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5-42)
They said to him, “Rabbi” -.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
“where are you staying?”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Jesus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It was about four in the afterno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무엘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엘리를 찾아갑니다. 엘리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온 사무엘을 보고 주님께서 부르심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주님께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10,17 참조)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할 때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기도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기도 뒤에 올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기도는, 들을 준비가 된 사무엘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는 시간이며, 그분과 내가 온전히 마주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서 인내해야 하는 순간에 많이 부딪힙니다. 좀 더 인내하지 못할 때 주님께 의지하면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찾을 것은 물건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으며,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깨어나는 데 필요한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안에서 무엇인가를 한참 찾다가 문득 무엇을 찾는지 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찾는 것은 물건이 아닌 예수님이었고, 그분께서 계신 것을 보고 함께 지내며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주님과 머무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
-키엣 대주교-
주님의 길도 이처럼 선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그분을 증언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제물인 예수님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이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따라오는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갈망과 진취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 분으로부터 어떤 약속도 듣지 못했지만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일이 있을 지 알수 없지만 자신들이 믿는 그분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자신들의 갈망이 이루어졌다는 기쁨에 그들은 친구들과 친척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전하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한과 안드레아를 예수님께 인도했고 요한과 안드레아는 시몬과 빌립을,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의해 시작된 기쁨은 마치 물이 흐르듯 이웃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 인도한 사람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주님의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
주님께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부르시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처음에는 천천히 조용하게 그러나 점점 강해집니다.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지향이 있어야 하며 가족의 기도와 맹서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께 자식을 바치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맹서가 있었고 안드레아와 요한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 예수님을 만났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사무엘은 대제사장으로부터 하느님께 인도되었으며,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응답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충실히 답한다면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 주님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응답과 순명할 때까지 점점 더 강하게 그리고 더욱 더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3번이나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요한을 당신이 계신 곳으로 부른 것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과 당신과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일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삶, 주님과 하나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교리나 주장이 아니라 단지 주님,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론적인 학문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삶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비록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영적인 친밀함 속에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 사무엘은 그의 생애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저녁을 보낸 안드레아와 요한 역시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했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서의 참 행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그 이상의 헛된 꿈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증거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을 증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다시 형 시몬 베드로를 그분께 데려갔으며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고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초대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는 순간과 성체 성사안에서 그리고 복음안에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는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빚을 갚듯 미사에 참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진실되이 당신의 삶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길은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얼마나 살았습니까?
주님을 맞이하였습니까?
지금 어느 만큼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주님께 다가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처음 그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두 손을 활짝 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이상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 우리가 누릴 참 행복입니다. 아멘

1.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까?
2.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3.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주님께 나의 진실된 마음을 이야기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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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고쳐 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은 이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이지만, 이 말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고쳐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세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고쳐지길 바라는 그 사람의 변화를 간절히 원한다면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에 그 생각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고쳐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고쳐졌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반드시 “나를 따라라.”라고 구체적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자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그들이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와서 보아라.”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와서 보아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주님의 뜻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직접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셔야 따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 곁으로 가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젖어서 세속적으로 살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보면,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5.19 참조).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1코린 6,20 참조). 그러나 너무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생각, 변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에 우리는 주님께 제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곁으로 우리가 먼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고쳐 쓸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자기 자신의 방향으로 1등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 방향을 잘 찾게 될 때 행복할 수 있겠지요.
둘째, 행복한 사람은 결점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점보다 칭찬에 주목합니다.
셋째, 감사와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크고 넓은 정류장은 감사와 용서의 마음입니다.
넷째,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준다는 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사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의 행복 지수가 훨씬 더 높다고 하지요. 결국 남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향해 나아가면 어떨까요?

