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일 토요일

Margaret K 2021. 1. 2. 07:46


2021년 1월 2일 토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와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와 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더욱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때로는 물질로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게 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 갈수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이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명을 완수하게 하듯, 우리의 겸손함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엄청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아침밥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아왔던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니까 아침은 알아서 해결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가사만 담당하는 아내가 당연히 아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어떻게 당연한 것이 있냐면서 그 무엇도 강요하면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밥 문제가 결국 이혼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침밥’만의 문제일까요?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 요구와 기대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침밥을 아내가 해줘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를, 아내는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수평적 부부관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기대가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당연히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안 좋은 결말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적 요구와 기대를 없애야지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는 대사제의 아들로 좋은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물음에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비참하면서도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을 드러내다 보면 하느님을 보려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했기에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1요한 2,27 참조).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이기주).


아무리 뻔한 것도 내세우는 용기와 자신감

오사카에 가면 광고문구 하나로 매출을 7.5배 더 올린 자전거 가게가 있습니다. 광고문구는 이렇다고 합니다.

“펑크 수리 5분 이내에 가능합니다.”

5분 이내에 펑크 수리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자전거 가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수리점을 하시는 분은 이 문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펑크 수리는 5분 이내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저도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무리 뻔한 것이라도 내세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용기와 자신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용기와 자신감을 내세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요?

 자녀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잇는 참 자녀의 자격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며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누구나 “너는 누구냐?”란 질문을 받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늘나라 상속권을 받으려 할 때 야곱에게 이사악이 누구냐고 물어본 것과 같습니다. 그때 하느님과 관련된 정체성이 나와야지 이 세상 부모와 관련된 대답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나와 사귀는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받으면 그의 정체성에 내가 조금 개입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결혼해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둘이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섞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정체성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있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들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거명되었으면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부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면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 그래서 너무 작아져 자녀에게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분들이 바로 요한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하느님 것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위대한 부모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위해 더 큰 부모가 주는 정체성으로 자녀를 인도해야 합니다. 내가 준 정체성 안에 자녀를 가두려 하면 자녀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전설적인 흥행을 기록했고 성탄절이면 여지없이 TV에 방영되었던 ‘맥컬리 컬킨’의 영화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다 ‘나 홀로 집에’임을 알 것입니다. 성탄절마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였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였습니다.

      맥컬린 컬킨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관리했고 어머니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7남매를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여운 외모의 맥컬리 컬킨을 아역배우로 쓰기로 합니다. 아버지도 예전에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쪽에 인맥이 있었기에 기회만 되면 아들을 무작정 출연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흥행한 ‘아저씨는 못 말려’라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 홀로 집에’가 제작됩니다. 예상외로 엄청난 흥행을 하고 ‘나 홀로 집에 2’는 그것보다 40배 이상의 출연료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교회 관리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아버지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흥행 보증수표인 아들 덕분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에 들어갑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아버지의 욕심은 날로 커져만 갑니다. 다른 자녀들을 맥컬리와 함께 써달라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고, 맘에 안 드는 대사는 고치지 않으면 아들을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망치기만 해봐. 맞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곤 했습니다. 맥컬리는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호텔 방에 묵는 것이 감옥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혹사합니다. 7년 동안 무려 17편에 달하는 엄청난 영화를 찍습니다. 정신이상자 연기, 욕설이나 담배를 피우는 연기 등 닥치는 대로 시킵니다. 이렇게 되자 맥컬리의 연기 의욕은 빠르게 저하되었고, 대부분이 흥행에 참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더는 맥컬리를 찾는 감독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 맥컬리는 더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이혼소송에 따른 양육권 분쟁을 하는데, 맥컬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서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내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해서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공식적으로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학교생활, 대인관계는 쉽지 않았습니다. 17살에 결혼하고 거의 바로 이혼하고, 방황하고, 술과 마약 등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큰 흥행은 못 하지만 조금씩 부모의 압박에서가 아닌 자유의지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출처: ‘크리스마스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맥컬리 컬킨의 인생’, 달빛 부부의 영화와 미드, 유튜브]


