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 21. 07:23

2021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대한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에 따라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체칠리아, 아가타, 루치아 성녀와 함께 초세기 4대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녜스 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용감히 나아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과 악에 얼마나 잘 대항합니까?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믿음과 형제애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나누어야 함을 알려 주는 요한 1서 저자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요한 5,5)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 계명은 힘겹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모두가 세상을 이긴다.’라고 전합니다. 아녜스 성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박해자들을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지만,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증거로 목숨을 요구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피 흘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참고 견디며, 세상의 악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은 우리가 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이 외침은 우리가 바치는 희생과 봉사와 애덕의 실천으로 세상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형제님께서 “저도 운동을 좀 해야 할 텐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운동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운동 없이는 지금을 잘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첫 번째는 ‘운동 좀 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책 좀 읽어야 하는데’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필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해야 한다고 하셨던 형제님을 향해서 곧바로 “운동하세요.”라고 했습니다. 필요성만을 기억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기억보다는 몸으로 하는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지만 가능성이 현실로 변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늘어놓고 있어서 소망만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는 대단하다는 것만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매일 2시간씩 해야지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책은 하루에 한 권씩 읽어야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적은 시간이나 양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습관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아서 매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는 그 뒤로는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손으로만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해서 단지 손으로만은 만질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악마의 세력마저 예수님을 뵈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냐하면 악마의 세력이 외치는 말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면서 조금이라도 변하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 역시 얻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며 원망하지 않기 어렵고,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논어 헌문편).


나만의 시간, 나만의 삶

미국 주간지 ‘타임’ 칼럼니스트 마이클 시몬스는 에디슨,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등 저명인사의 공통 습관을 찾았습니다. 대단한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공통점은 어쩌면 너무 작고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낮잠, 일기, 산책 등....”

일에서 비켜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의 원동력이었다고 마이클 시몬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면 자기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면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의미 있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부정적인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모두에게 잘할 수 없으면 아무에게도 잘해주지 말라

-전삼용신부-

 

오늘도 공동체 리더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이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리더이십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댈 수 있기에 예수님은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시어 그들과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도 그분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곤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한 공동체의 리더십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리더는 ‘편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더 잘 안다는 말은 더 많이 사랑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편애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누군가는 그 가정에서 소외되고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공동체 분열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귀 들린 이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리더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공동체 분열의 주범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입을 막으십니다. 또 뭍에 계시면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들만 이익을 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조금 떨어지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다면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게 하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참 리더의 모델입니다.

 

      ‘KBS 안녕하세요’ 프로에 「아홉 살인데 몰래 우는 아들」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9살, 4살 두 아들이 있는데 지나치게 차별하는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밥 먹으면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밥을 토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토하냐고 화를 내고 그 아이와 밥을 먹으면 밥맛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진행자들이 큰아들에게 “아빠가 너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작은아들에게도 그렇게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빤 절 사랑해요. 경상도 사람이라 좀 무뚝뚝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고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아빠가 말하지만 작은 아이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핑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교하기 좋아합니다. 자녀는 부모 사랑의 절대적인 양보다 상대적인 양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 부모가 사랑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차별해서 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편애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은 리더가 다른 이에게 하는 사랑의 최대치가 자신에게도 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고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청년들이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집 센 누군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제가 본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청년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회가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따르는 청년들은 소수였지만 결국 끝까지 둘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항상 본받고 싶은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이 정말 대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잘 해 주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세금도 많이 걷고 다른 의무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불만이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못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 잘해줄 수 없다면 똑같이 못 해주라는 것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나라의 리더가 편애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의견에 휘둘린 것입니다. 최순실 씨의 의견이 다 옳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편애하는 리더일 뿐입니다. 그녀의 파일엔 국가안보 자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통령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를 골고루 사랑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자신을 알게 하지 않을 바에야 누구에게도 편파적으로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어떤 양반은 하인 둘이 서로 싸우고 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자네가 옳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하자 “자네가 옳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하인이 “주인님, 다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둘이 싸운 것인데요.”라고 했더니 “너의 말도 옳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분열은 옳지 않고 일치는 옳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이들은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에 휘둘린다면 좋은 리더는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만의 지도자가 됩니다. 지도자는 오직 하느님께만 흔들려야 합니다. 몇몇 사람에게 휘둘리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어머니는 양발이 구멍 나면 기워 주셨습니다내복도 무릎이나 팔목이 헤어지면 천을 대고 기워주셨습니다가난한 시절이었고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형들이 쓰던 가방옷을 물려받았습니다예전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옷을 수선하거나헌옷을 물려 입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자녀가 적기도 하고유행 따라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예전처럼 살지는 않지만 아끼고나누는 검소함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금이 간 도자기흠집이 있는 도자기에 금칠을 하거나그림을 그려서 작품으로 만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도자기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너무 낮은 온도에서 꺼내거나너무 높은 온도에서 꺼내면 금이 가거나흠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도자기에 마음이 갔고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고 합니다어릴 때 나환자들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얼굴에 흉터가 있는 분손가락이 없는 분발가락이 없는 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런 분들이 모두 밝게 사셨다고 합니다비록 외모는 흉터와 상처가 있지만 마음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건강한 몸으로 노래를 불렀던 자신이 오히려 영적으로 더 큰 상처와 흉터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나환자들과의 만남을 기억했고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일을 그만두고 흠이 있는금이 간 도자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탓하지 않으십니다하느님께서는 허물과 상처가 있음에도어쩌면 그런 상처와 허물이 있기에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오실 구원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내가 선택한 이내 마음에 드는 이다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제목은 지나간 다음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큰 고난이 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며

