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속프란치스코회

세복음적 권고 (1회,2회,3회의 회칙 등을 주심으로 비교분석) 오상선 신부님

Margaret K 2020. 10. 24. 21:35

세 복음적 권고

 

오상선(바오로),OFM

 

우리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복음적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복음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통적인 봉헌생활의 구성 요소인 3대 서원, 즉 순종, 가난, 정결 서약으로 구체화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3대 서원의 의미와 구체적인 실행방법은 수도회마다 혹은 같은 프란치스칸 가족 안에서도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회, 2회, 3회의 회칙과 생활에서 언급하고 있는 순종, 가난, 정결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올바로 인식하여 각 신분에 합당한 복음적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 <생활양식>

 

1회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Rb 1,1).

2회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생활양식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CR 1,1).

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회칙과 생활은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다(회칙 4조).

 

 

위의 표를 통해서 보듯이 1회와 2회, 3회 생활양식의 공통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1회와 2회는 수도생활이기에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세 복음적 권고를 산다는 명시적인 언급이 있는 반면, 3회는 세 복음적 권고를 명시하지 않고 단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라고 폭넓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3회원들의 복음적 생활은 수도자들처럼 세 복음적 권고의 서약이 의무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역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1회원들과 2회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 복음적 권고를 산다는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1회, 2회, 3회 구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불림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점이 바로 우리의 공통 성소이다.

 

 

2. <순종>

1회

그리고 아랫사람이 된 형제들은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영혼과 우리 회칙에 반대되지 않는 한, 주님께 지키기로 약속한 모든 일에 있어 자기 봉사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Rb 10,3).

 

2회

그리고 아랫사람이 된 자매들은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들은 영혼과 우리가 서약한 생활양식에 반대되지 않는 한, 주님께 지키기로 약속한 모든 일에 있어 자기 원장들에게 순종할 준엄한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CR 10,2).

 

3회

회원은 성부께 당신의 의지를 의탁하신 예수님의 구원자적 순종을 본받아, 다양한 생활환경에서 각자의 처지에 따르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회원은 곤란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회칙 10조).

 

순종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자기 의지의 포기이다.” 다시 말해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극적인 의미만 담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뜻에 내맡긴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향하고 있는 말이다.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순종의 탁월성은 바로 예수님의 구원자적 순종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가난을 통해서도 정결을 통해서도 아닌 바로 순종을 통한 결과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내맡기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어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로서의 가장 큰 죄는 불순종의 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추구하는 죄, 이를 사부님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죄”(권고 2), 아담의 죄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자기의 뜻을 어떻게 포기해야 하는가? 1회 회칙과 2회 회칙에서 프란치스코오 글라라는 똑같이 영혼에 반대되지 않고, 즉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그리고 회칙, 즉 서약한 생활양식에 반대되지 않는다면 장상을 통해서 전달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는 다른 방식의 순종 실천이 제시된다. 첫 번째는 “다양한 생활환경에서 각자의 처지에 따르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순종을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곤란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순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있어 순종생활은 그냥 회장이나 영적보조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의 의무를 다하고 어려움 안에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순종은 장상과 수하 형제 모두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먼저 장상들의 의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자주 형제들을 방문하고, 영혼과 회칙에 위배되는 명을 내려서는 안 되고,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목방문(시찰)의 중요성은 형제들의 영혼을 돌보도록 맡겨진 직책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고 활동보다는 영적 생활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사랑으로 충고와 교정을 해 주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이러한 장상으로서의 의무를 잘 자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장상의 두 번째 의무는 명령을 내리되 영혼과 회칙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순종의 명이 하느님의 뜻에 맞갖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상은 프란치스코가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에서만 기쁨을 찾는 종”(권고 21)이 된다면 언제나 그의 순종의 명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장상은 각 형제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형제의 양심에 위배되는 명을 내리지 않게 된다. 회칙은 “지극히 높으신 분 친히 계시하신 것”(유언 14)이기에 하느님의 뜻의 표현이다. 그래서 장상들은 그에 반대되는 것을 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장상직의 어려움은 바로 종이요 봉사자가 되어야 하는 데 있다. 순종의 명은 자주 내려서는 안 된다. 이는 최종 수단일 뿐이다. 첼라노가 전하듯이 순종의 명이 “미친 놈의 손에 들린 칼자루”(2첼라노 153)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고위 장상직에 대해 욕심이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작은 형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장상은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도와 줄 의무가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가족적인 정신이다. 주인이 하인에게 대하듯 장상을 대할 수가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장상이 갖추어야 할 여러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형제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장상은 먼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형제들의 양심과 회칙에 근거해서 합당한 명을 내리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도와줌으로써 형제들의 영혼을 돌보도록 맡겨진 직책에서 나오는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순종의 첫 번째 대상은 수하 형제가 아니라 바로 장상 자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수하 형제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장상의 권고와 교정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했음을 생각하여 순종을 충실히 실행에 옮기고, 회칙을 영적으로 실행할 수 없을 때 장상에게 달려가야 할 의무가 있다.

