습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보며 속상해하고 화를 냅니다. 장난을 치다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다 바퀴가 빠져 진흙에 물건들이 떨어집니다. 그때 지나가던 아이가 할아버지를 도와주다 옷에 흙을 묻힌 것입니다. 이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엄마가 아이를 만나는 장소에서 틀어줍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옷에 흙이 묻지 않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에 흙이 묻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랑스러워 뽀뽀 세례를 퍼붓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라도 이렇게 부모에게 영광을 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도 더 예쁜 자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사랑을 위해 더 죽을 줄 아는 것을 배운 이에게 더 가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들에게 양의 냄새가 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양의 좋은 냄새가 아닌 양을 깨끗하게 하려고 더러워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아끼는 목자는 사랑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죽는 소중함을 깨달을 때 참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값은 언제나 죽음임을 잊지 맙시다. 죽음으로 비워지면 언제나 그 안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결국, 사랑과 생명은 같은 뜻입니다. 생명을 주면 사랑을 주는 것이고 사랑을 받으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해서 ‘백신’을 맞았습니다. 2번에 걸쳐서 백신을 맞았습니다. 처음 맞았을 때는 약간 뻐근했지만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2번째 맞았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팠습니다. 미열이 있었고, 근육통이 있었고, 기력이 없었습니다. 백신 접종 후 발열, 오한, 피로, 두통, 또는 주사 부위 쓰라림/붓기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백신은 강력 할 수 있지만, 이는 신체가 코로나19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신을 통해서 내 몸에 코로나19의 대한 저항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백신과의 경쟁에서 항체를 만들어 내는 내 몸의 면역체계가 고마웠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성소 주일은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습니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성령을 받아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되어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교회의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3가지 직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언직(預言職)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멀어졌을 때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언자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높은 망루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봉사직(奉仕職)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로 오신 것은 봉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봉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 당한 이웃을 도와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제사직(祭祀職)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한 성사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신앙인은 이미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착한목자’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거쳐 이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나 수도자들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삶 안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각 본당과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는 사제 성소자와 봉헌 생활 성소자들을 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저 아이들에게는 저밖에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성소주일을 맞아 제 지난 봉헌생활을 돌아봅니다. 사부이신 돈보스코와 청소년들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사제서품 후보자 시절, 서품 성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성경 말씀에서 뽑았는데, 저는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긴 돈보스코의 고백을 뽑았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며, 청소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흘러 뒤돌아보니 큰 부끄러움만 한 가득 남습니다. 말과 글로만, 강론대에서만 청소년 청소년 했지, 솔직히 제대로 된 청소년 사목을 하지 못했습니다. 크게 가슴치면서 지금이라도 뭔가 할수 있을까 고민해보지만, 이제는 너무 연세^^가 들어 아이들이 슬금슬금 도망가버립니다.
가끔씩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는 형제들이나 수녀님들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할때 마다 제가 건네는 단골 멘트가 있습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랍니다. 나이들면 청소년 사목 하고 싶어도 안시켜줍니다. 솔직히 부럽습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겠지만 지금이 살레시안으로서 제일 행복한 때인 줄 아십시오.”
올초 과분하게도 교구 신부님들 연례피정을 동반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착한 목자 돈보스코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돈보스코의 생애, 영성, 그가 겪은 고통, 기도생활, 성모신심...제 개인적으로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돈보스코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착한 목자의 전형이자 모델이었습니다. 그의 머릿 속은 오직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외의 것들은 들어올 틈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돈보스코가 토리노 오라토리오를 떠나 로마로 출장을 떠날 때 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에 대한 걱정, 사랑,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로마에서 보낸 돈보스코의 편지 안에 그런 마음들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섭섭함이요 괴로움인지 여러분은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우리 모든 사목자들의 마음 속에도 돈보스코가 지녔던 양떼를 향한 애틋한 마음, 열렬한 사랑의 불이 다시금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든 사목자들의 마음 안에 어떻게 하면 양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떤 감동적인 강론과 구체적인 삶의 모범으로 양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성소주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목자들이 그렇게 노력할 때, 양들은 참으로 행복해할 것입니다. 세파에 지쳐 쓰러져 울다가도 우리 사목자들을 떠올리며 존재 자체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돈보스코가 젊은 사제 시절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토리노 교구 내 큰 손이었던 바롤로 후작부인이 운영하는 소녀 기숙사 지도신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토리노 뒷골목 노동 현장에서 착취당하는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꽤나 파격적인 연봉을 받으면서 사목하던 돈보스코였지만, 바롤로 후작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본업에 충실해주면 좋겠는데, 즉 기숙사 소녀들에게만 전념해주면 좋겠는데, 돈보스코는 틈만 나면 토리노 뒷골목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어느새 소년 교도소에 가있었습니다.
어느날 화가 잔뜩 난 바롤로 후작 부인이 담판을 짓기 위해 돈보스코를 호출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나입니까? 아니면 저 뒷골목 아이들입니까?”
제가 돈보스코 같았으면, ‘죄송합니다. 후작 부인! 제가 요즘 좀 지나쳤죠? 앞으로 기숙사 소녀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랬을텐데, 돈보스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후작 부인꼐서는 돈이 많은 분이니 얼마든지 좋은 사제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아이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 저는 저 아이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아이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라는 표현이 오늘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사목자들도 이런 고백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가난한 양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부활 제4 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성령으로 가득 차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증언합니다.
