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예수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악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졌던 물건을 다시 만지기를 꺼립니다. 손을 통하여 바이러스가 옮겨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손 소독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 시대에 우리는 악수로 인사하며, 서로의 어려움을 손으로 보듬고 위로해 주었지만, 이제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악수를 청하면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코로나19로 잃어버린 것은 서로의 손을 물리적으로 잡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를 돕고 배려하던 마음의 손도 놓아 버려 세상이 더욱 각박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만나서 하던 많은 반가움의 행동들이 그리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열병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의 손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에도 손을 내밀어 이웃을 도울 수 있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도움을 주고, 우리의 두 손으로 남모르게 이웃을 돕는 행동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공포, 불신과 의심의 열을 가시게 하여, 하루빨리 건강한 사회를 되찾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른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도움과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 가운데 실행하는 일이며, 주님의 손을 잡고 신앙인으로 올바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약 5~6만 번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말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라는 말에서 오만은 숫자 5만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생각 중에서 약 95%는 어제 했던 생각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5%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 창조적인 생각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생각의 반복이냐가 중요해집니다. 무의미한 생각의 반복이라면 내 삶은 문제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의미 있는 생각의 반복이 될 때는 어제와 다른 멋진 모습으로 변화되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학창 시절 영어 단어 외울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계속 반복하면 외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 깊이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반대로 쓸데없는 생각도 내 머릿속 깊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반복되는 생각이라면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정적인 단어는 지우고, 긍정적인 단어로 채워야 합니다.
주님은 부정적 단어가 아니라, 긍정적 단어입니다. 또한 무의미한 생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의미 있는 생각을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꽉 잡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으십니다. 그래서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지요. 그때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셨고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들지요.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잡은 사람은, 즉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계속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힘을 내서 벌떡 일어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몬의 장모가 보여 준 시중드는 모습입니다.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내 머릿속에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모든 부정의 삶이 사라지고 기쁘고 행복한 긍정의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종합격투기 경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직전에 서로 눈을 노려보면서 심판의 이야기를 듣는데, 상대방을 마치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기의 해설자는 경기 전부터 신경전이 대단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경기는 아주 치열한 난타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 두 선수는 서로를 뜨겁게 포옹을 하더군요. 경기 전에 보여 주었던 눈싸움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경기 전과 경기 후의 모습이 다를까요?
격투기 선수는 링에서 마지막까지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흥분해서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선수가 처음 하려는 일은 상대방을 흥분시켜 평정과 통찰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평정과 통찰력을 잃지 않는 것이 승리의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그래서 평정과 통찰력을 잃어서 패배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의 특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초기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아마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열병을 치유해 주시자 부인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시중을 듭니다. 그녀에게 더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위를 빼앗아 간 분이 아니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멍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많은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질병도 치유해 주십니다. 특별히 마귀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그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마귀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분열’시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됩니다. 마귀는 이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공동체에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입니다. 모두 찾고 있다는 말은 이제 그 마을 공동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이슈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마음 안에서 모든 분열이 해소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제 됐다.”라고 하시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복음이 전해진 곳은 ‘모두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겨울이었습니다.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독일군, 스코틀랜드군, 프랑스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싸움에 지쳐가던 중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독일군 중 한 명인 슈프링크는 성악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본부 장교들의 성탄절 이브 축제를 위해 저택으로 불려갔습니다. 슈프링크는 그곳에서 아내를 만납니다. 같은 성악가 출신인 아내와 함께 장교들을 위해 성탄 노래를 불러줍니다. 