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속프란치스코회 소속감
엠마누엘라 데 눈찌오 SFO
https://www.nafra-sfo.org/Korean/Belonging_Korean.pdf
서론.
소속감의 위기를 맞은 현대
1. 개관. 20세기의 위대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는 과거의 "견고하던 사회"가 무너지고 "유동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평한다. 이 “유동적인 세계”에서는 더 이상 전수의 문화, 축적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고 매이지 않는 문화와 연속성이 없는 문화가 있을 뿐이다. 유동적인 사회에서는 그 동안 사회가 견고한 실체로 서 있도록 지탱해주던 버팀목들이 약화되었다. 즉 국가관, 관념과 관습, 가족, 직업 등의 개념이 약해졌다. 현대는 무엇 하나 확고하거나 확실한 보장이 없다. 소모품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너무나 편리하게 바뀌고 변한다. 인간관계도 깊이가 없어져서 사랑을 위해서나 우정을 위해서 변함없이 오래 기다려 준다는 일은 이젠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며 웰빙시대 사람들은 먼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기 보다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만족에 관심을 둔다.
불확실하고 모험적인 시대에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만족을 찾는다. 현 소비사회는 사람들에게 소유욕을 조장하고, 인공적인 생필품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선택할 수 있고,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의 삶속에서도 자기가 결정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통은 점점 더 무시되고, 심지어 기본적인 윤리마저 소홀히 여겨진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 개인의 욕구 성취가 정당화되고, 행동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 사회적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고 무슨 일에든지 매이기를 싫어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분명하게 어느 것에든 "소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관계나 어떤 관습에 대한 관계는 깨어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고 이를 쉽게 저버린다.
호세 까르바요(P. Jose Carballo) 작은형제회 총장은 2007년 6월 30일 작은형제회의 돗자리 총회에서 젊은 작은형제회원들에게 이러한 현대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따라 살고, 순간을 위해 살며, 상대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럽고, 모든 것이 언제나 타협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는 항상 불확실, 불안전, 불안정이 도사리고 있어서, 성덕이나 확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세상은 의심이 제도화되어 의심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많다. 감정의 세계, 감정의 시간이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사람들은 "시간제"와 “속도"의 문화에 끌리어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겨 다니며, 한 직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경박한” 문화에 이끌려, 유토피아나 희생이나 포기와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관적인 문화에 빠져, 자기 자신이 잣대의 중심이 되고, 만사를 자기중심, 자기실현의 목적으로 삼는다. 현대인은, 특히 현대의 젊은 세대는, 불확실한 시대에 확고한 주관이 정립되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힘든 길을 더 알아듣기 어렵게 되었다.
2. 가정 소속감 우선, 가정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가정이란 주제는 복잡한 주제이다. “결혼”의 정의부터 내리자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평생의 친구와 그의 운명의 일부로서 선택하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배우자와 동반자로서 선택한다. 둘이 한 인생을 계획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 그들은 얼마동안이 아니라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한다. 결혼의 특성은 “언제나” 함께 사는 것이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를 존중하고, 매 순간 서로 마음을 다 하여 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집이 가정이 되고, 가정이 가족이 되어 자녀들이 그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가정은 한 사람에게나 한 사회에 가장 큰 자원이다. 가정은 가정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너그럽게 용서하며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서로 도움을 주며 산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은 사방에서 시대의 도전을 받고 있다. 앞서 언급한 불안정성과 물질주의와 순간적인 쾌락주의, 미디어의 영향 등으로 가정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이 시대의 가정은 한 지붕아래에 함께 사는 정도로 성격이 변하였다. 이제 가족과 결혼과 자녀는 부부 두 사람이 설계한 꿈의 실현, 삶의 열매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일 뿐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동거 형태로 가고, 결혼했더라도 부부 중 한 사람이나 혹은 두 사람 모두 “결혼했지만 독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결혼과 이혼의 높은 비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70년대 후반에 결혼한 부부 중 아직까지 함께 사는 부부는 50%가 안 된다고 한다. 미혼모의 수나 가정 밖에서 사는 어린이의 수가 점점 늘고 있어, 이러한 상황이 거의 “정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이점을 염려하시어, 가정을 보다 견고하게 세우는 길을 모색하고, 신세대들의 가톨릭 신앙교육에 관심을 두고, 신앙이 부모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임을 인식하기를 강조하셨다. 가정이 개인과 사회의 “완충지대”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실 때문에 가정이 앞에서 열거한 시대의 경향에 당연히 역행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완충지대”인 가정을 파괴하려고 한다.
