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0일 주님 세례 축일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르코 1,7-11)
It happened in those days
that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in the Jordan by Joh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느님이시다.’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마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늘 함께 있는 보호자처럼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십니다. 성자의 강생은 나약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동참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심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가 하느님과 만나는 문이라면,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세례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성자께서 성부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약한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아이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늘 함께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세례는 영광이고, 예수님께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부께 순종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택하신 겸손의 표양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간인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키엣대주교-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사명과 그 분의 겸양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바라는 권위있고 위풍당당한 구세주의 모습이 아닌 세례를 기다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진실된 참회의 필요성을 설교하였기에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군중들은 언제나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어머님의 뱃속에서부터 만난 분들인데 지금 예수님은 그 분께 세례를 청하고 계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죄를 씻는 세례를 청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거만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가는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세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죄를 숨기고 인정하지 않는데 원죄없으신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죄의 씻김을 청하고 계십니다. 죄 지은 사람들은 벌을 피하려 안간힘쓰는 데 그 분께서는 인간이 받을 모든 죄와 벌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로 닫혀버린 하늘이 다시 열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내렸습니다. 다시 열린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인간의 지위를 높이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것은 어떤 명칭도 지위도 아닌 사랑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말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름으로 활동하시고 삼위일체 하느님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함께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부터 인류 구원의 사명을 받으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어둠 속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시며 이 세상에 공정을 세우는 사명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비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를 위해 오셨으며 인간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내가 세례받던 그날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세례의 은총으로 나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당신의 아들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일체속에 하나가 될 것을 깊이 약속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그날 성령께서는 나에게도 하나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효성스런 자녀가 되는 것, 그리고 인류 구원사업에 동참하라는 사명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잊고 살았던 그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며 사랑과 평화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편안할 때, 내가 가진 것이 많을 때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면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작은 사랑이 모여 세상이 따뜻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리스도 주님, 저희가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고 그 사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1. 나의 삶에서 세례는 어떤 의미입니까?
2. 세례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3. 세례를 받던 날 다짐했던 주님과의 그 약속을 되새겨 봅시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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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을 만났습니까? 지금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내 이상형이 맞습니까? 종종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상형이 아니었다면서 실망의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형을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는 아주 희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이상형이 아니다.”라고도 말하지만, 그래도 이상형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될 확률은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이상형은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때 꿈꿔왔던 이상형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세례는 회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참사랑을 만들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도 직접 받으시고,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활동으로 주님께서는 사랑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오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또 다른 이상형이 되어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셨고, 그런 이유로 이 땅에 오셨고 오늘 기념하듯이 세례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 순간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제1독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곳, 최고의 이상형이 가득한 곳.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한 현인을 찾아가 생활했지만, 스승은 몇 달이 지나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승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기 벽돌 뒤에 많은 금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돌벽으로 막아두었으니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느냐?”
제자는 망설이지 않고 “망치로 돌벽을 깨뜨리고 꺼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스승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이 닭의 알에서 생명을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 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망치로 껍질을 깨는 줄 알지만,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힘으로 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 주는 것만이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제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반항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신호
-전삼용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30년간의 사람의 아들로 사는 삶을 마감하고 3년간의 하느님 아들로 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너는”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심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왜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성장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신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당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인간 성장 과정에 빗대어보면 ‘사춘기’입니다. 많든 적든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4~5학년이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모에게 대한 반항입니다. 사실 부모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면 자녀는 더 큰 사춘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사실 자퇴지만 퇴학 이틀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자퇴한 것입니다.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스트레스가 컸던 것입니다. 5년 동안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아이도 그래서 지옥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대한민국 최고의 강사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들인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니 열등감과 무기력감에 피시방만 전전하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입시학원에 다니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어 해서 기뻤지만, 입시 석 달 남겨놓고 예대를 가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엄마는 웃겨서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니까 시켜주었는데 아이는 음악성이 있는지 악보도 못 보면서 한 곡을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고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들어온 학생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겨우 버티다 또 자퇴하였습니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엄마가 믿어주는 것에 죄송했는지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노력해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왜 태어났는지 성당을 다니며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때부터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아마도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사춘기를 길게 앓고 있는 아들이 자신에게 계속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고 말합니다.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흔히들 ‘사춘기에 맞는 부모의 대화법’이란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가장 처음에 묻는 때가 언제일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물론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아기는 그저 불안해서 울기만 합니다. 다행히도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문제는 엄마가 금방 해결해 줍니다. 젖을 줌으로써 자신이 엄마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는 엄마 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엄마, 아빠처럼 되면 됩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민이 다시 시작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춘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굳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무기력하고 고립되는 시기가 성장에서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에서는 이 시기가 참 부모를 찾으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없다면 하느님을 굳이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때 참으로 세례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때 부모가 자신이 부모임을 강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자녀다”라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자신들도 아기를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되며 더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기의 모든 문제가 부모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던 것처럼 사춘기 때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하느님만이 다시 생명을 주시고 몸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되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지듯이,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시작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시작하신 두 가지는 ‘자기 자신과 싸움’과 ‘아버지 뜻의 실현’입니다. 성령은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신이 부모임을 믿으라고 주는 젖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며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주시는 그분을 우리의 참 부모로 확신합니다.
