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8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Lor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him, and said,
“I do will it. Be made clean.”
And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코시모 로셀리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다'.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의 요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장면입니다. 절박한 심정의 사람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거나 대충대충 넘기지 않으며, 간절함을 담아 진실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뿐 아니라 치유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절박함을 네 권의 복음서는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이 길가에서 소리 높여 주님께 외치기도 하고(마르 10,46-48 참조), 많은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도 하며(마르 5,21-34 참조),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염치없이 악령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마르 9,14-29 참조).
이렇게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이며,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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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노만 쿠신’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병은 뼈를 감싸고 있는 인대에 염증이 생겨서 심해지면 인대가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으로, 점차 내장기관까지 굳어져서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고통 속에서 오래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이 사람의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커다란 좌절에 빠졌고 모든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연히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실컷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가 끝나고 난 뒤에 몸이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 매일 코미디를 즐겨 보면서 적극적으로 웃었습니다. 그 결과 이 불치병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미있는 소리는 육신의 병을 고치고 인간의 정신을 치료한다.”
저 역시 반백 년 이상의 삶을 살면서 깨달은 작은 것이 하나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은 늘 슬프고, 기뻐하는 사람은 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말입니다. 슬픈 사람은 슬픈 이유를, 기쁜 사람은 기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요즘 특히 건강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고쳐 주기 위해 나병 환자에 손을 대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정결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고 여전히 깨끗하신 상태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병에도 더러워지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나병 환자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같은 마음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될 수 없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은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긍정적인 방향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긍정의 이유만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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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태권도 미국 국가대표 선발전 때의 일입니다. 두 여자 선수가 결승에서 맞붙었지요. 그런데 한 선수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기권하고 매트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자 뒤따라 내려온 상대 선수가 기권한 선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승을 차지해서 국가대표가 된 선수는 사실 준결승전에서 크게 다치고서 결승전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결승전을 치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상대 팀 선수가 시작과 동시에 기권한 것입니다.
이 상태로 경기를 하면 부상 당한 선수를 여유 있게 이기고,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승리를 줍니다. 올림픽 출전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저보다 실력이 한 수 위에 있는 선수입니다. 저는 올림픽에 출전할 적임자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입니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답게 지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세상을 훨씬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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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자유, 늑대의 자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줍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리고 당신도 좀처럼 자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처럼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몰려듦에도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뜻에 나를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율법에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나병이 나으면 율법에 매이게 됩니다. 무엇이 더 자유일까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더 자유 아닐까요? 사실 사람은 나병에 걸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던지, 율법에 매여 나병으로부터 자유롭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몹시 굶주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늑대가 어느 날 숲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고 살이 토실토실한 개를 만났습니다.
늑대: 넌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개: 나랑 같이 가자.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를 좀 봐. 너무 볼품없고 비참해. 그렇게 있다간 굶어 죽고 말 거야.
늑대: 널 따라가면 난 뭘 해야 하는데?
개: 별거 없어. 가끔 사냥도 나가고, 집에서는 주인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주인이 귀여워해 주고 맛있는 음식도 갖다 주지.
늑대: (기쁜 마음으로 개를 따라가다 문득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보며) 그게 뭐야?
개: 이거? 아, 주인이 있다는 뜻의 목걸이야.
늑대: 목걸이! 그럼 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니?
개: 늘 그런 건 아냐. 가끔은 주인이 끄는 대로 가야 해. 대신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늑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자유가 무척 중요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을 준다고 해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바꿀 수 없어.