3. 직장 소속감 불안정성은 직장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직장이 불안하기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평생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 인생여정의 주요한 행사 즉, 부모로부터의 독립, 자녀 출산 등을 연기하고 있다. 이에는 취업의 위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직업을 택하고, 전문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돈 벌 목적만으로 준비되지 않은 분야에서 직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다.
4.국가의 소속감 최근에 행한 이민조사에 의하면,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사는 사람이 1억 7천 5백 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85%가 개발 도상국가에서 일 년에 일인당 3,500 달러로 살아야하는 현실에서 이민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특정 지역에 국한한 소속감이 크게 변동되는 것은 문화와 전문직의 이동 때문만이 아니고, 현대에서는 초국가적인 실체가 국가라는 실체보다 더 위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국인, 이태리인, 한국인이라는 국적의 의미는 약화되었고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정체가 뿌리를 깊이 내릴 토대라고 볼 수 없다. 반면 지역적 현실, 즉 자기 이익을 옹호하는 좁은 지역, 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전반적인 상황은 불안정성이 전체적으로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다. 직장에서부터 인간 상호 관계, 가정,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불안하다. 사람들이 조국이나 가정에, 혹은 전문 직업에 깊이 소속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외의 다른 사회적인 이유를 보면, ?조각난 사회: 한 공동체라는 개념 즉,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없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가 낯설다. 사람들은 “옆 집”이나 “건너 편”에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불만: 지나친 개인화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간의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의심과 불신의 사회: 오늘 날의 폭력적인 사회가 불신의 원인이 되고 있다. 평화롭고 따뜻한 인간관계는 마비된 것 같고, 불신이 사회의 기반을 좀먹고 있다.
5. 교회 생활의 소속감 교회와 사회 간의 토론회는 그 토론의 목적이 달라졌다. 70년대에는 이혼이나, 낙태, 약복용 문제 등 가톨릭의 윤리 문제들을 다루었었으나, 오늘날에는 이미 인정된 크리스천 삶을 더욱 강화하는 문제이다. 남성과 여성, 부권과 모권, 성 문제 등을 토론하며 남성이나 여성이 어떻게 삶을 충만하게 살고 어떻게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에 대하여 그 대안과 세계화된 비전을 찾으려고 한다. 세례성사로서 교회의 신자가 된 사람들이 교회에 어떻게 소속되어 있는가? 교회와 관련하여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신자들 중에는 완전하게 교회에 속해 있는 신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지체로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명목상 외형적으로 교회와 겨우 연결되어 있다. 또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회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 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에서 2007년 12월 15일자로 출판한 ‘복음화의 입장에 관한 교의 주석’(doctirnal note on some aspects of evangelization)에는 특별히 교회에 관한 “소속감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은 사도들로부터 시작한 복음 선포 의무에 태만할 수 있기에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지켜내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크리스천 희망으로 살아있지만, 오늘의 현실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교회는 사방의 도전을 향하여 예언자적인 응답을 해야 한다. 실제로 교회가 이러한 현실을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와 크리스천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 신자들은 본래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 째, 신앙과 현실이 직결되어야 하고, 둘 째,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하며, 셋째 진리와 자유가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계속 주시해야 한다.
우리가 재속프란치스코회원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크나큰 이 사명에 협력할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재건을 거듭해 나아가야하며, 참된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복음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길이며, 복음을 배반하거나 변질시키지 않고 선포할 수 있는 길이다.
소속감과 정체성
6. 본질적 일치 누구에게나 소속감에 대한 이야기는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정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성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사제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수도자의 존재 의미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에게 정작 유익하고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충만한 존재로 살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에게 속하고 내게 속한 사람은 누구인가?
소속감과 정체성의 밀접한 관계는 심리학적 문제이겠으나, 그 보다는 오히려 존재 자체의 구조적 문제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본질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해야 한다. 자아를 발견함과 동시에 모든 이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 원리이다. 소속감 없는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정체성 없는 소속감이란 없다. 정체성과 소속감은 다른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소속감을 논하기 위하여 우리는 정체성을 말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과 타인을 구별해야 한다.