한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고난이 지나간 다음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습니다.

 

나의 고난은

인생을 깨닫고

더욱 성숙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나를 위해서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권력자존심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주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양승국신부-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풍기셨던 매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큰 무리를 이루며 따라다녔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 때 모인 군중의 수는 장정만도 5천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많은 숫자의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들 합치면 적어도 만명, 이만명이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 잠시 계셨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군중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예수님 주변을 뺑 둘러싸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나 제자들의 힘만으로 질서 유지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 있겠다는 걱정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상 조치로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배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후, 안전한 상태에서 가르침과 치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엄청난 군중의 수효를 확인한 제자들은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더 큰 욕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난 번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때는 장정만 5천명이었는데, 다음 신앙대회 때에는 만명을 돌파해야 할텐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좋을텐데, 스승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각자 마을로 돌아가서 입소문을 많이 내면 좋을텐데...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유난히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메시아 함구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나 권위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은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도 교회를 찾습니다.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꼭두 새벽부터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백성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울 수 있도록 동반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소문은 발 없이 천 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큰 무리가 몰려왔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자기 삶의 무게를 덜어보겠다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배불리 먹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현실적인 위로와 희망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세상 속에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골치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속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구원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호기심과 욕구에 따라 바라보고 밀쳐댔습니다. 거기에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밑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악령들은 아부하느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들먹였지만, 그 속을 알기에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기도하며 갈망하다 보면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되면 참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됩니다.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나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삶의 현실 안에 함께하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발은 땅을 디디고 삽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거리 두기’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7-10).”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은,

밀려드는 군중과 당신 사이에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먼저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고 다투었는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그리고 ‘말씀의 은총’을 주는 일을 먼저 하시려고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뒤로 물러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서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빵’을 주시는데도

그 ‘빵’을 받지는 않고 ‘돌’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받지 않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만지려고 서로 다투고 밀쳐 대는 모습은

그들의 ‘이기심’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 생각은 하지 않는,

양보할 줄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사랑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거리 두기’는 바로 그 이기심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밀쳐 댄 것은,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병자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요한 5,5-9).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로 물러나시면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것은,

병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고쳐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라는 뜻입니다.

(“우선 먼저 나의 설교를 들어라. 그 다음에 모두 고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모습과 관련해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가시는데 군중이 그분을 밀어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그가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즉시 하혈이 멎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부인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가 무슨 까닭으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으며, 또 어떻게 즉시 병이 나았는지

온 백성 앞에서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8,43-48)”

표현만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 모르게 예수님의 ‘기적의 힘’을 훔쳤고,

예수님께서는 나중에야 그것을 알아차리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여자의 간절함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예수님을 밀어 댄 군중 가운데에는

그 여자처럼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인데, 치유의 은총은 그 여자에게만 내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는 믿음도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옷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의 ‘자비’로, 또 당신의 ‘권한’으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경우에도,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청해야 할 진짜 큰 은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만병통치약’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어디서 무슨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자기도 기적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충실한 신앙생활’은 하지도 않고, 자신의 영혼 상태는

반성하지도 않고, 이웃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그저 기적 체험만 많이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신앙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마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다.(마르 3, 10)

-한상우신부-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세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골짜기가
꽤나 깊다.

영원한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부서진다.

부서지는 것이
맑아지는 것이다.

맑아지는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은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부서짐도
아픈
은총이었다.

순교란
부서져서
한 줄기 맑은
빛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잔치는
부서짐의
잔치다.

동정 순교자
성녀 아녜스
축일이다.

