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Margaret K 2021. 1. 3. 07:52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 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한다.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를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해마다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Behold, magi from the east arrived in Jerusalem, saying,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주님 성탄 대축일로 부를 만큼 중요한 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는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듯이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연약한 아기 예수님께서, 동방 박사들로 표현된 이방 민족들에게 별의 인도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구세주의 탄생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솟아오른 생명의 빛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혜며, 세상을 구원하는 빛입니다. 이 빛을 보고 도착한 동방 박사들에게 연약한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시어 ‘신앙의 여정’이라는 먼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 인류의 구세주께 경배를 드린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빛을 따라 삶의 희망을 잃지 말고 참고 견디어 내며 지혜롭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 주시고 온갖 위험에서 건져 주시며, 끝내 당신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신앙의 빛을 따라가는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들어 높여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겸손하고 가난하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신앙의 빛 안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그분께 의지하는 신앙인은 늘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주님의 별입니다.

키엣대주교-

 

오늘 복음은 동방 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이 복음을 읽다보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그들은 별을 따라 아기예수님께 갈 수 있었을까요? 그별은 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을 바로 베들레헴으로 안내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거쳐 가게 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아니면 전해오는 전설인가요?

마태오성인은 유다인의 특별한 문장형식으로 이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따라서 문장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두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길을 안내한 낯선 별이 아니라 마태오 성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 그들은 이방인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민족이며 우리 자신을 뜻합니다.

그들은 단지 우주에 나타난 단순한 징표를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 별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희미한 별빛외에 의지할 아무런 이정표도 없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지도 않았고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로지 낯선 별에 대한 믿음으로 별을 따라 갔고 아기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밝혀주는 별은 바로 그들 가슴에 있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 위엄있는 왕자가 아닌 아주 작고 허름한 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경배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을 드린 것은 그들의 겸손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하나뿐인 아드님,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길을 안내해 주고 계십니다. 하늘 높은 곳의 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빛을 뿌려주십니다. 그 빛을 찾아야 하고 그 빛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옛날 동방박사들처럼 모험적인 믿음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때로는 마치 헤로데 왕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내가 소유한 자리가 흔들릴까봐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두렵습니다. 세상의 혼란에도 침묵하시는 주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불안하고 허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태양과 달빛, 땅의 에너지로부터 밝혀지는 모든 빛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를 빛이라고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광속에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하여주소서.

주님, 증오와 불공평,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저희의 마음 속에 주님께서 주신 양심과 사랑의 불을 지키고 삶의 순간 순간을 주님을 따라 걸어가야함을 알게 하여주소서.

주님, 세상의 어둠이 언제 끝날지 두렵습니다. 제 마음 속의 어둠도 언제 끝날지 점점 두려워만 갑니다. 저희가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불을 밝혀 온 세상이 밝아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빛을 찾아나선 동방박사처럼 주님을 찾아 떠나 보았습니까?

2.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별이 되어보십시오.

3. 주님께 인도하는 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빛나는 별과 동행하는 은총의 길

