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Margaret K 2020. 12. 30. 07:04

2020 12 30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
.
(루가 2,36-40)

 

Worshiped night 
and day with fasting and pray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여기서 시메온과 함께 또 한 사람의 예언자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입니다. 그는 루카가 전하는 대로 7년 혼인 생활을 하고서는 여든넷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고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예언자로서 한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 낸 현명하고 거룩한 여인이었습니다.
한나의 삶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속 슬기로운 처녀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올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에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성실함과, 성전에서 단식과 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한나의 인내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본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비록 한나가 사람들에게 전한 이야기가 루카 복음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사 40―55장 참조)을 떠올리며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께서 바로 아기 예수님이시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혼인 생활의 열두 곱절을 성전에서 보낸 여든넷의 여인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대로 완전하고 거룩한 삶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가 한나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졌다고 많은 이들이 울상을 짓습니다. 그러나 마이너스 편익과 함께 반대로 플러스 편익도 교차한다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 이동이 줄면서 항공 산업, 자동차 산업, 운수 서비스업 등은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탄소 등 오염물질 배출이 줄어들면서 맑은 공기라는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원격 근무,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사무실 밀집 지역 식당가에는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주거지에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영화관에 관객이 끊기면서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좋은 영화를 값싸게 감상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유흥가 술집에 손님이 줄면서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가족과 보내는 저녁 시간이 늘면서 관계가 개선되어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를 봅니다. 그녀는 남녀 차별이 심했던 시대를 사는 여자였습니다. 또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과부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이는 한나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도 정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다렸기 때문에 그 모든 부정적인 상황이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뒤바뀝니다.

우리에게도 부정적인 상황은 자주 주어집니다. 내 편은 하나도 없고 이 세상 안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상황에 갇히면 안 됩니다. 그냥 주저앉아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한나 예언자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에 흔들려서 포기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부정적인 상황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희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코로나 팬데믹을 잘 이겨냈으면 합니다.
행복이란 자신의 몸에 몇 방울 떨어뜨려 주면 다른 사람들이 기분좋게 느낄 수 있는 향수와 같다(랄프 왈도 에머슨).


누구도 닮지 않아서 예쁜 아기

아주 예쁜 꼬마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기 참 귀엽고 예쁘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니? 엄마 닮았어? 아니면 아빠 닮았어?”라고 말합니다.

이 물음에 이 꼬마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요. 아무도 닮지 않아서 이쁘대요.”

엄마도 아빠도 닮지 않아서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의 대답이 참으로 당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아이의 대답처럼 삶을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감정 폭발하는 다혈질인가요? 활력이 넘치는 분입니다.

아들이 고집이 너무 세다고요? 소신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늘 지적만 한다고요? 참으로 세심하고 섬세한 것입니다.

딸이 너무 소심하다고요? 조심성이 있는 겁니다.

세상이 롤러코스터 같다고요? 네 맞아요. 세상은 놀이터입니다.

생각을 뒤집어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정말로 다른 생각이 보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알려줄 예언자를 빨리 찾아주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 예언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말합니다. 시메온과 마찬가지로 한나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속량’은 피 흘림을 통한 죄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언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나 축구선수의 자녀로 태어나면 그 방면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남들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런 분야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가 없기에 또한 훌륭한 성과를 내게 됩니다.

 

      올해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 씨도 감독의 길로 들어서 자신의 팀이 U18 무패 우승하여 최우수지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은 이을용 코치의 아들 이태석이었습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갈 길을 알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늦게서야 찾으려고 했던 사람과의 차이가 극명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부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그 길을 아기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서 이 아이를 어떤 길로 이끄시려고 하는지 그 길을 빨리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속 ‘사하라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비셀 마을 원주민들은 켄 리먼(Ken Lehman)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한 번도 사막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막을 벗어나려고 길을 떠나도 걷다 보면 결국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게 마을 원주민들이 말한 이유였습니다.

      1926년 이 마을을 찾은 영국인 켄 리먼은 이 사실을 알고 엑터라는 마을 청년에게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북극성을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리먼의 가르침대로 엑터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북극성을 보고 걸으며 마을 원주민 중에서는 처음으로 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사막의 개척자가 되어 마을 한가운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방향만 찾으면 천천히 걸어도 방향 모르고 달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고생하면서도 훨씬 멀리 갑니다. 그러니 일찍 그 방향을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하고 싶은 일이 하도 많아서 90개나 적습니다. 모두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중생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이가 들어도 평생 해 놓은 것이 없어 인생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밑에 물이 있다는 확신을 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 늦게나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만나 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방향으로 나아온 것에 지금까지 후회가 없습니다. 힘이 들어도 좋은 열매가 계속 맺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늘 예수님의 미래를 말해 준 한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5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여든네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는 그 긴 세월을 혼자 성전에서 기도와 절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한 삶이 아니라 한 길로 평생을 나아온 삶입니다. 그 정도면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뜻을 평생 따라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누군가의 삶을 예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에 멘토의 조건 네 가지가 나옵니다.

