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4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오4,12-17.23-25)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땅, 거칠고 척박한 땅으로 가십니다. 즈불룬과 납탈리,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이며, 가난과 고통의 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듯이, 이제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회개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당신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화해하고, 내 주변의 이웃을 돕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행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배워 그분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주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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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어떤 청년이 면담을 청해서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립니다. 잠시 진정할 시간을 주면서 기다리자 불쑥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너무 하셔요.”
지금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어떤 시험을 준비해서 봤는데, 늘 1차에는 여유 있게 합격하지만 2차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왜 이렇게 불합격만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몇 차례의 실패가 이 청년을 낙담의 굴레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 상황에 있는 청년에게 어떤 말을 해야 힘이 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 청년이 말했던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시험에 응시했던 다른 청년들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바람을 들어주셔야 할까요?
실패를 맛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라는 아쉬움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라는 말은 나 자신의 노력이 나를 감동하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보다 나를 감동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 먼저 아닐까요? 나 자신을 먼저 감동하게 한다면 ‘운이 없고’, ‘환경이 나빠서’, ‘최선을 다했다’는 등의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선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라집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복음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이었습니다. 백성 가운데에서도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당시에 이런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도 전혀 없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밑바닥의 상황에서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주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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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일단 먹이를 먹으면 위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는 소화가 될 때까지 1주일이고 2주일이고 잠에 빠집니다. 이렇게 잔뜩 먹고 자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소화불량에 걸려 나중에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하지만 사자는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럼 사자가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도록 돕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똥파리입니다. 똥파리는 여기저기 달라붙어 피를 빱니다. 사자는 자면서도 본능적으로 온몸과 다리, 꼬리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똥파리를 쫓아냅니다. 이런 행동이 자면서도 운동을 하게 되며, 소화까지 원활하게 합니다.
똥파리는 사자의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삶에도 참 똥파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신경 쓰이고, 귀찮게 했던 많은 환경이 우리 삶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신앙생활이 큰 부담이고 짐이라고 말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힘든 순간, 기도하면서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기회를 통해 자기 삶을 변화시키고,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똥파리처럼 여겼던 신앙생활이었지만, 지금은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아주 열심히 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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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우선하여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이사야 예언서의 말대로 소외된 이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당시 갈릴래아나 요르단 건너편, 즈블룬, 납탈리 땅은 이스라엘에서 거의 이방 민족처럼 여겨지는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이 아닌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찾아갔고 그들 중에서 제자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습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 지방까지 퍼졌고,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라고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먼저 복음을 전하셨다면 이민족들의 어둠의 땅은 여전히 소외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외된 땅에 먼저 복음을 전하니 유다와 예루살렘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모든 이들에게로 그 복음이 전해지지만, 부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한 채로 남아있게 됨을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교회의 선택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맥스 루카도’의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엘리(뜻: 나의 하느님)라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엘리는 저마다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웸믹이라는 작은 나무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나무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한마을에 살았습니다.
웸믹은 각자 금빛이 나는 별표와 어두운 점표가 든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다녔습니다. 칭찬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멋진 모습을 지닌 이들에겐 별표를, 보잘것없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겐 검은 점을 붙여주었습니다. 별표는 자랑거리였지만 점표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펀치넬로라는 웸믹의 몸엔 온통 검은 점표만 붙여져 있습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겉모습도 보잘것없었지만 특별한 재주도 없어서 남들로부터 계속 점표만 받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려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더듬어 또 점표를 받는 그런 억울한 웸믹이었습니다. 펀치넬로는 점점 외로워지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웸믹을 만납니다. 루시아라고 하는데 그녀 몸에는 별도 없고 점표도 없습니다. 참 특이한 웸믹이었습니다. 별표를 붙여도 떨어지고 점표를 붙여도 떨어졌습니다. 펀치넬로는 그녀가 부러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루시아는 친절하게 “엘리를 만나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펀치넬로는 점만 받는 자신이 감히 자신을 만든 엘리를 만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펀치넬로는 용기를 내어 엘리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너무 큰 그분 앞에서 다시 뒤돌아 나옵니다. 그때 엘리가 펀치넬로의 이름을 부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도 놀랍지만 자신을 특별하게 대해주는 엘리가 더 놀랍습니다. 하지만 펀치넬로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물었습니다. 엘리가 말합니다.