왜 그리스도를 만나야 사랑이 가능해지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두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짧은 복음 안에 요한의 구원관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선 요한에게는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인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교회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인도자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며 그리스도께로 안내해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되셔야 하는 구세주를 상징합니다. 요한에게 죄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 혹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안드레아가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계명을 완성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킴과 복음을 전함은 숫자 ‘10’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시간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시간으로 ‘열 시’를 ‘오후 네 시’로 옮긴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께 성령을 받음으로써만 완성됩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에게 복음을 전해 받고 시몬에서 케파로 이름이 바뀝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도 ‘1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렇듯 이제 형제들에게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모험’인데, 나의 생존이 걱정된다면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불 밖은 위험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도 두려움에 싸이면 자기 안으로 숨어듭니다. 그러나 밖의 멋진 세상을 구경도 못 하고, 사랑도 못 하며 이불 속에서 불안해하며 살다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그렇게 살기 싫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망률 1위 스포츠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혹시 안전장치(로프)를 하지 않고 맨몸으로 암벽을 등반하는 스포츠인 프리솔로(클라이밍)을 아십니까? 유튜브에 보면 이런 영상들이 여럿 올라와 있습니다.
로프에 몸을 의지하는 것도 끔찍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맨몸으로 작은 틈, 작은 돌기를 찾아서, 거기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초크가루를 묻힌 손가락 끝으로 암벽에 매달리며, 오르는 클라이밍 방법입니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추락할 수 있기에 아주 조금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암벽 곳곳에는 이들을 절벽에서 추락시킬 많은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절벽에서 돌출되어 나온 작은 암석 조각, 손톱만 한 크기의 움푹 들어간 홈 등, 중요한 이 홀드들이 암벽등반가들의 몸무게를 지탱해 줄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절벽 오르기를 할 턱에는 모래와 자갈들이 있어서 손을 미끄러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날씨도 매우 중요합니다. 산악지형에서 돌풍이라도 불면 손가락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 흔들릴 수 있으며, 소나기라도 지나가면, 암벽이 미끄럽게 됩니다. 물기는 손가락의 땀을 제거하고,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초크(하얀가루)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바위에 손가락을 베이기라도 하면, 절벽 등반을 중지하고, 꼼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2019년 오스카상(장평 다큐멘타리 부문)을 수상했던 프리솔로 등반가 ‘알렉스 호놀드’의 엘카피탄 등반 과정을 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그는 23살 나이에 300m가 넘는 문라이트 버트레스 암벽과 롯데타워보다 높은 기암절벽 하프돔을 프리솔로로 오르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6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유명한 914미터 절벽 엘캐피탄을 도전합니다. 안전장치를 하고도 사고가 자주 나는 악명 높으면서도 최상 등급의 난이도를 넘어서는 오직 손가락 첫 마디만 이용해서 올라야 하는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 하나 미끄러지면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그 시간 동안 호놀드는 전혀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등정했다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만 후들후들합니다.
어떻게 죽음의 문턱에서 손가락 몇 개로 버티고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에겐 안전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떨어질 수 없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한순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려 9년 동안 준비를 하였습니다. 시도하기로 하고는 무려 50차례나 로프 등정을 하며, 루트에 존재하는 홀드들의 위치와 촉감 등을 세세히 살피며 기록하고, 또 그것들을 암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홀드에서 다음 홀드로 이동하기 위한 손동작과 발동작을 시각화(이미지 트레이닝)하며 계속 그 상황을 상상하고 연습했습니다. 등반 하루 전날은 홀드와 턱 등, 손이 닿을 장소들에 있는 모래와 자갈들을 직접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도 프리솔로잉에 대해 큰 공포와 두려움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번 등정할 때마다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프리솔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인데, 오직 ‘반복과 연습’만이 그런 마음의 평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고, 미리 연습하고 모든 절차를 스스로 완벽하게 하는 것. 이것이 그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완벽하게 성취해내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어떤 여자 청년은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하면 그들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떠나가려 하면 불안하고 잡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소유욕입니다. 소유욕은 생존 욕구입니다. 이렇게 생존 욕구를 이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놓치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만 쫓아다니게 만듭니다. 그러다 자신 이불에서 나오지 않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과 머물고자 했던 것은 이런 자신 안에 갇혀있는 그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잃는 두려움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생존 욕구는 그리스도와 머물 때 해결됩니다. 그분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그런 믿음을 갖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호놀드가 로프에 의지해 수없이 연습했기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와 머무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물 줄 알 때 사랑의 계명이 완성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머물다 보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분 안에서는 수없이 실패하고 떨어져도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서만 참 사랑이 가능한 이

-조재형신부-
