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마르2,18-22)
As long as they have the bridegroom
with them they cannot fast.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en cloth
on an old cloak.
If he does, its fullness pulls away,
the new from the old, and the tear gets wor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인가 쇄신하려 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꼭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옛것을 버리기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옛것을 알아 새롭게 하려는 용기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두려움이 있다면 어쩌면 새롭게 살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낡고 초라하며, 고집스러운 생각과 편견 등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을 망쳐 버리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모습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 곧 당신의 삶에 초대해 주셨고,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한결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오랜만에 후배 신부를 어느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후배 신부의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신부! 살이 많이 쪘네?”
워낙 왜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신부인데, 살진 모습이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말에 기분이 안 좋았나 봅니다.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살 뺄 거예요.”
실수한 것 같아서, 얼른 “아니야! 건강해 보이고 보기 좋아서 이렇게 말한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 신부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쪘다는 것을 하나의 욕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게으르고 자기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의 생각이 이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상대의 힘을 빼는 말이 아닌, 상대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말도 이런데, 주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 역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와 달리 단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만 보여 주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이런 모습만 기억하면서 먹고 마시는 데에만 중점을 둬야 할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함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먹는 것을 삼가는 것이 단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는 단식을 우리가 받아들였으면 하셨습니다. 즉, 음식을 삼가는 것처럼 악습을 멀리하는 것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악습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기존의 단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단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은 새 천 조각,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옛 옷과 옛 부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새 옷, 새 부대가 되어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단식의 의미였습니다. 먹는 것을 삼가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악습을 멀리하고 주님의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이 진짜 단식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사회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 친구들이 대학 다닐 때, 열심히 데모하면서 소위 운동권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진보적인 태도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이런 모습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위치가 높아지거나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개방적으로 살았으면서도, 자신의 자녀를 향해서 보수적인 모습을 멈추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편에 서고 있느냐입니다. 진리가 없는 방향성은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름을 틀렸다고 나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회개하지 못한다
-전삼용신부-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왠지 ‘공동체’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죄를 용서받는 장입니다. 그러나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죄의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규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를 ‘바리사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죄의 용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남의 집 땅에서 자라는 밀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율법 규율이 그 집단의 지배 원리인 바리사이 공동체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는데도 그들을 옹호해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율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는 참다운 안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이 그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그렇게 이루어진 안식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이십니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도덕성도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성의 발달은 규율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래의 지문을 읽고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살펴봅시다.
“하인츠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는 데 필요한 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한 약국의 약사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인즈는 약을 사러 갔지만 약사는 제조비의 대가로 원료값의 10배인 한 알에 200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인츠는 모든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빌렸지만 1000달러밖에 구하지 못해 약사한테 사정을 해봐도 약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츠는 절망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을 부수고 약을 훔쳤습니다.
이때 하인츠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유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법을 지켜야지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혹은 “돈을 안 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된 거죠.”라고 대답하면 어린이 정도의 도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혼나기 싫어서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율적 판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단 횡단하거나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신고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더 높은 단계는 법보다 상황과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단계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 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자비가 법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장발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19년을 복역했습니다.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주시합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자신이 당연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 하정우는 가슴 따듯한 사람으로 나오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친구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후임을 용서하지 못하고 후임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발장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남의 물건을 훔칩니다. 먹여주고 재워줘도 주교관에서 금 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만약 빵을 훔친 것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그것을 그냥 준 것이라 말합니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날 이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겉보기엔 남의 곡식을 훔쳐 먹고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함께라면 그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마 다시는 예수님께 그런 상황을 만들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공동체와 함께 다녔습니다(물론 그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 사가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르코가 바오로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더는 마르코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가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자신의 믿음이 교회 공동체 때문에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오로가 용서해 주어서 자신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코가 회개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누군가의 회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웠습니다. 눈을 치우지 못한 곳은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신발장에서 등산화를 꺼내서 신었습니다. 미끄러운 길도 걷기가 수월했습니다. 눈이 쌓인 곳도 쉽게 걸었습니다. 등산화는 방수가 되었고,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신발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거나, 강의를 할 때는 검은색 구두를 신습니다. 동네 산책을 할 때는 편한 운동화를 신습니다. 눈이 온 다음이나, 캠핑을 갈 때는 등산화를 신습니다. 물가에서는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슬리퍼를 신습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밭을 가는 데는 소보다 못합니다.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나무는 성문을 부수는 데는 용이하지만 구멍을 메우는 데는 작은 나무만 못합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엉이는 캄캄한 밤에도 벌레를 볼 수 있지만 낮에는 산도 보지 못합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발로 걷는 사람은 3가지 능력이 생겼습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도구는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었고, 사냥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도구를 이용하면서 문화와 예술이 생겼습니다. 뇌의 용량이 커졌습니다. 이성과 오성이 발전하면서 철학, 종교가 생겼습니다. 성대가 열리면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지식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발로 걸으면서 감수해야 할 어려움도 생겼습니다. 척추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리의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자녀의 출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골반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소화 기능이 약해졌고, 치질이 생기기도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고 극복하였습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직, 제도, 율법, 계명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희생, 헌신, 열정, 사랑, 나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갑을 억지로 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제도와 조직에 안주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떠날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낡은 제도와 조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씨앗은 쪼개져야 새 싹이 나듯이 우리는 늘 낡은 허물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2021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곧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오순도순 모여 사랑 가득 채운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사랑과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새 포도주의 신선함
-반영억신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만큼 새로워집니다.