      물론 좀 심한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조금은 자녀들이 나의 테두리에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부모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아무리 커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준 정체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자주 되뇌고 다닙니다. 저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저의 머리로 사시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몸만 되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부모님도 저의 이 정체성 안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정체성은 지상의 부모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고 자신 또한 자녀를 통해 영광을 받고 싶다면 자녀에게 인간으로서 주는 정체성이 아닌 하느님을 부모로 둔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이곳 미국에서 저를 나타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첫 번째는 사회 보장 번호(社會保障番號, Social Security number)입니다저는 이를 근거로 세금을 납부하였고작년에 재난지원금으로 1,200불을 받았습니다이 번호는 한국의 주민 등록증과 같다고 합니다미국에서 장기 체류하거나취업을 하는 사람은 사회 보장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미국 생활에서 꼭 필요하고중요한 번호입니다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운전 면허증은 신분증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운전 면허증이 있으면 됩니다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한국의 면허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운전을 하려는 사람은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세 번째는 성사 허가증(The Faculties of the Diocese of Brooklyn)입니다한국에서는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전국 공용으로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지만 외국에서는 지역 교구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한국에서 교구장님이 공문을 보냈고부르클린 교구장님이 제게 5년 동안 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작년에 나타난 코로나19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코로나19는 무엇이기에 세계의 경제를 멈추게 하였고미사를 중단하게 하였고우리에게서 일상의 소중함을 빼앗았을까요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했고이웃과도 거리두기를 하게 했습니다확진된 많은 사람이 병원엘 가야했고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코로나19는 도대체 무엇이고왜 우리에게 나타났을까요코로나19는 사스메르스신종플루와 같은 바이러스라고 합니다폐에까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합니다전염력이 높으면 사망률이 적은데 코로나19는 전염력도 높고 사망률도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다른 바이러스는 증상이 나타나면 비로소 바이러스가 전파되는데 코로나19는 무증상인 상태에서도 높은 감염력을 보인다고 합니다기존의 바이러스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방역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바이러스를 우습게보고 초기 대응을 소홀히 한 면도 있습니다미국은 한국과 같은 시기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지만 초기에 대응을 소홀히 하였기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졌고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코로나19처럼 새로운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신세계를 보았습니다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좋지도 않고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1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승국신부-

 

시건방지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수탉들과는 달리 유난히 크고 붉은 닭벼슬과 화려한 색상의 털은 지니고 있었기에 건방을 떨었나 봅니다. 다른 수탉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스스로를 닭 세계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더 큰 착각을 한 가지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동틀 무렵에‘꼬끼오!’하고 외쳐야 태양이 뜨고 새벽이 온다고 여겼습니다. 수탉 자신으로 인해 이 세상이 시작되고,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런 수탉의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이 공동체가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들러리로 여깁니다. 나로 인해서 이 공동체가 평화롭고, 나로 인해 이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외칩니다. “나야 나!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러나 실상은 어떠합니까?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까?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게 눈을 뜹니까?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하고 신비스런 섭리와 질서의 손길에 의해 이 세상은 시작됩니다.

  

태양은 새벽녘에 아주 미세한 여명을 보내시어 깊이 잠들어있는 수탉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옅은 빛으로 인해 닭장 안에 잔뜩 깃들이고 있던 짙은 어둠이 조금씩 어두움이 가시는 것을 감지한 수탉은 달라진 분위기에 기지개를 펴며 ‘꼬끼오!’하고 외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나로 인해 공동체가 돌아가고, 나로 인해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 중에서도 너무나 큰 착각입니다. 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 인간 개개인 각자는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누구든 이 세상에 홀로 설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공동체란 이름 아래 엮어주셨습니다. 각기 한없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살아가라고 한 울타리 안에 엮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신원의식, 자아정체성은 얼마나 큰 교훈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가 탁월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사람이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아닐까?’

  

이런 이유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몇몇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1장 19절)

  

그러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때, 그야말로 잘 나가던 때, 그를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대단했습니다.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 극도로 청빈했던 삶, 강직한 인품, 쌍날칼보다 날카롭던 그의 설교...그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한때 ‘세례자 요한 당(黨)’까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 인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혹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이고,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습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또한, 요한에게는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고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힘을 군중들의 힘을 빌려 나타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따를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너희의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한 예언자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한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함과 겸손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한상우신부-

새 일기장에
새 날을
기록했다.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부딪히고
맞닥뜨리며
깨닫게 되는
삶의
나날들이다.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진짜 우리들
소리이다.

어김없이
만나게되는
광야의
시간이다.

삶 속의
광야이다.

같은 것
하나 없는
힘겨운
우리들 광야의
삶이다.

광야에도
사람이 있다.