“넌 내가 만들었고, 내 것이니까!”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분 것이니, 난 특별하다?’라고 되뇌며 엘리의 집을 나오는 순간, 자신 몸에 붙어있던 검은 점표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칭찬에 반응할 필요도, 비난에 반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특별한지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별표가 많은 이들은 자신이 이미 특별하다 믿기에 그것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만들어준 분으로부터 특별하단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가장 잘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별표를 붙이기 위해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별표든 점표든 필요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주님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루시아와 같은 존재가 되면 별표를 붙인 이들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부자유스럽게 살았던가!’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전파의 우선순위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둠 속에 머무는 이들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그래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김하종 신부가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주는데 수백 명의 노숙자가 몰려드니 민원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성남동 성당 주임 신부님이 도시락을 당신 성당 마당에서 나누어주라고 성당을 개방해주었습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에 맞는 교회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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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지난 12월 10일입니다. 영상을 통해서 밴쿠버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밴쿠버 시간으로는 저녁 8시였는데 뉴욕의 시간은 밤 11시였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을 끝내니 밴쿠버는 9시 30분 정도 되었고, 뉴욕은 새벽이 되었습니다. 시차가 3시간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시간에 맞추면 밴쿠버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교우 분들이 강의를 듣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늦은 시간이지만 많은 분들을 위해서 밴쿠버 시간에 맞추어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영상을 통한 강의는 처음이라서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교우 분들은 집에서 안전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의 차이, 세대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고도 합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과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반대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고 야단맞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명예, 권력, 재물이 보장되는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의 자리를 가고자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셨고, 중풍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유산을 탕진한 아들은 인생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있는 집을 생각하였습니다. 따뜻한 집, 맛있는 음식, 깨끗한 옷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회개하였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묻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돌아온 동생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결정에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평생 아버지의 집에 있었는데 나를 위해서는 잔치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라며 화를 내고,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제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의 동생은 죽었다 살아왔다. 그러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저 역시 아버지처럼 행동하지 않고, 큰 아들처럼 행동 한 적이 많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권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과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희생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상처’를 너무 쉽게 덮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성찰과 반성은 그릇된 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상처를 잘 돌보지 않으면 곪아서 터지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께 가는 길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는 디딤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고 하는 유혹’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교회는 물질과 자본이라는 그릇된 영에 의해서 병들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버리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높이 솟은 빌딩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친교와 축제는 희생과 봉사의 거름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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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 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축구 신동이나 축구 천재라고 불리는 아이에게 어디서 데뷔전을 치르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동네 축구 운동장이나 7부 리그 경기장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좌석수가 10만 가까이 되는, 전 세계 모든 축구인들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웸블리 스타디움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캄프 누 경기장에서! 라고 외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데뷔 무대가 어디냐에 큰 관심을 갖고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도시, 거룩한 도시의 상징 예루살렘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유다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할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시 갈릴래아는 여러 면에서 낙후된 지역이었고, 또한 ‘촌구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별 볼일 없는 지방으로 사람들의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지방 출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다들 ‘촌놈’ 왔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광장 한 가운데서, 당대 영향력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지식인들, 권세가들 부자들 앞에서 당당히 시작하지 않으셨을까요? 홍보 효과도 훨씬 컸을텐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상해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유다 왕실이나 정치 1번지, 휘황찬란한 번화가나 초호화 전원 주택 마을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의 슬픔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십니다. 고통 받는 백성들의 절망 한 가운데로 끼어드십니다. 상처 입은 백성들의 탄식과 눈물 한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서 생활하십니다.
오늘날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구차스런 우리의 삶 한 가운데입니다. 짜증나는 우리의 일상 한 가운데입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 인간관계 한가운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작은 곳, 갈릴래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겉멋만 잔뜩 든 휘황찬란, 위풍당당한 당대 대도시들의 위선과 타락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 작고 낮은 도시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과거 교회는 보통 도시의 한 가운데,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곤 했습니다. 세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높은 곳에 고색창연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 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까마득한 교회의 첨탑 위로 끌어올리기보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삶의 현장 한 가운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자주 상반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시선으로 대단해보이는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떄 아주 작아보이는 것이 하느님께는 엄청나게 위대할 수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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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영근신부-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당신 백성을 돌이키실 때도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즈라를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23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둠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저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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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 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에서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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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한상우신부-
회개로
하늘 나라는
더욱 밝아진다.
회개와
하늘 나라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
하늘 나라는
가까이 왔고
가까이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
일상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늘 나라를
만나는 것이다.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사람과 사랑이
하나이듯
하늘 나라와
회개또한
하나이다.