하지만 슈프링크는 다시 참혹한 전쟁터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고생하는 데 자신만 호화로운 축배의 잔을 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터로 돌아온 슈프링크는 각 나라 군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성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술을 한 잔씩 건네며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스코틀랜드 진영에서는 백파이프로 연주되는 성탄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각 나라 군인들은 그 음악에 맞추어 각 나라말로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슈프링크는 참지 못하고 참호 위로 뛰어올라 그 음악에 맞추어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총을 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며 총부리를 겨누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것은 높은 사람들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념의 희생양들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세 진영의 장교들은 각자의 참호에서 나와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성탄 이브와 내일 성탄절은 총을 쏘지 말자고 합의합니다. 그리고 모든 군인은 함께 모여 성탄 성가를 부르고 미사에 참여합니다. 언어는 달랐지만, 모두가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면 충분했습니다. 각자가 주장하던 잘잘못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은 진영 사이에 있는 전우들의 시체를 서로 찾아 묻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탄절이 지나도 서로 총을 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각 나라의 장교들은 그들을 문책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미사를 해 준 사제도 문책을 당하였습니다. 사제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교의 말에 사제직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군인들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더 참혹한 전쟁터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으로 가면서도 성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는 실화이고 이 전쟁터에서 꽃핀 성탄의 기적은 여러 버전의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한 공동체가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는 말들을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그 옳고 그름이 해결되면 그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될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옳고 그름을 주장할 때 예수님은 필요 없는 공동체입니다. 반면 오직 평화와 일치만이 옳은 가치이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유가 악의 영향 때문임을 알 때 예수님께서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분명 독일군이 전쟁을 시작했으니 옳지 않고 그들을 방어하는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은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죽이는 전쟁은 그냥 모든 이들을 잘못된 삶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고자 하시는 것은 그 옳고 그름의 이면에 있는 평화입니다. 사랑이고 일치입니다. 이 일치는 이념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금지하셨을까요? 그것들이 하는 말이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깨닫게 만들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은 그리스도 앞에서 의미를 잃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평화이고 일치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고 악입니다. 이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때문에 일치를 이룬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념을 넘어서게 하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그분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본당, 우리 단체는 서로 옳고 그름으로 갈라지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 일치와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입니까? 옳고 그름을 넘어 서로 이해하고 오직 일치만을 가치로 삼는 공동체라면 예수님을 만난 공동체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니면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로 분열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의 특징은 그리스도 외에는 찾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옳고 그름의 싸움이 멈추고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일치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입니다.

-조재형신부-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잠을 자면 피곤하고, 찌뿌둥하게 됩니다. 미꾸라지는 진흙탕과 물속에서 지내지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고기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지만 사슴은 풀을 뜯으면서 맛있다고 합니다. 사람과 미꾸라지, 사람과 사슴은 사는 곳과 먹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영국 왕자의 초청으로 아프리카의 부족장이 영국으로 왔습니다.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데 부족장은 식탁에 놓인 물을 마셨습니다. 그 물은 손을 씻으라는 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부족장을 비웃었습니다. 예의를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자가 식탁의 물을 마셨습니다. 왕자는 식탁의 예절은 어겼지만 부족장과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기준과 예절은 문화와 사회의 질서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과 문화에 강요하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저의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기준과 잣대가 절대적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단식하며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졌던 ‘틀’에 세례자 요한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회당이 아닌 광야로 가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죄인들, 세리들, 창녀와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는 그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파격이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마시는 물을 같이 마셨다면 율법은 어겼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시고, 눈먼 이는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십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하십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팬데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텅 빈 성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요? 마스크 사용, 사회적 거리두기는 친교와 나눔의 신앙생활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그동안 교회라는 ‘틀’에 머물면서 우리만의 성을 쌓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어쩌면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는 중세의 흑사병을 겪으면서 르네상스를 만났고, 성모신심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산업혁명과 공산주의를 겪으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했습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을 디딤돌로 삼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 방향은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따로 시간을 내어 아버지 하느님과 친교의 시간을 나누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지상 생활 중에 풍성한 저녁 만찬과 향긋한 포도주도 살아가는 힘이었지만, 더 강력한 에너지 원이 있었으니 바로 기도였습니다.