저도 사춘기를 극복한 것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를 넘어선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어쩌면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외롭다, 외롭다!”였습니다. 한 개신교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옆에 계시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을 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졌고 그 이후로 사춘기의 반항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첫영성체와 세례가 진정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우리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고 특별히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고 그래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히 하느님처럼 되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합시다. 사춘기는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화론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께 자녀임을 인정받도록 주님께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세례의 의미입니다.

-조재형신부-
서울의 신학교에는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념품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앉으셨던 의자와 교황님께서 입으셨던 제의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한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신학교를 방문한 것은 신학교에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대학교에서는 사회에 공헌이 큰 인사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는 큰 영광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대학교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에게는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물은 ‘정화’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수(聖水)가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머문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3번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구세주가 아닌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1784년 한국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입니다. 단순한 정화의 상징인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구원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오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 모세와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곳에 천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거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변모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어린 시절 꽤나 궁금했던 부분이 예수님의 세례였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 무죄하신 분이신데, 왜 인간인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셔서 세례를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세례의 주관자, 세례의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나약한 한 인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너무나 깨끗하신 분, 그래서 세례가 전혀 필요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 사이에 서셔서, 마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마치 한 기업의 CEO가 신입사원 연수를 받는 일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대장이 훈련병에게 거수경례하는 일입니다. 환갑을 넘긴 교장이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신입생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입니다.
‘주님 세례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때부터 골고타 산에서의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극단적 자기 낮춤, 한없는 겸손,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의 틀 안에서 주님 세례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연히 무죄하신 분이기에 굳이 요르단 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죄를 사해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자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쭉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셨습니다. 다른 죄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을 찾아오신 모습을 확인한 세례자 요한은 얼마나 당황했던지 극구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구세주 하느님의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첫 여정인 마구간 탄생을 통해서 한없는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지극한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한 평생은 초지일관 극단의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 교부들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영원하신 아드님께서는 세례를 받아야 할 어떤 필요도 없었지만, 스스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티끌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무죄하고 순수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정화제인 당신의 몸으로 오염된 세상과 인간을 정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물속으로 들어가심을 통해, 그 물을 정화시키시고, 부패한 우리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켜주셨으며, 우리에게 불멸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 무죄, 순수, 청량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요르단 강에 들어가자마자 죄와 부패, 타락과 우상숭배로 물들어있던 이스라엘 전체가 말끔히 정화되는 효과를 입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발길 닿는 곳마다 혼탁한 공기를 청량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세리와 환전상으로 욕심으로 오염된 이스라엘의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키시는가 하면 악령으로 더럽혀진 인간의 영혼을 말끔히 치유해주셨습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랫사람들 앞에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 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며, 성탄시기와 주님 공현 주간을 마무리해 줍니다. 한편,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가르는 기점이 되고, 이제 성탄시기는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에서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곧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듯이, 공생활의 시작에서는 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일까요? 왜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묘?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도 이를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1인친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복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하느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당신 구원의 동반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의로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리낌 없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더없이 겸손한 자세로 율법의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는 한편,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하시고, 또 그 물을 성화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의 세례 안에 성령께서 내려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요한 1,10)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시대 왔음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심”과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모습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하늘과 땅이 화답하는 일치의 모습 안에서 그 기름부음의 성취는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역사의 시작은 이처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보여 지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엄한 장면을 통해 연출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 선포의 내용은 셋입니다.
<첫째>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시편> 2장 7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곧 우리의 세례가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의 탄생됨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창세기> 22장 2절에서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란 유일한 아들이심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미 사랑받은 존재, 이미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게 됨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에 드는’ 이란 ‘주님의 종’임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구원의 협조자로, 제 2의 예수님으로, 구원의 도구로 소명을 지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미 그 은총을 입었기에 그 사랑을 곧 그 용서를 베풀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옷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 안에서, 당신의 사랑의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반영억신부-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6).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더없이 큰 사랑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신비가 세례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5-7).
