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1. 22. 07:22

2021 1 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코 3,13-19)

 

 he appointed twelve to be with him;

and he called them apostles.

He wanted to send them out to preach,

and he gave them authority to drive out demo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사회 심리학 교수 폴 피프(Paul Piff)는 ‘모노폴리’를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모노폴리는 주사위를 던져 판 위를 이동하며 도시를 사고 건물을 짓는 보드게임입니다. 솔직히 이 게임을 잘 모르겠지만 설명을 들으니, 저 역시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브루마블’ 게임 같은 것 같습니다.


그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동전을 던져 소위 ‘금수저’ 참가자와 일반 참가자로 나누었습니다. 금수저 그룹은 일반 그룹보다 두 배에 달하는 자금을 받았고, 보드판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을 지날 때마다 받은 보너스도 두 배였습니다. 그리고 주사위도 두 배로 더 던져서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혜택도 주어졌습니다. 과연 어느 팀이 이겼을까요?

당연히 금수저 그룹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게임 후 승리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머리를 잘 써서.”, “특정한 부동산을 잘 구매했기 때문에” 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받은 특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히 받고,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받은 혜택은 당연하고, 좋은 결과가 일어난 것은 자신이 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쁜 결과를 얻게 될 때는 운이 없거나, 다른 누구 때문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부정적 생각과 긍정적 생각 때의 뇌 혈류량을 측정해보니, 긍정적 생각을 할 때의 뇌 혈류량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특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지금의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기에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 때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파견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아서 주님처럼 놀라운 표징을 세상에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남들보다 많이 공부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많은 봉헌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제자들은 교만하지 않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착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고, 순교의 길을 행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랑은 나이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기 때문이다(파스칼).


감사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데이비스 대학의 심리학자 로버트 에몬스는 192명의 학생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A 그룹은 기분 나쁜 일에, B 그룹은 감사한 일에, C 그룹은 일상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B 그룹의 행복도가 가장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 1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역시 B 그룹의 행복도가 제일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B 그룹은 질투를 느끼거나 신경질을 내는 경우가 줄었고, 좌절감을 겪는 일도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질투, 신경질, 좌절감 등... 우리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좌절을 헤쳐나갈 힘은 눈앞의 시련에 감사해 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훌륭한 리더는 조직체계를 만든다

-전삼용신부-


 마르코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란 첫째,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애는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가장 무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리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났을 때 짓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 수도회를 세운 것과 같고, 마더 데레사도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이어갈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리더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리더가 사라지면 금방 와해됩니다. 또 리더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치더라도 혼자 힘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끌 때 처음엔 혼자 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이 와서 모든 백성의 송사를 본인 혼자 다 처리하려 하지 말고 그 권한을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에 해당하는 리더를 뽑아 그들에게 맡기라고 충고합니다. 모세는 그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훨씬 편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사람은 한 조직에서 참모형이 있고 리더형이 있습니다. 참모형 리더는 참모로 있을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참모들은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세 사람이 합친 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반면 리더형 인간은 남 밑에서 일을 할 때도 리더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지도자가 되면 훨씬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예로 들자면 유비는 리더형 인간이고 제갈공명은 참모형 인간입니다. 유비가 만약 남의 밑에 있었다면 그는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조라는 엄청난 사람이 판치는 곳에서 한 나라의 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실력으로는 제갈공명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것에 비해 사람들을 일치시킬 능력이 부족했음을 알고 유비의 대를 이어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만약 유비와 제갈공명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삼국지의 이야기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야 많이 있겠지만,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사장실장인 시마 사토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손정의 사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무작정 나아갑니다. 그래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이 중간에 시마 사토시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스템화하여 전략을 짭니다.

 

      예를 들어 손 사장이 몽골에서 일본으로 전기를 끌어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시마 사토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고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대선 후보인 박근혜 측근, 문제인, 안철수까지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보스가 꿈을 꿀 때 그 꿈의 실행 계획을 짜주며 일반 직원들도 그 꿈이 황당무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손발이 잘 맞으면 못할 게 없지만, 참모 스타일이 지도자가 되고 보스 스타일이 참모가 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모도 되고 리더도 되어야겠지만, 리더가 되었을 때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온 예화를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자 네 명을 모으고, 일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고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이야기 끝.