물론 짧은 지상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매일 매일 하셔야 될 일은 태산같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공생활 기간 역시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밤낮 없이 언제나 상습 피로에 시달리셨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는 그런 바쁜 예수님 일상의 단면을 살짝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코 복음 1장 32~34절)
예수님께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고통 중에 있는 당신 백성을 향한 사목활동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따로 시간을 내어 아버지 하느님과 친교의 시간을 나누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 복음 1장 36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 속에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부자간의 대화 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주로 가장 정신이 맑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시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기도란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 즉 하느님과의 일치는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기도 자체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전 생애는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계획, 사명, 기적, 순명, 고통, 십자가 등 모든 것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분 관계 안에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각,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혹은 한 밤중에 혼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단둘이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고 일하시는 사목 활동 속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순간 순간 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깊이 몰입하셨습니다. 예수님 생애 안에서 모든 중요한 결정은 깊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계속해서 쉬지 않고 순간 순간 하느님과의 깊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전락해버리기 쉽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소홀한 기도생활에 대한 변명으로 ‘열심히 사는 게 기도지!’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 특히 그분의 기도 생활을 바라본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님처럼 열심한 삶 중간 중간에 아버지을 위한 시간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나와 주님, 단둘만의 시간을 배려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는 구절입니다. 곧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이는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고요함이 있는 곳
-반영억신부-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외딴곳에서 빈말을 되풀이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골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은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곳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송영진신부-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29-34).”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일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7).”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을 겉으로만 보면,
의사가 병자를 치료하는 일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깊은 뜻이 들어 있는 일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고통 속에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인간들의 고통을 당신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물론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십자가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인간을 치유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는 ‘힘’을
인간들에게 주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어떤 병에 걸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단순히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주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 쪽에서 생각하면, 신앙생활의 목적은 몸의 건강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 병의 치료를 간청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병의 치료만 간청하고, 병이 나으면 만족하면서 그것으로 그친다면,
작은 것만 얻고 가장 큰 것은 놓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목적지를 보지 못하고 중간 경유지에서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3)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당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들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복음 선포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병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기쁨’을 얻은 일은
‘기쁜 소식’을 통해서 ‘기쁨’을 얻은 일과 ‘같은 일’입니다.
(치유의 기쁨을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람들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전해 준 일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즉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갖가지 질병을 앓는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은
‘작은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들’입니다.
(질병 때문에 허약해져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중병이나 불치병에 걸려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여기서 ‘병’은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넓은 뜻에서 ‘영혼의 병(죄)’도 포함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이곳에서’(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즉 이곳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냅니다.
<병자 치유 자체가 복음 선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하셨습니다(루카 5,17).>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은 안 듣고 몸의 치유만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몸의 치유’로만 만족했습니다.)
그렇더라도 꼭 그렇게 돌아다니셔야 했는가?
그냥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병자 치유는 ‘오는’ 사람들에게 해 주는 일이지만,
복음은 ‘가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말씀을(복음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에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르 6,34).>
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독점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마르 16,15).
(복음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에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독점될 수 없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고, 모든 사람의 구세주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을 독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다니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조욱현신부-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 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 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아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 38)
-한상우신부-
우리를
존중하시고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주님께서는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소명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주님에게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소명은
순명이다.
소명이
무르익으면
복음이 된다.
소명은
현존이다.
소명은
받아들임의
신뢰이다.
소명의 위기는
믿음의 위기다.
소명이
쓰러지면
기쁨도
사그라든다.
소명은
소통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소명에
참여하는
우리들이다.
소명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줄
뿐이다.
예수님의
소명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된 관계에서
출발하였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힘 있고
가장 분명한
우리들의
소명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소명은
우리의 삶을
되찾아준다.
존중이
빠져버린
소명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하느님의
일은
존중이다.
소명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믿는다.