7.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정체성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재속프란치스코회원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평신자이거나 수도자이거나 재속프란치스코 회원은 3회의 다른 공동체들을 알 기회가 많다. 과거에는 많은 공동체들이 있었다. 회원들은 대부분 남녀가 다른 회원복장을 입었다. 남성 형제회와 여성 형제회가 따로 있기도 하고, 남녀 공동 형제회도 있었으나, 남성과 여성은 양쪽으로 따로 갈라져 앉았다.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프란치스칸 가족은 큰 변화를 체험하였다. 1978년 6원 24일 바오로 6세가 인준한 새로운 회칙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열렸었는데, 바오로 회칙은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문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는 새 회칙을 받고 회칙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기간으로 들어갔다. 새 회칙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기본적 참고가 되었다. 우리는 새 시대를 맞아 쇄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쇄신은 전통에 충실하면서 쇄신하는 길이었다. 어떤 형제회는 그들이 재속에서 교회 활동의 도구의 소임을 끊임없이 받고 있으면서도 수도생활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남녀수도자들도 이미 본질은 같지만 표현방식은 다른 새로운 프란치스칸으로 변화되었다. 프란치스코 삼회는 재속프란치스코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그 새 이름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며, 정확히 우리는 재속에 사는 프란치스칸 평신자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재속프란치스코회라는 이름은 삼회의 “재속성”을 강조하는 이름이고, 재속성이야말로 삼회의 특성인 것을 확인하기 위한 이름이다.
후에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를 상기하면서,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 이렇게 쓰셨다. “평신자들의 성화의 소명은 재속에서 세상일을 하며 재속의 고유한 방법으로 성령에 따르는 삶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17 항) 이러한 지침은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이 되는 사람에게 더 큰 의무를 부여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의심과 의문과 변화된 문화에 접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허공의 존재가 아니고, 저마다 고유한 상황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완수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고, 하는 일, 이룩한 업적만이 그가 아니다. 사람은 그 이상의 존재로서, 저마다 하나의 신비이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날 재속프란치스코 회원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서약을 한 회원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과거의 어느 때 보다 현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주어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렵지 않다. 일상에서 각자가 하는 일이 각 사람을 나타내고, 형제회가 이루는 일이 형제회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첫 대답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이 아닌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일이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이르면 우리는 당혹해한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서 성실하지 못했고 철저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하는 일에 (혹은 형제회의 일에) 프라치스칸 색깔을 내보이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신심을 증진시키고, 프란치스코 관련 전시회를 열고, 성 프란치스코의 전이예식을 무대에 올리고,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어쩌면 피상적인 것이 아닌가? 프란치스코회 정신은 부수적인 것, 이차적인 것, 장식적인 것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전문가이다. 혹은 학생, 사업가, 지도자, 성체 봉사자, 또는 본당 봉사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 위에 하나 더 우리는 프란치스코 회원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가 프란치스코 회원임은 우리 정체성의 핵심이며, 골수이며,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회칙 서두에 재속 프란치스칸 삶의 기본이 되는 요소들이 정확히 나와 있다. 회칙 2조에는 재속프란치스코회원들은 “재속 신분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서약하고, 교회가 인가한 이 회칙에 따라, 성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적 생활을 추구한다.”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최근 규정(회칙과 회헌)은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정체성이 세 가지 차원으로 표현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즉 개인적(내적 생활), 형제적(공동 책임감) 그리고 보편적(선교)생활이다.
8.내적 생활. 불안정하고 동요하는 시대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내적 생활에서 깨어 있어야 꾸준한 헌신과 성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내적기초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삶은 일관성이 없고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디딜 곳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모험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우리는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회칙 7조는 회개는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회헌 8조 2항은 “끊임없는 회개의 쇄신 여정 안에서” 살 것을 가르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정체성과 소속감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특별히 영속적 양성은 프란티스칸의 삶이 날마다 새로운 프란치스칸이 됨으로써 충족된다는 의식을 깨우쳐야 한다. 즉, 결코 한 번에 끝날 일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실천을 요구하는 여정이다. 작은 실행을 통하여 개인이 거듭나며 이 작은 실행은 우리의 큰 회칙생활로 연결된다.
