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7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Margaret K 2021. 1. 7. 07:37

2021 1 7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4-22)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a year acceptable to the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그 자체로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고유한 사명이고,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모든 이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얻게 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중견 기업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는 40대 여성이 성추행으로 고발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대 신입사원들이 새로 들어왔는데 그중 한 남성 신입사원에게 “운동 열심히 하나 봐요. 몸이 좋네요.”라며 나름 칭찬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직원은 이 말에 불쾌했다면서 성희롱으로 회사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성희롱의 가해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지요. 불쾌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성적 언어가 성희롱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옛날에는 어른들이 꼬마 아이에게 귀엽다며 뽀뽀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일 날입니다. 시대가 각박해졌다며 혀를 찰 것이 아닙니다. 더욱 많이 알아야 하고 그래서 지금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지금에 맞게 해야 합니다. 코로나가 한창 확산할 때, 정부가 비대면 종교행사를 요청합니다. 신앙도 중요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 역시 신앙의 기본인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요청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코로나 감염을 더 빨리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에 맞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늘 나라를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며 사람임을 직접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을 펼치신 뒤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를 해방하십니다. 이로써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가 언제 왔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지금 성경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하늘 나라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도 또 특별한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위대한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헉슬리).


‘관계’를 팝니다.

일본 치바현에는 특이한 카페가 있다고 합니다. ‘가시와 미스터리 카페’. 여기서는 자신이 주문하고 계산한 음료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대신 자기 다음 사람이 내가 주문하고 계산한 음료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또 무엇을 마실지 모르니 카페 이름도 ‘미스터리 카페’인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음식이나 음료를 받으면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카페입니다.

이 카페가 잘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카페의 아이디어를 통해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해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지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관계를 생각한다면, 자기보다 우리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 함의 중요성도 깨닫게 됩니다.

 경쟁의 허용이 괴물의 세상을 만드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소명’(召命)을 공적으로 표현하시는 내용입니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지만 ‘당신이 깨달은 하늘의 뜻’(知天命)을 공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 구절을 찾아 회당에서 읽으심으로써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을 공표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누구나 이 사명을 물려받습니다. 성모 마리아나, 세례자 요한, 또 사도들은 모두 이 사명에 결합한 이들입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 모두가 주님의 계획안에서 어떠한 사명을 지니게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사명과 반대되는 개념이 있는데 ‘꿈’(이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dream)과 ‘소명’(vocation)은 반대말입니다. 창조될 때부터 주어진 사명을 ‘소명’이라 한다면, 자기 자신이 이루고자 정한 것을 ‘꿈’이라 합니다.

 

      소명, 즉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분명 자신이 선택한 꿈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소명도, 꿈도 없다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좇는 사람은 세상에서 ‘괴물’이 되고, 소명을 찾은 이들은 그런 괴물에게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명을 성취하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꿈과 소명은 상반되고 살아가는 각자의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괴물 한 명을 생각해 봅시다. 히틀러는 분명 괴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 대신 폭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바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예외 없이 ‘경쟁’을 통해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 합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좋은 평을 받게 되고 정치로 나아가서는 더 좋은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경쟁’을 통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게 만드는 전쟁을 시작한 괴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는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꿈을 가지게 되며,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그 꿈이란 것이 결국엔 자신 안에 있는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람들은 무작정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좇는 것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그들 모두가 작거나 크거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나라에서 웹툰으로 그린 이가 있고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어 지금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입니다. 이 드라마는 잔인한 괴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된다는 설정을 ‘욕망’에서 찾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욕망에 자신을 맡긴, 그 욕망을 꿈으로 실현하는 이들은 타인을 죽이는 괴물이 됩니다. 이 괴물들은 남의 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괴물, 힘으로 타인을 눌러버리는 괴물, 자신의 것을 쌓아놓는 괴물들로 나뉩니다. 이것을 만든 작가도 몰랐겠지만 그 괴물들은 결국 삼구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들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 욕망을 절제하는 인간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은 그런 욕망을 지닌 괴물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자신들 안에 분명 그런 욕망이 있지만, 그들은 그런 욕망을 추구하는 경쟁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이들입니다. 그중 ‘현수’란 캐릭터는 경쟁에서 도태되어 세상에서는 자살밖에 할 것이 없는 친구였습니다. 이미 그는 세상의 경쟁에서 아무 꿈도 꿀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아파트의 주민들을 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좋은 사람들은 다 사회 경쟁에서 도태된 인물들입니다. 더는 세상에서 삼구를 추구할 수 없는 상태의 인물들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소명을 공표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하신 일이 광야에서 삼구(三仇)의 유혹을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돈도, 쾌락도, 명예도 아니면 세상에서 무엇을 추국해야 할까요? 바로 그런 것들을 좇는 이들로부터 피해를 보는 이들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소명은 꿈을 좇는 세상의 경쟁적 분위기에서 물러나 그 반대로 향할 때 찾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도 모두 그런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한발 물러섰기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바치며 추구해야 할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굳이 이런 분들만이 아니라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 등의 거부들도 경쟁 속에서 성공은 했지만, 그들은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것보다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오다 보니 성공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가진 재산 전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약속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꿈을 찾으라고 하고 그 꿈을 추구하도록 경쟁시킵니다. 그리고 부모들도 그것에 많은 학원비까지 써가면서 아이들을 삼구의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히틀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먼저 자녀들에게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괴물들의 세상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학교가 이런 욕망을 제어하고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만드는 곳으로 바뀌게 해야 합니다. 꿈이 아닌 소명을 좇는 아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합니다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래서 콩 심은데 콩 나고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말합니다이는 윤리적으로과학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이 되었습니다함무라비 법전세속오계삼강오륜은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토대로 법칙을 만들고법칙을 찾아냅니다과거로부터 현재의 상황을 유추하고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합니다그러나 인과응보의 을 벗어나는 곳이 있습니다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입니다양자역학에서는 기존 과학의 법칙과 방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과응보의 을 벗어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베드로 사도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으신 사건은 인과응보의 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 19는 무섭게 전파되었습니다세계적으로 86,000,000 명이 확진되었습니다이는 전 세계 인구 80중에 1명 정도가 코로나19에 감염된 숫자입니다미국은 16명 중에 1명이 감염될 정도입니다한국은 800명 중에 1명이 감염된 정도입니다코로나19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일상이 생겼습니다. ‘거리두기마스크 착용손 씻기입니다이는 코로나19의 감염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입니다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었습니다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백신과 치료제가 보급되어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려진 다미안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다미안 신부님은 몰로카이 섬에서 나병환자들과 지냈습니다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손 씻기를 하지 않았습니다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나병환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함께 식사하고환자들을 방문하였습니다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집을 지었고수도를 만들었습니다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았던 나병환자들은 다미안 신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정부도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지원을 하였습니다건강하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몰로카이 섬에 묻혔습니다봉사자들이 제2의 다미안 신부님이 되어서 몰로카이 섬으로 왔고신부님들이 왔습니다. 2,000명이 넘던 나병환자는 점차 줄어서 지금은 없습니다.

