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요즈음 세계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리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평화가 사라진 듯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새해 첫날인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태어나신 주님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총이며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 성자께서 탄생하신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강생의 신비를 통한 은총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서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된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인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분으로 표현되십니다.
성모님의 잉태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삶을 성모님의 돌보심과 전구에 의탁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기도에 나오듯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고, 언제나 축복과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확실하며, 어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과 실망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속에서 얼마나 고민합니까? 성모님과 늘 함께하고 성모님께 의지하는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계획 안에 살 수 있게 하고,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함께하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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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가 알고 있는 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햍타트’(חַטָּאת)라고 하며, 희랍어로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상황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삶을 말한다는 것을 이 단어의 어원에서 발견합니다.
막 입대한 뒤에 신병교육대에서 사격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난생처음으로 쏜 총소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더군다나 위험해서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사격전에 사격 방법에 대해 교육을 받았음에도 막상 사격할 때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사격하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단 한 발도 과녁에 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과녁 자체를 보지 않았으니 과녁에서 벗어난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보지 않을 때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1년의 첫날입니다. 새해가 되면 커다란 희망을 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과 함께해야 할 목록들을 나열하곤 하지요. 이 목록의 첫 자리에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즉 죄의 삶에 들어가지 않는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를 떠올려 보십시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낳으면서 겪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시끄럽게 세상에 떠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죄로 기울어지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제1독서의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2021년의 첫날에 독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성모님처럼 곰곰이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될 때, 2021년을 더욱더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2021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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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런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지 아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
어느 영화의 대사입니다. 이 영화 대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손수건의 의미를 새기면서, 손수건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은 원래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자기 삶만을 살면서 정신없어합니다. 나를 위해서만 손수건을 사용합니다.
이제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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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엄마의 자격
-전삼용신부-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믿을 교리로 반포하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며 그 신성을 버리셨거나, 혹은 신성을 지키시기 위해 인성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붙잡고 나아가야 할 사다리가 될 수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로 오르는 ‘길’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길은 하늘과 땅을 맞닿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다리의 끝이 하늘에 닿아있어야 하고 또 땅에도 닿아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다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그 사다리와 같은 예수님을 낳으셨는데, 그 하나인 분을 잘라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되셨는지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시다고 엘리사벳이 불렀다면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요,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도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떻게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고 할례를 베풀고 아버지께서 주신 예수란 이름을 지어준 사실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참 부모가 아님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믿으셨기에 하느님께서 그분의 겸손을 보시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참으로 자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그 모범이 되십니다. 자녀들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려면 자녀들의 참 어머니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나의 마더’는 인류가 멸망한 직후 로봇 마더에 의해 아기가 키워진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로봇 마더는 한 아기가 될 이미 저장된 태아 중 하나를 골라 가장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보육과 교육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기는 로봇 엄마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을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엄마를 닮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해 버린 존재일 뿐입니다. 마더는 완벽한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자신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라고 말합니다. 마더는 소녀에게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려고 매일 교육하고 시험을 보게 합니다.
소녀는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했습니다. 마더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느 날 정전이 되자 마더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정전되어도 움직일 수 있는 자신과 너무 다릅니다. 소녀는 정전을 일으킨 생쥐를 마더에게 보여줍니다. 마더는 균이 있을 수 있다며 생쥐를 불에 태워버립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생명체와 마주했던 소녀는 엄마에게 조금 실망합니다.
얼마 뒤 한 낯선 여자가 외부에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세상에 인간이란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인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마더와 똑같은 기계들에 의해 총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더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소녀는 마더를 조금씩 의심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말한 대로 엄마는 자신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미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여 시험에 실패하면 계속 소각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봇은 최고의 엄마가 되기 위해 태아들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낯선 여자와 벙커에서 탈출합니다.