다시 부르심의
첫마음으로
돌아갈 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를 베푸십니다. 그동안 병고와 마귀에 시달려 고통을 겪던 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복되고 온전해지게 됩니다. 병자와 지인들 모두 여느 주술사나 치료사들의 일시적인 치료와는 다름을 느낍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악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을 지닌 자를 파멸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괴롭히는 병고와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는 건, 그분이 양들의 생명에 당신 죽음을 거셨기 때문이지요. 죽음으로 양들을 위협하는 악에게 철퇴를 가하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은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순명에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피곤하셨을 법도 한데 예수님은 "새벽 캄캄할 때 외딴곳"에서 아버지 안에 머무르십니다. 기도는 예수님 활동의 원동력입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이 그분을 움직이지요. 죽음까지도 순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기적을 본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나섭니다. 그분이 곁에 계시면 세상 걱정이 다 사라질 거라 여겼을 겁니다. 인간이 느끼는 불안 중에 병과 마귀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비중은 매우 크니까요.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제자 일행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 역시 상당히 고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스승이 일으키신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기에도 놀라웠습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행보가 이제부터 활발히 전개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는 제자들의 말에 전혀 동요하시지 않고, 담담히 당신의 소명을 밝히십니다. 인기나 명예에 영합해 둥지를 틀고 주저앉는 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지요.
복음은 널리 전해져서 세상 구석구석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명 앞에서 누구도, 어느 민족이나 국가나 인종이나 신분이나 제도도, 예수님을 독점할 수 없지요. 예수님은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 악의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는 마음에서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아버지와의 사랑을 통해 형성되고 견고해지지요. 죽음을 각오한 이에게 불가능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병고와 완고함, 나약함을 치유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기도하며 우리를 어루만지시니, 우리도 기도 안에서 기다리며 의탁해야겠지요.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는 그분 곁에서 함께 기도하고, 그분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내리시길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영성생활
-김찬선신부-
어제와 오늘의 복음은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영적 육적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일찍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다음
다른 곳으로 옮겨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어느 한날 얘기가 아니라 주님의 일상이었지요.
그런데 이것은 주님의 일상일 뿐 아니라 주님의 일생이었지요.
옛날에 이미자씨가 부른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가 있었는데
여자의 아주 고달픈 일생을 노래한 매우 구슬픈 노래였지요.
일생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 많은데
그래도 여자이기에 말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도
혼자 견뎌야 하는 것이 전부라면 그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옛날 여자들 특히 옛날 엄마들은 정말 이렇게 사셨습니다.
저도 가끔 저의 어머니가 어떠셨는지를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집안일과 농삿일을 다하시면서 애까지 키우고,
옷도 손수 만들어 입히고, 바느질에다 빨래도 세탁기 없이 하시고,
콩나물 키우고, 두부 만들고, 메주 만들어 간장 된장 담그고,
명절이면 엿이니 술이니 식해니 갖가지 명절 음식을 만드셨지요.
그뿐입니까?
시집살이에다 남편이 제 구실 못하거나 폭력적이면 살얼음판 걷듯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고 가정을 꾸려가야 했는데 정말 어떻게
이 일생을 살아냈는지 남자인 저와 지금의 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이 힘은 운명에 대한 순명의 정신입니다.
그 당시에는 다 그래야 되는 줄 생각하며 살았기에
순명의 정신이 시대 정신처럼 대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지요.
이 순명의 정신은 위계적인 사회에서 여자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 가혹하게 요구되었던 것이고
이런 여자의 운명에 옛날 어머니들은 순종하였던 거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머니들이 그 모진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 그 고생을 견디게 한 더 큰 힘은 윗 사람에 대한
순종 정신보다 아랫 사람 곧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내리 사랑입니다.
그런데 순종과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감당하겠다는 정신,
그렇습니다. 어쩔수없이가 아니라 스스로 이런 정신으로 살겠다는 것이
바로 영성생활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삶입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칸 영성을 산다는 것은 프란치스칸 정신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이요, 정신없이 살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살겠다는 거지요.
주님의 일상과 일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잘알고 계셨고,
그 이유와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셨습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먼 길을 오신 이유와 목적은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이고
그 같아진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제 얘기했듯이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도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능력으로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구원하려 하셨으며
그래서 저 위에 높이 계시지 않고 이 땅에까지 내려오시고 같아지셨지요.
그리고 위에서 여기까지 오신 분이기에 나자렛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붙잡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아무튼 영성생활이란 주님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사는 삶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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