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 20. 07:40

2021 1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치유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병에서 치유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행동과, 당신을 노리고 있는 적대자들의 행동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고 선한 일을 하심으로써 안식일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에만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행동과 말씀으로 선행에까지 이 원칙을 확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가 오그라든 사람만이 아니라, 영혼이 오그라든 사람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를 받았지만, 그것을 지켜보면서 반대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고집과 탐욕으로 마음이 오그라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의 손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각으로 사는 우리도 치유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며, 욕심을 부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며, 그분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유의 삶’으로 살려는 마음보다,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우리의 구세주를 본받아 다른 형제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용서하는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책에서 ‘신체 나이 자가 진단법’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 피부 탄력 검사.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손등 피부를 5초간 잡아당겼다가 놓습니다. 원상태로 복구되는데 1~2초는 2~30대, 3~5초는 4~50대, 10초 이상은 6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순발력 검사. 엄지와 중지를 약 10cm 벌립니다. 다른 사람이 30cm 자를 위에서 아래로 예고 없이 떨어뜨렸을 때 잡습니다.

세 번째, 정적 균형 검사. 신체의 전반적인 신경 근육 기능을 파악하는 검사입니다. 두 눈을 감고 오른발로 섭니다. 오른발 무릎을 45도 구부린 채 왼발을 지면에서 15cm 높이로 듭니다. 두 손은 허리에 댑니다. 이 자세가 무너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합니다. 25초 이상이면 2~30대, 10~24초면 4~50대, 5초 이하이면 6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대로 따라 해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거든요(물론 결과는 제 나이처럼 50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젊게 나오게 하려고 힘을 쓰는 제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옵니다. 어차피 50대인데, 또 젊게 나왔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신경을 참 많이 씁니다. 그런데 정작 신경을 써야 할 대상은 하느님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체적으로 젊어 보이는 것보다 마음의 성숙이 먼저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헐뜯는 자들의 의도는 그분을 망신시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이 온전해지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 망신주기에게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를 안식일에 일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이를 안식일 법을 어긴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악한 생각이 반대자였던 헤로데 당원들과 마음을 맞추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선에 신경 쓰면서 생활하고 있었을까요? 오로지 사랑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라 로스코프).

격몽요결(擊蒙要訣)

조선 중기의 율곡 이이 선생은 평소 나쁜 습관에 대해 ‘격몽요결’이라는 책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1. 일하지 않고 놀 생각만 하는 것.
2. 할 일 없이 하루를 허비하는 것.
3.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
4.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헛된 말과 헛된 글을 쓰는 것.
5. 풍류를 핑계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
6. 돈만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
7.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
8. 절제하지 못하고 돈과 여색을 탐하는 것.

이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칼로 잘라내듯 습관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습관이 나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이 나의 모습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리더는 살려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전삼용신부-


마르코 복음은 제대로 보니 정말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병이 치유 받고 죄의 용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이에서 분란의 원인이 된 터라 아마 공동체의 리더의 자격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바오로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리더는 규율보다는 자비와 사랑이 앞서야 한다고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장발장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주교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리더로서의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이 나옵니다. 일단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는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지 않으냐?”라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사랑을 깔아 누르는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마음이 몹시 아프고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십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곧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안식일에 그렇게 자비를 베풀면 그들에게서 보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참사랑은 자신이 죽는 두려움도 넘어섭니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한다면 사랑을 베풀 수도 없고 그러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육체적 편안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세속-육신-마귀에 빠진 지도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사랑한다며 공동체를 이끌지만 결국 공동체를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많은 수가 수백, 수천억 원을 횡령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때 경제가 발전하고 모든 것이 나아진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배를 먼저 채우려는 리더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남미 나라들이 잘 살다가 그렇게 몰락한 이유도 자기 배나 불린 지도자들 때문이고 카다피와 같이 가족들이 배를 불리는 나라의 시민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들 때문에 가난한데도 여전히 그들을 또 뽑아준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할 줄 알아야 자녀가 배부를 수 있는 것은 진리입니다.

 

      남극을 탐험한 두 탐험가가 있습니다. 우선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입니다. 1911년 12월에 남극에 도착했지만, 그 뒤 9개월 동안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11월에 그의 일기장과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중략)..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스콧을 비롯한 7명의 대원은 모두 그렇게 사망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년 뒤 1914년 8월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도 27명의 동료와 함께 남극에 도착했지만 역시 조난을 하고 맙니다. 그들은 남극에서 무려 1년 7개월을 버티고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새클턴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원들을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고 팀을 하나로 만들어 갈라지지 않게 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난한 곳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합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섀클턴은 해냈고 또 3000m가 넘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넘는 등의 4개월간의 고생 끝에 조난 후 643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스콧 선장도 훌륭한 탐험가였지만 섀클턴은 동시에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자신의 팀을 하나로 만들 줄 알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차리는 지도자 앞에서는 공동체가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는 지도자의 피로 결속됩니다.