단식을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몇 해 전 로마를 비롯한 남유럽에 혹한이 닥쳤을 때 로마의 성 갈리스도 성당을 노숙자 숙소를 사용하였습니다. 약 30여명의 노숙자들이 성당에서 따뜻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조치하고 자선단체가 제공하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청 소유의 승용차와 승합차를 이용하여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배려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성당은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이 살아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율법의 엄정함과 철두철미한 준수가 오래된 포도주라면 그것을 넘어 사랑이 숨 쉬게 하는 것이 새 포도주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새 포도주의 신선함을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옳은 것은 지키고, 옳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
-송영진신부-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 말씀을 해석할 때, 겉으로 보이는 ‘새’ 라는 말과 ‘헌’이라는 말에만 매여서,
또는 이 두 말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지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1-22).”
우리는 ‘새것’이든지 ‘헌것’이든지 간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서 선한 것은 보존하고 악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새것인가?, 헌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영원히’ 보존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마태 24,35).”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낡은 율법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계명들과
계명들에 들어 있는 근본정신은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수천 년 전에 내려주신 것입니다.
‘낡은 것’이라고 함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도 이천 여 년 전의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항상 “오늘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곧바로 버려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21).”
그 당시의 아테네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또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사도 17,16).
그 도시는 새로운 것을 즐겨 찾다가
온갖 이단 사상과 우상 숭배와 미신으로 가득 찬 도시가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사이비 종교들은 ‘새로운 이론’, ‘새로운 사상’이라는 탈을 쓰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그 ‘새롭다.’는 것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의 모습과 같습니다.
뒤의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 질문은, “안식일은 ‘좋은 일’(선한 일)을 하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단되고,
그래서 주일에도 주일미사 참례를 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평화방송에서 중계하는 미사를,
또는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미사를 ‘구경’하기만 하고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바이러스를 핑계대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했던, 즉 선행과 사랑 실천도 안 했던
유대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새 부대를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았다.”
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하는 미사가 중단되어서 미사 참례를 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많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도생활과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신심과 의지의 문제입니다.>
새로운 본당에 부임해서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바꾸려고 하면,
‘전통’이나 ‘관습’을 내세우면서 반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서 고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옳은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잘못된 틀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고치고 바꿀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고, 변화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 대해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 경우에,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편안할 텐데,
그 편안함에 안주하면 제자리에 정체된 신앙생활이 되어버리고,
그러다가 결국 후퇴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조욱현신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
-한상우신부-
새 포도주의
시작이다.
새 포도주는
새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은 우리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는 일이다.
마음이
시작점이며
마음이
모든 것의
기본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마음의
일이 가장
으뜸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야말로
새 부대가 필요한
마음의
사람들이다.
단식은
생명을
일깨워주고
마음을
일깨워준다.
단식은
주님과의
진심어린
마음의
소통이다.
마음의 소통은
맞아들임의
시작이다.
단식의 길은
주님을
맞아들이는
마음의 길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있고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원한다.
