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27일 일요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Margaret K 2020. 12. 27. 07:42

2020년 12월 27일 요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2,22-40)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filled with wisdom; 
and the favor of God was upon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대공황 때에 미국의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여덟 살 난 아들은 서로에게 줄 성탄 선물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들은 받고 싶은 선물을 서로 그림으로 그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성탄 전야에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멋진 자동차를,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아들을 위하여 많은 장난감을 그려 주고받았습니다. 서로 그림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가운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엄마는 왜 저에게 선물을 달라고 하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아들은 자신이 그린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위에는 ‘아빠’와 ‘엄마’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아들의 손을 꼭 쥔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큰 글씨로 ‘나의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 성탄 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에 따라 맏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의 맏아들을 살려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자 바쳤던 이 예식을 통하여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아기 예수님께서 선물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도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시작을 인식하고, 이를 찬미가로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먼저 가정 안에서 펼쳐집니다.
아이들은 단순하지만 때때로 심오한 방법으로 문제의 핵심에 이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 예화의 아들도 아기 예수님께서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가족의 삶에서 서로 지킬 것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이땅에서 오신 사랑

-함승수신부-


어느 주일학교의 성탄제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빈방 있습니까)’이라는 성극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을 방문한 마리아와 요셉이 따뜻한 방을 구하기 위해 여관들을 전전하는 장면에서, ‘여관주인 3’ 역할을 맡은 아이의 대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요셉이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 “혹시 머물 방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쌀쌀맞은 태도로 “방 없어요!”라고 말하면 되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아이의 순서가 지나갔고 그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 방이 있는지 물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은 여관주인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혹시라도 대사를 잊은 것은 아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대본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셉. 여기 빈방이 있어요.”

아이는 대사를 잊은 게 아니었습니다. 연극에서맡은 배역과 자기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마저 요셉 일행을 문전박대하면예수님이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실까걱정돼, 오랜시간열심히 연습한 배역을 망쳐가면서까지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이 아이처럼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는 듯합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기념하는 미사에 참여할 시간에, 지인들과 ‘성탄절 파티’를 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선물을 주는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많아도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잔치’를 지내면서도 그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분의 탄생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씁쓸한 현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지요. 아니, 그땐 그 이유가 ‘오해’와 ‘미움’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무관심’ 때문이라는 점에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그분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살과 피를,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기꺼이 떠안으신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걱정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하며 돕는 일은 작은 희생과 사랑만으로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직접 그 가난을 겪으며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누리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다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를 바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사랑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권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봉헌하신 희생 미사를 기념하고 그분 덕에 구원받게 되었음을 기뻐하자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하느님께서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늘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본능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룰 때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 되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장들, 힘냅시다

-장재봉신부-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에 교회는 하늘 아래 가장 향기로운 곳, 성가정을 기리며 온 세상을 축복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해를 추억하는 우리의 마음은 그리 밝지가 않은데요. 지난해의 삶들이 결코 예사롭지도 평범치도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온 세상이 참으로 독특하고 생소한 날들을 경험해야 했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지금 이 글을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 사랑이 오롯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성가정의 축복을 고스란히 전달하여 모든 이들의 삶에 생기가 되살아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인의 찬미와 감사는 편치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무런 조건 없이 마냥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아기 예수님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기뻐하시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니 말입니다. 우리 삶을 스산케 하는 모든 어둠은 빛이신 주님을 결코 이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성가정의 가정사를 세세히 들려주지 않지만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분들의 삶이 결코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키운 남자, 요셉 성인의 심정이 마음에 담기는데요. 그날 요셉 성인이 봉헌한 예물, 비둘기 두 마리는 양 한 마리를 바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한 예외 조항이었다는 사실이 괜스레 아프게 다가오는 겁니다(레위 11,8 참조).
 

두초 디 부오닌세냐 ‘성전에 바침’ (부분)

하느님께서는 산모의 정결례를 위한 예식에서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를 바치고 속죄 제물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바칠 것을 명하셨는데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예물을 마련했던 걸 보면 성가정의 살림살이가 결코 풍족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는 걸 알려주니까요.