-김창선-

주님 공현 대축일에 성탄의 기쁨이 새롭습니다. 동방박사(Magi)들이 별의 인도로 베들레헴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침으로 강생의 신비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납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해에는 사랑이신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우리 위에 별빛이 비칩니다. 이사야 예언자(제1독서)는 거룩한 도성에 은총의 빛이 충만함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 올랐다(이사 60,1).” 구원의 빛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순례는 보편적입니다. 모든 민족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이끄시는 행복한 삶의 길로 향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제2독서)는 계시를 통해 주님의 신비를 알고 이방인들에게 사도직 사명을 수행합니다. 지금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다른 민족들도 복음을 통하여 약속의 공동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 가족의 한 몸으로 공동수혜자가 됩니다. 모든 신자가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에 동방박사들은 주님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와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바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내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부하지만 다른 민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시초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 솟는다’라는 신탁((민수 24,17)처럼 새로 뜬 별을 보는 것은 주님의 탄생으로 사랑의 여정이 시작되는 믿음입니다.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때는 헤로데 왕 시대(기원전 37-4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드리러 왔다는 말에 헤로데와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랍니다. 별이 앞서가다 아기 예수님 계신 곳에 멈춘 곳은 예루살렘 남쪽 10km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입니다.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일명 ‘빵의 성전’으로 불립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베들레헴 첫 크리스마스 때 강생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게 그레치오 성당에 구유를 처음 설치(1223)했지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구유에서 이민족의 첫 방문객인 동방박사들을 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연약한 우리의 인성에 사랑이신 주님의 신성을 함양합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별빛을 따라 순례한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방랑의 길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여행목표는 분명합니다.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믿음의 순례길입니다. 빛나는 별을 보고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을 찾아옵니다. 일기가 불순하거나 구름이 짙을 때는 잠시 쉬어 생기를 돋우고, 장애물을 만나면 좁은 길을 택했겠지요. 우리의 삶의 길도 나 중심이 아닌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땅에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값진 예물(황금, 유향, 몰약)을 드립니다. 영성독서회에서 성서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아가를 묵상한 바 있습니다. 사랑의 상징물 중에 순금과 향유와 몰약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순금은 왕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지이고, 향료는 주님 사랑을 갈망하는 영혼의 향기이며, 몰약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힘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빛,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일치를 찬미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신 주님께 우리는 무슨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아가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불길임을 노래합니다. 아가가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찌 정경으로 채택되었겠습니까? 창조의 신성과 주님의 지혜는 물론 조건 없는 사랑은 영원합니다.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사랑이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고,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빛이십니다. 빛 속을 걷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빛나는 별과 함께하는 길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친교와 형제애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지난날 잦은 해외여행과 산행을 한 경험에 따르면 순례길의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나누고, 낡은 습관은 털어버리며, 마음을 무겁게 한 사람과 화해하고, 풀리지 않는 매듭은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코로나 19 감염 위기로 가난한 이들이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자신을 버린 가난한 마음으로 따르는 사랑의 길입니다.

 동방에서 출발해 ‘빵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향한 동방박사의 순례길을 인도한 별은 참빛이십니다. 이 별은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고, 하느님을 아는 신앙의 여정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새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인 동시에 ‘성 요셉의 해’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갈망하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아멘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

-염수정추기경-

 

서울에서는 별이 잘 안 보입니다. 서울에서 별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조명이 너무 밝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서울에서도 밝은 별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별이 안 보이는 이유는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우주의 신비는 모두 다 밝혀지지 않아서 우주에 존재하 는 별의 숫자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서는 그 많은 별 중에서 그분의 별을 발견하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난 핍박과 고통 의 삶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구 원할 구세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구세주인 예수님께서 태어난 것을 가 장 먼저 알아본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머나먼 지역에 살 고 있는 동방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 니다.”(마태 2,2) 동방 박사의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 하여 온 이스라엘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동방박사들은 아 주 먼 곳에 있었지만, 구세주의 별을 보았습니다. 등잔 밑 이 어둡다고 합니다. 지척에 있던 유다인들은 그분의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왜 별을 못 보았을까요? 혹 시 너무 가까이 있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욕심에 눈이 어두 워서였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 분의 별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손이 닿는 가까운 곳 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가족, 친지, 혹은 나의 마음일지 도 모릅니다. 구세주께서 다시 태어나실 곳, 베들레헴은 바 로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별들 중에 구원으로 이끄는 별을 찾 아야 합니다. 물론 저절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동방박사들 처럼 많은 수고와 노력이 따를 것입니다. 다행히 예수님께 서 당신을 진리요, 길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도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따라간다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발 더 나가서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 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분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주님을 찾는 방법은 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즉 구세주이신 주님 은 우리 사이에 계시고,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계신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아 야 하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올 한해 나와 이웃 안에서 그분의 별을 발견하기를 소원 합니다