프란치스코는 후반부에서는 올바른 명령과 참된 순종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안해 주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부정적 관점에서 순종을 논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순종을 논한다.

먼저 부정적인 관점에서 참다운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몇 가지 요소가 제시된다.

①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을 조심할 것. 이는 자기로 가득 차 있고 주님의 정신이 조금 밖에 없음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순종하는 자는 하느님께 빚진 자의 자세로 늘 겸손할 수밖에 없다. ② 질투와 탐욕을 조심할 것. ③ 이 세상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표시가 바로 이것이다. ④ 중상과 비평을 말아야. ⑤  배우는 데 집착 말라.

그렇다면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참다운 순종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순종을 산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작용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정신으로 무장되는 것이다. 이 주님의 영을 얻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있다. ① 순수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해야. 순수한 마음은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있게 하는 불변의 조건이다. 또한 이는 모든 현세적인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고, 그리하여 하느님을 위해 자유롭게 되기 위한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기에 우리는 그분을 깨끗한 마음으로 흠숭합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합니다.” ② 겸손해야. 겸손한 사람은 박해와 병고에 인내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겸손하지도 인내롭지도 못하다.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인내와 겸손을 같이 놓고 본다. 겸손하고 인내로운 자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박해이든 병고이든 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와 겸손 가운데 갈바리아를 오르는 자는 주님께로부터 약속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③ 사랑해야. 그 중에서도 자신을 박해하는 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죽고 주님의 영으로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표지이다. 가장 어려운 것임은 분명하지만 주님의 영을 가장 확실하게 지닐 수 있는 길이다. ④ 항구해야. 이렇게 하여 하느님으로 채워지기 위해 자신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채 항구하게 될 때, 이런 텅 빈 우리 안에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작용이 있게 된다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다.

순종은 사랑의 자매이다(귀부인이신 거룩한 사랑이여,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순종과 함께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따라서 참으로 순종의 사람은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모델을 성녀 글라라에게서 볼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유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오.”(CR 10,5) “그리고 원장은 직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덕행과 거룩한 생활로써 다른 자매들보다 앞장서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자매들은 그의 표양에서 자극을 받아 두려움보다 사랑 때문에 그에게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CR 4,7).

 

 

3. <가난>

1회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뢰심을 가지고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으니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Rb 6,1-6).

 

2회

우리가 주 하느님과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약속한 거룩한 가난을 내가 나의 자매들과 함께 지키려고 항상 열심히 애쓴 것같이, 나의 후임자가 되는 원장들과 모든 자매들도 끝날까지 어김없이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즉, 직접 혹은 간접으로 재산이나 토지 혹은 토지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 단, 수도원의 정숙과 격리를 위해 요구되는 정도의 토지는 제외됩니다. 자매들이 필요로 하는 밭 외에는 이 땅을 경작하지 말 것입니다(CR 6,4-5).

 

3회

성부를 신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을 관심있게 또 좋게 보셨지만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을 택하셨다. 이와 같이 회원은 물질적 욕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복음을 따라 자신은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받은 재물의 관리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원은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자나 나그네’와 같이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회칙 11조)

 

어제도 오늘도 프란치스칸 혁명은 가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가난은 쇄신의 원동력이다. 프란치스칸이 이 가난에서 멀어진다면 더 이상 프란치스칸이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현대화된 세계, 풍요로운 물질문명 세계 안에서 프란치스칸은 오늘날 가난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1회원들에게 있어 가난은 무소유의 정신과 순례자와 나그네 정신, 동냥의 정신이 요청된다. 그 무엇도 자기 것으로 취하고 소유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통해 1회원들은 오늘날에도 가난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곳이 있다면 떠날 수 있는 자세는 이 가난의 정신을 대변해 주고 있다.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1회원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부끄러움 없이 애긍을 청할 줄 아는 것 역시 가난의 한 단면이다. 가난한 사람만이 애긍을 청할 수 있다.