우리는 세상과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한 몫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한 ㅁ몫은 반드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재속회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정치적 분야나 전문적인 분야에서 연대와 자유의 증진, 권리와 정의의 증진을 위하야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의 특별한 소명은 살아계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상 속에서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기도하지 않고서 세상에 참되게 기여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도는 산 체험을 동반해야 하며, 우리는 체험으로써 변화되어 사랑을 실천하며 내적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황 베내딕토 16세는 이 문제를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교황은 행동을 계획하기 전에 먼저 흠숭기도를 바쳐라. 기도는 우리를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행동을 비추어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리므로 형제회는 감동적인 기도의 학교가 되어야 하고, 일치를 이루는 곳이어야 하며, 사랑이 비추는 곳, 희망이 솟는 곳이 되어, 회원들이 형제자매들에게 사랑 받는 기쁨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충만한 기쁨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주고 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
9.타우의 영성.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소속과 정체성의 외적인 표지는 타우 십자가이다.(회헌 43).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의 상징인 이 표시를 매우 존중하였다. 성인은 편지에도 타우 십자가를 그리고, 머무시던 곳에도 타우 십자가를 새겨 놓고, 늘 타우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 보나벤투라가 전하는 것과 같이 마치 예언자의 말에 따라 진정으로 예수님께 회개하고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이마에 타우 표시하는 것에 열정을 쏟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타우 십자가를 지니고 증거자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뜨거워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성소와 서약의 목적이다. 타우 십자가를 지님으로써 우리가 “십자가의 영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회칙 10조를 다시 읽어보자. “...회원은 곤란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회헌 10조: 십자가는 형제자매들의 “책”이다. 십자가는 삶을 살고, 사랑하고, 고통을 받는 목적과 방법에 대하여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공부하는 “책”이다. 우리가 회헌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에, 어는 국가형제회에서 이 조항이 너무 비관적이라 삭체하거나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에 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보다 더 낙관적인 일이 있겠는가?
십자가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하며 인간의 영원한 문제 즉, 고통, 질병, 죽음, 존재의 불확실성의 의미 등의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의 상처 속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옆구리의 상처와 손과 발의 상처 앞에서 토마스와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할 것이며 바오로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고 고백할 수 없을 것이며, 프란치스코와 함께 “황송하옵게도 나를 사랑하셨기에 당신이 죽으신 것처럼, 나도 당신 사랑 때문에 죽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할 것이다. 고통과 고난은 사랑의 범주에서가 아니면 달리는 설명하지 못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삐에뜨랄치나의 빠드레 비오 성인의 시성식(2002, 6월 16일) 강론에서 우리 시대의 “마음을 희망으로 다시 열기 위해서 십자가 영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희망은 “모든 눈물을 닦아 줄” 세상에 대한 희망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덕을 닦고, 자비을 실천함으로써 더 의롭고 복음적으로 되는 세상에서, 모든 인간 조건이 개선되는 희망이다.
10. “나눔의 정신” 지금까지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정체성과 영성의 특성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나눔의 정신을 다시 깨닫고, 주는 문화를 세울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베네딕토 16세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하신 말씀을 본받는 길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회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의 고마움을 알고, 유용성보다는 인간의 정체성이 우선이고,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외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벗어던지라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께서 그의 첫 회칙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중심 메시지는 나눔의 정신 즉, 인간 상황의 필수적인 잣대로서의 형제애이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하며, 삶과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기대하면 성장하였다. 이러한 기대로 찌든 사회에 이제는 “나눔의 정신”을 도입할 때이다. “나눔의 정신”은 오늘날 사회의 역동성을 해석하고 새롭게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잣대일 것이다.
그리스천에게 (더욱 프란치스칸들에게) 정의의 입장만 지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형제애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 형제애는 나와 너의 좁은 하늘 아래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형제애는 우주의 공간 (온세계) (피조물의 노래)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형제애의 다양한 측면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개인의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를 지탱해온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측면을 개인의 독점에 의해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교황님은 최근의 한 연설에서 강조하셨다. “사랑이 신자들을 구별하는 생활방식임을 인식하고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사랑의 증인이 됩시다.”(O.R. 2008.2.21.)
소속감과 공동책임
11.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소속.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이 되는 것은 서약에 근거한다. 즉,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양식과 교회에서 인준한 회칙에 따라 복음을 살 것”을 엄숙하게 약속한 서약으로 회원이 된다(회칙 2조). 회헌 42조 2항에서 서약은 후보자를 형제회에 입회시킨다고 서술하고 있다. 펠리스 신부는 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서약에 대하여 훌륭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즉 후보자는 서약함으로써 살아있는 유기체인 형제회에 흡수되어 하나의 고유한 실체가 된다. 이렇게 흡수와 동화의 과정을 통해 여러 몸이 한 몸으로 된다고 하였다.