주님을 통해
우리 마음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다.
자아를 벗어나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하는 삶이
새 부대의 삶이다.
낡은 악습을
끊어버리듯
새롭게
변화되는 삶속에
새로운 기쁨이
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삶의 새로운
기쁨으로
초대하신다.
기쁨이 없는
삶은 변화를
꺼리는 삶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만든다.
그래서
오늘이 새롭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 주십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단식은 육신을 비워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수행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뉘우침과 통회, 간청의 표현으로 옷을 찢거나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거나 단식을 했습니다. 단식은 단순히 건강을 위해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식이요법을 넘어서, 자신의 기본 욕망을 제어하고 인내하면서 하느님께 바치는 일종의 보속 행위가 되기도 했지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곁에 두고 단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혼인 잔치는 기쁨과 축복의 장이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대사제는 ...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히브 5,1)
아론의 후예인 대사제는 자신이 지은 죄와 백성이 지은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축복을 얻기 위해 예식을 거행합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예물과 제물을 바쳐 정결하고 거룩한 백성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인간 대사제의 행위는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느끼실 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와는 달리, 지파의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경외심"에서 출발합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기꺼이 당신 것으로 하는 "순종"입니다.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 대사제들이 드리는 예물과 제물은, 많은 경우 백성들로 인해 하느님이 몹시 화가 나셨을 테고 우리가 그걸 풀어드려야 한다는, 징벌과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이 경우 삶에서 감사꺼리를 떠올리며 찬미와 기쁨의 제사를 바치기보다 죄와 어둠에 집착해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부작용이 크지요. 또 자칫 진정으로 통회하는 마음 없이 물질과 예식으로 때우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마음을 보시는 주님은 예언자를 통해 '이런 제물은 역겹다.'고까지 하셨지요.(이사 1,13 참조)
예수님의 제물은 당신 자신이셨고 제사는 사랑과 순종의 의탁이었지요.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신뢰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제사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단식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오랜 역사 동안 이스라엘이 충실히 지켜온 단식의 가치를 폄훼하시지 않으시지만, 단식이 어떤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새롭게 보자고 초대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 중 하나인 단식이 영혼이 빠진 형식적 율법 준수나, 엄벌에 처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 두려움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분 현존의 기쁨을 영육으로 실컷 누리다가, 그분을 빼앗기는 날, 사랑을 잃은 애끓는 비통과 슬픔의 표현으로 바치면 된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혼인잔치 안의 기쁨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뿌리에서 생성해 성장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움은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무엇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회복이고 우리 의식의 전환일 겁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죄의식이나 두려움보다 감사와 찬미에서 흘러나오길 그분은 원하십니다.
이미 용서 받은 죄에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주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내가 괜찮다는데!" 하고 등을 두드리시니, 어깨를 펴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우리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사랑에서 솟아나는 예물과 제물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신랑과 함께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새로운 가르침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이 주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주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의구심인지 궁금증인지 아무튼 의문이 생깁니다.
누가 옳은 건지.
왜 주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는 건지.
그래서 사람들은 마침내 주님께 와서 왜 단식치 않는지 질문을 던지는데
이것이 비교를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것도 비교 우위가 아니라 비교 열등의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분노하거나 움추려들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는 도무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단식이 그들의 단식과 비교하여 옳으니
또는 그르니 이런 식으로 답하기 보단 새로운 거라는 뜻으로
새 부대와 새 포도주 얘기를 꺼내시는 것 같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께 일관된 것은 사랑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전통이나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며 그래서
당연히 사랑이 단식보다 더 중요할 뿐 아니라
단식을 할지, 하지 말지 그 기준도 사랑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전과 다른 새로운 가르침이고 새 포도주라는 말씀입니다.
실로 우리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단식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지 않지만, 단식하는 사람.
그러므로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사랑하지 않지만 단식하는 사람보다
단식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우리는 사랑하지 않지만 단식하는 사람이 됨이 나을 것이고,
단식을 하되 사랑 때문에 단식하는 사람이 됨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마르2,18-22)
---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지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1-22).”
우리는 ‘새것’이든지 ‘헌것’이든지 간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서 선한 것은 보존하고 악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새것인가?, 헌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입니다.)
-송영진신부-
---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 하셨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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