그러나 밖에 낯선 여자의 주장대로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낯선 여자도 혼자뿐이었습니다. 사실 낯선 여자도 평생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혼자 살아왔던 것입니다. 낯선 여자는 소녀에게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회유합니다. 낯선 여자에게도 속았다고 생각한 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딸은 다시 마더에게서 자라고 있는 남동생을 구하러 벙커로 돌아갑니다. 이때 마더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 인류의 어머니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소녀는 남동생을 빼앗고 마더를 죽입니다. 그러나 마더의 본체는 그것 하나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실패한 마더도 더 완전해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제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마더가 어떻게 올바른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시험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장된 태아의 숫자가 다 소진될 때까지 한 명의 아이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고, 로봇 마더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그 아기의 원천도 아닌데 어머니가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 어머니들이 가진 교만의 위험성’입니다. 아기들은 배아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로봇 마더는 그 아기들을 최대한 완벽한 모성애로 키우려 합니다. 그렇게 완벽한 인간들이 태어나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봇이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아를 키우면서도 자신이 어머니라고 믿게 하려는 것 안에서 아이도 혼란스러워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해도 아이는 로봇에게서 인간답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드님께 할례를 베풀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지어주고 하느님께 도로 봉헌할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이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셨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부터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아기의 부모가 하느님임을 인정했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자격은 ‘겸손’입니다. 아이의 생명이 내가 아닌 주님에게서 오기에 아기는 나의 것이 아닌 그 생명의 주인의 것이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닌 당사자가 그 생명을 완벽하게 키워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겸손하게 아드님이 당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주님의 것이라 인정해드렸습니다.
이런 자녀 봉헌을 가장 잘하는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할례는 물론이요, 성인식 때 이미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번 주식 동학혁명의 선봉장이라 불리는 ‘존 리’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인식 때 5천만 원 정도를 아이에게 유산으로 주며 그것으로 경제 공부도 하며 주식도 잘 불려보도록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역할을 내려놓고 사춘기 전에 참 부모인 하느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아이에게 주입식 공부를 시키더라도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하며 자신이 어머니란 소리를 계속 들으려고 한다면 결국 영화에서처럼 스스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든 어머니들도 지금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자녀를 주님께 돌려드려 성모님처럼 테스트를 통과하여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이 어머니가 되려다가 결국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 것인지.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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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2021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0년은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행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소중한 일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했고, 사랑하는 이웃과도 거리두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에도 새 생명은 태어났습니다. 꽃은 무상으로 향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의료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일상으로 느끼던 삶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웃과 정답게 웃으며 식사하는 일,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것,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남편 때문에 화가 난다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다툰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매일 텔레비전만 보는 남편이 싫다고 합니다. 게으른 남편이 싫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남편이 도박을 하나요?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나요? 남편이 아파서 화장실을 못 가나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나요? 남편이 돈을 함부로 쓰나요?” 자매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니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것과 조금 게으른 것 말고는 특히 나쁜 것이 없네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도박하지 않는 남편, 술을 마시지 않는 남편, 건강한 남편, 검소한 남편, 아내만 사랑하는 남편”이라 생각하면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면 화가 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다툴 일도 없어질 겁니다. 생각을 바꾸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화가 날 일도 사라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짜증내면 짜증 날 일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걱정하면 세상은 온통 걱정덩어리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이해하면 오해는 사라집니다. 사랑하면 세상은 온통 사랑이 넘쳐납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릅니다. 어떤 단어에 힘주어 집중하면 에너지는 그곳으로 모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픈 것이 싫어.’라고 말하면 ‘아픔’에 집중하는 것이 되고, 그때 에너지는 ‘아픔’ 쪽으로 흐릅니다. 그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은 ‘나는 건강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인 상태뿐 아니라 세상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는 길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대신 ’평화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농약투성이의 채소나 너무 많은 육류 소비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와 깻잎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이 싫어.’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가슴 뛰는 일이 좋아.’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불행한 것이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행복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으로 2021년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요. 잘 했어요. 잘 될 겁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하면서 “좋아요. 잘 했어요. 잘 될 겁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도 이렇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출산을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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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마리아
-양승국신부-
한 수도회 피정집에 머물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피정객들에게 있어 식사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주방 자매님을 못 구했더군요. 형제들이 밥해대느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저보고 발이 넓으니, 좋은 주방 자매님 한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분을 원하냐고 물었더니, 요구 사항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습니다.
연령은 4~50대에다 음식 솜씨는 기본. 교회 기관이니 신앙심이 돈독하고, 봉사 정신도 갖춘 분. 급여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 분. 성격이 밝고, 마음씨도 따뜻한 분.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 입이 무거운 분!
다 듣고 난 저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사님들! 그런 자매님 있으면 저부터 모셔가겠네요.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온 세상을 다녀봐도 그런 자매님은 없답니다. 특히 입이 무거운 자매님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습니다. 참 딱 한분 있기는 하네요. 우리 성모님!”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복음 2장 19절)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절대로 우쭐한 법이 없었습니다.