오늘도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배려했던 요셉 성인의 성정과 됨됨이를 깊이 추앙하며 기립니다. 하지만 그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하느님께 바칠 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양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장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옹색하게 작은 새 두 마리를 준비하면서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마음속 그득, 못난 가장의 미안함이 쌓이지는 않았을까요? 문득 아내를 마구간에서 몸을 풀게 했던 일도, 아기 예수님을 추위에 떨게 했던 것도 다 자신이 못난 탓이라 싶지는 않았을까요? 스스로 기가 죽어서 말도 조심조심히, 눈길도 조심조심히 성모님과 예수님을 살피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오늘 이러한 요셉 성인의 모습에서 이즈음, 고단한 삶으로 힘에 부쳐 계신 가장들의 처진 어깨를 봅니다.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늘 작아지는 가장의 시린 뒷모습을 봅니다. 그날 요셉 성인의 모습이야말로 홀로 모든 걸 짊어지고 감내하며 쓴 소주 한잔 들이키며 힘을 내는 우리네 아빠들의 모습이라 싶은 겁니다. ‘힘내세요’ 큰소리로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성가정을 이루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더 크고 넓고 으리으리한 삶을 선망합니다. 이런저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갖기 위해서 애를 쓰며 지냅니다. 그런데요. 만약에 성가정의 삶이 그런 세상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마련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요. 성가정을 꾸리기 위한 조건이 풍족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에 있었다면 그분들의 삶이 그렇게 옹색할 까닭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저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제 주위에 놓인 많은 것들, 방안에 겹겹이 자리한 이 허다한 것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 잡다한 것들로 하느님과의 사이에 벽이 쳐진 것은 아닌지, 주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닐지, 우려합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 구경하는 처지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염려합니다. 성경 말씀마저 지식으로 간직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삶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는 모습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성가정은 매일 매일 시간 시간마다 마음을 쏟아붓는 기도가 살아있는 곳입니다. 하느님 앞에 정직하고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기도의 골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화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마구간처럼 초라해도 상관없습니다. 작은 새 두 마리밖에 마련할 수 없는 처지라 해도 문제없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께 마음의 지성소를 내어드리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수시로 주님과 대화하며 그분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첫걸음임이며 성가정을 꾸리는 제일의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무한 긍정의 존재로 살아갑시다. 세상의 세파가 제아무리 험할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참 평화를 잃지 않는 하늘 가정의 가족이 되어봅시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 주님의 평화 덕분에 “영혼이 꿰찔리는”아픔마저 튼튼한 믿음과 탄탄한 희망의 근거로 삼는 참 지혜의 소유자가 되시길, 마음 모아 축원합니다.

 가족

김상우신부-


유학 중에 종종 고향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던 형제자매들, 동네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산자 락, 학창 시절의 방황과 꿈이 깃들어 있는 비좁은 골목, 어 머니께서 지어주셨던 따뜻한 밥…. 그때는 그토록 지겹고 싫었던 것들까지 지금의 저 자신을 만들어준 소중한 선물임 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모든 기억에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 여봅니다. 이번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교 회는 예수 성탄 대축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기념하며, 그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와 친 교의 가정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 봐 야 할 화두입니다. 한편 현대의 가정은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1인 1가 구 가정 등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 로운 국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가정공동체의 의미를 어떻게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일 복음말씀(루카 2,22-40)에 서 그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마리아와 요 셉이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렀을 때,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 를 만나 펼쳐지는 상황이 복음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시메 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 는 이’로 구세주를 직접 뵙기 전에 눈을 감지 않을 것이라 는 성령의 말씀을 믿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을 받아 안으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 해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 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라는 예언을 전합니다. 그렇다면 시메온의 예언을 들은 마리아의 마음은 과연 어 땠을까요? 또 요셉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자렛 성가정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시메온의 예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근심 걱정이 전혀 없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 기준에 따라 ‘완 벽한’ 가정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련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일치와 친교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참다운 의미의 ‘가족’이 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말하지 않아도 먼저 이해해 주며, 있는 그대로의 못난 모습까지 안 아주기에 ‘가족’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상처가 되며 심지어 원수까지 되어 버리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도, 가정공동체의 화해와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 도 한 분뿐이십니다. 여러분 각자가 속해있는 가정공동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화해와 용서가 필요한 가족의 얼굴을 떠올 리며 짧은 화살기도를 바쳐보시기를 청합니다.