 

      피를 내어주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지도자가 있고 공동체의 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리더가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저출산이 자기 나라에 큰 위기가 될 줄을 알면서도 노인에게만 돈을 썼습니다. 노인 복지는 잘 되었을 수 있지만, 경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책을 편 이유는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노인 인구가 많으니 그들에게만 잘해주면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본은 정권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도 망해갑니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정당이 지금 피해를 보아도 결국 우리나라 미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살리려는 리더는 공동체를 죽일 것이고 자신을 죽일 줄 아는 리더만이 공동체를 살릴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일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175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심문하던 관원의 말입니다한국천주교회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준비하면서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말을 주제어로 삼았습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사제로서 1년 짧게 사셨지만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고목자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지상에서의 삶은 짧았지만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의 수호자가 되셨고사제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175년 전에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습니다성공명예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한국천주교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신이 천주교인요?”라는 말을 주제어로 삼은 것은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가난병고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할지라도 주님의 영광 위하여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2000년 전에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는 광야에서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요?” 세례자 요한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렇다면 당신은 엘리아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렇다면 당신은 예언자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끄를 자격도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도 합니다선생님을 예언자라고도 합니다선생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엘리야가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예언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례자 요한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나는 이제 천국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하나는 당신은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입니다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나는 천주교인답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환자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바리사이들은 정신과 마음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한 인간 존재로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똑같이 느끼셨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때로 감탄하셨고, 분노하셨으며, 슬퍼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허기를 느끼셨고, 잠을 주무셨고, 여행에 지쳐 주저앉기도 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고, 수난이 다가오자 근심에 휩싸이기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어두웠습니다. 잔뜩 노기를 띠고 계셨고, 동시에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분노와 슬픔의 이유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떼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바리사이들의 악행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에 앉아 있던 다른 모든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였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새 삶을 결심했습니다. 치유하시는 예수님를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치유 활동, 오랜 세월 고통 당했던 사람이 온전해지는 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언제 실언을 하는지? 언제 율법을 어기는지? 고발거리를 한건 건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코 복음 3장 4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길길이 뛸까봐 당신 말씀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가축을 구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파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말씀 앞에 바리사이들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른 치유 장소에서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환부를 만진다든지, 입김을 불어넣는다든지, 일으켜 세운다든지 손을 사용하시며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으로만 치유하십니다. 손대는 것 조차 노동이라 억지를 부릴지 모르니, 말씀으로만 치유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치유하시기 위해 사악한 바리사이들의 심기를 봐가면서 일을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 낮춤이요 극진한 사랑인가요? 

 

환자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바리사이들은 정신과 마음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환자의 오그라든 손은 성하여졌지만 바리사이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낫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마음이 오그라든 병

 

얼음 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 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반대에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을 지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지구력은 예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 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1,5).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쥔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쥔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신앙생활은 어떤 생활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이고,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의

종교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헤로데 당원들이

바리사이들의 모의에 가담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종교 질서에 바탕을 둔

유대인들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그 당시에 기득권층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마주친 장애자는

바리사이들이 의도적으로 데리고 온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고발하려고’ 라는 말은, 뜻으로는 ‘죽이려고’입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덫을 놓고서 그 덫에 예수님께서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는가, 무시하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라고

말한 자들은, 안식일을(율법을) 하느님보다 위에 둔 자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이든지 율법이든지 간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하나인(요한 10,30)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안식일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날, 즉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선행과 사랑은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더욱 특별하게, 더 많이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이 가르침은 넓은 뜻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개인의 신앙생활도 그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의 모습을 보면, 선행과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의 세력을 늘리고 재산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일만, 또 자기가 복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 생각은 안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철저하게 하는 생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이비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3)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일하셨을까? 좀 적당히 부드럽게,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방식으로 일하실 수는

없었는가? 꼭 그렇게, 굳이 안식일 문제로 부딪히셨어야 했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5,16-18ㄱ).”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니

나도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고,

그 어떤 이유로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단 한 순간도, 그 어떤 이유로도 멈추지 않고

우리를 끊임없이, 또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숨’과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의식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계속 숨을 쉽니다.

숨이 멎으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일부러 안식일에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자극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은 하나이고,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과 똑같이,

요일과 상관없이 일하셨고, 안식일에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을 중단해도 되는 날이나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언제나 어디서나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해도 되느냐?’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 (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시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손을 뻗어라.(마르 3, 5)

-한상우신부-


오그라든
그만큼
뻗어나가는
것이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오그라던
내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오그라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오그라든
내모습에서
주님을 만난다.

주님을 만나는
근원적 체험이
오그라든 삶을
바꾸어놓는다.

한 번도
오그라든
내 모습에
아파한 적이
없었다.

"손을 뻗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용기를 얻는다.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작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나의 현재
모습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오그라든
내모습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그라든
내모습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사랑은
존귀함과
소중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살아있는 삶을
느끼게 된다.

막혀있었던
오그라든
관계가 다시
열리는 것이다.

손을 뻗어야
삶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듯

손을 뻗어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순간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오그라든
내모습에
눈 감지 않는
것이다.