일찍이 세례자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 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22,16).
우리는 가끔 세례를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성당에로 인도하시분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0-11).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나의 정체성을 일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
-송영진신부-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7-11)”
여기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내 뒤에 오신다.” 라는 말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며 메시아의 선구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말은,
메시아와 비교할 때 자기는 그분의 노예만도 못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자기 자신을 낮춘 표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자신을 낮춘 것은, 예수님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원받아야 할 인류에 속한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의 세례는 물로만 주는 세례,
즉 회개했음을 표시하는 세례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세례는 죄와 벌을 모두 사해주고 인류를 구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회개, 보속, 세례가 모두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으로서, 또 인류의 죄의 보속자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물에서 올라오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지며’ 라는 말은 원래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금의 ‘성령의 내려오심’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라는 말은,
비둘기 모습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라는 상황이, 또는 그 장면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새가 내려앉는 것처럼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사건을 예수님만 보신 것으로 기록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는 ‘외아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맡기려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선언하는)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말씀입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있었던 일을,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했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두 장면 모두 인간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주신 장면인데,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세례는 모두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신비’를 ‘삼위일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일은,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으로 오신 일’에 속한 일입니다.
그 일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과 ‘비움’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구조대원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들 위치로 내려오신 분이고,
사람들과 같아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에도 ‘낮춤’과 ‘비움’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낮춤’과 ‘비움’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일이고,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일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 자체가(신앙생활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세례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의 시작입니다.
4)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지는 일이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는 세례도 승리, 영광, 부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은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세례가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축성하고 또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분이 수행할 구원 사명에 관한 어떤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우리의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전반부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시하고(7-8절) 후반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9-11절).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7-8절).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탄을 쳐 이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더 힘센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마르 3,27; 루카 11,22; 사도 10,38 참조). 그러면서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쇄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이 성령은 새로워진 하느님 자녀들의 전 존재에 내적으로 생기를 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된다. 성령에 ‘잠기게 하는 일’,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베푸실 새로운 세례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 자신을 낮추시는 행위를 이루신다. 즉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게 하려고(갈라 3,13-14; 2코린 5,21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인이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의미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를 취하시고, 죄인들인 우리 모든 인간과 연대성을 갖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더불어 계속 펼쳐지는 광경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 사명을 세상에 구현시키고자 하는 낮추심의 행위를 하늘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상의 죽음이 실제로 그 정점을 이루게 될 만큼 그 어려운 사명에 대해 하늘이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하늘이 열림의 의미이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의 형상은 마치 비둘기가 새끼들 주위를 이리저리 날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듯이, 아들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정을 표현해 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여기서 ‘사랑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유일하다’라는 의미이며,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시편 2,7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유다 전승은 그것을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것을 예수께 적용해 해석하여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메시아적 왕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이 장엄한 천상소리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이 잘 반영되고 있다. 초기교회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재해석하여 그분의 공적인 사명을 스스로 낮춤과 죄인들과의 연대에서 인식한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를 달라고 청하는 제배대오의 두 아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하셨다. 이 비극적인 세례는 바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이 길고도 극적인 구원의 여정에 예수께 힘을 주셨다. 이 힘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유혹 사화에서 사탄이 제시하는 세속적 메시아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 필요했던 힘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세례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완성되는 구원의 사명을 담고 있다. 이에 비추어 우리의 세례까지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인간들과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세례도 기억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세례 사명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세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가야 할 길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한상우신부-
세례 안에
삶의 해답이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사람은
세례를
향해 있고
세례는
사람을 향해
열려있다.
세례는
사랑의 뜨거운
관계 맺음
이다.
세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준다.
세례로
우리의 삶또한
주님의 삶안에서
사랑으로
공유된다.
세례는
우리 삶의
가장 고귀한
변화이다.
세례는
참된 세례의
여정을 걸어간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가게한다.
세례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랑의
하느님께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세례는
구원을 향해
열려있다.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세례의 은총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로 세상을
바꾸신다.
세례는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통한
세례의
내면화이다.
우리의 소중한
세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삶의
주일이다.
소중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시며
소중한 세례를
주셨다.
세례는
삶이다.

-오상선신부-
은총의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주 커다란 행복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0-11)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놀라운 겸손의 현장이고, 또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은총 가득한 순간입니다.