 하느님의 표징들

-신현욱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별’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 ‘별’은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당신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신기한 자연현상일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던 것 이지요. 어쩌면 그들 또한 오늘날 우리처럼 그저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그 놀라운 표징 앞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위대한 분의 탄생을 알아차리지 못했 고, 하느님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그 표징의 의미를 잘 깨달았습니다. 그 ‘별’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고 그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았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그분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일 상의 일들과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일상의 일들을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 속에, 그리고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 하느님의 표징과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때로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은밀한 방법으로 그것을 주시 기도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갈망들, 인생의 허무함과 영혼의 목마름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연으 로 돌려버리는 순간 우리는 삶의 소중한 것들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런 인생에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습 니다. 그저 모든 일이 우연이고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없는 인생에는 감동도 변화도 발전 도 없을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에게 많은 표징들을 통해 이끄시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성탄 시기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이제는 우리의 공현을

-김원석신부-

 

이 땅과 온 세상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한창이고 인간의 삶은 고단 하고 피폐하며 두렵기만 합니다. 나약한 인간은 세상의 두려움에 용 기를 잃거나 숨거나 눈을 감음으로 써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무시 하려 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 사 이의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더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아기의 모습을 가 진 주님의 공현은 주님이시기에 언 제든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 즈음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예수님 에게 공현은 그저 쉬운 사건이 아 닙니다. 주님께서도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마태 26,39 참조) 세상을 향해 당 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우리 와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 모든 것 을 다 비우시는 큰 결심을 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모습으로 오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 니다. 세상을 향해 거리는 둘 수 있지 만, 오늘 희망을 선포하는 하느님 과는 거리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 다. 이웃과는 거리를 두어야겠지 만, 그들을 위한 간섭은 거리를 두 어야겠지만, 그들을 향한 뒷담화는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의 고 통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웃의 슬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 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을 세상 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그리하셨듯이 내가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게 희망을 두는 이유입니다. 그래 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된 이 유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비우시 고, 우리의 희망이 되셨기 때문입 니다. 희망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 다. 희망은 주님처럼 베푸는 것입 니다. 희망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증거 하는 하느님의 것 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 아 기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그 사실을 항상 깨어 믿고 주님의 눈으로 세 상을 바라보며 나로부터 변화되어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야 겠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여러분의 공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앙과 말씀으로 세상의 희망이 되는 여러 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기적

-박찬호신부-

 

2005년에 세계 청년대회가 독일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선배 신부님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참가하는 청년들의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 청년대회의 주 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였는데,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듯이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주님을 경배하러 함께 모이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대회는 전세계에서 온 청년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마지막 날에 “Marienfeld”라는 넓은 평원에 모두 모여 노숙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대미사와 함께 마치는 일정이었습니다.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파견미사 후 청년들과 함께 숙소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사람 을 잃어버렸습니다. 전철역으로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청년 두 명이 큰 트렁크를 들고 먼저 출 발했는데, 약속장소에 가보니 없었던 것입니다. 휴대전화도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 단 나머지 일행을 먼저 보내고, 저와 다른 신부 한 명이 그 두 청년을 찾아 나섰습니다. 한참을 돌 아다녔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우리가 전철을 타기로 했던 역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군중 속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마음 속 에 서서히 체념이 자리잡으려는 순간 저 멀리 역 안쪽에서 두 청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눈물의 재회(?)를 하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전철을 기다렸습니다. 전철 문이 열리는데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먼저 보냈던 일행이 그 안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초지종을 들어보니 우리가 탄 역이 많은 인파로 폐쇄되어 그 전역으로 걸어가서 전철을 탔다는 것 이었습니다. 전철 안에서 청년들이 “신기하다, 신기하다.”를 되풀이하는 동안, 저는 인솔자로서 안 도의 한숨과 함께 작은 기적 체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천 년 전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분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만나 기까지 그들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들의 계획은 바뀌었습니다.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두말 없이 따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별이 그들의 인도 자였다면, 하느님을 체험한 후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진정한 인도자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그들 삶의 여정을 바꿔놓았고, 삶의 중심을 바꾸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요? 돈, 명예, 혹은 쾌락이라는 별에 고정된 우리의 시선을 하느 님에게로 돌릴 때, 우리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다수의 뇌과학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처음 시작한 지 아직 21일이 되지 않은 행동’에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 그 행동을 입력해 놓을 ‘기억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주 동안 계속했음에도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는 것은 뇌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행동을 뇌가 받아들이고, 그 행동을 습관으로 저장하는 데는 꼬박 ‘21일’이 걸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습관으로 길들이고 싶다면 끈기를 갖고서 21일간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뇌에서 “아! 주인이 이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려나 봐.”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21일 이하면 뇌에서는 ‘아예 결심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습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습관을 통해 계속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이야기도 많아지고 더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습관이 이뤄지지 않으면 늘 주님이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21일 동안이라도 반복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로 예수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인 오늘, 동방박사의 모습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별만을 보고서 메시아를 만나러 이스라엘까지 찾아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가서 헤로데 임금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동방박사들이기에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초라한 마구간에 태어난 이 아기가 온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주님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만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21일의 규칙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이 나의 삶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진 것은 시간 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에게도 시간은 있다(발타사르 그라시안).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1984년부터 1996년까지 4차례의 올림픽 대회에서 총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육상 영웅 칼 루이스에 대한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도시는 교통 상황이 너무나 나빠 교통지옥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도둑이 그의 모터사이클을 훔쳐 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가격이 저렴한 자전거를 샀지만, 이것마저 도둑맞았습니다. 그 뒤 그는 왕복 24킬로나 되는 먼 길을 매일 뛰어다녔습니다.