 소중한 인성의 못자리, 가정

하상범신부-


찬미 예수님!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사랑으로 항상 평화롭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 나 자라서 어른이 되고, 삶 전체를 통찰하며 그 정점에 이를 때까지 삶의 기틀이 되는 인성은 가정을 통하 여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그런 가운데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일이 무척 이나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은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길흉화복을 운명론적으로 이해하여 팔자타령으로 한숨짓거나, 한 번도 본 적이 없 는 조상들 탓으로 치부하며 치성을 드려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과학 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바탕을 갖춘 인성을 신앙에 맞물린 기도생활과 더불어 지 혜로운 삶의 연결고리를 찾고, 자신의 내면을 올바르게 다독이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낼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라 할 수 있겠습니다. 루카 복음 10장 27절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자아의 인성을 하늘에 붙들어 매 고 사랑의 정점을 완성하는데 꼭 필요한 천상적 생명력의 계시적 가르침이자 인성을 더욱 풍요롭게 물들이 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가정은 소중한 인성의 못자리입니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서로를 사랑으 로 도와 건강한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사회적 종교적 환경을 토대로 하늘을 향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의 얼굴이 밝게 빛날 때, 그 자리가 바로 천상입니다. 온갖 피조물들의 환성 가득한 낙원임을 온몸으로 깨우 칠 때까지 하느님의 이끄심에 오롯한 마음으로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복되게 꾸려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아 울러 가난하고 고통받는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드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거룩한 성탄 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서도 따듯하고 친절하게 배어 나와 주변으로 번져가는 파스카의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또 하나의 성가정이 되고자

-석판홍신부-



 인간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을 통해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이 에 서로를 챙겨주고 사랑으로 돌봐 주는 가정이야말로, 소중한 ‘보금자 리’이자 ‘행복한 삶의 기반’입니다. 가정은 세상살이에서 받는 온갖 상 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고 힘을 북돋 아 줍니다. 이러한 가정이라는 ‘관 계’ 속에서 우리는, 가족과 함께 서 로 성숙되고 성화(聖化) 됩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 무리 부부라 하더라도, 배우자가 매 사에 100% 자신과 똑같기를 요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관계는 배우자를 숨막히게 만듭니다.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성 그리고 가치관 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배 려입니다. 이에, 서로 맞춰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서로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려 면 그 힘을 기도를 통해 구해야 합 니다. 가족 간에 서로 참아주고, 기 다려주며, 감싸주는 힘은 기도를 통 해 나옵니다.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을 위한 간 절한 기도는, 기적과도 같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변화의 축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아가,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 탁하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모님 과 요셉 성인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성가정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그 저 행복하기만 한 그런 가정은 아니 었습니다. 성가정이란 가족 중에 말 썽부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정 이나 어떠한 근심 걱정도 없는 가정 이 아니라, 세파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 구하는 가정입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예수님. 이분들은 고통 과 시련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했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많은 아픔 과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며 살았습니다. 올 한 해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례 없는 이 고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 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과 가족 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 분과 역할을 되짚어 보고, 모든 것 을 하느님께 내맡기며 그분 뜻에 순 종하는 ‘또 하나의 성가정’이 되고자 노력했으면 합니다.

믿음과 봉헌

-키엣대주교-


세상 모든 부모의 고민은 아마 자녀 교육일 것입니다. 그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나자렛의 성가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귀절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습니다.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성령께서는 나이가 많은 시메온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고 어느 날 그는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갔습니다. 그 곳에서 부모에게 안겨오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는 죽음과 같은 어두운 밤에 사랑과 생명의 빛을 밝히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성령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였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과 봉헌

마리아와 요셉은 당신의 자녀를 스스로 바치쳤습니다. 자녀를 바쳤다는 것은 겸손의 표현일뿐만 아니라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한 믿음과 신념이 필요합니다. 성가정이야말로 믿음의 가정의 표상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순명하셨고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되새겼습니다. 성요셉 역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봉헌은 진실된 믿음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덕 위에서 이삭을 바쳤고 성모님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쳤습니다. 자녀를 봉헌한다는 것은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는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봉헌의 의미를 아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꼭 필요한 참교육의 기본일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은 의혹에도 의심을 하고, 나의 허술함을 보일까 마음의 문을 걸어닫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가족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과 같은 가정이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예수님들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 성전에 올려지시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모습을 경외합니다. 저도 아기 예수님의 효심을 본받아 주님의 계명을 지킬것입니다.