회칙에 간추려 놓은 “복음생활 계획‘은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고 살아야 할 계획이다. 회헌 3.3에 나온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자주 그리고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소명은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사는 것이다.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형제회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와 결합하고 형제회들은 온 세상에 퍼져있는 재속프란치스코회라는 큰 영적 가족인 유기적인 유기체의 단일 조직체를 이루는 세포들이다.
소속감에 대하여 조심해야 할 것은 회원의 정체성을 너무 절대화하여 우월감이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 것이다. “자기의 소속과 정체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병적일 수 있다. 실제로 지나친 집착은 한 개인에게는 소견을 낳게하고 지나친 집착을 갖는 국민에게는 국수주의를 일으키고, 또한 종교와 문화에서는 근본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고 교황청 문화성성 장관인 몬시뇰 라바시(Mons, President of Ponntifical Council for Culture)는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해서 말할 때에 친교와 공동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회헌 30.1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형제들은 자신의 소속 형제회와 온 세상에 퍼져있는 모든 형제회의 유기적인 재속프란치스코 형제회를 위하여 공동책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1회나 정규3회의 장상들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급 형제회를 운영을 위하여 법적으로 선출된 회장과 평의원들 (?그리고 영적 보조자), 즉 형제회의 지도자나 봉사자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차원인 것이다. 신앙과 사랑의 형제적 친교에 대한 협조가 요구된다. 이러한 형제적 친교를 위해서는 서로 기도하고, 서로 이해하고, 모임에 착실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세계에 퍼져있는 전 재속프란치스코회에 대하여 말하자면, 공동책임이란 무엇보다도 상급형제회에서, 즉 지구, 국가 및 국제형제회에서 요청하거나 제안하는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쾌히 응하는 자세이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문화권에 있는 형제회의 사정에 대하여 알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은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평의회의 비용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 “모든회원은형제회의 생활과 전례, 사도직, 자선활동 등에 필요한 지출을 충당하기 위하여 자기능력에 따라 회비를 내야 한다. 그리고 각 단위형제회는 상급형제회 평의회의 모든 경비를 분담하도록 배려해야 한다.”(회칙25) ?참조: 하선문장은 원문에는 없음- 이러한 주제는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잠시 그 중요성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지구 및 국가형제회의 평의원들이 크고 복잡한 책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각 단위 형제회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맡은 바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하며, 국제평의회의 회장단은 국제적 위치에서, 재속프란치스코회가 협조적이며 활동적이 되도록 인도하고 다른 프란치스코 가족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고,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삶과 사도직을 증진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회헌 73조)
12. 단위 형제회 소속 여러분은 회칙 22조의 단위형제회의 정의는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단위형제회는 “… 전 재속 프란치스토회의 기초단위이며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볼 수 있는 표지가 된다…” 이 기본적인 내용을 분명히 설명하기 위하여 회헌 30.2에서는 형제회 소속회원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 “회원으로서 공동책임감을 가져야 할 사항은 모임에 출석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하며, 기도와 각자 자기 처지에 따라 그리고 형제회의 활성화를 위하여 각자의 의무를 다 할 것이다.” 이 설명이 그저 신학적인 이론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우리의 공동책임의 “몫”을 최소한의 시간이어도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출석, 형제회의 정규모임에 필히 참석할 것(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님)이며, 정규모임을 이제는 “월례회”라고 부르지 말 것이다. 모임은 평의회에서 정하는 대로 “자주 모일 것”이며 그 모임은 프란치스코회원의 형제적인 삶과, 교회의 신자생활과 회원생활의 성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회칙24)
2. 증거/증거자, 복음생활과 형제회 생활의 증거는 성소의 증진과 (회헌45.2), 새 회헌들의 양성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회헌37.3)
3. 기도, 기도는 “사랑의 공동체”의 영혼이다.(회칙8조)
4. 적극적인 협력, 모든 회원 각자의 적극적인 협력은 좋은 형제회를 위해서 모든 이가 참여함으로써 역동적인 모임이 되고, 그리고 자선과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협조가 요구된다.(회헌53.3)
5. 형제회의 활성화를 위하여 특별히 봉사자의 소임을 맡아야 할 경우에 협력할 것이다(회헌 31.4)
6. 경제적 협조,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형제회에 경제적 협조를 한다(회헌30.3). 또한 형제회의 생활과 형제회의 전례와 사도직 및 자선활동의 경비를 충당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공동책임에는 모든 회원들이 인간적인 삶과 영적인 삶의 질을 높이도록 돌볼 필요가 있다. (CC. GG. 42.4항) 어느 형제자매가 무슨 문제나 곤란한 지경에 혼자 빠져 있으면 모른 채 하지 않고, 형제회에서 도와줄 것(물질적 도움까지도)이며 지원하고 위로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형제회원으로 산다는 것은 몇 가지의 확고한 사항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형제들을 그들의 실제 상황에서 만나고, 그들의 인간적인 성장에 동반자가 되고, 다양한 형식으로 기도를 체험하며, 왕국 건설의 사명과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가르친다. 그 소속감은 교회의 세계적 목적을 이해하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인간의 성장과 실현이다 (재속 프란치스코 형제회 회칙 14조).