훗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도둑도 달리기만은 훔쳐 갈 수 없었습니다.”

매일 이렇게 달린 결과 그는 세계 제일의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가장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에만 더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생존하려는(to be) 사람에겐 당신을 감추시고 살려는(to live) 사람에겐 당신을 드러내신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를 묵상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제 주님께서 나의 ‘삶의 의미’가 됩니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으면 그냥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생존하는 사람의 특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나도 죽고 이웃도 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릴 적 길을 잃어 남의 집의 식모로 키워졌습니다. 그 집은 어머니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만 죽도록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생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당엔 보내주었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하도 모질게 당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타서 죽이고 당신도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며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얼굴과 손발이 문드러진 저 나병 환자들을 보아라. 저런 사람들도 사는데 넌 무엇이 모자라 죽으려고 하느냐?”

어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의 의미를 찾으셨습니다. 사람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창조해주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살게 되셨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생존합니다. 생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존이 목적이 되는 이유는 ‘창조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 생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나면 살아갑니다. 그들은 ‘내가 왜 생존하는가?’를 묻습니다. 부모를 보며 ‘아, 부모가 낳아주었으니 사는 거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생존합니다. 나를 창조해 준 부모를 위해 살 때 동물적 생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더는 ‘사는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진짜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냥 살아가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존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처럼 창조자를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알아 그분 때문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래서 살기 위해 창조자를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하지만 대부분은 찾지 않습니다. 그저 생존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그런 사람입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나 참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영표 선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마치고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꿀맛과 같은 2주간의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강원도 어느 곳에서 청년들을 위한 강연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북한 이탈자 청년들도 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며칠을 생각하다 도저히 피곤해서 갈 수가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잘 아는 목사님의 사모가 우연히 자신을 방문했고 또 우연히 북한선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다시 강연하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강연 내용은 그리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 성공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맨 앞의 한 청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지막 질문을 그 청년에게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왜 저희 탈북자 청년들을 좋아하세요?”