하느님밖에
모르는
삶이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의 무게만큼
아픔도 향기가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또한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믿음은
부서짐의
봉헌이었다.

가장 아팠던
곳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신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사랑을
가릴 순 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오늘이다.

인생의 의미는
믿음의
의미이며

믿음은
영원한 것을
향한 부서짐의
사랑이다.

자아가
부서지는 것이
영적인 삶의
참기쁨임을
믿는다.

성녀 아녜스여,
기쁨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느님 사랑에
다시 집중하는
신앙의 눈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 8,4)

율법은 레위 가문에 사제 직무를 맡깁니다. 하느님이 그들의 유산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거룩함에 봉직하는 아론의 후예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따로 상속 재산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다 가문,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러나 인간 대사제들이 바치는 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대사제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십니다.

인간 대사제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히브 8,5). 반면 예수님은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히브 8,2)이십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6)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 군중이 몰려드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 들었다. ... 그분을 보기만 하면 ...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역동적인 광경이 펼져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변방으로 이동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중심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여전히 사제들이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며 예식을 거행합니다. 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관리하지요. 

예수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 치유와 구마가 절실한 이들, 중심 기득권층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들이 모입니다. 주로 온도와 핏기 없이 형식과 제도로 이어가는 예식 안에서는 도무지 위로와 안식을 얻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배운 것도 적고 가진 것도 없는 투박하고 단순한 이들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 깊숙이까지 생생하게 침투하는 실질적인 구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곧 예식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이 곧 제사인 구원자 사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고 체험한 것이지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의 모상이고 그림자"라면, 예수님께서 계신 이곳이 곧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요 참성막"입니다. 진정한 희생제사와 예배, 찬미와 찬양이 이루어지는 영의 도가니가 기쁨과 희망과 찬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3,9)

군중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몰려드는 통에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군중과 예수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질서를 찾고 또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만,  "배"는 곧 교회의 표상입니다.

교회는 심연을 헤치고 파도를 넘어 지상 순례길을 항해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한 희망"은 이 배를 단단히 고정해 항구인 "저 휘장 안"
(히브 6,19)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영혼의 닻이지요.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성전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봅니다. 신앙의 주인은 저 멀리 하늘에서 온갖 권리를 행사하며 섬김만 받으시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곁으로 내려와 보살피고 회복시키는, 종래에는 그 고통을, 죽음까지도 떠안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신약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를 살면서도 두려우신 하느님은 그저 멀리 계셔야 편하다며 적당선에서 신자 신분만 유지하고 구약 율법에 안주하며 살지는 않은지요? 오늘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분을 만지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일어나며 가슴이 뛰는지요? 그분 곁에 머물고 싶어 간절히 종종걸음을 치는지요?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은 어디에서나 드러나고 발휘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 신자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녜스 성녀께도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위해 빌어주십사 청합니다.

성녀 아녜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거룩한 걸레?

 -김찬선신부-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이해하던 주님과

전혀 다른 또는 정반대인 주님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면 주님을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늘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신 분이시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와 같이 계시고, 똑같은 인간이 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도 앞에서는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고 얘기하지요.

 

그러니까 진흙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땅에서 우리와 함께 진흙탕을 뒹구시던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이지

애초부터 우리와 거리를 두신 주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순수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계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해야겠습니다.

 

우선 죄인들과 떨어져계시다는 것이 죄인들을 멀리하거나 죄인들에게

가지 않으셔서 떨어져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같이 계셔도 죄를 타거나

죄에 물들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옛날 우리 시조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에 가지 말라는 시가 있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죄인들과 어울려다니셨어도 죄 짓지 않으셨고

이젠 하늘로 오르셔서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 되어주셨다는 뜻이며

그래서 히브리서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라는 뜻이 되지요.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주님은 그저 우리 죄인들과 어울려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죄를 씻어줄 주님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신데 죄를 씻고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방식입니다.

 

다른 사제들은 제물을 바쳐 사람들의 죄를 씻는 데 반해

대사제인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씻으시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제게 계속 아른거리는 것이 바로 걸레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곳에 뒹글다보니 걸레가 된 걸레가 아니라

더러운 것을 닦기 위해 자원해서 걸레가 된 걸레입니다.

 

사실 걸레라는 것이 애초부터 걸레인 것은 아니지요.

더러운 것을 계속 닦아주다보니 걸레가 된 것인데

이때 스스로 걸레가 된 걸레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함과 순수함도 사랑이 아닌 다른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거룩하고, 주님의 사랑이 순수하고 순결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 불순물이 있는 사랑인 것에 비해

자기애나 욕심이나 보상과 같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사랑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오로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24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