여러분은 개와 늑대 중에 어떤 것이 더 자유롭게 보이나요? 좀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자유로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는 늑대의 삶이 더 좋아 보이나요, 아니면 그런 것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주인의 목줄을 걸고 다니는 개가 더 좋아 보이나요? 사실 늑대라고 목줄이 없을까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그 나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약해 보이면 안 되고 내가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나의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늑대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나병 환자입니다. 몸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있어 부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개는 배고픔의 욕망을 좇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밥을 주시는 분에게는 순종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 국정농단과 관련하여 삼성 이재용 회장이 법정에서 울먹였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아버지보다 나은 삼성을 만들겠다며 선처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아도 이렇게 마음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진정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법을 지켰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사람은 반드시 어떤 법에는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라 여깁니다. 국정농단 때 이재용 회장은 왜 뇌물을 바쳐야만 했을까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만약 살을 빼야겠다고 결정하면 살이 빠질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자신 안에 그와 반대되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먹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 욕구는 배고플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음식을 더 먹게 만듭니다. 인간은 이렇듯 욕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병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면 차라리 목줄을 채우고라도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목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이 목줄을 채우면 세상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1837년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던 링컨은 정부에서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에게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아마 링컨이 권력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명예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1860년, 링컨은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루었고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마침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흑인 중 어떤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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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2018년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지낼 때입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시돌 피정의 집이 있었습니다. 피정의 집에는 ‘삼뫼소’라는 아담한 호수가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호수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이 호수에 그림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밤에는 하늘의 구름과 달이 호수에 내려왔습니다. 호수의 물이 바람에 출렁거리면 주변의 모습은 호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름과 달도 호수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호수가 잔잔할 때는 그렇게 주변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람이 마음에 불면 이웃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불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바람이 불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음은 차갑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거울은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비추어줍니다. 거울은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울 같은 사람은 비춰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춰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성모님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2021년에는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여름까지 머물 거라고 합니다. 신문의 홍보도 아직은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성지순례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겨울의 끝에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나오듯이,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듯이 희망이 빛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밴쿠버 성 김대건 성당에서 신문 구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림특강을 온라인으로 함께 했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질의 응답시간이 있었고, 신문을 홍보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강의나 피정 후에 신문을 홍보하는 것도 새로운 방법입니다. LA 지역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하겠다는 모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비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진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좋은 지면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진주와 과자를 주면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맛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양보, 인내, 친절, 겸손, 나눔, 봉사’를 택하라고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들고, 어렵고,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것들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 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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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올리는 간절한 기도는 하늘을 움직입니다!
-양승국신부-
흑역사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안좋은 기억들입니다. 가끔씩 머릿속에 떠오르면 잠을 자다가도 “내가 그때 대체 왜 그랬지?” 하면서 강한 이불킥을 날리게 하는 부끄러운 사건을 흑역사라고 합니다.
흑역사는 묵상할 때도 가끔씩 떠올라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저는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만일 다시 시작할수 있다면, 오답으로 가득한 제 인생의 시험지를 쫙쫙 찢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상처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제 지난 발자취를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원점에서 새출발하고 싶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주님께서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복음 5장 13절)
중증 악성 나병으로 인해 온몸이 종기 투성이인 한 가련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간절히 청합니다. 간절함이 얼마나 컸던지 율법의 규정까지 어겨가며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환자들은 부정을 탄 사람이기 때문에, 마을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옷을 찢어 입어야 했고, 머리는 풀어헤쳐야 했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지 사람들이 다가오면 나병환자들은 큰 목소리로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추방된 존재,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복음 5장 12절)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림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큰 비참함 만큼이나, 그의 기도는 강렬했습니다. 강한 신뢰심을 바탕으로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는 나병으로 인해 온몸에 퍼져버린 상처만 깨끗해지기를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으로 인해 생긴 깊은 마음의 상처,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은 자신의 인생,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신으로부터도 깨끗해지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외침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 외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폐부를 깊숙히 찔렀습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강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마침내 치유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교회는 그 옛날 나병환자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깨끗해지고 싶으며, 다시 한번 새출발하고 싶다는 신자들을 위해 아주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고백성사와 성체성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성 있게 잘 준비하고 온몸과 마음으로 성사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 성사들을 통해 깨끗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티끌 한점, 오점 한점 없이 순백의 빛나는 모습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이 성사들을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낡은 나를 강물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나로 거듭태어나 새 인간으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땅에서 노예살이하던 우리를 빛과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은총의 파스카 성사가 고백성사요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위축시키는 부담스런 죄를 지었다면, 3개월, 6개월씩 끌어안고 힘겹게 살아가지 마시고, 즉각적인 고백성사를 통해 그때 그때 시원하게 털고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은총 상태를 갖춘 후, 정성스레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성사 안에서 엄청난 기적과 놀라운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능함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힘겨울수록 더 간절히 주님께 의탁하고, 더 절박한 심정으로 그분께 간청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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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영근신부-
오늘도 우리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하고,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보다 더 앞세우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우리 주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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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곳으로 물러가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나의 속을 보게 되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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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희망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12-13).”