 

      에드와 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뽑아 교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인의 힘만을 믿는다면 그건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 자신 밑에 있는 사람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교황님께서 성탄 미사를 봉헌하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백신은 부유한 나라의 국민에게만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공기를 모두가 공짜로 이용하듯이햇빛을 모두가 공짜로 받듯이바람을 모두가 공짜로 느끼듯이 백신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특히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무료로 백신을 맞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이것이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연못 속에는 붕어가 두 마리 살았습니다어느 날 붕어는 서로 싸우고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물은 더러워졌고결국 연못에는 한 마리의 붕어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우리는 지난 1년 분명히 보았습니다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 없었습니다바이러스는 국경도 필요 없었습니다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리 이동하였습니다우리 모두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백신은 공공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7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받아들이게 됩니다세례성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성체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사입니다견진성사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앙이 깊어져 열매를 맺는 성사입니다고백성사는 허물을 벗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치의 성사입니다병자성사는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성사입니다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성가정을 이루는 성사입니다신품성사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봉사하는 사제를 선발하는 성사입니다충실한 성사생활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강력한 백신입니다.

 

교구 성소국에서 일할 때입니다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였습니다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셨습니다십자가의 길제단감실성작성합제의와 같이 전례에 필요한 성물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의자컴퓨터세탁기운동기구와 같이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기숙사를 축성할 때 후원자들을 초대하였습니다기숙사 현관 입구에는 후원자들의 명단을 적은 동판을 만들었습니다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자비를 베푸는 사람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지금 슬퍼하는 사람온유한 사람마음이 깨끗한 사람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그리고 안드레아필립보바르톨로메오마태오토마스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타대오열혈당원 시몬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과 함께 지내며,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듯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써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 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 도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면서,

그 교회의 주춧돌로 삼기 위해서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1) 열두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뽑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특별한 ‘장점’과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뽑으셨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 사랑, 희망, 희생정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 열정 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뽑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열정(뜨거움)입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함’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미지근한 것은 찬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뜨겁지 않은 것은 모두 찬 것입니다.)

사도들은 대단히 열정적인(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그들의 죽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도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2) 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말하고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또 사도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고, 의도적으로 사도들을 깎아내리는 죄가 될 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사도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들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3) 사도들의 직업, 학력, 출신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러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업, 학력,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사도가 될 만한 자질만 보시고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좋은 예가 마태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자질만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고, 그것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집착은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4)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배반자 유다 대신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의 장면을 보면,

바로 그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열두 사도의 임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임무’입니다.

이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일도 복음 선포에 포함됩니다.)

 

5)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배반자가 되어서

사도단에서 탈락한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 뽑으셨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이 원래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사도로 뽑힐 때에는

분명히 뽑힐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탈락한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끝까지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모두 순교했는데,

그것도 그들 자신들이 선택한 일입니다.)

순교자가 되든지 배반자가 되든지 간에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이 각자 스스로 선택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배반자가 지옥에서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후회’와 ‘절망’일 것입니다.)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조욱현신부-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부르심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다.

따름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체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사람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다.

부족하고
약한 부분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참된 삶의
행복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게된다.

부르심과
따름은
하나이다.

따름이
사라지면
부르심도
생명을 잃는다.

부르심에
생명을
더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맞아들임의
살아있는
부르심이다.

날마다
십자가이고
날마다
부르심이다.

온 마음으로
온 삶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삶이
부르심의
가장 큰
의미이다.

부르심을 통해
드러나는
가장 좋은
사랑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자신이다.

부르심과
따름으로
성숙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을 보여 주십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온 때에, 그들과 맺은 계약과는 다르다."(히브 8,8-9)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예레 31,31-34 참조)을 인용하여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성조들과 계약을 맺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먼저 새 계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히브 8,10)

이번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에 새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존재 안에 각인시키시겠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 새삼스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존재 안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의 마음이 스며들었으니까요.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마르 3,16)

열둘은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야곱이라는 한 아버지의 열두 아들에게서 번성한 구약의 백성이, 저마다 다른 출생과 성장배경을 지닌 채로 예수님께 모여와 영적으로 형제자매를 이룬 새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확장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마르 3,13)

선택 기준은 에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예수님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열두 사도의 선정은 편애과 불공정일까요?