13. 다중 소속감 공동책임에 큰 장애의 하나는 소위 다중 소속감으로서 이는 회원이 교회의 여러 단체에 소속되는 것이다. 명심할 것은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성소는 그 회원만의 삶과 사도적 활동 을 틀지우는 특별한 성소"(CC.GG. Art.2)라는 것이다. 회원이 다른 단체에 소속될 때 그 사람의 전체 삶과 그 사람의 모든 행동에 슬며들어야 하는 프란치스칸 영감이 다른 영성과 섞여서 희석된다. 그밖에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중복되면 형제회원의 의무를 정확히 실천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은 양성 책임자나 형제회 평의원들이 서약예정자들의 적합성을 평가할 때 참고할 것이다.
소속감과 선교
14. 세상을 향한 개방 글로벌 시대, 다문화, 다종교적 환경 속에서, 개인주의와 회의주의 사회에서, 초대교회처럼, 교회는 다시 예수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해야할 사명을 절감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교회가 세상에 주는 무상의 선물이며,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은 “서약으로 보다 강하게 교회에 결속되어 있어” “생활과 말씀으로써” 그리스도를 선포할 소명을 받았다.(회칙 6조). 말과 증거는 서로 빛내 준다. 행동 없는 말은 효력이 없고, 증거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말로 받쳐지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말과 모범적인 행동으로 즉, 우리의 온 삶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선교지역은 매우 넓다. 사회에서부터 소외된 지역, 원주민 공동체, 도시의 빈민들, 이민자들, 피난민들, 추방된 사람들 등등이다. 선교의 목적은 보편적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선교는 현존과 말씀을 전함과 기도로서 수행한다. 현존이란 함께 삶으로써 대화를 나누고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복음화는 하느님의 백성 중 소수의 사람들만의 특전이 아니다. 즉 온전히 봉헌한 삶을 살며 구원을 선포할 소명을 받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은 선교 소명과 연결되어 있다. 즉, 믿는 이들은 모두가 성화와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 (Redemptoris missio no.90)
선교 없는 교회는 교회의 기본 사명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재속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모든 형제회들 그리고 회원들도 "교회의 산 지체”로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교회의 선교를 위한 증거자와 도구”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생각의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데만 만족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갈 용기와 자세가 필요하다.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의 선교의 뿌리는 존재와 생활과 정신에 있다. 생활은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생활 (회칙 10, 11, 12조항), 정신은 산상수훈의 정신이어야 한다. 회원의 봉사의 방식은 각자의 재능과 형편을 따를 것이며, 일하는 환경에 맞아야 한다. 사도적 사명은 자선을 베푸는 일, 모든 이를 그리스도와 다시 일치시키는 계획을 실현시키는 일, 일에 대한 헌신, 전문직 수행 등이며, 실제적 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대해 얘기하면서, “상황에 따라 절충하는 것도 거룩함이다”라고 전기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여러 가지 복병이 숨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효율성을 우선하고 약자를 소외시키는 경제원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유를 질식시키고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국수주의에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에서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는 국가가 진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는 것을 확인한다. 또한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시작하였고 위대한 스승이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레오 13세 교황께서 거듭 강조한 “공동 선”에 따라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소수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을 줄 수 없는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덕으로써 민주주의가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을 동포들에게 알리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 가장 약한 자들을 포옹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수용하며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살만한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
도시와 인접 지역은 진정한 인간관계를 수립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자선으로 시민보호기능을 세울 수 있는 곳이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병자들을 방문하고, 글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돌보고, 노인들을 도우며, 괴로운 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등...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늘 살펴야하는 의무이며, 회개하는 형제자매들이 처음부터 실행했던 일이다. 그러나 오늘 날 이러한 의무들은 새로운 형태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야하고 따라서 새로운 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수단은 삶과 말이고 목적은 복음화이다.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어떤 이들은 세상의 일을 최우선으로 시급히 시행하고, 하느님과 가톨릭 신앙에 관한 일은 특별한 것으로 보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룬다.. 그러나 ...복음화를 가장 먼저 해야 하고,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의 일도 발전하고 화해도 이루어진다. 사회 활동과 복음은 분리할 수 없다.” (라티스보나에서의 교황님의 연설).