      이영표 선수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뒤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그때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북한을 나와 남한에 왔는데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를 때 하느님을 안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을 보며 이영표 선수를 한 번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청년이 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이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진짜로 만날 때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진짜 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생존의 삶을 넘어서고 싶어 해야! 합니다. 참삶의 의미를 위해 생존의 도구들을 포기하는 모습이 바로 ‘봉헌’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지니고 강연에 왔던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면 더는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며 생존하게 만드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 때 부모가 삶의 의미가 되어 그렇게 행복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하느님을 만나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표징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희망이 되는지, 아니면 고문이 되는지가 우리가 헤로데의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인지 동방박사인지를 결정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을 찾는다는 증거로 준비해 온 선물이 십일조와 같습니다. 황금은 세속(돈)을, 몰약은 육신(쾌락)을, 유향은 마귀(교만)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세속-육신-마귀를 선택하여 주님께 바치기를 거부한 ‘선악과’와 같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별합니다.

      청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연습을 시킨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의 창조자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투자하는 만큼 주님은 당신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사는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1984년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당시는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03위 시성식과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공식 표어는 이 땅에 빛을이었습니다우리 선조들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784년 시작된 교회는 많은 박해를 겪었고순교자가 있었지만 신앙을 지켜왔고, 103위 성인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저는 당시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103위 시성식입니다교황님과 사제단이 제대로 입장하는 동안 통로에서 안내를 맡았습니다다른 하나는 교황님의 신학교 방문이었습니다저의 자리는 통로 쪽에 있었고교황님께서 제대로 입당하실 때 제 옆을 지나가셨습니다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부족함이 많았던 제가 신학교를 잘 마치고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빛이 되신 103위 성인의 전구하심이라 생각합니다.

 

5년 뒤인 198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당시 한국교회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세계 성체 대회(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는 전 세계의 성직자평신도가 성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높이고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회입니다. 103위 시성식이 한국교회를 알리는 자리였다면 성체대회는 한국교회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성체대회의 공식 표어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저는 당시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하였습니다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성체대회 폐막미사입니다저는 제단에 올라가서 미사에 참례하였고성체 분배를 하였습니다. 5년 전인 시성식 때는 통로 안내를 맡았지만 성체대회에서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다른 하나는 괌에서 온 참가자들의 안내였습니다덕분에 성체대회의 많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가난한 이들의 벗이셨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여러 나라의 공연도 보았습니다.

 

25년 뒤인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시복식의 공식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였습니다당시 한국은 세월호 참사로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교황님은 세월호 희생자의 손을 잡아 주셨고희생자의 가족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한국교회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교구청에 있던 저는 감사하게도 방준위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하나는 기도문 제작입니다교황방한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교회의 인준을 받아서 나누었습니다다른 하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기억하는 자료집 발간입니다함께 하였던 분과위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통로 안내자성체 분배자에서 분과 위원장이 되었습니다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일어나 비추는 것이 제게는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오늘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습니다멀리 동방에서 별을 따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세 명의 박사이야기입니다멜키올과 발다살 그리고 가스발입니다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인도해준 을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성공명예권력부와 건강이라는 별을 따라 살아갑니다하지만 그 별은 참된 진리의 별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남을 속이게 되고분쟁과 갈등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합니다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별은 무엇이어야 할까 생각합니다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너의 빛이 왔다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자 보라어둠이 땅을 덮고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유향몰약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무엇이어야 하나 생각합니다우리가 드려야 하는 첫 번째 선물은 첫 예물은 희생이었으면 합니다두 번째는 인내였으면 좋겠습니다세 번째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2021년도에는 말씀의 별을 따라 희생인내감사의 선물을 준비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유다인들이 아닌 이방인들, 동방박사들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사건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동방,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할 보편적인 일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성탄절인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인물들이 있으니 동방 박사들입니다.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 오랜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방박사들이 이제는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가져온 선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강생하신 만왕의 왕 앞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니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입니다.