<제2 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어주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합니다(에제 34,11-16;스바 3,19;미카 2,12 등). 그리고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에제 34,23-24;37,24;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의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곧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으며,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 압니다. 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곧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예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일입니다. 곧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성소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소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리지외의 소화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고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나는 착한 목자다.>
-송영진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1-13).”
“나는 착한 목자다.” 라는 말씀에서 ‘착하다.’는 말은,
단순히 성품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그 뜻도 포함해서,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뜻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은, 하느님의 그 뜻을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원래 ‘착한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착한 목자’의 반대말은 ‘악한 목자’인데, ‘악한 목자’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목자입니다.
(사실상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삯꾼’은 바로 그런 ‘거짓 목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에제키엘서에 이런 예언이 나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에제 34,2-5).”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에제 34,10).”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5-16).”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에제키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거짓 목자들을 꾸짖는 에제키엘서의 말씀에서 복음서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여기서는 율법학자들만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제들과 지도자들까지 모두 겨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목자’로 행세했던 자들입니다.
또 과부들만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두 해당됩니다.
힘없는 서민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예언이 구약시대에서 끝나는 일일까?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의 상황을 비판하는 말씀으로 그치는 것일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여기서 ‘안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양들의 일치의 원형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신 것은
바로 사람들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하늘로 데려가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도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쪽에서도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일을 ‘헛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 자체는 결코 ‘헛일’이 아니지만,
그 은총을 안 받아서 못 받는 사람에게는 ‘헛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도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은,
“부르심(성소)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말을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일도,
또 우리 각자에게 제각각 다른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 일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탈렌트를 받는 것은
은사의 ‘크기의 차이’가 아니라,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성소의 다양성과 은사의 다양성은 차별도 아니고 불공평한 일도 아닙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당한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소와 은사에 ‘우열’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은 성소나 은사에 시기 질투를 하면 안 되고,
자신이 받은 것에 열등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최소한 죄는 짓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죄.>

복음: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소주일(聖召主日)이며 이민의 날이다. 우리의 성소와 특히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고국을 떠나 이민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목자의 모습은 이사야의 "야훼의 종"과 같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여기에 삯꾼이 나온다. 삯꾼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있으나 양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삯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양들을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절) 이리는 악령이다. 이리는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을 불어넣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켜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이런 이리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양 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이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들을 지키셨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고 한 우리에서 한 목자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18절)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이 자발적인 것이고, 그분은 당신이 내놓으시고 되찾을 수 있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임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신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온 것이다.
베드로는 구원이 이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 떼에 베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1코린 15,45)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전한 구원의 모습이 현시점에서부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부활이 될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의 성소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제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고, 그 목자 아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이다.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 11)
-한상우신부-
부르심은
한줄기
빛이다.
부르심은
신비이다.
부르심은
버리지 않고는
따를 수 없는
결단의
지속적인
여정이다.
부르심은
참된
소명이다.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된다.
부르심의 고백은
신앙의 고백이
된다.
부르심은
은총이다.
부르심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다.
부르심은
우리의
생활로
드러난다.
부르심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참된 사랑으로
깊어가야 한다.
회개와
망각 사이에
부르심이
있다.
부르심은
회개를 통한
변화이다.
부르심을
돌보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다.
부르심은
목숨이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내놓는다.
부르심은
기쁨이다.
착한 목자와
함께하는
참된
행복이다.
부르심은
착한 목자를
향한 신뢰이다.
싱싱한
부르심은
풍요로우신
주님의
현존이다.
부르심의
그 뜨거움을
다시 만나는
성소주일이다.
모든 부르심의
기쁨을 위해
기도드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의 착한 양을 그려주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양들을 치는 목자, 그것도 착한 목자라고 계시하십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비유지요. 주님과 메시아, 백성의 지도자에게 부여된 목자의 소명은 맡겨진 백성을 사랑과 자애로 돌보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 돌봄과 보호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니, 목숨을 바치기까지 돌보고 보호하는 것이 그 한계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겠네요. 양들을 향한 착한 목자의 사랑은 생명을 건 헌신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가장 큰 사랑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야말로 가장 큰 사랑의 실천가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이 한 "착한 일"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사도 4,9)
못 걷던 이가 걷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 좋은 일을 한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문을 받습니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 기적에 대해 그저 "착한 일"이라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표현하지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이 기적은 과연 "착한 일" 맞습니다. 고통 속에 있던 이가 해방되어 구원으로 걸어들어간 "착한 일"이지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인데, 어찌 "착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 맺는다."(마태 7,17)는 말씀 또한 떠오릅니다. 스승이신 착한 목자의 제자이고 양들인 그들은 그분을 닮아 착한 제자요 착한 양으로 양성되었고 성령을 받아 "착한 일"을 행합니다. 착한 나무에서 착한 열매가 맺힌 것은 당연하지요. 게다가 선한 스승이고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제자들이 행한 구원의 기적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착한 일"입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미래 모습을 들려 줍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하듯, 좋은 나무이신 아버지에게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가 좋은 가지인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닮아 자녀인 우리가 사랑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봄"으로써 그분에게 물들게 되어 그분을 닮아가고, 결국 "그분처럼 됨"이라는 궁극의 차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은 착한 양들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닮은 사랑의 자녀들이기도 하지요. 이 착함과 사랑의 극치에는 목숨을 바치는 헌신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그런 분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여정 안에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오늘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긴 착한 일로 채우시길 기원합니다. 성소주일을 맞아 착한 목자에게 사랑받는 착한 양으로서 저마다의 사랑의 성소를 살아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제4주일-착한 목자와 착한 양의 두 성소 중에서 나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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