구세주 탄생이란 하느님의 큰 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로서 뭔가 기대할 만도 한데 결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평생 자신 앞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진의(眞意)를 찾아나갔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 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려고 발버둥칩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충분히 그랬을 겁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몸으로 메시아를 낳은 사람이라구. 내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구!”
그러나 마리아는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초지일관 겸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쓰시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다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한 몸 희생하여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조그만 기여라도 한다면 참으로 영광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마리아였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머리 위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끝없이 밑으로 내려서는 마리아를 하느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교회는 마리아와 관련된 교리가 보다 성숙되고 균형잡힌 것이 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관련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의 가르침도 은혜롭습니다.“마리아만이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어머니요 또한 그분의 신부(新婦)이십니다. 마리아는 열 달 동안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던 살아있는 감실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시기 전 당신 영혼 안에 먼저 잉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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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모친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입니다. 2021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며,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시작이요, 비롯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웃에게 축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소명을 거듭거듭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면, 그렇게 축복을 베풀어주시리라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새해 인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복을 빌어주면, 복이 흘러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축복을 빕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해가 갈수록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아빠, 나의 주님께 내맡기는 기도>
아빠, 나의 주 나의 전부시여!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 당신 하나뿐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바람과 지향과 뜻, 저의 믿음과 의탁, 저의 사랑과 앎,
저의 모든 것을 드리오니, 당신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이 바라시면 저도 바라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지 않으시면 저도 바라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가져가시면 가져가시게 하고,
당신이 주시면 거절하지 않게 하소서.
저의 고독과 고통과 죽음, 저의 모자람과 무능과 보잘 것 없음,
모순과 부조화, 열등과 두려움, 허약과 불순, 상처와 부끄러움,
저의 모든 조건과 상황, 현실의 일체의 것 안에서 당신의 일하심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빠, 주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오로지 당신의 뜻과 활동, 당신 섭리와 이끄심을 따라 살게 하소서.
저의 불신과 벗어남마저도 당신 손길은 마다하지 않으시니,
저를 온전히 당신의 믿음에 맡깁니다.
저의 미움과 배반마저도 당신 섭리로 이끄시니,
저를 온전히 당신 선의의 뜻에 맡깁니다.
자유의지와 저의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소유하시고 저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저는 당신의 소유이오니, 소유하시는 당신이 되나이다.
저는 단지 당신 안에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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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화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 군대가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 찬미는 예수님 탄생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찬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게 될 ‘인류 구원 활동’은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는 일이 될 것이라는 찬미입니다.
여기서 ‘평화’ 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구원,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는 그 평화를 ‘참 평화’ 라고 부릅니다.
‘참 평화’를 누리는 일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됩니다.
1) ‘참 평화’를 누리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그 두려움은 ‘참 평화’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은, 신앙생활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한 신앙생활과 회개로 사랑을 완성한 사람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몸의 편안함’을 평화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화를 전쟁의 반대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그런 착각입니다.)
만일에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 있다면,
몸이 편안한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 편안함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전쟁이 없더라도 긴장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몸’ 말고, ‘마음의 편안함’은 어떨까?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 없고, 죄책감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마음 편하게 잘 지냅니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참 평화’일까?
죄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죄에 속하는 쾌락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거짓 평화’입니다.
신앙인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참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2) ‘참 평화’를 누리는 일은 ‘사랑의 완성’에 직결된 일인데,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참 평화’는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여기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은,
공동체 모두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풍요로움을 누렸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또, 바로 앞에 있는 “큰 은총을 누렸다.” 라는 말과 합해서
모두가 다 ‘참 평화’를 누렸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말은, 이기심과 욕심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이기심과 욕심을 버린 것이 바로
모두가 다 ‘참 평화’를 누리게 된 비결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편안하게 지내면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도 없는 곳은 지옥일 뿐입니다.
아무리 편안하게 지내도, 지옥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평화일 수는 없습니다.
실제 인간 세상을 보면 자기와 세상 사이에 높은 성벽을 쌓아놓고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낙원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과 단절되어 있는 곳, 즉 지옥입니다.>
3) 지금 ‘영혼의 평화’(참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 평화는 아직은 미완성 상태인 평화이고,
완성된 평화를 미리 조금 맛보는 것일 뿐입니다.
(평화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고, 자만심에 빠지거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지상에서 누리는 평화가 아직은 미완성 상태라는 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온갖 종류의 박해와 환난도 공격이고, 유혹도 공격입니다.)
완성된 평화,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지상에서의 현재의 삶은 지나가는 중간 경유지입니다.
