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1. 23. 07:17

2021 1 23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3,20-21)

 

  Knowing what was happening his relatives

came to take charge of him:

"He is out of his mind," they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으며,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가짜 뉴스’인 소문에만 집중하여 편협하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나서는 태도를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8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가짜 뉴스는 거짓되고 매혹적인 주장을 앞세워 유쾌하고 위험한 유혹으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불안, 멸시, 분노, 좌절과 같은 즉각적 감정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직해 보이는 가짜 뉴스로 조작된 허위 정보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식별력과 판단력으로 진리를 가려내려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가짜는 참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가짜가 주는 열망은 불신을 낳고, 고립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믿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우리는 진리를 체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이 옳다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다가 인격장애의 종류가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집성, 분열성, 분열형 인격장애는 A군이고, B군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말합니다. A군이 외톨이형(자기만의 성을 쌓기 때문)이라 하면, B군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기에 자존감이 낮고 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마지막으로 C군 인격장애도 있는데, 강박성, 회피성, 의존성 인격장애로 불안해서 집착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이라고 합니다.

인격장애의 종류가 하나씩 살펴보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저 역시 약간씩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저에게도 약간의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관대합니다. 자신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따라서 자신의 문제를 알아가면서 좀 더 조심해서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완벽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하고 피하기보다는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앎은 ‘나’라는 틀에서 바라보는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에는 잘못된 판단으로 더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희망 가득한 말씀, 깜짝 놀랄만한 표징들로 인해 사람들은 늘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표징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예수님 망신 주기에 더 큰 노력을 쏟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문을 흘렸습니다.

이 소문을 예수님의 친척들이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아서 더는 미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소문만 듣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친척이라면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까이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단지 남의 말만 듣고 “미쳤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이 역시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도해 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매튜스).


원칙과 단호함.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합니다. 양심이나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꽤 있지요. 공감 능력이 없고, 공감할 의지도 없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참 많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네가 맞다.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라고 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성향의 사람과 잘 지낼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엮이는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직장 상사를 비롯해서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원칙과 단호함.

스스로 원칙을 세워 단호하게 끊을 수 있을 때,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병적인 이 사람을 고치겠다고 해서는 더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나의 원칙과 단호함을 가져야 합니다.

 훌륭한 리더는 비전과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도 역시 리더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교회의 리더셨던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그분의 제자들도 너무 바빠서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이렇게 자신도 미치고 자신의 조력꾼들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동기 부여자’여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는 그 동기 부여의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리더가 먼저 성령을 받고 미쳐야 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팀원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악령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 성령에 사로잡힌 리더를 구분하기 어려울까요?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는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의 욕심과 육체적인 욕심, 그리고 권력과 명예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1997)은 잘 나가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변호사는 승리에 취해있습니다. 지금은 한 성추행범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자가 성추행범인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엄청난 설득력으로 재판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리고는 가장 큰 법률사무소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 사장은 그를 엄청나게 좋아해 줍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신에게 관심을 잃어가는 남편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회사 사장은 사탄이었고 자신이 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사탄의 말에 응하는 척하다가 자유의지를 발동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쏴서 자살합니다. 그때 번쩍 다시 눈이 떠집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의 바로 그 재판장입니다. 그가 성추행범을 변호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깨달았던 주인공은 변호를 포기하고 재판에서 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세상 누가 봐도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소유욕, 육욕, 권력욕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악령에 들렸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런 욕구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악령에 이미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령으로 인도받는 이들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미치고 죽게 만듭니다. 아이돌 지망생들을 경연시키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정신적으로 무장이 안 된 그들을 비(정지훈) 씨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가르쳐준 지 며칠이나 됐니? 내가 늘 좋은 얘기만 하니깐 좋아 보여? 아니야. 너희들은 그냥 씻고 잘 준비가 돼 있니? 집에 일찍 가고 싶어? 그럼 연예인을 하지 마. 가수를 하지 마. 무대에 백 번, 천 번 섰던 나도 잠이 안 와서 오늘 들어가서 혼자 또 연습한다니까? 내가 나를 만족하지 말라니까? 거울로 봐봐. 나를 만족하지 마! 예뻐야지. 멋이 있어야지. 그래야 대중들이 본다니깐 너희를. ”

      정지훈 씨는 진통제 살 돈이 없어 고통 받으며 죽어간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을 듯이 연습해서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꾸지람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슈퍼 주니어 출신 예성이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하는 말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습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내내 했어요? 노래 연습도? 근데 1년 이상 해야 할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원래 퍼포먼스에서 춤을 좋아했던 친구들이죠? 근데 가수가 되고 싶은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해요. 무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연습실에서 누가 본다고 했을 때 절대 장난치면 안 돼요. 가사지를 들고 와서도 안 되고. 내 파트가 나오면 자신감이 없어도 자신 있게 불러야 하고, 틀려도 실실 웃으면 안 되고. 민폐라고요.