서양의 철학자 중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제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세상은 동굴 밖이라고 합니다. 동굴에 갇혀있는 사람은 동굴을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굴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굴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고, 아름다운 꽃과 싱그러운 바람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호수와 바다가 있고,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 있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새들이 노래하고, 시냇물이 흘러간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동굴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밖에서 온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서 심판한다고 합니다. 안전한 동굴이 있는데 위험한 세상으로 나오도록 현혹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호접몽(胡蝶夢)’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하늘을 높이 날았습니다. 그런데 깨어보니 침상이었습니다. 장자는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지금 꿈속에서 장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애벌레들에게 ‘너희는 곧 나처럼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거야.’라고 말하면 애벌레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할 겁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애벌레에게 하늘은 어쩌면 위험한 곳일 수 있습니다. 날개의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벌레는 고치가 되고 나면 결국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진화의 과정이고,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작은 나뭇가지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날개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서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세상을 말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장자처럼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기예보처럼 날씨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동굴 속에 갇혀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나비가 된다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되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로 부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능력, 힘, 나이, 재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부도, 세리도, 창녀도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으면 기름부름 받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았던 엘리사벳도 하느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였습니다. 나이가 어렸던 마리아도 하느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불가에서 말하는 ‘선문답(禪問答)’과 같습니다. 세상이라는 동굴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굴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제 시몬은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무엇을 찾느냐?”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매일 매 순간, 모든 사건과 만남 앞에서 아멘! Yes! Fiat! 이라고 외치는 것,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모습을 발견한 세례자 요한은 감격과 감사로 가득찬 떨리는 목소리로 제자들을 향해 크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36절)
세례자 요한의 외침 후에, 두 제자는 스승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한 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세례자 요한이 던진 증언의 진의(眞意)는 이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그토록 고대하던 때가 되었다. 나와 너희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이제 나를 떠날 때가 왔다. 나를 넘어설 때가 왔다. 나보다 훨씬 더 크신 분, 저분을 따라가거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례자 요한의 철저한 겸손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교육시킨 제자들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평생 옆에 두고 스승·제자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막상 제자들을 떠나보내려니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쿨하게 제자들을 떠나가게 도와줍니다.
이토록 놀라은 겸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의 겸손은 오랜 세월 광야에서 머무르면서 내공을 닦은 데서 온 겸손입니다. 그의 겸손은 철저한 청빈 생활과,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려는 기도의 삶에서 온 겸손입니다.
참으로 추하고 비참한 것이 물러날 때를 모르는 것입니다. 물러날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센스있고 깔끔하게 물러납니다. 공들여 닦아놓은 지역구도, 열렬한 추종자들도, 자금도, 세력도 다 내려놓고 혈혈단신 홀로 떠나갑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허전하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100% 완수했다는 데서 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다보면 나 자신을 커지게 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형제들을 작게 만드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나 자신을 작아지게 함으로 인해 예수님과 형제들을 커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참된 기도자였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된 기도는 세례자 요한처럼 수시로 주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나아갈 길은 어느 길입니까? 기도 끝에 목적지를 선택했다면 열심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길을 걸어가다보면 당연이 기력이나 에너지가 소진되겠지요. 그럼 또 다시 주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 안에서 매일 매 순간, 모든 사건과 사람들, 특히 내게 호의적이지 사건과 사람들과의 만남 앞에서도 아멘! Yes! Fiat! 이라고 외치는 것, 또한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와서 보아라
-이영근신부-
연중 2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그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말씀의 ‘들음’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8)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응답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데 있음을 노래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 40,8)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지체”(1코린 6,15)로 삼으시고 “성전”(1코린 6,19)으로 삼으시니, 그에 합당하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로 안내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개의 동사, 곧 일곱 가지 행동을 요청합니다. 곧 ‘듣다.’ ‘따라 가다’, ‘함께 가다’, ‘보다’, ‘함께 묵다’, ‘말하다(선포하다)’, ‘그분께 데려가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따라 갔습니다.”(요한 1,37). 여기서 제자가 가는 두 가지를 길을 말해줍니다. 곧 “듣다”와 “따라가다”라는 동사는, 제자 되는 길이 단지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넘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하며,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진정 찾아야 할 것을 무엇이며, 진정 향해야 할 곳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묶으십니까?”(요한 1,38)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분이 “묶으신 곳”이라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당신 인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 체험을 직접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원하는 그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여기서, 제자들이 가는 길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그분과 “함께 가”는 일, 그분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를 받아 함께 가는 일이요, 그곳을 “보는” 일,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일이요, 그분과 “함께 묵는” 일, 그분을 체험하여 사랑으로 흠뻑 젖는 일입니다.