인생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라 저쪽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6-18).”
여기서 “나날이 새로워진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멈추어 서버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과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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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욱현신부-
새해 첫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 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주심으로서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성장까지도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축복은 365일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 루카 2,16-21: 여드레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8일은 깊은 의미가 있다. 하느님의 1주간이 꽉 찬 것이다. 이것은 주일로부터 주일로 부활주일로 완성된 모습이다. 이 8일이 된 날 할례를 통하여 아기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 날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Jeshua'-Jah, 야훼는 구원이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어제이며, 우리의 오늘이고, 또한 영원히 같은 분이시여라”라고 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때가 차자”(갈라 4,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히브리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에 속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하게 하셨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외아들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를 위한 전달자이시다. 이 하느님 자녀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닌, 참 자녀의 모습이다. 참 자녀는 상속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기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여(루카 1,38 참조)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따라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받아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 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게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성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하여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더욱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노력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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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어려움 중에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축복이 가득합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들에 살며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천사가 알려 준 대로 베들레헴으로 달려옵니다. 그들의 서두름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과 갑자기 맞닥뜨린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뒤섞여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은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의 방문이 갑작스러웠지만 그들이 전하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기의 부모만 아는 탄생의 신비는 일면식 없던 목자들의 증언으로 더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를 이미 영육으로 체험한 마리아는 어쩌면 이제 세상사로는 더 놀랄 일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동안 예수님을 품었던 자신의 존재 안에 이 모든 일을 깊숙이 품습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 20)
오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원자를 만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영혼으로 변모됩니다. 그들이 되돌아가는 삶의 자리가 황량한 벌판, 냄새나는 양떼 곁, 위험이 도사린 광야 그대로일지라도 이미 그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고자 모세에게 이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민수 6,23)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중재 없이도 만물에 축복을 내리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사제 가문에게 당신의 축복을 전하라고 하시지요.
"복, 지켜주심, 주님의 얼굴, 은혜, 평화"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미 주시려고 마음먹은 은총입니다. 그저 말씀만 들어도 배가 부르고 흐뭇해지는 축복들이지요.
축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제직을 직무로 맡은 이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불리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축복은 남녀노소,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누구나 다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영적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축복하는 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축복은 순환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 작정하신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후한 선물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축복을 통해 이웃과 세상으로 번져나갑니다. 이 축복은 돌고 돌며 점점 커져서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 찬양으로 다시 올려지고 이웃에게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복은 복을 부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갈라 4,7)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로 오신 이유는 율법 아래 묶인 우리를 속량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으니, 우리 모두가 종에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갈라 4,7)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신 아드님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거저 얻게 된 것이지요. 이 축복 앞에서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와 찬양, 찬미뿐입니다. 오늘 복음 속 목자들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허락하신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복을 빌어 주고 복을 얻고 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주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아직 전인류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봉합되기 전에 맞이한 새해는 여전히 어둡고 혼란스럽지요. 그리서 우리의 선하고 진실한 축복이 더욱 절실합니다.
축복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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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는
-김찬선신부-
올 새해에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새해 첫날 우리는 누구나 이 생각들을 하시겠지요?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면 올 한해 막살겠다는
또는 되는 대로 살겠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 나의 계획을 세우는 걸까요?
아니면 계획 없이 되어지는 삶을 사는 걸까요?
우리가 신앙이 없다면 그래서 하느님 뜻을 생각지 않고 산다면
계획을 세우고 사는 것이 옳은 삶의 태도이고,
되는대로 사는 삶은 앞서 얘기한 대로 막살겠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되어지는 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올해는 제 계획을 세우거나
세운 계획대로 올해를 살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되어지는 대로 사는 것이 올해의 계획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하느님께서도 원하시고
그래서 저의 계획에 둬도 무난한 것들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성찰하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선, 제가 행복한 사람이기를 바라시고,
저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행복하도록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겁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해도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두 번째 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니 자녀답게 살아가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데도 종종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데
하찮은 세상 만족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종으로 만들며 살지 않고,
이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품위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속에는 똥이 가득 차 있으면서 고고한 척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한 프란치스코가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살려고 하였지만
영적으로는 품위를 생각하며 살라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다음으로 하느님의 자녀에서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은 천주의 모친 축일이지요.
인간인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말인데
같은 인간인 우리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뜻이고,
주님 친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프란치스코는 이 주님 말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얘기하지요.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사랑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가 성모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니 우리도 올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되새기는 어머니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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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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