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begotten Son,
full of grace and tru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종말이 언제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답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그리스도의 적’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거짓말쟁이인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종말의 날과 시간을 모르는 채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을 보내며 우리가 살면서 겪었던 고민과 갈등을 되돌아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진리와 은총으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은총에 은총을 받아 새해를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한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2020년, 우리가 살아온 하루하루를 선물이라고 생각합시다. 각자의 삶의 무게와 감염병의 유행으로 힘겨웠지만 살아온 나날들의 손익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참빛으로 오신 생명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영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실패와 실수도 맛봅니다.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살아온 경험들이 도움이 되며, 시간도 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를 깨닫도록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은총에 은총을 거듭 청해 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달에 책값으로 나가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상당히 많은 책을 구매하기 때문입니다.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데, 제가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은 딱 한 군데입니다. 사실 어느 인터넷 서점의 사은품이 많다는 동창 신부의 말을 듣고서 옮겼다가 큰 실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은품은 많은데, 정작 택배로 오는 책의 포장이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은 사은품은 별로 없어도 책 포장이 완벽합니다. 책 받을 때의 기분이 너무나 좋아집니다.
책 상자 겉면 일부가 뜯겨져 있고, 테이프 끝이 너덜너덜하다고 해서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성이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게 됩니다. 하긴 세상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정성이 없는 곳을 또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성이 담긴 곳에는 세세한 배려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성을 모두 좋아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남에게 배려심 있는 정성으로 다가서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12월 31일. 2020년 경자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이면 낯설게만 느껴지는 2021년 신축년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선 오늘, 올 한 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오는 새해에는 더 큰 정성을 가지고 살겠다는 다짐을 했으면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강조하지만, 세상은 ‘욕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정성을 쏟게 됩니다. 작은 것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세상의 편이 되어 ‘욕심’ 안에서만 힘을 씁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니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상속재산을 차지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림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정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주님의 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은총에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맡겨야 하겠습니다.


아주 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약 7년 동안 1만 5천 시간에 걸쳐 700장의 그림을 그렸고 이후 201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베스트 글로벌 아티스트’ 대회 2등 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이 화가를 특별하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재능이 많은 화가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에게는 팔이 없기 때문입니다.
폴란트 화가, 마리우스즈 케드지에르스키(Mariusz Kedzierski)입니다. 1992년 태어날 때부터 팔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과 색칠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팔이 없는 자신의 장애는 꿈을 이루는 것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유럽 전역을 돌면서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마리우스즈 케드지에르스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꿈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것도 장애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하는 것도 꿈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빛의 자녀, 달콤 쌉쌀한 캡슐 약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말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은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드러내신 분이 요한 세례자입니다. 로고스 찬가는 이렇게 누군가가 누군가를 드러내는 가운데 어떻게 구원이 펼쳐지는지 짧게 보여주는 구원 신비의 요약입니다. 이것을 단계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말씀이 빛이 되어 오시다: 말씀은 창조자이시고 당신을 통해 창조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에 속해 그분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어둠이 걷히려면 반드시 자신이 어둠이고 주님만이 빛이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빛의 증언자가 필요하다: 빛은 발이 없습니다. 누군가 옮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증언하는 운반자가 필요합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하기에 빛 자체는 운반자 없이 어둠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3.빛을 받아들이면 빛의 자녀가 된다: 자녀가 됨은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나려면 은총에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첫 은총은 뒤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준비 은총입니다. 사랑이 빛임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세례자 요한이 첫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은총 덕분으로 참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4.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느님처럼 되었을 때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빛의 본성을 압니다. 빛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5.빛의 자녀는 빛의 증언자가 된다: 동물의 자녀는 동물을 낳고, 사람의 자녀는 사람을 낳으며, 빛의 자녀는 빛을 낳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례자 요한처럼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음을 증명됩니다.
이것이 로고스 찬가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그분이 빛이시고 나는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는 이는 빛을 받아들일 이유를 잃게 됩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어둠에 속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파라오가 모세를 받아들임이 자신에게 그러한 재앙이 될 줄 알았다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껏 키워놓고 모세에게 당합니다. 모세는 빛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먹었을 때 그가 어둠임이 밝혀졌습니다. 모세의 10가지의 재앙은 파라오가 빛이 아니고 어둠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파라오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믿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알려면 빛인 줄 모르고 먹었다가 낭패를 보게 만드는 빛의 재앙이 필요합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를 당하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이지안이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광일로부터 빚 독촉을 받습니다. 이광일은 이지안이 죽인 남자의 아들입니다.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미움 때문에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남자인 것입니다. 지안이나 광일이나 두 사람 다 후회와 증오의 어둠에서 살아갑니다.