여기 데뷔하는 사람 몇 명이에요? 거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처음 회사(SM)에 들어갔을 때 80명 가까운 연습생이 있었어요. 불안했죠, 내가 언제 잘릴지 몰랐으니까. 우리가 데뷔할 때 12명이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 모든 걸 다 버리고, 웃고 떠들 수가 없었어요. 난 아슬아슬했으니까. 진짜 간절한 사람이 데뷔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제가 봤을 때 여러분들은 그리 간절해 보이지 않아요. ‘나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쉬운 바닥이 아니에요. 좋은 기회가 왔잖아요? 정말 목숨을 걸어요. 진짜 모든 걸 걸었을 때 합격할 수 있어요, 진짜로.”

      성령은 나를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이들도 죽입니다. 이것이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151경기’(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교 미국 풋볼팀은 지는 법이 없습니다. 11년 151경기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끌던 코치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년 동안 코치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에 팀은 첫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경기도 집니다. 모든 승리의 근저에는 ‘밥’이라고 하는 리더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복귀한 코치 밥은 그들을 버스에 태워 군인 재활 시설에 데리고 갑니다. 당장 잘린 손이 있다면, 당장 잘린 발이 있다면 전우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죽어라 재활하는 군인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이 없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연승행진은 이어집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무언가에 한 팀이 되어 매진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리더는 자신과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노력하는 데서 참 기쁨이 옴을 가르칩니다. 게으르게 만드는 리더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밥 먹을 시간도 없게 만드십니다.

 -조재형신부-


20년 전의 일입니다수녀님들과 대림특강의 강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습니다거리가 멀었고신자의 수가 적었습니다누구를 강사로 모실지 고민하고 있을 때입니다수녀님이 제안을 하나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실까요?’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작은 성당에 오실 수 있을까오신다고 하면 어떻게 대접을 할까혹시 모르니 편지를 보내자고 결론을 냈습니다수녀님이 정성어린 편지를 추기경님께 보냈습니다. 6월에 보냈는데 9월이 되어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습니다추기경님께서 못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강사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그런데 10월에 연락이 왔습니다추기경님께서 로마에 다녀오셨는데 편지를 보셨고대림특강을 해 주시기로 했다고 합니다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신자들은 많이 모일지준비는 차질 없이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추기경님의 방문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장단의 콩으로 두부를 만들었습니다임진강의 꽃게로 탕을 만들었습니다면장님도 오고군인들도 올 수 있도록 부대에 연락했습니다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도 해 주시고미사까지 봉헌해 주셨습니다미사 후에 사진도 찍어 주시고식사도 함께 하셨습니다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온전히 하루를 내어 주셨습니다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에 특별히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그랬습니다추기경님께서는 해마다 성탄절이면 작은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비록 작고 허름한 곳이지만 추기경님께서 방문하시고 미사를 봉헌하시면서 결코 작고 허름한 곳이 되지 않았습니다어느 해인가 피정 중에 추기경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 어디일까요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입니다.”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제사는 다시 번제물이 필요하지만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더 이상 번제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김수환 추기경님의 방문이 저와 성당에는 큰 기쁨이요영광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만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우리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고난이 찾아오면 다른 곳을 찾으려합니다재물명예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눈에는 하늘을 나는 나비가 위험에 보일 겁니다날개의 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세상의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의 눈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자비를 베푸는 사람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양승국신부-

 

1846년 돈보스코(1815~1888)가 32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 시절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400여명 가까이 되었지만, 오라토리오는 계속 떠돌고 있었습니다. 묘지에서 방앗간으로, 작은 헛간에서 풀밭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유능한 돈보스코가 본당이나 병원 등 안정된 사목을 뒤로 하고, 갈곳 없는 아이들 수백명과 토리노 뒷골목을 전전하며 깔깔거리는 모습을 본 토리노 교구 동료 사제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1846년 연초에 개최된 토리노 교구 사제 모임 때 몇몇 사제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혹시 돈보스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은 아닐까?