15. 새로운 형태의 참여.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 된지 40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힘은 본질적인 역동성으로 인하여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고 또한 희망적인 적이다. 우리는 인간과 또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새로운 개척지에서 그 가르침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흥정할 수 없는 것이며, 역사에서 진행되는 세속화와 상대주의에 결부시킬 문제가 아니다.
* 새로운 형태의 활동은 사회적-정치적 양성이 요구됩니다. 그 양성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 교리를 알고 사회 교리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간추리 사회 교리(Compendium Sociale Exxlesiane doctrinae,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에서 지침을 찾아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히 사회-정치 분야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그래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와 복음에 함당하지 않는 어떤 일이 시행되려 할 때에 그리스도교 신자는 보다 정직하게, 정의와 공동선의 입장에서 맞서 대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 문서 가운데 현대 세계의 사목 현장인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cs)를 읽고, 최근의 가르침인 교황 베네딕토 16세 칙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제 2부의 시각에서 이 공의회의 문서를 다시 읽어보도록 합시다.
* 재속프란치스칸들이 사회에 나가 임할 때에 가장 좋은 자세는 자발적인 봉사입니다. 자발적인 봉사는 반드시 "하는 일"에 있기 보다는 "함께 있는 자세"에 있습니다. "함께 있음"이란 마음입니다. 그것은 삶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며 "되돌려 드리는 행위" 즉, 받은 것을 타인과 나누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봉사 행위는 국가나 공적기관의 "틈을 메워주는 일"이 아니고 상호 보완하는 것입니다. 항상 끝까지 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형태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자원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부족하고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남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의 문화를 구축하는데 누구나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습니다. (2007년 9월 교황 베네딕토 16세, 비엔나에서)
* 또 다른 활동 분야는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기대어야할 확고한 가치기준이 없고 특히 불안정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를 악화시키는 것은 어른들이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하는 정직성과 윤리성보다는 행사할 수 있는 권력과 소유할 수 있는 경제력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능숙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성과 윤리성을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약점뿐만 아니라 새로운 약점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당한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정, 봉사정신, 새로움에 대한 의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힘으로 "봉사의 삶"을 살 용기를 실현시킬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는 길에 함께 할 동반자를 필요로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젊은 프란치스칸을 조직하고 활성화시키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각 형제회가 "신앙의 전달"의 주제를 숙고하고, 분별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성교회에 생명을 불어넣고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모범으로써 젊은이들을 참된 신앙과 교회 공동체에 다시 불러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인간적,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들이 자유롭고 성숙하기 위해서 자신을 타인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누구에게나 삶을 충만하게 해주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철저함, 성실함, 인내, 그리고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소망이 일어납니다.
* 생태환경: 우리 지구의 심각한 상태는 생태문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야기시킵니다. 창조주의 조화에 기준한 진정으로 살만한 지구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투쟁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새로운 가치, 꿈, 행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기본원칙은 창조를 보전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고 있는 원칙입니다. 온 지구가 하나로 합심하여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소박한 생활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추수를 위해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구촌을 건설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피조물이 존중되고, 모든 이의 사랑이 있으며 모두에게 하나의 정직한 삶을 허용하는 정의로운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창조보전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여러 활동분야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즉, 핵무기를 제거하여 새로운 생활양식을 취하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의 재생을 비폭력으로 대체할 결심입니다. 그것은 환경과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환경과 피조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고 사는 방법입니다.