 

인과응보의 이 지켜지는 사회가 바람직합니다과학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세상에서는 필요합니다그러나 신앙인은 인과응보와 과학의 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신앙인은 3차원의 세계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신앙인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넘어서 지복직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의 친구가 되었고스스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갔습니다성인과 성녀들은 인과응보를 넘어서 자연법칙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을 넘어서는 것입니다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사랑의 실천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도 요한이 말년을 보낸 에페소에서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1서는 복음의 진수(眞髓)이자 핵심을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를 읽다보면 수시로 등장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제자단의 일원이자 예수님의 애제자(愛弟子)로서 공동체 생활, 그리고 초대 교회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만만치 않았던 삶을 통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고,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사도 요한이었기에,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야말로 ‘뼈때리는’ 내용입니다. 

 

오늘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찔리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살아할 수는 없습니다.”(요한1서 4장 20절) 

 

요한 사도의 권고 말씀을 들으면서 든 한 가지 생각입니다.‘사랑의 실천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이로구나!’

  

가끔씩 이러 분을 만납니다. 하느님 사랑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눈만 뜨면 기도요 미사입니다. 하루 온종일 성경과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특기는 피정이나 성지 순례입니다. 취미는 성전에서의 봉사요 전교 활동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합니다. 그들이 삼시세끼 제때 챙기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이 잔뜩 안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 속 예수 그리스도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경우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어색한 사랑, 20퍼센트 부족한 사랑, 아직 갈길이 먼 사랑입니다. 

 

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격이 원만해 가족들과는 물론 주변 사람들과 너무나 잘 지냅니다. 어디 가나 ‘핵인싸’로 박수갈채와 큰 환영을 받습니다. 광범위한 소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탁월한 해결사로서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너무 바쁜 나머지 하느님께 나아갈 시간을 조금도 낼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희희낙락 즐기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단 1분도 성체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역시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너무 지우친 결핍된 사랑입니다. 

 

요한1서에 의하면 사랑은 행동으로 진실되게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덜 중요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하느님, 또한 하느님에게서 인간! 이런 무한 순환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한 신앙인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해버리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영적인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은 가짜 사랑이요,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는 언제나 함께 가야 마땅합니다.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형제들도 하느님 사랑 안에 사랑받아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가능한 까닭은 이미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잠시 후에,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반영억신부-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해방자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류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려고 오신 ‘해방자이신 분’입니다.

그 자유와 해방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선포하신 바로 그 순간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죄와 죽음의 억압으로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영혼의 참 자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1-36)”

여기서 ‘진리’는 ‘구원의 계시 진리’,

즉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자유’는 ‘구원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라는 말씀은,

구원을 얻는 방법, 즉 신앙생활의 방법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서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라갑니다.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참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참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참 자유’를 잃는다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잃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지 않거나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

‘영혼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에 자신들의 몸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는데(창세 3,7-8), 바로 그 모습이 ‘참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죄인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하면 되는데,

죄에 대해서 무디어져 있고,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회개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가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이라는 말씀은,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참 자유’를(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먼 고장’에서,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는 동안에는

자기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루카 15,13).