이때 박동훈이란 대기업 만년 부장이 등장합니다. 지안이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후배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박 부장도 불쌍한 인간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하는 불쌍한 중생입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힘든 처지에서도 늙은 어머니를 보필하는 지안이란 청년을 착하게 보아줍니다. 박동훈을 이용하려 했던 지안은 점점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둠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에 문을 엽니다. 자신이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빛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둠의 편에서 일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안이의 원수인 이광일도 빛을 받아들인 지안이를 먹고는 탈이 납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그 캡슐로 된 약 안에 빛과 사랑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온통 드라마가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괴롭히던 사람들이 지녔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유되었을 때 또 누군가에게 빛의 증거자가 됩니다. 광일도 원수 같은 지안과 박동훈을 돕기로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상처가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빛의 모습으로 가 사람 속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둠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이에게 쓴 약을 먹이기 위해 달콤한 젤라틴으로 만든 캡슐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속에는 감당할 수 없는 쓴맛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는 달콤한 젤라틴을 먹는 줄 알지만 그것이 안에 들어가면 병을 죽이는 쓴 약이 됩니다.
빛은 사랑이고 그 빛을 증언하는 이는 사랑이 담긴 캡슐입니다. 그 캡슐을 먹으면 그 안에서 사랑이 미움을 보게 만듭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사랑을 품은 달콤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둠을 죽이고 빛의 증거자가 되게 만드는 캡슐로 된 사랑의 약이 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달콤 쌉쌀한 알약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1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것은 코로나19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지만 코로나19는 2020년의 마지막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전대미문의 감염 병으로 우리사회의 일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마스크와 거리두기 그리고 손 씻기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영상을 통한 회의와 미사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박해시기에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미사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를 갔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컴퓨터는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 무력하였습니다. 2021년에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만나면 환한 모습으로 웃고 악수하고 포옹하면 좋겠습니다. 소리를 모아 성가를 부르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좋겠습니다. 친교와 나눔이 넘쳐나는 신앙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은 ‘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산업이라는 기관차가 잠시 멈추면서 공기가 맑아졌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먼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산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상처 입었던 자연은 모처럼 생태계가 복원되었고, 그 안에 살던 생명은 힘을 얻었습니다. 코로나19는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백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연과 연대하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발전과 개발이라는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연은 더 강력하고, 더 파괴적인 백신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코로나19라는 큰 파도를 겪으면서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의료진의 헌신과 불편함을 기꺼이 참아준 깨어있는 시민들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추적(Trace), 검사(Test), 치료(Treatment)'를 통해서 방역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코로나19로 지친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던 성서 말씀은 요한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전승은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명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는 함께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요한은 예수님 곁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께는 요한 사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만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0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한 처음에~”라는 이 단어는 <창세기>의 첫 단어이기도 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한 처음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베레쉬트)는 ‘집’, ‘안에’(베트)라는 말과 ‘처음’, ‘시작’(레쉬트)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세상이 집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집’(베트)이란 곧 ‘하느님의 집’, ‘하느님이 거한 처소인 성전’을 의미하고, ‘처음’(레쉬트)이란 ‘첫 열매’이고 ‘하느님의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해석해 보면, ‘맏아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집인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란 단어의 히브리어(바르) 뜻은 ‘집의 사람’, ‘집에 거하는 사람’, 나아가서 ‘집에 거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온전한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들’은 ‘아버지가 거처하는 집’인 셈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10)
그러니 오늘 <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말씀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아 우리 가운데 사신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곧 우리를 ‘하느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뜻은 ‘집을 다스리는 사람’, 곧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며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안입니다.”(히브 3,6)
그러니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는 사람이 바로 아들’입니다. 여기서 ‘경작하다’, ‘다스리다’는 말의 히브리어(아바드) 뜻은 성경에서 주로 ‘섬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집의 문을 보는 것’, 곧 ‘주인의 집에 문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종’의 모습을 말합니다. <탈출기>에서는 ‘주인을 사랑하여 함께 살고자 하는 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은 그를 하느님께 데리고 가서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세우고,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그의 종이 된다.”(탈출 21,6)
이처럼, ‘종’은 항상 주인의 집의 문에 서서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을 섬기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7-8).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자녀인 우리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섬기는 삶이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오니, 제 안에 빛을 불어넣으시고 어둠을 몰아내소서.