주님, 진심으로 저희가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어둠이 저희의 영혼을 가리지 않고 주님 사랑의 빛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참으로 어둡고 답답한 이번 성탄절에 다시 오신 아기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습니까?

2. 봉헌과 믿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3.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성가정의 사랑과 믿음, 봉헌을 본받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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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길가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이 노점상에는 가격을 알리는 푯말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에 300원, 세 개에 천 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 개를 사면 더 싸야 하는데, 이 가게는 여러 개 사면 더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격 푯말이 너무 이상해서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서 이렇게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 개를 살 만큼의 돈이 없거든요.”

이런 이유로 적게 살수록 오히려 이득이 될 수 있도록 가격 책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라서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전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드러난다면 함께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떨까요? 가족 안에서 합리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줬으니, 나도 하나를 받아야 한다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사랑의 법칙이지요. 받은 것이 없어도 기쁘게 모두 줄 수 있다고 하는 사랑의 법칙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어떤 불합리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든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 안에 세상의 합리적인 기준들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세상의 합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도 있었지만,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는 사랑이 충만한가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 보면, 그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라인홀트 니부어).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

어느 형제님께서 신부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계속 성당에 나와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신부님 강론을 계속해서 듣고 있지만, 단 한 편도 기억하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굳이 성당까지 나와서 시간 낭비를 해야 할까요?”

이 말을 듣고서 신부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형제님, 혹시 일주일 전에 드셨던 저녁 메뉴가 기억나십니까?”

“아니, 일주일 전에 먹었던 것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오늘 아침에 먹은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형제님, 메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굳이 식사를 왜 하십니까? 식사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 형제님은 “신부님, 식사하지 않으면 제가 살 수 없잖아요.”라면서 당연한 것을 뭘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식 메뉴를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살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처럼, 강론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성경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도 성당에 나오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가야 하는 이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억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성가정은 석탄에서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 곳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은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 아드님의 양부, 이렇게 셋입니다. 어마어마한 집안입니다. 이렇게 세 분이 모두 엄청난 분들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 분이 가정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모두 무엇이 되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예전에 철로 금을 만들려는 등의 연금술이 성행했는데, 어떠한 재료에 그렇게 변형될 수 있는 촉매제와 결합하는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그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우선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고 완성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석탄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석탄의 원소 구성은 매우 2차원적이기에 불안정하고 다이아몬드의 탄소 원자는 3차원적으로 매우 결속력 있게 뭉쳐져 있습니다. 2차원적인 분자구조를 변형시켜 3차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석탄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3천℃ 이상의 열과 3만 기압 이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우선 3천도의 열과 3만 초고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 물질은 이 열과 기압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지하 200km 이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일을 해냈습니다. 1955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탄소를 이용해 인공다이아몬드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공다이아몬드는 현재 유리 칼이나 다른 금속재를 깎는 연마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산보다야 그 아름다움과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흑연과 같은 것으로 보석과 버금가는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고 있기는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석탄으로 태어납니다.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잃었지만, 그 가능성만은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 닮아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과 압력이 필요합니다. ‘열은 은총’이고 ‘압력은 진리’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진리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과 진리가 인간 분자구조를 바꾸기 위해 생성하는 힘은 ‘믿음’입니다.