그러니, “와서 보아라.”(요한 1,3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으로 걸어라’, ‘이렇게 걸어라’라는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체험을 통하여 배우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라는 히브리어(탈미딤)와 희랍어(마테테스)의 뜻은 ‘배움에 헌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범을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종이 되어 섬기고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인격적 유대로 전인격적인 변형을 이루어 갑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스승과의 인격적 관계는 친아버지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랍비가 다 같이 인질로 잡혀가면, 제자는 랍비의 몸값을 먼저 지불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먼저 스승의 짐을 덜어드린 후 아버지의 짐을 거들어야 한다.” 그래서 엘리사가 스승과 사별할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2열왕 2,12)라고 부르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결국,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나 스승에 대한 정보적인 접근이 아니라, 교리적인 진리를 배우고 신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따라 사는, 스승을 닮아가는 진정한 변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과 함께 묶은 그들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요한 1,42 참조). 여기에서 제자들의 두 가지 사명이 드러납니다. 곧 그분을 ‘말하는’ 일,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이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태 28,19) 사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동행을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줍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동행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복된 길을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증언하여 선포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고,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무엇을 찾느냐?
-송영진신부-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5-39).”
이 이야기는, “우리는 구원받기를 갈망하면서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드디어 구세주를 만났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라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1)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저분이 바로 구세주이신 분이다.” 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입니다.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준 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시는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2)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라는 말은,
‘두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안 믿었음을 나타냅니다(요한 3,25-26).
‘증언’을 듣는다고 해서 들은 사람들이 모두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듣게 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그 두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간 일은,
요한을 버리고(배반하고) 예수님에게로 간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이 인도하는 대로 갔고, 그것은 요한 자신이 원했던 일입니다.>
3) “무엇을 찾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가 갈망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왜 나를 따라오느냐?” 같은
‘가벼운’ 질문을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이 왜 당신을 따라오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한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이 질문은 예리코의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질문과 비슷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이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으실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가 지금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겉으로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찾는 사람은,
그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의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과
제자들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는 반문은,
겉으로만 보면 ‘동문서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은 동문서답은 아니고,
“저희는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은,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함께 지내고 싶다는 말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한 말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그 믿음은 아직은 ‘머리’로만 믿는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삶’으로 믿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5)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두 사람의 청을 받아들이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정식으로 제자로 부르신 일은, 시일이 좀 지난 뒤에
호수에서 그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루카 5,1-11).>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을,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살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자신의 삶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0-42).”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안드레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요한 사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
그들이 그동안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다는 큰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글로 읽으면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실제로는 크게 기뻐하면서 외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안드레아는 형에게로 급하게 달려가서,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기쁜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부르심과 따름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핵심은 부르심과 따름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힘과 정성을 쏟아 찾고 있는 것이 그분의 뜻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복음: 요한 1,35-42: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주선하여 자기의 두 제자와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장면과(35-39절) 안드레아가 주선하여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40-42절)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공통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만남은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던 정확한 시간까지 기록하고 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39절).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자체가 생애의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복음을 기록하는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의 어린양은,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8)으로, '고통받는 하느님(야훼)의 종'(이사 53,7 참조)으로, 또 날마다 성전에서 어린양의 번제(탈출 29,38-46 참조)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 중에도 무한한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의 죄를 쳐 없애고 자신의 희생과 봉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당신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홀로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들과의 일치를 보여주셨다. 바로 이분을 세례자 요한은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르 1,7), 자기보다 '앞서신 분'(요한 1,30)이며,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면서 제자들을 그분께 보내 드린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간다. "'무엇을 찾느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38-39절). 