2회원들에게 있어 가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녀 글라라는 가난의 특전을 교황님으로부터 얻어낼 정도로 이 가난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글라라는 1회원들에게 요구되는 가난의 정신을 그대로 요구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있어서는 다른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다. 글라라 시대의 모든 관상수도원들은 보유 재산이나 토지들로부터 세를 받아서 먹고 살았다.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 바로 도조였던 것이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에 동참하기 위한 방법으로 관상 수도자들의 기본 생계유지 수단이었던 재산이나 토지의 보유를 원천적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늘 하느님의 섭리와 애긍으로만 살아감으로써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가난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2회원들에게 있어서도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려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애긍에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자세가 곧 가난을 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있어 프란치스칸 가난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구체적인 실행방법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재물의 관리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하느님께서 재물의 주인이심을 알고 모든 재물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요구되는 가난의 삶이다. 따라서 실천적으로는 물질적 욕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하며,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1회, 2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순례자와 나그네의 정신이 요구된다.

가난을 살고자 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정신이 바로 이 순례자와 나그네의 정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구체적인 가난을 사는 길이 될 것이다. 순례자와 나그네는 무엇보다도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 고향인 천국을 향하는 여정에 있기에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완전한 것이 없고 다 지나가는 것이다. 돈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미모든 고향이든 직장이든 그 무엇이든지 나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걷지 못하게 묶어 두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오늘날 프란치스칸 선교를 이러한 측면에서도 접근한다. 프란치스칸 선교는 이렇게 순례자의 여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떠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여정 중에 있는 나그네가 되고 떠나지 못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안주자가 되고 만다.

 

 

4. 정결

1회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합니다. 형제들은 여자들과 의심스런 교제나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 특별한 허가를 받은 형제 외에는 수녀원을 출입하지 마십시오. 또 남자와 여자의 대부가 되지 마십시오. 이로 인해 형제들 간에 또는 형제들에 대해 추문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Rb 11,1-3).

 

2회

수도원 밖에서 봉사하는 자매들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표양을 항상 보여 줄 수 있도록 정숙하게 행동하며 말을 적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들과 의심스러운 교제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할 것입니다. 또 남자나 여자의 대모가 되지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해 비평이나 동요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속의 화젯거리를 수도원에 감히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또한 수도원 내에서 일어나는 말이나 일에 대해 그것이 추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감히 끌어내지 말아야 할 준엄한 의무가 있습니다.(회칙 9,7-11)

 

3회

회원은 내세 행복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자신이 받은 성소 때문에, 마음을 깨끗이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면 자유롭게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회칙 12조).

 

프란치스코는 정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별로 주지 않고 있다. 다만 위에서 보듯이 세 가지를 애써 강조하고 있는데, 여자와의 의심스러운 교제를 피하라는 것과 수녀원 출입에 신중하라는 것, 그리고 추문이 생길만한 대부모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글라라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프란치스코와 달리 여성으로서 정숙한 행동과 말을 적게 하라는 충고를 덧붙이고 있으며, 세속의 화젯거리를 수도원으로 끌고 들어오지도, 수도원 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이야기를 바깥으로 끌어내지도 말라고 하면서 입조심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육신의 정결보다도 마음의 정결에 대해 더 강조하는 듯하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6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강조한다.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은 지상 사물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으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결은 한마디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바라고 흠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회원들과 2회원들에게 있어 정결은 이렇게 육신의 오감을 절제하며,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 하느님을 바라고 흠숭하는 데 진력함으로써 살 수 있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재속 프란치스칸들도 정결을 살 수 있는데, 마음의 깨끗함을 통해서이다. 내세 행복의 증인이요 성소 때문에도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하는데 노력해야 하고 그래야만 형제들을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결은 개인적 덕행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위한 조건이며 더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한 방편이다.

정결의 삶은 결백증과는 다르다. 정결은 하느님께 오롯한 마음을 돌려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손발을 깨끗이 씻고, 목욕을 자주하고,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정결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하느님인가 사람인가? 또 그 하느님과 사람에게 정말 사심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다가서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5. 결 론

 

복음적 생활의 서약,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서약은 우리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의 핵심이다. 이 서약은 세 복음적 권고라 불리는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삶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그러나 생활양식의 차이점 때문에 이 세 복음적 권고를 사는 방식 또한 똑같을 수는 없다. 1회는 순회설교적 생활, 2회는 정주적 관상생활, 3회는 세속 안에서 재속성을 사는 생활이기에 그 생활양식에 합당하게 이 세 복음적 권고를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자기의지의 포기와 하느님의 뜻에 내맡김으로서의 순종, 무소유의 정신, 순례자와 나그네 정신, 동냥의 정신, 재물의 관리자로서의 정신으로서의 가난, 오관의 절제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통한 주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이라는 정결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살아가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