 

      항상 예로 드는 것이지만, 늑대에게 자란 아이를 생각해봅시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석탄의 상태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인간이라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았기에 인간이란 분자구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이상 그 아이는 절대 두 발로 걷는 일은 없습니다. 몸만 인간이지 본성은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늑대 가운데 살고 있다면 절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을 이미 실현하였기에 행복합니다. 인간 눈으로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인간에게 발견된다면 인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과 가르침, 즉 은총과 진리가 3천℃, 3만 기압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아이는 바뀌지 않습니다. 분자구조를 바꿀 믿음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발견된 늑대에게 키워진 이 아이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습니다. 머물기는 하되 그들의 믿음을 바꿔줄 사랑과 가르침이 그 정도를 채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인간이 되려면 그 아이들의 친부모와 버금가는 사랑과 가르침을 지닌 공동체를 만나야 합니다. 그 공동체가 3천℃의 사랑과 3만 기압의 가르침을 가졌다면 그 공동체의 모든 인간은 반드시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이 아이들을 참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석탄을 보석으로 만드는 그릇입니다.

 

      이런 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를 참 인간으로 만들어줄 부모를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는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을 생성할 온도와 기압이 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손에서 큰다면 그곳에서 머무는 것은 그저 허무한 고생일 뿐입니다. 가정은 이렇게 석탄에서 보석으로의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는 공동체이고 그래서 부모는 이 세상의 작은 하느님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은 이보다 더 나아갔습니다. 어머니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란 믿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위의 단계가 있다면 바로 성모 마리아가 그런 분이십니다. 여기서 실제로 새로 태어나는 분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여보, 또 아버지라 부르는 그 분위기에서 산다면 요셉 성인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꼭 부모가 자녀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자녀들 속에서는 그 사람이 부모라도 자녀들의 믿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믿음으로는 자녀가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 안에서 보석의 가능성을 보아야 하고, 교회는 새로운 가정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합니다. 교회 자체가 자신을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면서 신자들 가정에서 자녀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가정이 참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참 하느님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인간의 자녀들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온도와 압력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새고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성가정은 한 가정의 믿음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교회 또한 어떤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그 온도와 압력을 품을 수 있는 수준이 안된다면 그 가정이나 교회는 누군가를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 고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머물기만 한다면 석탄과 같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제조 공장이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오늘 12월 27일은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그러나 오늘이 주님 성탄 다음에 오는 주일이기에 사도 요한의 축일 대신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요한 사도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처럼 요한 사도는 기꺼이 자신의 축일을 성 가정 축일에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전례력으로 요한 사도의 축일을 지내지는 않지만 축일을 맞이하는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저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나는 더 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양보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성 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가족들이 모두 육체적으로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가족이 아프면 맑은 날에 먹구름이 끼듯이 걱정과 근심이 생깁니다정신적으로 아픈 가족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습니다모두가 건강하면 좋겠지만 뜻하지 않게 아픈 가족이 생기곤 합니다화목한 가정은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고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직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실직은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합니다화목한 가정은 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취미활동을 하거나봉사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좋습니다추억이 있으면 대화할 수 있는 소재가 됩니다화목한 가정은 같은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감사드리고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위로하고가족들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신앙이 있는 가정과 신앙이 없는 가정은 어려운 상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나자렛의 성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성 가정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순명은 성 가정의 시작이 되었습니다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성 가정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비록 가족이 건강하지 못할지라도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지라도대화가 부족할지라도신앙이 서로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성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 성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른 소경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육상 경기는 항상 출발선이 있습니다이 출발선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우리의 신앙생활사회생활경제생활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가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요교회입니다이 가정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와 윤리를 배우게 됩니다인류의 구세주요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도 바로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이웃을 돕는 가정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가정(聖家庭)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전삼용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훌륭한 선생님 한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인간극장에 소개되어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주인공입니다. 선천성 시각 장애를 딛고 일반 중학교 비장애 학생들의 국어 교사로 당당히 교단에 서신 강신혜 선생님이십니다.

  

장애인으로서 일반학교 교사로 임용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휼륭한 부모님과 든든한 안내견 미래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 때 하고 싶은 말을 몇 십번이고 반복해서 예행 연습하는 모습,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감동을 준 것은 첫 출근날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따님이 안내견 미래와 함께 잘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인사하며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수없이 예행 연습을 한 길이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출근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을 나서자 마자 계단도 내려가야 하고, 횡단보도도 건너야 하고, 지하철도 탔다가 내려야 하고, 여간 복잡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첫 출근인데 늦으면 어떡하나? 미래가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컸지만, 씩씩한 미래의 도움으로 별탈없이 선생님과 미래는 학교 정문을 통과합니다. 선생님은 무사히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환한 얼굴로 교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서부터 전철, 그리고 학교까지 20~30미터 뒤에 몰래 숨어서, 계속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출근길 내내 조마조마했던 어머니는 따님과 미래가 교문을 통과하자마자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행복한 얼굴로 뒤돌아섰습니다.