오그라든
내모습에
연민의 마음을
품는다.

부질없는 것들을
그동안 참으로
많이 부여잡고
살았다.

손을 펴고
주님께로
향한다.

가벼워진다.
자유로워진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드러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예수님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라도 어둠에 묶여 있는 이라면 예수님의 시선이 머물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곳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면 고발하려고 벼르는 무리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으시지요.

안식일은 생명을 증진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불편하고 아픈 사람 입장에서 안식일은 치유에 더욱 적합한 날이 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고착된 문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쯤 더 아프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아파보지 않았고 고통을 겪어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율법 수호가 별볼일 없는 사람의 안위보다 절박하기 때문일까요?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 3,5)

예수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참 아프고 슬프신 것이지요. 무엇보다 회당에 앉은 누구도 그 사람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선 슬프셨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 오히려 그 사람의 고통을 올가미로 악용하는 못된 마음이 아프셨을 겁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금지된 게 많은 안식일이라는 사실도, 당신을 노리는 음모의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으시지요. 안식일이라고 생명과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과 사랑은 안식일이나 평일이나 그치지 않고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닥칠 위험을 아시면서도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히브 7,16)

예수님의 존재가 율법을 초월하시니 그분의 사랑도 거침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히브 7,3) 멜키체덱처럼 예수님께 죽음이라는 "끝" 따위는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6)
 

여러 기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바리사이들이나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위험 인물로 보고 이미 죽이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즉 방식을 의논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네요. 안식일의 치유, 누군가에겐 회복과 치유의 기쁨을 주었지만, 누군가는 더 거칠고 깊은 악과 손을 잡는 날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 생명을 구하고 선을 이루는 일에는 시와 때의 구분이 없습니다. 사랑은 미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구호활동은 눈에 들어온 그 순간이 가장 적합한 때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긴급하고 절박한 요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내게 사랑을 받고 싶으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시는지 영육의 눈을 크게 뜨고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와 손을 맞잡고 싶은 누군가가 우리 주변에서 움츠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 우리 사랑을 기다리고 계시니 주저말고 사랑을 베풀면 좋겠지요. 시작도 끝도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니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사랑을 향해 성큼 나아갑시다. 예수님과 함께 용기있게 사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 

 -김찬선신부-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느끼셨던 두 가지 감정을 소개합니다.

분노와 슬픔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만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악함을 보고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신 것인데 어떻게 보면 반대되는 두 감정입니다.

 

분노는 정의에서 비롯된 감정이고,

슬픔은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며,

분노가 미움적인 감정이라면

슬픔은 자비적인 감정이지요.

 

분노는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감정입니다.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하거늘 인두겁을 하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감정입니다.

 

천인공노할 짓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하늘과 인간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이지요.

 

얼마 전 입양한 아이를 죽게 하였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를 키워봤던 엄마들이 공분公憤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천인공노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적인 감정과는 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분노이고,

하늘의 뜻과도 어긋나기에 하늘도 노하는 그런 분노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는 짓을 할 때

인간들은 개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분노하고

인간에게 그런 도리를 주신 하늘도 같이 분노하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께서 분노하신 것은 오늘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평화의 임금"이시며 "정의의 임금"이신 멜키체덱과 같은

우리의 대사제의 분노입니다.

 

사제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존재 곧 백성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인데 악인의 불의와 죄악에 대해

인간의 공분과 하늘의 분노를 잇는 존재가 사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의 분노는 개인의 분노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과 하늘의 분노를 모두 대표하는 천인공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악한 자들에 대해 슬픔도 느낍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감정도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이 가련하고 그래서 

그들을 보고 슬프신 것인데 이 또한 하늘의 슬픔입니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지만 그럴 수 없어 이를 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을 불쌍히 여겨는 그런 경지에 오른 분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그것도 하느님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미움과 분노 이상의 감정 곧

슬픔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을 지닐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고 오직 미움과 분노만 있을 때

우리는 악인을 그저 파괴해버리고만 싶지

그가 불쌍하다거나 그를 살리려거나 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정상인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대상으로 끔찍한 성범죄를 범하고 퇴소하는 사람이

자기 고장에 돌아오는 것은 물론 사회로 나오는 것조차 반대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죄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악인이 불쌍하고 악인의 죄를 안타까워 하며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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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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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쥔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쥔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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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느끼셨던 두 가지 감정을 소개합니다.

분노와 슬픔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만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악함을 보고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신 것인데 어떻게 보면 반대되는 두 감정입니다.

 

분노는 정의에서 비롯된 감정이고,

슬픔은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며,

분노가 미움적인 감정이라면

슬픔은 자비적인 감정이지요.

 

분노는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감정입니다.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하거늘 인두겁을 하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감정입니다.


천인공노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적인 감정과는 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분노이고,

하늘의 뜻과도 어긋나기에 하늘도 노하는 그런 분노이지요.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감정도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이 가련하고 그래서 

그들을 보고 슬프신 것인데 이 또한 하늘의 슬픔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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