 

1. 해당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낸 전문가일 것.

2. 타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됨).

3. 평생 자신과 싸움을 하며 성장하는 사람일 것.

4.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고 한 발 내딛게 만드는 사람일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자신과 싸움을 통해 자신을 이긴 사람이어야 하고 이웃의 발전에 관심이 있어 그 사람도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아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도 저처럼 책을 통해서도, 혹은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분명 어떤 좋은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분명 우리 부모 주위에, 혹은 아이들 주위에 놓아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이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오늘 3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하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입니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강아지 똥은 민들레 씨를 만나면서 거름이 될 수 있었고강아지 똥은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길가에 버려진 강아지 똥누구나 외면하는 강아지 똥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다른 하나는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입니다호주의 원주민들은 자연을 파괴하고자원을 낭비하고전쟁을 일으키는 지금의 인류를 돌연변이라고 이야기합니다원주민들은 잘 씻지 않아도 냄새가 나지 않고 배설물에서도 악취가 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인간은 잘 씻고 향수를 뿌려도 냄새가 나고 배설물에서도 악취가 났습니다호주의 원주민은 이웃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인간은 돌연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끝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습니다집 앞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습니다아침이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지금이야 대부분의 집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지만 당시에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집이 많았습니다신학생들과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하면서 문득 배설물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우리의 몸에는 변이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의 몸을 냄새난다거나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교회는 원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마찬가지로 원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거나죄에 물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우리가 부모님께 몸을 물려받듯이 교회는 신앙인들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가르쳐왔습니다원죄에 대한 교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었습니다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이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악한 경향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없애려는 의미입니다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죄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그리고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이야기합니다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한나가 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긴 까닭은 무엇일까요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고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루 남은 2020년을 보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아침마다 묵상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미국 뉴욕에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신앙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그 이유를 알았다면 행복한 1년이 되었을 겁니다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다면 하느님 나라에 영원히 썩지 않는 보화가 쌓였을 겁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속량

-이영근신부-


성탄 팔부 축제 제 6일입니다.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 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했듯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마치 유딧이 이스라엘을 구한 다음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말입니다(유딧 15,14-16,17).

이처럼, 한나는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사가는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밤낮으로 기도하며 성전에 머물며 우리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기를 말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의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반영억신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주변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늘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청주교구는 내년 1월12일 오후 2시에 사제, 부제 서품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3명의 사제 후보자와 6명의 부제 후보자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피정에 임하게 될 후보자를 위해서 희생의 기도를 봉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보자들이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그들이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빕니다.

 

'한나'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사제. 부제 후보자도, 우리도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모 마리아  

 -송영진신부-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6-38).”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시메온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했고(루카 2,29-32),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난을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2,34-35).

한나도 시메온이 한 것과 같은 찬양과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한나의 말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시메온이 한 말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두 예언자가 같은 예언을 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나의 신앙생활 모습에서 바오로 사도가 과부들에 관해서 한 말이 연상됩니다.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대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몸입니다(1티모 5,5-6).”

“과부 명단에 오를 수 있는 이는 예순 살 이상으로 한 남편의 충실한 아내였고,

선행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여자여야 합니다. 자녀들을 잘 길러 내고

나그네를 후대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온갖 선행에 몸을 바친 사람이어야 합니다(1티모 5,9-10).”

한나는 과부로서도, 또 신앙인으로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한나의 삶’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복음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나의 삶’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언자 한나의 삶’ 자체가 ‘성모 마리아의 삶’의 예고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새로운 성전’으로 오신(요한 2,21) 예수님 곁을 떠나는 일 없이

일생 동안 충실하게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모 마리아를 암시하는 것과 같은,

또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루카복음 21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동전 두 닢이 하루 생활비였던 가난한 과부의 모습에서

가난한 과부였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헌금함에 넣는 모습에서

자신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2-16).”

죽은 젊은이가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아마도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시면서 큰 고통을 겪으실

성모 마리아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그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큰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신의 부활로 성모 마리아가 ‘큰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모든 이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건이지만,

성모 마리아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 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서

“이것은 하느님의 기적이다.” 라는 단순한 뜻으로 이 말을 했지만,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다.” 라는 것을

말하려고 이 말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를

어머니에게 맡기셨고,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요한 19,26).