빛의 아들로, 세상의 등불 되어 당신 빛을 비추게 하소서.
빛을 증언하여, 세상이 당신의 말씀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생명, 그리고 빛
-반영억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코로나19’와 싸우다가 일 년을 마감하는 듯합니다. 마음이 추운가운데 매서운 추위까지 찾아왔습니다. 들리는 소식은 맑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둡고 가슴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좀 더 힘을 냅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새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해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워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명, 하늘의 말씀, 하늘의 법칙이 살아있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름다운 모습으로
-송영진신부-
1)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해마다 12월 31일이 되면, 인간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마지막 날’이란 없습니다.
‘시작에서 종말로(한처음에서 영원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한 조각의 시간일 뿐입니다.
오늘이 특별한 것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별히 주신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오늘’은 언제나 항상 특별한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히브 4,6-7ㄱ).”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어제’ 마감하지 않으시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신 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속에 시간 의식을 심어 주신 것은
그 기회를 허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생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으로 가야 하는데,
추한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으로 갈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생 전체를 마무리하는 일이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이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정치인도 있고,
정말로 보기 싫고 추한 정치인도 있습니다.
‘물러날 때의 모습’이 임기 중에 쌓은 업적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 라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추하게 물러난 정치인을 변명해 주려고 그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글자 그대로 변명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도 비슷할 것입니다.
심판의 첫 번째 기준은 심판대에 설 때의 현재 상태입니다.
의인으로 살았다가 타락해서 하느님 앞에 설 때에 죄인으로서 서는 사람이 있고,
죄인이었다가 회개하고 의인으로서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가 아니라 ‘사도’로서 하느님 앞에 설 것이고,
배반자 유다는 ‘사도’가 아니라 ‘배반자’로서 하느님 앞에 설 것입니다.>
2)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하루하루가 은총이었고 선물이었다고,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고, 모든 일에 감사드린다는 말은 좋은 말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회개와 변화를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은 그냥 상투적인 말이고, 위선적인 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방탕하게 살던 작은아들은 정신을 차린 뒤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7-19).”
그는 자기가 아버지 곁에서 살던 때가 얼마나 은혜로운 때였는지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회개했고,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갔고, 자신이 스스로 버린 은혜를 회복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하루하루가 은총이었음을 깨달았다면,
그 은총에 제대로 응답했는지를 반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회개는 곧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총에 감사하기만 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지난날이 좋았다.” 라는 추억일 뿐입니다.
오늘과 내일의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지나간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3)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시간의 관리자(집사)입니다.
시간을 인생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내 인생의 관리자입니다.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한 일들을(인생을) 정산해야 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2)”
비유의 내용을 보면, 주인은 집사를 바로 해임한 것이 아니라,
청산할 수 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주었습니다(루카 16,3-7).
그 시간 동안에 집사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깎아주었는데,
단순히 자신의 먹고살 길을 찾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자기가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서
집사에게 해고를 미리 통고하고 청산할 시간을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ㄱㄴ).”
표현만 보면,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칭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전체 뜻을 생각하면, ‘잘못한 것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주인이 그 집사를 칭찬했다는 말은 있는데,
해고를 취소했다는 말은 없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고,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 우리가 제대로 회개한 것을 칭찬하시더라도,
그 칭찬이 꼭 수명 연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충실하게 회개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의 수명 연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지상에서의 수명 연장도 아니고,
또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이유입니다.)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기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는 말이 진실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 당사자가 얼마만큼 성실하냐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험한 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내 생각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가? 백 퍼센트의 효과를 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모든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인간의 말로는 부족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말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끼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순간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어떠한 말을 어떻게 해서 얼마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 왔고 해가 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한상우신부-
살면 살수록
말씀 아닌
것이 없다.
모두 다
말씀이다.
말씀이
생활(生活)이
되셨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간다.
말씀은
우리 삶의
토대이다.
우리모두를
살아 숨쉬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다시
일깨워준다.
말씀이
뜨거운
빛이 된다.
모든 것은
말씀으로
출발한다.
말씀이
사람다운
삶으로
이끈다.
삶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자녀가
되게한다.
말씀은
고통조차
이겨내게 하는
삶의 힘이며
삶의 중심이다.
그래서
성탄은 말씀을
만나는 일이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모두는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말씀을
우리 생활에
새기는
은총의
성탄이다.