예수께 대한 체험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남에게로 전해지게 된다.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는 전하고 싶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이 질문은 첫 번째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항구한 것임을 생각하고, 그 '따름'의 동기와 내용을 끊임없이 확인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항구한 따름의 태도를 보일 때, 그분의 신비가 우리를 무한히 초월하며, 그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나 그분에 대한 체험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오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만이 '우리를 완전한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참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더 그분 앞에 겸손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의 공간을 더욱 넓힐 수 있다. 이런 '추구'의 노력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를 새로이 확인해줄 것이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려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동기를 꾸짖으셨다(요한 6,26-27 참조). 즉 그들은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찾기보다는 기적을 통해 체험했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기보다 그리스도께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그분의 복음을 우리의 취향, 생각, 행동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질문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절).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그분과 친구가 되고 생활, 기쁨, 지식 등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즉, "선생님, 우리도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십시오. 또 당신이라는 인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십시오"(G. Segalla, S. Giovanni, Fossano 1972, p. 165 참조).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시며, 당신이 누구신지, 또 이미 그분과 함께 살아야 할 제자들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분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지'를 체험하라 하신다.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복음은 안드레아의 소개로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과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불림을 받은 자는 '전달하는'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삶의 의미로 체험하고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한 형제들의 '중재'로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부르심'은 결코 '고립된' 것이라든가 '고립시키는' 사건이 아니다. '부르심'은 공동체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시몬의 이름을 '바위'라는 뜻의 케파라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그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한다.(마태 16,18 참조) 그러니 우리가 불림을 받은 것도 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따른다.' 동사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37.38.40절). '따름'은 믿는 이가 자신의 안전한 상태, 자신의 계획, 자신의 생활 체계와 습관을 떠나 어디로 갈지는, 그리스도만이 아시는 그 길고도 모험적인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그렇게 아름답고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스럽지만 '추구'하려는 원의를 가지고 '응답'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강한 원의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극복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밀어준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한다. 즉 우리의 생활 형편이 어떻든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겸손하고도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는 우리의 몸도 주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로마 12,1 참조). 주님과 더 일치하는 삶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언제나 항구하게 따르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와서 보아라."(요한 1, 39)
-한상우신부-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만남이 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주님과
함께하는
이순간들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진실된
생명력이다.
다양한
사연들과
함께
주님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애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정체성은
함께 머무르는
머무름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다.
다시금
신앙이란
머무름의
진실된
관계임을
깨닫는다.
나는
어떠한지를
아프게
보게된다.
우리의
오늘또한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다.
함께하는
머무름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
자유이다.
우리안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머무르는 것이다.
머무름의
방식을
따른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링양이시다."(요한 1,36)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자기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의 신원을 알려주고, 그들이 그분께 가도록 길을 비켜줍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구원 역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요한은 잘 알고 있지요. 그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제자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어 세력을 과시하려는 헛된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시는 방식은 율법이나 교과서의 이론을 머리 속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를 존재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요한 1,41-42)
그날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과 함께 지낸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예수님을 알립니다. 이미 안드레아의 마음 안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 각인되었지요. 아마도 형 시몬과는 평소 메시아 도래와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날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하였기에 당장 말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께 데려갔을 겁니다.
예수님의 수석 제자이며 교회의 반석인 케파, 시몬 베드로의 부르심은 이처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타인의 '눈'과 '초대'와 '동행'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먼저 알아본다는 것은 존재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이미 그분을 체험했을 때 가능하지요. 지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분의 현존과 자취를 기억하는 이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어루만지는 주님의 터치를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사무엘 선지자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1사무 3,4)
주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네 차례에 걸쳐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가 부르는 줄 착각하고 자다 일어나 바로 엘리에게 달려가지요. 그것도 세 번이나 성실히! 이에 대해 성경 저자는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1사무 3,7)라고 그 까닭을 설명합니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신 줄을 알아차리고"(1사무 3,8)
이 일이 세 차례 반복되자 엘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성경 저편의 역사에서 엘리도 과거 어느 때인가 그처럼 부르심을 받았을 터이고, 또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지탱하면서 무수한 부르심의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도움으로 사무엘이 비로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8) 하고 주님께 합당히 응답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불륜을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1코린 6,13)
구약성경에서 불륜은 대체로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한 신랑이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주님께 축복받은, 혼인한 부부 간의 사랑 이외의 쾌락적 결합을 가리킵니다.