  

준비해온 예물을 다 바쳤고, 또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아기 예수님을 드디어 발견하고 경배했습니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뵙는 기쁨에 황홀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구유 앞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가져온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영근신부-

 

찬미 성탄! 오늘은 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은 어떤 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에 대한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은 제2의 성탄이다. 그것은 주님의 탄생 신비에 대한 몰이해를 더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유다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공현은 성탄의 신학적 내용을 확대해주고 깊게 해 준다.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오늘 박사들에게 나타난 별은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 별은 그들 여행의 안내자 역할 외에 더 나아가 그들을 꼼짝 못 하게 이끄는 자석과 같아 보인다. 오늘의 전례는 이 예루살렘 대신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 이제 이렇게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땅끝까지 쏟아부어야 할 새로운 예루살렘은 교회이다.(교회 1항)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복음 선포와 교회 각 지체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을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그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는 않았다.

 

복음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다. 이때 헤로데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어딘가를 알아본 뒤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만나 경배한다(마태 2,4-12 참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다.

 

복음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 즉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그를 해칠 계략을 짜지만, 멀리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예수께서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찾고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1절).

 

복음에서 별은 동방박사들을 예루살렘에까지 인도한 후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기가 있는 곳 위에”(9절) 머물게 된다. 이 별에 대해서는 하나의 혜성으로도 생각했고, 현대 과학자들은 기원전 7년에 발생한 물고기 성좌에서의 목성과 토성의 접함을 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 별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내적 빛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요한 6,44 참조)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둘째로는 마태오는 별의 표징 아래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했던 발람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제 구약의 계약이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그분의 빛은 이미 온 세상에 빛난다. 왜냐하면, 이교도들도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고 한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계시하신 뒤 감추심으로써 당신을 다시 찾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프고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빛을 받아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헤로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폭군에게 그리스도를 살해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헤로데와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 수가 없다.

 

만일 빛이 스며든다면 모든 것이 붕괴한다. 왜냐하면 ‘숨은 생각들을’(루카 2,35) 드러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들의 나라 ‘동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을 더욱더 널리 확산시켜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보다도 동방에서 그 빛이 더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빛에서 빛으로’(2고린 3,18) 옮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밝은 빛처럼 변화시켜 더욱더 깊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또한 영원한 영광중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뵙기를 갈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의 공현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항상 찾아 만나 뵙게 되는 것은 주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가능함을 잊지 않고 순간의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한상우신부-


사람이라는
기쁨을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먼저 드러내신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기 개방성인
평화와 기쁨의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떠나
우리들 곁으로
오셨다.

동방박사들도
길을 떠났기에
하느님의 성탄을
만날 수 있었다.

공현은
떠남이다.

집착에서
탐욕에서
떠나는 것이다.

공현은
만나기 위한
떠남이다.

공현은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사랑의
축제이다.

그 축제에서
하느님의
가난함을
만난다.

작은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껴안으신다.

널리 드러내는
공현은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씀의 빛이다.

사랑할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본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가난한 아기의
여정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공현의 본질이며
구원의 실재임을
알려주신다.

모든 삶을
우리들에게
거시는
하느님의
봉헌이 사랑의
공현(共顯)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봉헌이시다.

봉헌이
선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주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먼 길을 온 이유는 그들을 놀라게 했던 그 별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유다인들만의 임금으로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현자인 그들이 감지한 것이지요.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누워 있는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충실히 움직이고, 박사들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별을 따라 갑니다. 별은 박사들을 예수님 구유 앞에까지 이끈 뒤 제 역할을 마치고 멈춥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박사들은 기뻐하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애초부터 별을 따라서 떠난 길이니, 그 별이 멈춘 곳이 왕궁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것은 별이니까요.

유다인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분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반겨 맞이하고 엎드려 경배한 존재들은 마굿간 짐승들과 가난하고 투박한 목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제1독서는 온 세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몰려들리라고 예언합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 60,3-4)

저마다 예물을 들고 빛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를 관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더 이상 작은 나라 이스라엘만의 임금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 자비와 구원을 목말라하는 온 세상이 이 모두를 지니신, 빛이신 분께로 나아옵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구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공현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느님과의 계약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상으로 지평이 열립니다. 모든 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또 그분의 신부가 됩니다. 이제 구원의 조건은 인종이나 국적,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실현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마태 2,6)

말씀을 품은 이에게 온 세상의 보화가 물밀듯 밀려들 것입니다. 주님을 품었으니 모든 것을 품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주님께 쏟아지는 경배와 흠숭이 그저 흐뭇하고 기쁠 뿐입니다.

