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Margaret K 2021. 1. 6. 07:40

2021 1 6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나다두려워하지 마라.

(마르코 6,45-52)


When they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thought it was a ghost and cried out.
They had all seen him and were terrified.
But at once he spoke with them,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우리가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신 주님을 잊고 사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연약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음이 연약한 것은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게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신 주님을 제자들은 그새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제자들의 마음에도, 그리고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도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떨쳐 냅니다. 우리의 주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또다시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곁을 떠나 현실의 여정을 걸어간다면, 곧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두려움과 불안함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깨달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용기이며, 사랑의 행동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정신없이 일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일이 없으면 실패자로 생각하고,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것 같습니다. 쉬지 못하고 일에 대한 압박으로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강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도 ‘쉼’을 말하고 있습니다. 명상, 영상보기, 잡념, 목욕, 산책, 아무것도 안 하기, 음악 듣기, 혼자 있기, 자연에서 회복하기, 책 읽기를 쉼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쉼’을 매우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쉼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쉬는 것도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더 피곤함을 느낍니다.

일과 쉼이 조화를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일이 내 생활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게 될까요? 어떤 것이 쉼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일만 하는 사람이 주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주님 안에서 쉬면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일에 대한 또 다른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위에서 맞바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맞바람을 뚫고서 건너편 벳사이다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 중 많은 이가 어부 출신인데도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 없이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십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없기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분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겁에 질려 소리부터 지릅니다.

이 부분도 우리에게 큰 묵상 거리를 줍니다. 어렵고 힘든 삶을 경험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때 주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냥 제자들처럼 소리만 질렀던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향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진정한 쉼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세상의 일에서 주는 걸림돌에 좌절하지 않게 되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편안한 쉼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반복된 생활이다. 좋은 일을 반복하면 좋은 인생을, 나쁜 일을 반복하면 불행한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W.NL.영안).

바다의 색깔

우울한 마음이 생기거나, 생각할 것이 많아지면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성당이라고요? 성당에 갈 때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나는 곳은 ‘바다’입니다.

성소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었던 고등학교 때, 수업도 듣지 않고 몰래 도망쳤습니다. 저의 미래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지 않으면 무슨 사고를 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해 바다가 보이는 인천의 ‘월미도’에 갔습니다.

바다만 한 시간 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는 그냥 푸른색 한 가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햇빛에 의해서 계속 색깔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한 부분인 이 바다도 여러 색깔로 바뀌는 것처럼, 내 삶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만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삶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들면 바다로 갑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강화도에 살고 있어서 더 행복하네요.