회개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 나라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울음을
우리의 아픔을
사랑으로
닦아주신다.
모든 순간들이
하늘 나라이며
회개 아닌 것이
없다.
참된
회개가
하늘 나라로
이끄는
참된 빛이다.
앞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일이다.
회개는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회개와 사람은
서로를 비춘다.
구원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회개이다.
아름다운
하늘 나라는
아름다운
회개임을
믿는다.
하느님,
당신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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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이어지는 주간 평일 복음에서는 빛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네."(마태 4,16)
이 말씀 안에는 주님 공현의 의미가 담겨 있지요.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가셔서 당신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갈릴래아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변두리 지역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온갖 기득권에서 제외된 이들이 사는 고장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삶의 한계와 죄의 짐에 묶여 있던 이들을 해방시켜 하느님께서 창조 때 부여하신 저마다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분에게서 지혜를 얻고 건강을 되돌려 받은 이들의 기쁨을 관상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안심하고 행복해하는지요! 실낱같이 이어오던 구원자 메시아의 희망이 그들 눈앞에서, 자신들에게서 실현됨을 생생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예수님의 헌신적인 행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지향으로, 사랑에서 촉발된 행위는 수혜 대상이 하느님의 선을 누리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거침없이 펼쳐지는 중이지요.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사랑을 살라고 촉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1요한 3,23)
이 세상에 오신 성자께서 공생활 동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은 그분 가르침과 행위 안에, 곧 그분 생애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24)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는 그분 안에 머물러 그분과의 사랑을 누리는 동시에, 그분께서 하시는 사랑에 참여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사랑에 자신을 던진 이 안에 머물러 당신의 사랑에 그를 참여시키시지요. 사랑함으로써 이미 우리는 주님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1요한 4,6)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즉 사랑에 속한 이들이지요.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를 알아봅니다. 사랑에 머물러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굳이 소리내어 광고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들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고, 그들의 실천이 예수님의 헌시적 사랑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숨길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네."(영성체송)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운 하느님의 영광을 봅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봄"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그렇게 살라고 촉구하지요. 우리 자신이 사랑이 되라고 재촉합니다.
사랑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필요한 일이 세상 곳곳에서 우리를 목말라 하고 있지요. 먼저 주님 안에 머물러 영적 에너지를 충전하고,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의 힘으로 사랑한다면, 사랑은 결코 고갈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우리 사랑이 자기중심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나 순수성을 회복한다면, 사랑이 부르시는 곳을 선명히 감지할 수 있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속한 사랑하는 벗님! 사랑하는 일에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와 세상은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시니,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라도 주님의 일이 되고, 이로써 우리는 주님과 하나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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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공현하는
-김찬선신부-
어제 아기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공현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어른이 되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공현하십니다.
어제는 아기이기에 스스로 찾아온 이들에게 공현하신 주님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스스로 찾지 않는 이들까지 찾아가 공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현하신다는 것의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공현하신다는 것입니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까?
연세 서른이 되기까지 은거하시다가
이제 연세 충만하니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까?
우리 전례에는 이런 뜻이 분명 있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어른이 되어 본격 등장하신 주님이 이사야가
이방인의 빛으로 오실 분으로 예언한 바로 그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례가 예수님의 등장을 주님의 공현으로 얘기하는 것이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등장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려고 하셨지요.
그래서 오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이사야 예언대로 어둠 속 이방인들에게 빛이 떠올랐다고 한 다음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 내용을 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알지요.
오늘 복음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자 하셨다면 그 기적을 행하셨겠지요?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얘기는 주님께서 신성을 드러내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난 뒤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당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는,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시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제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요즘 새롭게 시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주님의 기도를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바치지 않기
위한 면도 있지만, 저를 드러내고 제 마음대로 하려는 저를 경계하며
동시에 진정 하느님 이름이 거룩히 빛내고,
하느님 뜻을 이루는 제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도입한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시며'를 바칠 때
'빛나소서!', '빛나소서!'를 몇 번 반복해서 외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를 바칠 때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반복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시기를 빌 때
저는 제 사랑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바치곤 합니다.
제게 사랑이 있다면 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공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제 사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제 사랑에 고마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와 내가 같이 하느님 사랑의 햇빛을 쬐기보다는
나의 사랑에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 안에 우리가 같이 머무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해야겠지요.
그래서 오늘 서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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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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