  

첫출근길 시각 장애인 따님의 뒤를 멀리서 조심조심 쫓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가까이는 아니더라도 저 멀리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시리라 믿습니다. 여차하면 달려오시려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훌륭한 부모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따님에게 확신갖고 강조하셨습니다. 장애는 불행의 단초가 아니라는 것, 장애는 조금 다른 것일뿐이라는 것, 극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높은 벽 앞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항상 함께 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든 분들, 너나할 것 없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 성가정(聖家庭)꿈꿉니다. 그러나 희망사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는 것을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초단기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절규합니다. 한때 목숨바쳐 사랑했던 그였는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는 모습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요 전부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이제 머리가 커졌다고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찌릅니다.

  

성가정(聖家庭)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필요합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요구됩니다.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멤버들도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습니다. 워낙 특별한 가정,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신비스런 가정, 영적인 가정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감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특별한 말 한 마디를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복음 2장 34~35절)

 

 

성가정의 주요 구성원이셨던 마리아 역시 성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수시로 영혼이 칼에 꿰찔렸습니다. 물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천국 체험도 앞당겨 맛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상처와 희생,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가정은 모든 생활과 관계의 기초이며,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파괴되고, 가정이 새로워지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교회도 새로워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가정, 가족

 -송영진신부-


1) 바리사이들이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부부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주신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가족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을 자기의 소유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착각에서 많은 비극과 불행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을

자기가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맺은 일’을 자기가 했으니 ‘푸는 일’도 자기의 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들은 부부의 만남은 ‘인연’이라고,

또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정을 이루는 일은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신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혼인과 가정을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그 ‘신의 일’과 ‘신의 힘’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곧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2)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의 ‘형제들’을 ‘사촌형제들’로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가족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신앙인의 가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이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또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가정은 ‘내 마음대로(내 욕망대로)’ 해도 되는

세속의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정생활’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이 하나인 사람입니다.

가정은 가족으로 이루어진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신앙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큰 가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1테살 4,3-5).”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1테살 4,7).”

이 말은 남편들에게만 하는 권고가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모든 사람에게) 하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통해서, 또 가족과 함께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3) ‘버림과 따름’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 라는

앞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가족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고,

가장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족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이고,

신앙 여정의 동료입니다.

만일에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으로 간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4) ‘따름과 보상’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가족을 버려야 한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애착심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가족이 여러 곱절로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고 참된 사랑’으로 완성되고 충만해진다는 뜻입니다.

 

5) 부활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부활 후에는 가정이 해체된다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모든 가정이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가정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정생활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성된 가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들을 초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가족부터 먼저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그 사랑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증폭되어야 하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조욱현신부-


성탄 8부 내 주일을 성가정축일로 지내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오늘 축일은 사실 성탄축일의 연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도구 역할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에서 나자렛 가정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해준다. 우리는 나자렛 가정을 통해 자신들을 재발견할 수 있을 때, 올바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나자렛 가정이 항상 모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할 수 없는 사랑이 타오르게 하는 능력(에페 5,25-33 참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가정의 근본이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사랑은 가정을 하나로 만들고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교회가 된다.

 

제1 독서는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경을 드려야 할 때와 그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이며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모공경은 바로 자기의 죄를 벗는 길이며, 자기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보증이 된다. 그것은 가정이 주님께서 원하신 제도이며, 그분의 사랑 계획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가정축제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생활, 즉 우리와 같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일상의 가정생활을 거쳐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와 그 때문에 은밀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마음(마태 1,18-25 참조)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자렛 가정은 가정이 근본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요셉의 행위는 사랑에 근거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 봉헌으로 이해하는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행위’(22-24절)이다. 이 봉헌은 장차 십자가 위의 봉헌을 예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태중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그 생명을 사랑과 감사의 ‘봉헌’으로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라고 하더라도 막 피어나려는 생명을 질식시켜버린다면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불경죄까지도 범하게 된다.