우리 교회는 이 일을,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당신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신 일로, 또 당신의 교회를 성모 마리아의 자녀로 삼으신 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1)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이고, ‘삶 전체’를 봉헌하신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이고, 주님이신 분의 어머니이신 분으로서

전체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예수님 승천 후의 교회의 모습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성모 마리아는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계셨고, 아마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지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때에도 그 현장에 계셨을 텐데,

일생 동안 겪어야 했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과 같은 고통이(루카 2,35)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 열매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성모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복음: 루카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조욱현신부-


시므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므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때도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여든네 살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한나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의 삶이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우신부-


마음이
깊어갈수록
이야기도
깊어진다.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이다.

성탄은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로
돌아서게 한다.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신
내려옴의
이야기이다.

내려옴이
믿음이다.

믿음을
배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믿음을
이야기하신다.

이야기는
말씀이 되고
믿음은
속량이 된다.

나와 너를
변화시키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구원이 필요한
우리들이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의
이야기이다.

성탄의
이야기는
우리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우리 마음은
성탄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야 한다.

마음을 살리는
이야기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의 정수를 보여 주십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날, 그 자리에 함께했던 한나라는 예언자의 삶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위안을 맛본 짧은 결혼생활이 끝난 뒤에 그녀는 온 존재와 삶을 하느님께 걸었지요. 자신의 존재를 그분 앞에 두고, 온전히 그분의 소유로 살아간 것입니다.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예언자인 그녀의 역할은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목소리니까요. 이제 직접 눈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본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감사를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은 대부분 감사로 채워지게 마련이니, 그녀의 반응은 놀라울 것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거기에 더하여 직접 눈으로 본 구원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언에 증언이 보태어진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번잡해지고 향락이 일상화되어도 내적 삶을 소중히 가꾸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나의 증언은 견고한 희망의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과 같을 겁니다. 함께 듣고 공감하고, 믿고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훨씬 선명해지니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1독서의 말씀은 세상의 욕망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물론 "세상"이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곳으로서의 세상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각자의 평화와 충만함을 누리는 장이기에 소중하고 거룩합니다. 동시에 세상은 온갖 욕망과 불의와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장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 서간 저자가 말하는 "세상"의 의미는 어둠의 힘이 장악한 세속을 가리키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겉꾸민 허영과 과시, 눈속임과 위선, 질시와 경쟁, 증오와 기만의 태 안에서는 슬프게도 사랑이 쉽게 유산되어 버리지요. 진실도 선함도 착상할 곳을 찾지 못해 쉬이 유실되고 맙니다. 욕망하는 무언가를 들이면 들일수록 더 공허해지는, 심연의 구렁과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 속 한나는 영원히 남는 사랑에 전 존재를 던진 지혜로운 여인의 표상입니다. 그녀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만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삶의 모든 공간을 채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녀의 사랑에 하느님이 매료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시공 안에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삶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재산이나 인맥, 권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에서 우러나는 것이지요. 진정한 행복은 주님의 충만함 안에 녹아들어가 그분 충만함의 일부가 된 영혼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한나처럼 말이지요.

신구약의 접점에서 복음 안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의 삶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기원합니다. 아기 예수님도 그녀와의 만남을 기뻐하셨을 것이고, 마리아와 요셉도 큰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에서 조금씩 더 깊이 주님을 섬기는 은총으로 들어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한나처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벗님을 축복합니다.   

 다 지나가는 것

 -김찬선신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은 지나간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이 우리를 지나가는가요?

독서가 그리 말하지만 실은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고

세상은 계속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요?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세상은 남아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아픈데 다른 이들은 건강한 것이 괜히 야속한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데 세상은 여전한 것이 야속하고

심지어 그런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욕망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지나가게 욕망을 내가 놔야 합니다.

지나가는 욕망을 내가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망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요.

욕망은 항상 끝이 허무 아닙니까?

욕망은 지니고 있는 동안은 근심과 걱정뿐이고, 지나고 나면 허무뿐입니다.

 

욕망과 근심 걱정뿐 아니지요.

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내게 계속 머물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만

슬픔도 마찬가지로 내게 계속 머물지 않고 떠나가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니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 시가 맞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러니 이 시와 새옹지마의 교훈을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방의 한 노인이 소중히 여기던 말을 잃고 슬퍼했는데

그 바람에 준마를 얻게 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떨어져 절름발이가 됐는데

절름발이가 된 것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었지요.

성한 다른 집 아들들은 다 죽었지만, 아들은 살게 되었다는 얘기지요.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게 다 내버려 두고

오는 것, 잡아야 할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월이 가고, 한 해도 다 갔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는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세월이 다 가고 한 생이 끝나는 날에 나는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