 나로 산다는 것= 지옥에 산다는 것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시기 위해 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호수 위에서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유튜브 동영상 중의 하나는 어떤 교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강의였습니다. 조회수가 거의 150만이 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우려했던 대로였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존엄성을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하라’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나, 책에 쓰인 이론들, 혹은 타인의 욕망에 아이 때처럼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이 어떤 의견을 자신에게 제시하면 술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도 충고하지 않으니 타인도 자신에게 충고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제나라 임금 ‘환공’과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환공이 성인들의 책을 읽을 때 윤편은 그 책을 쓴 성인들이 이미 죽었다면 그 책을 읽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술 찌꺼기처럼 진짜 술도 아니며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윤편은 자신이 수레바퀴를 깎는데 그 기술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타자의 이론은 그 자신이 지닌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주체적인 자아의 존엄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를 두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나의 존엄한 자기를 찾으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새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나 자신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로 산다는 것이 참 행복일까요? 지옥입니다. 아기는 왜 울면서 태어날까요? 울어야 호흡이 시작되고 그래야 뇌와 온몸에 산소가 공급되어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웃어도 우는 것만큼이나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까요?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로 살게 되었을 때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일까요? 그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주체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니 이제 나로 살아야 합니다. 불안해서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다시 ‘나’라는 자리를 부모에게 줍니다. 그러면 다시 편안해집니다. 엄마 품에서 아기는 울음을 멈춥니다. 아기는 그때 부모에게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억압받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은인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나’가 고개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때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자신도 부모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때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부모가 볼 때는 자아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것이 부모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녔던 ‘완고함’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믿고 의지하며 그 지배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나’란 주님의 이름을 지닌 참 부모가 주는 양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며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되려거든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아가 일으키는 모든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분 뜻에 휩쓸려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가 되니, 나는 곧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작지만, 또한 큰 신앙 체험을 하신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보내오신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우선 하느님께,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하느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큰 은총 주심에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줄었던 수입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주셔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큰 기적은 제가 평생 몸이 매우 아팠고 불안과 두려움에 힘든 삶을 살았고 영적, 육체적으로 아픈 가족들로 인해 암 수술을 받았고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겪고 있었는데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 많은 강론 계속 보면서 용기 내며 살아왔지만, 마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죽었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특히 한밤중에 두려움이 덮쳐 숨쉬기가 힘들 때면 수도 없이 되뇌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었으니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제 온몸의 기운이 빠지더니 경직이 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무서운 공포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동안 별별 기도, 수 없는 미사, 안수기도, 병원 치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체력이 떨어지니까 더 견디기 힘들었던 수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 신부님 말씀을 통해 치유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아픈 저보다 먼저 죽을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에서 제가 먼저 죽었고 또 죽으려고 하니 오히려 저를 힘들게 했던 가족들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나는 죽었다, 난 주님이다, 난 사랑이다’ 기도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 드리며, 신부님 좋은 말씀, 십일조 계속 강조해 주셔서 저처럼 힘든 영혼들 다시 살게 해 주시길 기도드리며 주님께서 신부님과 함께 해 주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부모가 창조했기에 부모에게 ‘나’를 봉헌할 때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때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느님께 ‘나’를 봉헌할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전에 섬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피조물에 불과한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우상이란 뜻입니다. 절대 나를 믿거나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으로 내 안에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리고 나를 지옥의 삶으로 살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나로 산다는 것, 이것이 곧 지옥의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구해주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아라는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 배 밖에서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 프란치스칸 영성이 연재되고 있습니다오늘은 12월 13일에 연재된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보나벤투라 성인은 그의 저서 ‘The Triple Way(삼중도)’에서 죄의 목록을 열거하는데 뜻밖의 죄가 있습니다그것은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언뜻 보기에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죄입니다진화의 과정에서 지구는 두 번의 큰 동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22억 년 전과 6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지구의 모든 땅과 바다는 얼음으로 뒤덮였다고 합니다생명은 이 두 번의 동결과정을 거치면서 크기가 커졌고지금과 같은 다양한 생명으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긴 빙하의 시기가 생명의 다양성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보나벤투라 성인은 어째서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을 죄라고 이야기했을까요우리는 누구나 꽃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성공명예권력이라는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고비를 주십니다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사람들이 타락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 때에 노아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를 통해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죄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도 꽃길만 걸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모든 영광과 권능을 포기하시고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누가 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하늘나라에서는 의인 아흔아홉 명도 기뻐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합니다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예수님 복음의 빛은 가난한 이아픈 이병든 이외로운 이에게 골고루 비추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가시밭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보나벤투라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라고 말하였습니다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나다두려워하지 마라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두려워하는 시간을 믿음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희망과 사랑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일컬어 사람들은 ‘불안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저만 해도 요즘 각양각색의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고에 대한 두려움, 노화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도자로서 관구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장애나 치매가 와서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탈모에 대한 두려움 ㅋㅋㅋ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찢어질듯이 가난할 때, 첨단 문명과 거리가 멀던 시절에는 걱정이나 불안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고 최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걱정과 불안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불안 증세는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으로 발전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런 견해를 펼칩니다. 인생에 있어서 적당한 불안감, 적당한 두려움은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외에는. 다시 말해서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짓눌려 허덕이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 인간적 사랑,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가 구원되기만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었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바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 결과 불가능을 가능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사랑의 소유자는 아무리 큰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뛰어넘습니다. 그 어떤 곤경속에서도 견뎌내고 이겨냅니다.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영근신부-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아름다운 마무리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연장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 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마르 6,45-48).”