그러다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굶주리게 되자

그런 생활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진짜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루카 15,14-17).>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생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참 자유의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에서 말하는 자유와 하느님 나라의 ‘참 자유’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3).”

이 말에서,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라는 말은,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고, 세속 일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자유와 권한은 없습니다.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신앙인의 자유는 ‘선’과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유인으로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1베드 2,16).”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신앙인은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도로교통법이나 방역법 등을 지키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런 법들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것은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입니다.

 복음: 루카 4,14-22: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조욱현신부-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 22)

-한상우신부-


은총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말씀은
결과가 아닌
모든 과정이다.

건강한
삶을 위한
말씀이다.

우리 삶에서
말씀의 불씨가
피어나야 한다.

말씀의
선택이
오늘의
선택이다.

오늘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고통과
어려움을
비추어준다.

끝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말씀으로
믿음은 자란다.

말씀은
우리 내부에
있다.

불확실한
오늘을
치유하는
은총의
말씀이다.

말씀은
하느님
중심적인
삶이다.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말씀이다.

말씀으로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산다는 것은
은총의 말씀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삶의 위기에
필요한 것은
간절한 삶의
말씀이다.

아름다운 오늘은
말씀으로
열어가는
말씀의 오늘임을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끈을
꼭 부여잡고
사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루카 4,18)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 말씀이 쓰인 부분을 찾아 읽으십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대목에는 예수님의 사명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내시어"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사야서 내용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신 것이지요.

이 세상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이 구체적 행위들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실천하시는 '완전한 계시'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영성체송)

말씀은 그 사랑을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당신 백성에 대한 애끓는 사랑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주신 사랑이지요. 그 외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힘껏 보여 주시다가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 그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 사랑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의 정신이며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지요(마태 22,34-40 참조). 여기서 우리는 이 두 계명이 하나로 엮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감지합니다.

누군가를 순수하고 진실되게 사랑하면, 그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들, 곧 하느님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게 되지요. 나의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정화되지 못한 인간적 사랑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그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 곧 우리 형제자매들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지요.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더라도, 감정이나 취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가 지닌 미소한 힘과 자원으로 세상을 단숨에 구할 거대한 업적을 쌓지는 못해도, 고통 속에 지쳐가는 세상에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선물할 수 있고, 위로와 희망을 건넬 수도 있지요.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들을 함께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면 족합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주님의 영께서 알려 주실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은혜로운 해", 희년은 우리의 작고 소박한 관심과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하느님과 함께 예수님 사랑의 사명에 기꺼이 동참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올해 우리가 지내게 되는 '요셉의 해'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 사랑하는 은혜로운 해가 되길 빌어봅니다.

하느님의 불행

 -김찬선신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오늘 서간을 묵상하다 느닷없이 '하느님도 불행하지 않으실까?'

이런 의문이 들었고, 이런 질문에 저는

아마 하느님도 불행하실 거라는 생각을 감히 하였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인간을 놔두고

하느님만 행복하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부모만 놓고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열 자식을 뒀는데 아무리 아홉 자식이 행복해도

행복한 자식 아홉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자식 하나 때문에 불행한 것이 부모가 아닙니까?

 

전에 제가 아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다 큰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이 막내아들만 생각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이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던 다른 자녀들이

세월이 지나도 계속 막내만 생각하고 자기들은 관심밖에 있으니

죽은 자식 생각만 말고 산 자식 생각도 좀 해달라고 불평했지만

이 어머니는 그 후에도 막내아들 때문에 계속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 부모도 이러한데 하느님 아버지는 수억의 불행한 당신 자식들과

당신 피조물 때문에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불행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런 부모이고 하느님이시라면 그리고 이런 부모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와 하느님이 불행지지 않도록

자기의 육적이고 영적인 형제가 불행해지지 않도록 사랑을

쏟을 것이고, 적어도 불행해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모만 사랑하고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만 사랑하고 형제는 사랑치 않는다면 이는 진정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주기에 부모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하지요.

 

이런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음은 물론 부모의 사랑도 모르기에

자기한테 부모의 유산이 더 오기만을 바랄 것이며,

그래서 유산을 놓고 형제들과 경쟁을 할 것이고,

부모께 대한 사랑 때문에 싫어도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원하는 것은 모든 자식이 행복한 것임을 알고

형제를 사랑할 때 그것이 진정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인 것처럼 

하느님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때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지요.

 

저의 하느님 사랑이 이런 면에서 진정인지 제일 많이 시험당하는 것이 

바로 일본 사람 사랑인데 아마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은 과연 내게 어떤 사람인가?

 

우리를 불행케 한 역사를 생각하면 이들은 원수이다가,

하느님을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사랑해야 할 형제이고,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 사랑에 도전하게 하는

도전자이자 그 사랑에로 딛고 오르게 하는 디딤돌입니다.

 

저의 사랑의 목표이고 여러분 사랑의 목표도 같겠지만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 사랑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사랑해서 남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이 그에게도 가지만

먼저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나에게 남습니다.

 

이것이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며 하느님도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10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4-22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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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지금 성경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하늘 나라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도 또 특별한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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