 

셋째는 마리아가 아들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교육적인 가르침이 있다. 즉 가정을 이루는 사람 각자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살고 또한 그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알며,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39-40절). 이제 성가정은 단순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즉 모든 가정의 모범이 되기 위해 다른 가정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가정은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한 가정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무한한 사랑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에 대해 특별히 쏟으신 사랑이 있다. 그러기에 그 가정은 하느님과 대화할 줄 아는 가정이었고 하느님의 은총과 빛을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한 가정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나자렛 가정을 향한 영적 여행을 하여야 한다. 거기서 ‘가정’의 본질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라고 해서 특별한 가정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었던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느님 안에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을 우리도 본받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앞에 승화시켜 계속적으로 봉헌할 수 있는 삶으로 그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가정을 이루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이러한 가정이 되도록 또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의무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의무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 존재의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이다(콜로 3,12-14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당시 가족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콜로 3,18)이라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사랑이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등 각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평등하게 인정케 한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가족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족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19-21절 참조). 그러면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가정 공동체에 제시하고 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다.(루카 2, 40)

나는 아픈
가정에서
자랐다.

힘겨움과
버거움의
여정안에서
기도와 감사를
배우게 되었다.

아픔과 사랑이
교차하는
가정(家庭)을
만드신 분은
다름아닌
하느님이시다.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가정 안에
답이 있다.

돌봄과 보호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자라난다.

기쁜소식의
시작은 언제나
가정이다.

가정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성가정은
하느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인격체들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다.

가족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을
걸어간다.

가정 안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가정 안에서
우리의 인격은
가르침을
받는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우리의
소중한 관계의
여정이다.

사랑을
알게되듯
하느님을
닮아간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셨다.

사랑은 배우고
깨닫고 배우고
나누는
실천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여정은
성가정의 여정을
걸으셨다.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하다.

가정 공동체는
성화가 필요하다.

함께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밝히는
사랑의 빛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족이
되어오신 예수님,
우리 가정공동체를
성화하여 주소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루카 2,22)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명한 대로 아기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지요. 이 모두를 행하는 선량하고 소박한 부부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참되고 순수한 이들입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성령께서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을 성전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만남의 순간은 그가 평생을 걸고 기다려온 "주님의 때"입니다. 그간 성전을 스쳐갔을 무수한 권력자와 학자, 부자들에게서가 아니라, 가난한 부부가 안고 온 작고 여린 아기에게서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영의 시력이 놀랍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 일생을 의탁한 이의 바람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니, 성삼위 하느님의 비밀, 그 신비를 그에게는 감추지 않으십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아기를 안고 기쁨에 차서 올리는 시메온의 찬미는 아기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으로 가득합니다. 이 내용은 아기의 부모가 천사에게서 들은 그대로이니, 그들은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을 예언자의 입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하지만 시메온는 듣기 좋은 덕담으로 그치지 않고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이니까요. 아마도 성모님께는 이 귀한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말이,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는 예언보다 더 놀랍고 아프셨겠지요.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이 은총의 순간에 한 사람이 더 초대됩니다. 성경 안에서 이곳에만 잠시 등장하는 예언자 한나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눈에는 박복하고 불쌍한 인생일지 몰라도 하느님과 일치를 누리는 복된 여인이지요. 이렇게 성전에서 주님이 봉헌되는 순간은 두 증인을 통해 세상 역사에 새겨집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루카 2,39)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래아, 그중에서도 작고 소박한 고을 나자렛에 성가정이 둥지를 틉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여정에  함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가정 축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께서 꾸리신 성가정의 모범을 기억하고 본받고자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가 성가정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서도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체험으로 알지요. 저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성가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1독서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듣습니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집회 3,6)

오늘 집회서의 권고는 누가 누구에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관계성의 근원을 이야기입니다. 부모, 자녀가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모상인 사람을 짓밝을 수는 없지요. 혹 그런 이가 있다면 그가 주장하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거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존중하는 "사람" 범주 안에 부모도 있고 자녀도 있으며, 형제자매와 이웃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는 이 관계성을 유지하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하게 창조된 사람인지 아는 이는 "~~다움"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요! 이 앎이, 여러 모로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경외하게 하고, 사랑받는 존재답게 살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이는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엮어갑니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와 이웃, 일면식 없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 사랑의 울타리를 넓혀가지요. 성가정은 이 사랑의 확장을 통해 가정에서 공동체, 사회, 민족과 국가를 넘어 온 세상을 하나의 공동체로 아우르는 신비입니다.