  

교구에서는 돈보스코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돈보스코와 절친했던 빈첸조 폰자티 신부와 나시 신부를 진상 조사 위원으로 선정해 파견했습니다. 교구는 정확한 진단과 정밀검사를 통한 치료 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토리노 시당국의 눈초리도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안그래도 비상시국인데, 수백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경찰국장이 돈보스코를 호출해 호통을 쳤습니다.

  

“대체 이 부랑아들이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들을 자기 집에 내버려 두시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돈보스코가 물러서지 않자 경찰국장은 바로 그날부터 경찰관들을 파견하여 오라토리오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후에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이 된 미켈레 루아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사 복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는 제게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 어디 가니?”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가요.” “너 아직 모르고 있었니? 돈보스코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렸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주임 신부님의 말씀은 가시처럼 제 마음 속으로 깊고 아프게 파고 들었으며, 형언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밀려왔습니다. 저는 오라토리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돈보스코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미쳤긴 미쳤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에 미친 것입니다. 그분은 미칠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가 앓고 계시다는 병은 바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병이었습니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돈보스코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니,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교차되어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예수님 역시 돈보스코와 똑같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 기간을 지극히 제한적이지, 당신 손길이 필요한 백성들은 끝도없이 구름처럼 몰려오지, 아무리 외쳐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지...

  

당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침식마저 잊고 사목에 헌신했습니다. 하루를 백년, 천년처럼 그렇게 강도높게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감사하고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잔뜩 꼬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 복음 3장 21절)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께서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셨고, 순간순간 지니고 계셨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활활 불타오르게 하셨다는 표시가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솟아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일을 향한 강한 열정이 샘솟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붙잡으며 반박한 것(마르 8,32)도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을 제지하기 위해서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자기 손에 붙잡고 조정하며 흔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는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시토회의 앙드레 루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도승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예수님을 붙잡으려 찾아다니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주님께 붙들린 사람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분이요,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배신할 때나 무관심할 때나,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힌 자로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려 살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조정에 승복하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아멘.

 흔들림 없는 삶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근심 걱정만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 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 -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받으시고 모함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래도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어떤 이가 흔들 때 드러납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르 3,20-21: 예수님 친척들의 몰이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가족들이다. 그것 때문에 어떤 때는 아무런 부담 없이 농담하고, 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족들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한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이것을 본 군중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적들을 비하하며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등 비방을 하였다(22절).

 

여기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21절). 아마도 예수께서 고향, 친척, 직업을 모두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셨을 것이다. 사실 그 형제들과(요한 7,5) 고향 사람들은(마르 6,1-6)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친척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경탄하기보다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한 사람이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서로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한 중상이나 비방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점,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다. 이 가족 안에서는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일이 없는 가족이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웃의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보다는 어렵고 곤란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을,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진정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힘들더라도 옳고 그른 진실과 허위를 가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이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한상우신부-


우리를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도
우리자신들이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것이다.

세상에
빨간색만
있다면
그야말로
돌아버릴 것이다.

삶의 묘미는
다양함이다.

다양함을
미쳤다고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나친 과장과
지나친 왜곡은
언제나
우리 삶을
아프게 한다.

정상과 이상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좀 부족해도
괜찮다.

저마다
남모를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고통을
헤아려주지는
못할망정
판단과 낙인으로
소중한 인격을
무너뜨린다.

무례한 통제와
도를 넘는
간섭과 무리한
요구를 이제는
멈추자.

우리자신밖에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저마다의
보폭과
저마다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자신과
이웃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 된다.

가치있는
존재로
바뀌는
그 시작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건강한 삶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미치지 않으셨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우리들
삶의 관계이다.