주님 공현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지속됩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의 구유 안에 말씀을 모시고 사는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신분이나 학위, 부나 권력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주님을 모신 영혼 위에 별은 떠오르고, 구원을 고대하는 이들은 이를 감지합니다. 

우리를 비추며 사막과 광야를 돌고 돌아 앞서가던 그 별은 저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나 왕궁이 아니라 초라한 마굿간 같은 우리 존재 위에서 멈춥니다. 누추하고 죄스런 우리 마음속 구유 안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말씀이신 분, 그분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시다.

사랑하는 벗님! 나 자신이 가난한 목동 처지여도, 의지할 곳 없은 이방인 처지여도, 마굿간 짐승밖에 못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을 모신 곳에 별은 빛나고 그 빛은 남녀노소, 민족과 국가, 인종과 문화를 넘어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평화를 건넬 것이니, 그저 말씀에 머물러 고통에 찬 세상을 품읍시다. 세속의 멍에와 탐욕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비추는 말씀의 별을 따라 여기까지 오신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제 "일어나 비추십시오."
(이사 60,1 참조)

 공현하기 전에 공현되는

 -김찬선신부-

 

지금은 오늘 축일을 주님 공현 축일이라고 하지만

옛날엔 한자어로 삼왕내조三王來朝 축일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까 세 명의 왕이 주님께 와서 조배를 드린 축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삼왕내조란 축일 명칭은 그야말로 세 명의 왕이 어떻게

주님을 찾아왔고, 무슨 선물을 드렸는지 곧, 삼왕이 중심이지요.

심지어 네 번째 왕도 있었다는 얘기가 작가들에 의해 덧붙여지기도 했지요.

 

이렇게 우리가 축일을 지내면 우리도 삼왕이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축일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도 삼왕처럼 빛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 속 동방에는 삼왕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빛을 찾지 않았고 그래서 찾아 나서지도 않았지만

삼왕만은 어둠을 탓하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빛을 찾아 나선 자들입니다.

 

실로 우리 중에도 자기가 어둠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고, 어둠 속에 있는 줄은 알지만, 어둠을 탓하기만 하지

정작 빛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삼왕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마침내 빛을 찾고는 자기들을 인도했던 별처럼 또 다른 별들이 되어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삼왕을 중심으로 오늘 축일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성찰한다면

우리는 비 구원의 어둠을 체험한 사람이지만 어둠에 주저앉지 않고

더욱 구원을 갈망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구원을 자기만 독점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별들이요 선교사들이 되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이제 이 축일은 더 이상 삼왕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이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모든 민족들에게 드러내신 축일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의 의미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이 결코 한 민족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갇혀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며,

이것을 지금에 적용하면 하느님의 구원이 그리스도교나

어느 특정 집단에게만 있거나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이 누구에게도 배제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이 누구에게도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누구에게도 배제되지 않도록

우리의 사랑이 아무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과도 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이 누구에게도 배제되지 않도록

우리 사랑은 아무도 배제하지 말아야 하고 그 정도로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긴 하지만 아직도 나를 채우지 못하고,

그래서 애정 결핍의 상태에 우리가 여전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햇빛이 부족합니까?

일조량이란 말이 있는데 햇빛이 양적으로 부족합니까?

햇빛을 싫어하고 그래서 받지 않고 쐬지 않는 것이 문제지요.

 

우리가 자주 하느님 사랑 대신 인간 사랑을 갈구하여

인간 사랑에서 애정 결핍을 느끼는 것이 하느님 사랑 결핍으로 이어지는,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 사랑은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인간 사랑의 구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요.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을 공현하기 전에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서 공현되지 않는 것, 곧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삼왕처럼 빛을 찾는 그 구도의 여정을 더 그리고 열심히

걸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음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