광야에도
사랑이 있다.

광야에도
햇살이 비친다.
광야는 늘
간절하다.

광야에서
삶의 목적지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된다.

추운 광야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괴로운 시간도
필요한 은총의
시간이 된다.

광야에서
우리를 살릴
유일한 말씀을
듣게된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광야도 길을
드러낸다.

이쪽 광야가
끝나면 저쪽
광야가 우리를
기다린다.

광야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난다.

추운 광야에서
깨닫게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은총으로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습니다. 아버지 즈카르야가 사제였고 어머니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인 까닭에 세례자 요한은 계보적으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요한이 서슴지 않고 고백합니다. 그는 찰나의 순간이라도 타인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치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그의 소명이니까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요한은 백성을 준비시키려고 자기가 베푸는 물의 세례와, 주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요한 1,33 참조)를 구분합니다. 백성 가운데로 오셨으나 아직은 백성이 알아보지 못한 분, 그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임을 알려 줍니다.    
 

"모르는 분"

예수님은 백성의 눈에 아직 베일에 싸여 계십니다. 그분이 나타나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해도,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구원이라 여기고 기대하는 이들 눈에는 영영 감춰져 계실 것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모르는 분"으로 남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신도들이 늘어가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분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지 조언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1요한 2,24)

요한 서간은 예수님과의 실제적 접촉이 매우 짧거나 거의 없었던 이들이 신도가 되어 세대를 거듭하는 시기(기원후 80-90년경)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지요. 아마도 예수님과의 직접적 추억보다, 사도나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에 의지해 그리스도를 믿기로 전향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기존 유다교의 반박과 이단의 교설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각자가 기억하는 부르심의 순간과 방식은 다 다르니, 박해 시대의 풍랑 속에서 때때로 불확실과 의심의 순간도 맞닥뜨렸을 테구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현상적 영역 밖의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사랑에 빠진 첫 순간을 기억하고, 그 뜨거웠던 첫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물로 정화되고, 성령의 도유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불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꺼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곤곤하고 버거운 세상살이 파도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에 머무르고, 자비 가득한 그분 마음에 머무르며, 우리를 부르신 그분 뜻에 머무르고, 우리와 일치하고 싶어하시는 그분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이 머무름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날이 더욱 친밀하고 두텁게 만들어 줍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을 부르시고, 성자 예수님을 끌어당기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속성이 일치이기 때문이지요. 성령께 마음을 열고 말씀에 머물러 아버지의 심장 안에 자신을 감추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일치적 사랑에 함께하게 됩니다. 머무름이 죄스럽고 부족한 우리에게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이 머무름을 통해 주님은 "모르는 분"에서 차츰 "아는 분"이 되어가실 겁니다. 새해에는 주님께 머무르고 말씀에 머물러 그분과 더 깊이 사랑을 나누는 여정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고결하고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갖추어 갈수록 세상도 좀 더 나아지고 밝아질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올 해는

 -김찬선신부-


올 새해에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새해 첫날 우리는 누구나 이 생각들을 하시겠지요?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면 올 한해 막살겠다는

또는 되는 대로 살겠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 나의 계획을 세우는 걸까요?

아니면 계획 없이 되어지는 삶을 사는 걸까요?

 

우리가 신앙이 없다면 그래서 하느님 뜻을 생각지 않고 산다면

계획을 세우고 사는 것이 옳은 삶의 태도이고,

되는대로 사는 삶은 앞서 얘기한 대로 막살겠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되어지는 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올해는 제 계획을 세우거나

세운 계획대로 올해를 살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되어지는 대로 사는 것이 올해의 계획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하느님께서도 원하시고

그래서 저의 계획에 둬도 무난한 것들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성찰하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선, 제가 행복한 사람이기를 바라시고,

저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행복하도록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겁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해도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두 번째 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니 자녀답게 살아가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데도 종종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데

하찮은 세상 만족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종으로 만들며 살지 않고,

이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품위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속에는 똥이 가득 차 있으면서 고고한 척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한 프란치스코가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살려고 하였지만

영적으로는 품위를 생각하며 살라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다음으로 하느님의 자녀에서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은 천주의 모친 축일이지요.

인간인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말인데

같은 인간인 우리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뜻이고,

주님 친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프란치스코는 이 주님 말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얘기하지요.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사랑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가 성모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니 우리도 올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되새기는 어머니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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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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