 

물 위를 걷는 일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고,

그것은 자연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 9,8).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증언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 하신 일인데,

‘빵의 기적’은 ‘늦은 시간’에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 ‘저녁’은 실제로는 ‘밤’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맞바람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르시고 기도만 하셨을까?

아니면, 아시면서도 무시하고(외면하고) 기도만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내버려두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노련한 어부들이 네 명이나 있었고,

그냥 내버려 두어도 자기들끼리 노를 저어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을 고생시키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은 상황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이야기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기를 간청했을 것입니다.

말로 간청하지는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라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특별한 일은 아니고, 타고 갈 배가 없어서 그냥 걸어가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특별한 일이 됩니다.

‘물 위를 걷는 일’은 그동안 제자들이 직접 목격했던 일들,

즉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인 기적들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탈출 34,6).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지나가시다.’ 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9-52).”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고, 그 유령이 무서워서 겁에 질렸습니다.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도 아니고, 맞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바로 나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령 같은 것을 무서워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내가 너희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긴 했는데,

부활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무서워했습니다(루카 24,37).

예수님께서는 그때에도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루카 24,39-43).>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입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 놀라서 넋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그냥 놀라기만 했습니다.

제자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라고 기록했는데,

이 말은, “그들은 빵의 기적을 보았으니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믿었어야 했고, 물 위를 걷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그들의 믿음은 부족한 상태였다.” 라는 뜻입니다.

한 번의 체험으로 곧바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단계적으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합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온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거쳐서,

온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그리고 확신에 가득 차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만물에 대한 숭배’의

반대쪽에 있는, 즉 우상숭배와 미신의 반대쪽에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은 모든 우상숭배와 미신을

배격하는 사람이고, ‘만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연 재난이나 전염병 같은 것도 주님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 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처럼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 모습에서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않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한상우신부-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위로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기에서
비롯되는
우리들
일상이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용기를
필요로한다.

용기만큼
믿음도
자란다.

하느님께서도
용기를 내시어
여기 이곳에
오셨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삶의
용기가 되셨다.

밀려오는
시련도
용기로 헤쳐
나가는 것이다.

신앙은
용기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가장 오래된
믿음은
용기이다.

용기로
완고한
우리 마음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모든
생명 자체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게된다.

빵의 기적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우리들 일상이다.

하느님께
맡기고
내어드리는
것이

우리 삶의
용기이다.

불어닥친
맞바람까지
멎게 하신다.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하시는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시간을
모두
맡겨드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함께할 때 일어나는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마르 6,47)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뒤, 제자들은 분부대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고,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 보내시고 나서 산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홀로지만 아버지와 함께시지요. 제자들은 여럿이 한 배를 탔지만 예수님 부재 상태를 맞고 있습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르 6,48)

복음사가는 앞서 일어난 빵의 기적이 "늦은 시간"(마르 6,35 참조)에 있었다고 전하지요. 배에 탄 제자들이 "저녁"(마르 6,47) 때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맞바람으로 곤혹을 치르는 그들 곁으로 가신 것은 "새벽녘"이니 꽤 긴 시간 동안 호수 위에서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은 그분이 자연의 원리를 넘어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유령이라 여겨 두려워하지요. 전날 겪은 빵의 기적을 통해 그들에게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에 대한 신뢰가 생긴 건 아니었나 봅니다. 오히려 세속적 영광을 보장할 메시아의 측근이 된 것에 대해 자만심만 더 커진 건 아닌가 싶네요. 이를 복음사가는 "완고한 마음"(마르 6,52)이라 표현합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51)