이 장면 안에서는 모두가 기쁘고 행복합니다. 놀라운 광경과 신비로운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이 은총이 예수님 한 인간에게만 내리시는 축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임을 저마다 감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신원에 대해 고민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을 예수님께는 앞으로의 길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 순간이 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 마음에 든다는 말씀이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원을 확신해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 말은 마법 이상의 특효약일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의혹에 싸인 마음을 붙들어 주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힘을 줍니다. 절망으로 쓰러져가는 이를 일으켜 세우고, 의기소침한 어깨를 활짝 펴게 해 주며, 슬픈 눈물을 닦아 주지요. 새롭게 시작할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이 말씀에 오래 머물러 봅니다.
"나는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였다."(영성체송)
이 영광스런 광경을 지켜본 요한이 고백합니다. 이 현장에는 세례자 요한과, 또 다른 이들도 있었겠지요. 세례 후 성부 하느님과 성령의 방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십니다. 또 다른 주님 공현의 현장인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들려 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복음 속 하느님의 말씀과 예언자가 전하는 목소리가 겹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이 바로 예언서의 이 부분의 실현임을 증명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실 것입니다. 주님이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된 분이 아니심을 드러냅니다. 종족과 율법, 할례와 안식일 규정으로 구분되는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이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지요. 우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제2독서는 성령에 이끌려 고르넬리우스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의 설교 중 한 대목입니다.
"여러분은 ...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사도 10,3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증언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의 유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실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사도 10,36)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율법이 정해 놓은 이방인과의 관계성 앞에서 멈칫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할례나 안식일법, 정결례 등이 그들에게 갈등 요소가 되었지요.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주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유다인과 이방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독서의 대목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설교가 이루어진 후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이 내리셨다"(사도 10,44)고 하지요. 이어 베드로는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 만민의 구원자시고 주님이심이 말씀 안에 새겨집니다.
성탄 시기는 이처럼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막을 내립니다. 주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내립니다. 민족과 국적, 인종과 피부색, 학식과 재력, 종교와 문화, 신분과 직업을 막론하고 모든 이가 구원자 예수님의 자비 앞에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마주한 우리 모두를 바라보시며 기쁨에 겨워 외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사랑의 불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참 행복해 하십니다. 우리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이 연중시기 내내 이어지길 축원합니다.

제물자와 봉헌자인 세례자
-김찬선신부-
오늘은 복음을 죽 읽어내려가다가 전에는 지나쳤던 다음 구절,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요르단까지 일부러 오셨다는 얘긴데
거리로 따지면 꽤 먼 거리를 일부러 오신 겁니다.
당연히 왜 이 먼 길을 오신 걸까 묻게 됩니다.
어제 복음은 요한복음인데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사실을 전하지 않고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는 맞은 편에서
주님도 같이 세례를 주고 있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경쟁적으로 생각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이를 못마땅해하고, 그러자
요한이 자기는 작아져야 하고 주님은 커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내용이지요.
이것을 볼 때 요한복음은 주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고 싶었거나 적어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세례받은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꽤 먼 길을 오셨음을 오히려 부각코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먼 길로 따지면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에 오셔서 세례받은 게 아니라
성탄 때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신 그 육화가 훨씬 멀지요.
그런데 여기서 먼 것은 무엇입니까?
무관심, 무관계의 거리입니까?
아니지요. 먼 거리만큼 큰 사랑, 먼 거리를 무릅쓰고 오시는 사랑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더 크게 무릅쓰신 것이 사실은 거리가 아닙니다.
더러움과 죄입니다. 더러움과 죄를 무릅쓰고 오신 것이고,
더러움과 죄를 무릅쓴 사랑이 더 큰 사랑이지요.
그런데 죄와 더러움을 무릅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똥통에 빠진 금반지를 갖기 위해 똥의 더러움을 무릅쓰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것과 같냐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더러워지겠다는 것이고
정화키 위해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정화입니다.
정화에는 정의의 정화와 사랑의 정화가 있는데 사랑의 정화인 것입니다.
불의 대 정의의 대결이 아니라 죄와 사랑의 대결이라는 말이지요.
정의는 무사의 칼과 같아서 도려내고 죽이는 데는 능하고,
눈먼 칼과 같아서 죄를 도려내려다 죄인을 죽이기 쉬운 데 비해
사랑은 의사의 칼과 같아서 환자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환자의 종기를 째고 고름을 빨아내어 마침내 환자를 살려내듯
죄인에게서 죄를 씻어내어 죄인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불의에 분노하지만 사랑은 죄에 대해 아파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아파하고 이웃의 죄에 대해서도 아파합니다.
그래서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라는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람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지 않고,
성부께서 "내 맘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신 아드님처럼
나도 너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우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기의 죄를 씻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마찬가지로 사랑하기에 이웃의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며,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처럼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봉헌자와 제물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랑의 세례를 받았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다시 명심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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