사실 제자됨이 세속적 영화나 명예, 재물과 번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뒤따르는 삶이니, 모르지 않고서야 마냥 부러워할 일도 아니겠지요. 안다면 오히려 부르실까 봐 외면하거나 줄행랑을 놓을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마르 3,14-15)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입니다. 당신과 함께함, 복음 선포, 치유와 구마의 권한 부여라 요약할 수 있지요. 기존의 종교 권력은 먼저 율법 지식을 머리에 넣어주고, 율법이 정한 예식을 익히도록 이끌겠지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함께함, 복음 선포, 구마와 치유 권한 부여라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는 방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공동생활에서 기도와 사랑을 배우고, 복음 선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체험하며, 구마와 치유 권한을 통해 연민과 자비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법이 돌판에서 하느님 모상인 인간 내면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히브 8,13)

하느님께서 구약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새로운 계약이 에수님을 통해 펼쳐집니다. 옛 것에 매여 죽은 문자와 씨름하던 만물이 비로소 새로운 숨을 들이키는 때입니다.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의 전환이라는 '비연속성'과,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는 '연속성'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새로운 법이 마음에 새겨진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시지요. 말씀이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글을 몰라도, 신분이 낮아도,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스러움과 부족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 곁에 두시고, 얕은 지혜와 아둔한 혀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초라한 연민이나마 치유와 위로의 도구로 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받은 우리의 소명이 금수저, 흙수저처럼 태생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영혼 깊이 새겨진 사랑의 흔적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제와 사도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원하시는 열둘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주제는

사제와 사도인데 틀림없이 어제 제 친구의 장례 미사를 다녀온 영향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라 하는데 그 계약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중매쟁이가 남남으로 살던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며칠 전에도 얘기했지만 사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또는 중매자입니다.

 

중개자와 중매자의 뜻이 비슷하지만 중매자가 서로 모르던 사람들

또는 알더라도 관계가 없던 사람들의 관계를 맺어주는 존재라면

중개자는 둘 사이에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조정해주는 자라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사제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자와 중매자인 존재인데

어제 장례를 치룬 제 친구는 이런 면에서 훌륭한 사제였습니다.

 

우리가 사제란 제사인 미사를 잘 봉헌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제 친구는 미사도 열심히 봉헌한 친구였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와 중매자라는 면에서 훌륭했던 친구입니다.

 

사제로 38년을 살면서 교구 사제들에게는 사제 생활의 꽃이라는 하는

본당 신부는 3년밖에 하지 않았지만 어디서건 또 누구건 어렵지 않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기 곁을 내준 사제였고,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알도록, 또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해준 친구였지요.

 

이 친구는 이렇게 자기가 살고싶은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야속하게도 이 친구에게 병을 주셔서 마지막 7년을 병중에서 살게 하셨지만

병 중에도 유쾌하게 살면서 주변에 걱정이 아니라 기쁨을 주며 살았습니다.

 

죽기 한 달 전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이 친구는 그 병원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방문하여 기도해주고 자기가 일생 취미로 찍은 야생화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함으로써 다른 환우들에게 밝음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생을 마친 이 친구를 어제 보내면서 저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고,

오히려 저는 이 친구가 자랑스럽고 부러웠습니다.

 

건강한 저는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기에 큰 고통을 통과한 사람은 누구건

고통을 겪은 것만으로도 존경하는 편인데 이 친구는 고통을 잘 통과하였고,

자기를 이 세상에 부르시고, 사제로 부르시고, 고통에로 부르신 주님께

끝까지 순명하고 갔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고 부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세우십니다.

사도는 중개자 또는 중매자인 사제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둘을 세웠다고 표현하는데

세웠다는 것의 뜻이 바로 기둥을 세웠다는 뜻이고,

이스라엘 집안의 열두 기둥으로 세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셨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열둘이 모두 기둥감이 못되는 자들 같습니다.

 

그러니 이는 주님께서 훌륭한 사람을 뽑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3년을 옆에 끼고 또 데리고 다니시며 제자와 사도로 키우시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키우시고 마침내는

성령으로 키우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사제와 사도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이 부르심을 사는 신앙인들이 되기로 결심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