* 에큐메니즘과 종교간 대화: 에큐메니즘에 관하여 핵심적인 것은 각종파의 수장들만의 일이 아니고, 신앙을 삶으로 사는 방법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기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친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간의 문제에서 이해, 존경, 상호환영, 그리고, 서로에 대한 체제격, 심리적, 역사적 편견의 극복이 필수입니다. 다양성이란 분열을 초래하고 적대감을 일음키기보다는 서로 풍요로움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평등은 대화의 필수 조건으로서 대화 내용가 관계없이 대화하는 사람의 인격을 평등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화중에 자신의 신앙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교파라든지 다른 종교 간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함께 기도하는 기회를 환영하고 가난과 싸우거나 평황와 윤리나 환경문제등 자연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공동으로 일할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즉시 동행해야 합니다. 복잡한 교리 매듭을 풀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 선교. 오늘 날 교회는 민족들의 발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기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민족, 비참함, 풍토병,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들, 그리고 좀 더 폭넓은 문명의 혜택에 참여하는 민족들,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민족들, 그리고 최대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습니다.(참고. Sollicitudo rei socialis(사회적 관심), Centesimus annus(100주년), Deus Caritas est.(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도덕적 자연법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법과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논리적인 상대주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도성소 부족과 같이 교회가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온 세상에 "희망의 표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복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선포하고 증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고무적인 선교 열정 때문이다. 재속프란치스코회원이나 형제회의 선교 활동도 ‘세계 선교의 날’이나 ‘프란치스코회 선교의 날’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일회 수도자들의 선교 활동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보다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세상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불행하게도 현대 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인간 존엄성의 파괴와 심한 불평등을 규탄하고 그와 맞서 싸워야 한다.
결론: 몇 가지 실제적 지침
재속 프란치스코 단위 형제회와 재속 프란치스코 형제회 전체에 대한 소속감을 실제로 어떻게 양성시킬 것인가? 앞에서 인용한 회헌 30.1은 회원은 재속 프란치스칸 단위 형제회의 회원이지만, 삶이나 선교에 있어서 온 세계 형제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16. 단위 형제회. 모든 각급 형제회는(단위, 지역, 국가) 다음의 목적을 이루고자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1. 성화 학교 - 형제회가 회원들의 내적 생활을 충분히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들은 다음과 같다: 심도 있는 전례 생활, 성사 생활과 자선 활동, 그리고 성찰의 정신과 새로운 삶의 정신으로 짜여진 프란치스칸 피정.
2. 양성 학교 - 소속감은 회칙의 정신이 형제자매들의 “삶”에 흡수된 정도에 따라 형성된다. 소속감은 각자의 삶과 삶의 역사에서 회칙의 정신이 얼마나 동화되었는가를 보여준다. 프란치스코의 글과 글라라의 글 그리고 옛 전기들을 열심히 읽음으로써 프란치스칸의 정체성을 돈독히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원들은 프란치스코 관련 문헌들의 영적 독서를 꾸준히 해야 한다.
3. 교회적 친교의 실천 - 프란치스칸들은 모임 (월례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을 형제회의 성사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회 생활에 참여할 결심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참석한 회원들과는 기쁨을 나누고, 못나온 회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평의회는 즐겁고, 효율적이고, 풍요로운 모임을 연구하고 계획해야 한다.
4. 교회의 사도직 참여 -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사도적 활동을 전통적 방법에서 그치는 수가 많다. 회칙이 우리에게 창의성 발휘를 권장하고 있는 것을 잊은 것이다. 사회는 변했고, 교회는 쇄신되었고, 지금도 쇄신을 계속하고 있다. 복음은 불변이지만, 복음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만남이 필요하다.
5. 교회의 사회교리 차원의 사회참여 - 모든 형제회는 형제회의 선교 의무 안에서 우선순위를 짚어봐야 한다.
*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 우리의 능력을 어디에, 무슨 목적에 집중시킬 것인가?
* 상급형제회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17. 국제 형제회
* 재속 프란치스코 내의 수직적 수평적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 프란치스칸 가족 안에서의 서로를 더 잘 알고 존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우리 형제회의 일반 양성 과정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도록 강조한다.
* 국제적 차원에서 연관 단체들과 활동하고 있는 FI (국제프란치스칸)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나라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운동과 기관에 협조하기 위하여 장벽은 허물고 다리는 놓도록 힘을 합한다(회헌 18.3; 23.1).
(번역 :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번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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