몸은 일시적인 욕정을 채우기 위해 활용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감각, 즉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영적 감각 모두를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열어놓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그의 존재 안에 새겨져 언제라도 주님을 알아듣는 바로미터가 되지요.
아울러 그는 자신이 알아들은 체험을 토대로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일어나는 갈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서 오는지, 왜 그런지를 함께 경청하고 숙고하여, 그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을 깨닫도록, 그리하여 하느님을 향하도록 길을 터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는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에 몸을 던져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는 몸뿐 아니라 마음, 영혼과 정신 모두 그분께 영광을 됩니다. 자신의 선하고 정결한 존재와 삶을 통해 영광을 드리고 또 그런 삶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도움으로써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길에는 부르심을 받는 이들과 조금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먼저 걸어간 이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나눠 주고, 새로이 부르심의 길에 들어서는 이들은 어린 사무엘처럼 겸손히 순종하며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이 모든 여정은 한 개인의 업적이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연중 첫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부르심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초세기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선인들의 앞선 체험과 고백, 증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음을 보게 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정표가 되어주고 안내표지가 되어 준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기꺼이 겸손을 다하여 우리가 만난 하느님, 우리가 듣고 맛보고 만지고 뜨겁게 사랑하는 하느님을 새로 발걸음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나눠주면 좋겠지요. 유구한 신앙 역사 안에서 저마다 단단한 연결 고리로 존재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
-김찬선신부-
연중 제2주일은 성소가 주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는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주제를 잡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사무엘이나 주님의 첫 제자들뿐이겠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는 귀하기에 부르시고
누구는 보잘것없는 자이기에 부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닐 거라는
저의 믿음 때문이고 오늘 사무엘기의 다음 언급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린 사무엘처럼 신앙적으로 어리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데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사는 것임에도 성소인 줄 모르는 채
살 수 있겠다는 성찰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도 생활이나 사제 생활은 성소라고 생각하지만
결혼 생활도 성소인 줄은 모르고 살 수 있고 그래서 성소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부들처럼 부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성소를 살지 않습니다.
수도원 처음 들어올 때는 분명히 성소가 있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지만
사는 동안 성소를 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은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들어왔는데
정작 수도원에서 들어와서는 성소 의식이 없이 형제들과 사는 것이고,
이는 마치 수도원 성소는 있는데 수도 생활 성소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프란치스코와 같은 성소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는 내가 선택한 형제이거나
관구장이 보내서 온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형제이며,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나도 부르시어 형제들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소를 산다면 형제가 내 맘에 드느니 마느니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왜 주님께서 이 형제를 내게 보내주신 뜻이 나에게는 무엇이고,
그에게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형제를 나에게 주시고, 나를 형제에게 주신 것은 서로에게로 향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여 같이 가라고 동반자와 도반으로 주신 겁니다.
왜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왜 굳이 공동생활을 합니까?
가까운 길, 쉬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편하고 좋지만
먼 길, 힘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같이 가야 하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러라고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구름 기둥과 모세가 있었듯이 따라가야 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소의 식별자요 스승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에게 엘리, 안드레아와 제자들에게 세례자 요한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리기에 나에게 어떤 성소가 있는지,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 알려줄 스승이 필요한 것이지요.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이 길을 알려준 분이라고 하며 이렇게 회고합니다.
"베푸시는 분이신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 우리가 받았고 또 날마다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 더욱
깊이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 성소입니다. 이 성소가 그토록 완전하고
위대한 것인 만큼 우리는 그분께 그만큼 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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