여기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깨끗함’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깨끗하게 해 달라는 간청은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이기도 하고,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깨끗하지 않는 상태’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상태이고,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레위 13,46).
이 간청을 ‘상징’으로 생각하면, 또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깨끗하지 않은 상태’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 후에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깨끗하게 해 달라는 간청은
다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에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는데,
죄를 지은 뒤에는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창세 3,8).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무서워해서 멀리 한 것입니다.
좋은 예가 탈출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백성이 모세에게 한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백성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먹구름 쪽으로 가까이 갔다(탈출 20,21).”
사람들이 하느님 앞으로 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들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고,
자신들은 죄에 물들어 있는 비천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는 인간들을
하느님 앞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깨끗하지 못한 상태인 인간들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깨끗하지도 않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고만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복음 말씀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병자의 말은,
주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주님의 의향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청을 받아주실지 거절하실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즉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은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라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병자가 청했기 때문에 그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의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원죄 이전의 깨끗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람들이 원죄 이전의 행복을 되찾는 것,
그 행복을 누리면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희망’입니다.
또 제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산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기쁨을 얻는 방법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인데,
실제로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니까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깨끗함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 4,8).”
여기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인데,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가 많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제대로 못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는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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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5,12-1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절)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도, 예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 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 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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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한상우신부-
모두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이
깨끗하게
되는 삶이다.
참된 치유는
주님과의
참된
관계회복에
있다.
참된
관계회복이란
참된 사랑에
있다.
언제나
사랑의
관계안에
참된
길이 있다.
주님께
나의 아픔과
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픔속에
치유가 있다.
나의
아픔까지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관계가
건강한 만남이다.
건강한 만남은
서로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생명이 있기에
그에 따르는
치유도 있다.
치유가 있기에
좋은 성장도
있다.
치유를 통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된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치유이며
깨끗한
정화이다.
우리모두는
아픔을 딛고
치유와 성장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존재들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의
아픔을 딛고
성장한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 사랑이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하신다.
사랑을 믿기에
살아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랑이 있기에
소중하고
멋진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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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의 의지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나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청합니다. 그의 말에는 엄청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말씀으로, 말씀은 반드시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이롭게 하시려는 하느님 구원 의지의 결정체시지요.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마술이나 주문, 한갓 인간적 재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지임을 이 환자는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 권능에 대한 앎이고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 이전에 그분 마음을 믿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고 또 목자가 양들의 안위를 챙기듯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고통을 떨쳐내주고 싶으실 거라는 확신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이 말 안에는 "당신이 원하시지 않으면 ... 저는 괜찮습니다." 하는 겸허하고 온전한 의탁 또한 담겨 있지요. 모든 것이 그분 뜻임을 그는 자신의 외롭고 한스러운 투병 생활 안에서 이미 깨달은 터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예수님께서 그의 말 그대로에 당신 뜻을 실어 응답하십니다. 그가 여쭌 것은 예수님의 의지에 대한 것이었으니, "내가 하고자 하니"라고 당신 의지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그 증거시지요. 이 세상은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급하고 아둔한 우리가 미처 못알아차릴 뿐이지요.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 안에서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1요한 5,11)