판단이 아니라
사랑속에서
성장하는
우리들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참된 성소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마르 3,20)

열두 사도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십니다. 군중도 뒤를 따르고 소문을 들은 이들도 모여듭니다. 이제는 유형의 성전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고 지성소가 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는 제자들과 군중만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으러 온 친척들까지 모여듭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에 놀라 달려왔을 겁니다. 이 대목 바로 뒤에 베엘제불 논쟁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마귀 두목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속단해 퍼뜨린 듯하지요.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친척인 예수님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앞섰겠지요. 혹 가문에 수치가 될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예수님을 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의도와 지향을 관상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메시아와 함께 출세와 영광을 바라는 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고, 군중은 치유건 구마건 위로건 무언가 얻어내고자 왔습니다. 친척들도 인간적인 걱정이 앞섰던 것이고요. 이 모든 동태를 살피러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
(마르 3,22)의 의도야 너무 뻔한 것이겠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찬미와 영광을 바치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형의 성전 안에 존재하는 성소, 지성소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히브 9,11)

인간 대사제는 지파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에 접근할 지위가 주어집니다. 그는 율법이 정한 짐승의 피를 뿌려 사람들을 정화하지요.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온 인류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만든 성소가 아니라, 모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성소의 원형,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공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짓고 집회와 친교의 장소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도와 지향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 각자의 바람을 아뢰고 청원을 올립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부터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수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까지 주님이 계신 곳에 모여드는 이들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당시 종교제도 밖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께 올리신 제사가 온 인류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장소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문 밖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 언덕이었지요.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재앙적 감염병 사태가 "진리와 영 안에서 예배하는"
(요한 4,23참조) 때를 앞당겨 준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전에 갈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고, 우리가 머무르는 공간이 주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지성소임을 절절히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지성소 안에 들어가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 품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이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 그분께 아룁시다. 우리 지향의 시작이 무엇이었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차츰 정화되고 성화되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영혼이 되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해의 발생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과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복음은 주님께서 오해받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미쳤다는 오해를 주님을 잡아가려고 온 친지들로부터 받고,

이어지는 복음에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는 오해를

진상을 파악하려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로부터 받습니다.

 

잡아가려고 왔건 진상을 파악하려고 왔건 그들이 오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친지들도 예수님께 오고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께 오고 사람들도

예수님께 몰려오지만 그 이유가 다른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하는 데

비해 친지들과 율법 학자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오해란 다 자기 기준으로 또는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기에 오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기준으로 또는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해하는 게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자기 기준이 강하고 자기 중심인 사람은 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해가 아니라 판단을 주로 하지요.

 

이런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와 같은 사람입니다.

MBTI 성격 유형에서 저는 INFJ이기에 저는 매우 판단적이고,

이것을 떠나 제가 저의 일생을 봐도 이해적이기보다는 판단적입니다.

 

저의 성격을 검사해준 교수님 말씀이 저는 N과 F 곧 직관력과 감성이

제일 강하고 그래서 NF가 주기능을 하지만 내향성도 강하고,

판단도 강하다고 하시며 그러기에 제가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대체로 맞지만 5% 정도의 실수는 있을 수 있으며 그러기에 너무

제 판단을 너무 믿다가 큰 실수를 할 수 있음을 꼭 조심하라 하셨지요.

 

그런데 제 경험상 잘못된 판단과 오해의 더 큰 요인은 성격보다도

인격적인 것 곧 교만이고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자기 비움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우리말의 이해에 해당하는 Understand라는 말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어의 이해는 Under/밑에 Stand/서다 곧 밑에 서는 것이잖아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늘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데 비해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늘 다른 사람 밑에 있기에

자기 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입장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친척들은 어떤 것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은 교만하기에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친척들도 교만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일까요?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오해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주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미쳤다는 표현은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아는 상식에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사건건 당시의 법과 제도와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정신 나간 자의 짓이 아닐까 하고 걱정과 염려의 눈으로 본 것일 겁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데 자기 가문의 예수가 너무 튀니

이러다가 큰 사단이 나겠다는 생각에 예수를 붑잡아 가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염려도 오해 발생의 한 요인입니다.

그런데 사실 상당수의 염려는 기우杞憂이지요.

기우란 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염려의 오해는 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나의 기준과 중심성이 강하여

생사람 잡는 일만은 없도록 자기 근신을 잘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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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무언가에 한 팀이 되어 매진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리더는 자신과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노력하는 데서 참 기쁨이 옴을 가르칩니다. 게으르게 만드는 리더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밥 먹을 시간도 없게 만드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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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상 잘못된 판단과 오해의 더 큰 요인은 성격보다도

인격적인 것 곧 교만이고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자기 비움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우리말의 이해에 해당하는 Understand라는 말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어의 이해는 Under/밑에 Stand/서다 곧 밑에 서는 것이잖아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늘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데 비해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늘 다른 사람 밑에 있기에

자기 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입장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친척들은 어떤 것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은 교만하기에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친척들도 교만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일까요?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오해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주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미쳤다는 표현은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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