말씀이
행복이
되셨다.
우리의 삶이란
그야말로
말씀의 연속이다.
말씀이
살아계시듯
사람도
말씀 안에서
살아간다.
말씀이
있는 곳이
소중한
사람이 있다.
말씀과
소중함은
하나이다.

-오상선신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한처음"과 "마지막 때"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성경은 말씀이신 성자께서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좁은 시야와 짧은 사고방식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태초를 가리키지요. 이는 이 세상의 시작이라기보다 하느님만이 아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적 "시작"을 의미합니다.
한처음부터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영향력은 역사의 구비구비를 거쳐,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한처음은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지점으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내내 시작으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비의 지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처음부터 계신 말씀께서 세상에 육화하시어 당신의 사명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할, 승천 사건 이후에도 말씀은 우리 가운데 생생히 현존하고 계시지요. 이 세상의 역사는 말씀께서 인류와 함께 걸어오신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예수님의 현존으로 인류는 한처음부터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마지막 때를 언급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8)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여겼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 이어진 박해와 '그리스도의 적'의 출현, 그리고 정치사회적 혼란상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했겠지요. 누구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은 혼돈의 시대를 사는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두려움보다 희망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이처럼 이천 년 전에 이미 언급된 "마지막 때"는 아직까지 하느님의 자비로 유예되고 있습니다. 그 때를 모르니 유예 기간도 알 수 없지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이 오기까지 하느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기름부음 받은 이는 성령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름부음은 선택받았음을 의미하며 구원의 보증이 되지요. 한처음부터 시작되어 이어져온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연재해와 천재지변, 기후 위기와 감염병, 반인륜적 범죄와 인간 존엄성 파괴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면 우리는 말세를 떠올립니다. 조금씩 고쳐서 나아갈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아예 뒤집어 엎는 것이 더 나을 듯 보일 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과 자포자기로 망연히 손 놓고 마지막 때를 관망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 순간까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기름부음 받은 이답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거룩하신 분께 맞갖는 존재로 자신을 닦아 나가고 있지요.
그러니 오늘이 창조의 첫 날인 듯 온 힘을 다해 찬미하고, 또 오늘이 마지막 때인 듯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주님 현존을 살아가는 소명을 완수해 나가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일년을 마무리할 때 으례껏 써온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이 상투어가 아니라 진짜로 생생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오늘입니다. 지난 2020년, 감염병과 그 여파로, 각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로 우리 얼마나 많이 힘들었습니까! 새해를 비추며 저만치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희망이 뜬구름이 아니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처음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이고, 성령께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설령, 당장 마지막 때가 닥친다 해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의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은총과 진리 안에서 기쁨을 끌어 올리며 용기를 내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일 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통스러웠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은총에 은총을 받았"(요한 1,16)음에 감사와 찬미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허락해 주신 새로운 생명의 날로 성큼 건너가시길 축원합니다. 2021년에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시고, 말씀 안에 더 깊어지시길 기도합니다. 이처럼 말씀과 기도를 통해 매일 만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복을 차고 넘치게 받으십시오. 한 해 동안 함께 이 여정에 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의 첫구절은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의 묵상과 나눔은 오늘 독서와는 다른 맥락에서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에 한 해를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한 해를 마치면서
2020년 지난 한 해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 지향적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2021년을 내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와 미래가 같이 있는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현재의 자기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의 감정과 상태가 과거도 미래도 매몰시킬 뿐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눈 다른 사람들을 같이 돌아볼 수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나의 한 해 동안 나에게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뿐 아니라
나의 삶을 힘들게 했던 사람까지 함께 돌아보는 사랑의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안 좋은 일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안 좋은 것만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는 사람은
나 같이 부족한 사람, 나 같은 죄인에게
좋은 일도 많았고 너무도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고
한 해를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인간과 인간사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일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일과 사람들을 보는 사람은
그 일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느님이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봅니다.
이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내다보면서
나의 지난 한 해는 어떤 해였는지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는 어떤 해였으면 좋은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2월 31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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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말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느님처럼 되었을 때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빛의 본성을 압니다. 빛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증언자가 된다: 동물의 자녀는 동물을 낳고, 사람의 자녀는 사람을 낳으며, 빛의 자녀는 빛을 낳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례자 요한처럼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음을 증명됩니다.
이것이 로고스 찬가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그분이 빛이시고 나는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는 이는 빛을 받아들일 이유를 잃게 됩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어둠에 속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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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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