관계적 어려움 속에서 성가정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관계성의 근원을 되짚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인 하느님, 어머니인 성모님, 형제인 예수님, 그리고 나. 우리의 관계는 어떤가요? 하느님을 경외하고 성모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나"답게, 이 관계성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에너지로 가족과 공동체의 구성원을 바라보고 대하는 과정 안에서 성가정이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작고 여린 아기 예수님이 우리 품에 안겨 당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맡기시니, 부성과 모성을 총동원해 조심스레 사랑하고 아껴드립시다. 하느님처럼 자비로이 다독이고, 요셉 성인처럼 묵묵히 보호하고, 또 마리아처럼 헌신하며 사랑을 엮어갑시다. 성가정의 신비가 기적처럼 나에게서 시작될 것입니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자녀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을 통해 온 세상이 성가정이 되어갈 것이니 감사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돌보아 주소서. 아멘. 

 의 등급

 -김찬선신부-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는데

혼족이 늘고 있기 때문인지 성가정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니, 그 이전에 가정이란 무엇이고, 가정은 필요한 건지 생각게 되었고,

그리고 가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감히 가정의 등급도 매기게 되었습니다.

 

비혼 가구도 있는데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출산했으니

어엿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래알 또는 콩가루 가정이 있습니다.

자기만 있고 가족 간의 사랑이란 눈을 씻고 봐도 전혀 없는 가정입니다.

 

이것보다는 나은 가정으로서 가족 간의 사랑이 있으니

사랑의 가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컬어 '우리만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끼리 사랑하지 이웃을 위한 사랑이나 여백은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니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웃 사랑에도 인색하지 않은 가정은

훌륭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가정일지라도 그리고

이웃 사랑이 아무리 대단해도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가정이 아닐 수 있지요.

 

인간 사랑은 있는데 하느님 사랑이 없는 가정 말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자기들끼리만 있지 하느님이 없는 가정이고,

인간적인 사랑만 있지 하느님의 사랑이랄까 신적인 사랑이 없는 가정입니다.

 

제가 꼭 오늘이 아니어도 반성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이 중심으로 계신가?

나는 형제를 사랑하긴 하는가?

사랑하긴 하지만 인간적인 사랑은 아닌가?

 

제 생각에 우리 공동체에 하느님이 당연히 계시긴 합니다만

때에 따라 소환하는 하느님이거나 구색으로 계실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문득 그동안 하느님이 안 계셨음을 깨닫고 소환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형제를 대하다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때야 소환하는 하느님이니 많은 경우 중심으로 계시지 않지요.

그래도 생각으론 하느님이 우리 중심이라고 주장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고 전엔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요즘 와서 형제를 사랑하긴 하는지

반성도 하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정작 같이 사는

형제를 덜 사랑커나 아니 사랑하는 건 아닌지 생각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고,

또 사랑하며 산다는 합리화도 필요한 인간이기에

사람 대신 강아지를 사랑하기도 하고 이웃도 사랑하지만 정작

같이 사는 형제는 사랑하기 쉽지 않아 이웃 사랑을 택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그래도 나는 사랑하며 산다'고

'명분 쌓기'를 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으로 흐를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자주 의식하지 않으면 저의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으로 흐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한다거나

편한 사랑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인데

하느님 사랑에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 사랑으로 흐르기가 십상이지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 사랑은 이런 사랑을 하려고 애써도

하기 어려운 사랑인데 깨어있지도 않으면 할 수 없는 사랑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나는 나 중심,

자기 위주가 되기에 이런 인간적인 사랑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 콜로새서의 다음 구절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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