때로는 힘에 겨운 지상의 순례 여정을 걸으며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꿈이 있다면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으로써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았지요. 하느님께서 진즉에 원하셔서 이뤄주신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언제든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고자 하시지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5,13)
요한서간의 저자는 때로는 질척대고 때로는 넘어지는 우리가 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당연한 어조로 담담히 전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됨됨이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원하심, 예수님의 의지에 기인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오늘 복음 속 환자는 알고, 청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 뜻에 달린 존재입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의지와 바람, 기대와 자비, 꿈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가 도토리 키재기 하며 볶닦거리는 생로병사와 행, 불행도 인간의 관점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 속 환자는 처절하게 맞닥뜨린 삶의 절벽에서 이 진리를 캐내었을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께 달린 듯 믿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린 듯 충실해야 합니다. 이 두 축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구원이 이루어져 갑니다. 특별히 나에게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지 숙고하고, 바로 그걸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미 주님은 마음을 먹고 계시니 우리만 깨달으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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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 제쳐놓고
-김찬선신부-
아시다시피 공현의 다른 이름은 등장입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으로서 유혹을 통과하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에 등장한 주님께서 어제는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오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데 이 소문이 점점 퍼져 마침내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 몰려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의 선포자요 치유자로서 등장하시는 건데
좀 이상한 것은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 몰려오는 사람들을 마다하고
주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시는 점입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하시는 겁니까?
다 고쳐주고 난 뒤에 기도하러 가셔도 될 텐데 왜
치유해달라고 사람들이 몰려와 있는 중에 기도하러 가시는 겁니까?
잘 아시다시피 루카 복음은 기도하시는 주님을 제일 많이 소개하지요.
제가 아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에는
기도하시는 주님이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주님 외에 두세 번밖에 없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이때 말고도 여섯 번이나 됩니다.
아무튼, 루카 복음은 기도하시는 주님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데 오늘 복음도
사람들을 피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고,
기도는 일을 다 끝낸 뒤에 시간이 나면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일을 중단하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하고 장소도
하느님과 나만을 위한 외딴곳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모든 일에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Ora et Labora!", 기도하고 일하라는 분도 성인의 가르침은
오늘 복음의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그래서 분도회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것이지요.
이때 기도는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일을 성사화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뒤집어 생각하면 기도 없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성취적인 일이기 십상이지요.
그러므로 기도는 일에 앞서 해야 할 것이고,
일을 제쳐놓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모범은 우리가 공동기도도 잘해야겠지만
개인 기도도 잘해야 함을 또한 가르칩니다.
제 생각에 수도자들이 신자들보다 기도를 다 잘한다고 할 수 없고,
신자들이 수도자보다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고 할 수 없지만
개인기도 또는 홀로 주님 앞에 나아가 묵상하는 것은 수도자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미사 시간이 아닌 때 홀로 성체조배하는 신자들이 많지 않고,
일부러 성체조배하러 가지 않더라도 미사 전이라도 조용히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텐데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듯이 그 시간마저 조용히
가지지 못하고 성전에서 커피 마시며 옆 사람과 막 떠들곤 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보인 모범은 요즘 우리로 치면 피정과 같은 것입니다.
옛날 교부들은 이런 주님의 모범을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따라 사막으로
들어가 일생 하느님을 관상하며 살았지만 일과 기도를 둘 다 해야 하는
우리는 주님처럼 가끔 열 일 제쳐놓고 주님 만남의 시간만은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열 일 제쳐놓고>입니다.
개인 피정이면 더 좋고 개인으로 어려우면 단체로도 좋습니다.
그러기에 대침묵 피정이면 더 좋고 아니면 소침묵 피정이어도 좋습니다.
이런 뜻에서 저는 코로나 방역이 좀 완화되면
<걷는 피정>을 하든 <여기 선교의 집>에서 하든 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도 피정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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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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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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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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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잔잔할 때는 주변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람이 마음에 불면 이웃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불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바람이 불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음은 차갑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거울은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비추어줍니다. 거울은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울 같은 사람은 비춰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춰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성모님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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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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