사실 진짜 기적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로 들어가시자 밤새 그들을 괴롭히던 바람이 멎었으니까요. 동시에 제자들 내면의 소용돌이도 잠잠해졌겠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배에 발을 들이시는 순간 내외적으로 평화가 시작됨을 감지합니다. 주님의 현존은 이렇듯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랑과 머무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하지요. 하느님도 사랑하는 영혼 안에 당신 거처를 마련하시고 머무르십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와 하느님은 서로의 거처가 되어 서로 안에 거하지요. 이 '서로에게 머무름'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과 누리는 최고 절정인 일치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분의 겸손과 자비 덕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속 제자들처럼 현상계에 익숙한 우리는 다가오시는 그분을 두려워하기 일쑤지요. 삶의 맞바람과 풍랑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도 주님의 새로운 현존 앞에 겁을 집어먹습니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부분에서건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겁을 내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과 누리는 완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지요. 사랑한다고 하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인간의 욕정과 자기애일 뿐,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배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가 내외적 풍랑으로 두려움을 품고 있다면 어서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배에 오르시는 순간, 바람도 멎고 마음의 동요 또한 가라앉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함께함의 기적'은 언제라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참 막막하고 힘겹지만, 그럴수록 주님께 희망을 둡시다. 그분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린 영혼에게 맞바람과 풍랑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표징이니까요.

주님과 함께, 사랑에 머물러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만 믿고, 우리 함께, 꿋꿋이 나아갑시다.

 사랑의 완성

 -김찬선신부-


어제는 사랑의 순서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오늘은 사랑의 완성이란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이 사랑의 완성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때야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고,

오늘 서간 말씀처럼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었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미성숙한 사랑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처럼 보상이나 보답을 바라지 않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사랑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받기 위해서 하지요.

 

그러니 우리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또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만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데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저 햇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듯 모두를 사랑합니다.

 

태양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은 있어도 태양에게 원수는 없듯이

하느님 사랑이 사랑할 수 없는 원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저놈은 자식이 아니라 웬수야!'라고 하지만

부모에게 원수인 자식이 없는데 하느님께는 더더욱 원수인 자식이 없겠지요.

 

그러므로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모두를, 그러니까

원수까지 모두를 사랑할 때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또 하느님 사랑은 이런 차원에서도 완성을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수지 물은 흐르고 흘러 모든 논을 채워야 저수지 역할을 완수하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나에게 가두지 않고

나를 거쳐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게 할 때 이것이 사랑이요 완성이지요.

 

아전인수란 옛날 관개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아 물이 부족할 때

도랑의 물이 옆집 논에 흐르지 않고 자기 논에 흘러들어오도록 가로채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도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내 안에 가둘 수 있는데

하느님 사랑을 나를 통해 모두에게 흘러가게 할 때 사랑은 완성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서간은 완성된 사랑의 또 다른 차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얘기한 것이고

여기서는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우리 사랑의 완성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두려움과 연관을 지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면 심판 날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제 생각에 마지막 심판 날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이든

현세의 그 어떤 두려움이든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것은 같습니다.

 

완성된 사랑 그러니까 완전한 사랑은 고통마저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이전에 완전한 사랑은 나의 좋고 싫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 전의 프란치스코는 좋고 싫은 것이 있었고 그래서

나병 환자를 두려워하였지만 회개하고 난 뒤에는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고 그래서 두려움 없이 나병 환자를 껴안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앞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완성된 사랑이고

지금은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완성된

사랑이라고 얘기하는 것인데 감사하게도 원수라고 할 사람이

없는 저에게는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없이 모두를 사랑할 때

하느님 사랑도 완성되고 저의 사랑도 완성되는 것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45-52)

---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전삼용신부-

---

가톨릭평화신문에 ‘프란치스칸 영성’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12월 13일에 연재된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의 저서 ‘The Triple Way(삼중도)’에서 죄의 목록을 열거하는데 뜻밖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가시밭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시간을 믿음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과 사랑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양승국신부-

---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영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