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코넬 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에서는 2년간 5,0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사랑의 유효 기간을 조사했습니다. 연구 결과 18개월에서 30개월이면 뜨겁던 사랑이 식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랑에 빠진 후 1년이 지나면 사랑의 감정은 50%가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계속해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영세 후에 곧바로 ‘권태’를 맞이하면서 점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권태를 변화를 위한 서곡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강사들은 매번 재미있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할 만한 시간을 알고 그 시간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식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사랑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회당에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겠다고 선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자진 신고를 하면서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자기를 쫓아낼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말도 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실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의심을 하게끔 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될 때가 주님께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얼마 전에 특수 청소를 직업으로 하는 분이 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수 청소라는 것은 대부분 ‘죽은 자’의 집 청소였습니다. 이 책 안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느 날, 모르는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은 “인터넷에 착화탄 자살을 하면 괴롭다고 쓰셨던데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착화탄 자살자의 집을 청소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착화탄 세 개를 샀다는 말을 듣고는, 저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경찰을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문자일까요? 물론 좋은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시키’
이 문자를 받고서 저자는 너무나 기뻤다고 적습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 섞인 문자가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욕을 먹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땀이 섞이지 않은 망치로는 달걀도 깰 수 없다
-전삼용신부-
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말을 해 준 부모가 있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해 준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말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쳤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엔 권위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좋은 길로 나가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에 권위가 있어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아른힐 레우뱅’은 10대 시절, 심리학자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환각과 환청을 겪기 시작했고, 그녀의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귀가 이상해졌습니다. 친구가 말하는 소리보다 자신의 신발 끄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다음엔 눈이 이상해졌습니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다음엔 자신 안에서 선장을 만납니다. 처음엔 친절한 것 같았지만 갈수록 잔혹하게 아른힐을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친구라고는 내면의 선장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자아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정신병원 독방 침대에 묶여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공허함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수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자해와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서 10여 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그 원하던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책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현병은 고질병이니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은 그녀를 변화시킬 어떤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사가 그녀의 두꺼운 기록철을 보더니 “이런 상태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라고 한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치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고 하며 그녀를 차로 태워주었습니다. 다른 때는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작은 친절함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말들은 강요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라고.
[참조: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아른힐 레우뱅, 책읽는 다락방 J, 유튜브]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힘입니다. 그러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말의 권위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 한 명의 마음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희망과 믿음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신 말씀 안에 ‘따듯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따듯함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말은 어떠한 힘도 없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값지게 살아. 값지게 ... ”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밀러 대위의 한 마디는 라이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에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말씀에 피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마귀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피가 섞인 말만이 내 안 마귀의 본성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이 든 말씀은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망치는 달걀도 깰 수 없습니다. 땀과 함께 휘둘러지는 망치만이 권위를 가집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말이 따듯해지려면 그 말에 나의 따듯한 피가 섞여야 합니다. 각자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집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리려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의 말엔 권위가 없고, 자신을 죽이며 이웃을 살리려는 말엔 권위가 있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1992년 브라질의 리우에서 리우환경회의가 있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유엔 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입니다. 28년 전의 일입니다. 전 세계의 정상들이 모였고, 단체들의 대표가 모였습니다. 주제는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고, 생명을 보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에너지의 급격한 소비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함께 살던 많은 생명이 멸종하였고,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던 오존층에 구멍이 났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기상이변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바다와 공기가 오염되고 있으며, 지구의 허파인 밀림은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환경파괴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을 보호하고 함께 살도록 하셨는데 인간은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주에서 하나뿐인 푸른 별 지구를 어둠의 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12살 때는 동네에 우물이 있었고 언제든지 두레박으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논에는 미꾸라지가 있었고, 메뚜기도 있었습니다. 동네 하천에서 수영도 하였고,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 동네 마당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돗물도 믿지 못해서 물을 사먹고 있습니다. 저는 28년 전에 환경회의가 있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며칠 전 우연히 당시 회의에서 발표하였던 어린이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어린이의 연설은 다른 학술 논문보다 호소력이 있었고,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어린이도 40살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어린이의 발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8000킬로를 달려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어린이 환경단체의 대표로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낚시에 잡힌 물고기가 암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공기와 바다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지구를 보여 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는 해결책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어른들도 해결책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존층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방법, 죽은 강으로 연어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 사라져 버린 동물을 되살려 놓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사막이 된 곳을 푸른 숲으로 되살려 놓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돈을 환경을 보존하고, 가난한 이를 돕고, 아픈 사람을 돕는데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리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중동의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저는 굶주리고, 병들고, 전쟁을 경험했을 겁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약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환경을 보존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나요? 아버지가 제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말이 아니라, 너희 행동이 너를 만든단다. 여러분도 행동으로 지구를 보호해 주십시오.” 12살 어린 소녀의 말이지만 놀라운 성찰이 있었고,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악의 세력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악의 세력도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악의 세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갑니다. 하지만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악의 세력이 하느님을 알지만 서로 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알면서도 악의 세력처럼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세속의 유혹 앞에, 돈과 명예 앞에, 자존심과 욕심 앞에 눈이 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참된 식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권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포하는 말씀에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받으셨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셨습니다. ‘내려가셨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나자렛은 해발 380미터 정도되는 꽤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고을인 반면,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숫가 북서쪽 해안 평지에 위치한 포구였습니다.
끝까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나자렛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고향이자 복음 선포의 베이스 캠프로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나자렛을 떠나 낮은 곳에 자리한 카파르나움으로 본거지를 옮기신 예수님의 선택이 의미심장합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에만 앉아 계시지 않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를 마다하시고 진흙탕 같은 인간 세상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카파르나움은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꽤나 융성했던 고을이었습니다. 교통의 요지였고, 로마 군대가 주둔했으며, 세관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위치했던 관계로 주거 환경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첫 제자단을 선발하셨습니다. 공생활 초기부터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많은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집도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 고을에 들르셨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을 ‘예수님이 사시는 고을’, ‘예수님의 집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고향이라면,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도 나자렛에서 하셨던 방식 그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 안으로 들어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종래의 사제나 율법학자들과는 차별화되는 신선하면서도 살아있는 가르침 앞에 백성들을 크게 환호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기존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포하는 말씀에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과 생명력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앉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회당 안에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마귀들린 사람조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파악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영의 신앙 고백을 경멸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복음 4장 35절)
믿음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부정한 영이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지만, 결실이 없는 헛고백이었습니다. 신앙 고백에는 언제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양한 마귀들의 횡포와 그로 인한 악이 창궐하지만,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권위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초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보이셨습니다. 곧 거룩하신 분, 전지전능하신 분, 완전히 다르신 분, 지극히 힘있는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반영억신부-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 ♣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요한 1,1).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힘’은 모든 피조물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특히 마귀들은 그 힘의 위력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저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만일에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러나 제자들이 자유의지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고,
제자들이(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말씀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었고, 또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자 몹시 놀랍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었다면,
그 힘을 느꼈을 때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마귀는 자기가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께 반항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마귀가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의 신원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라는 마귀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표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악한 의도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실이 되지 않습니다.
또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원래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5-37).”
마귀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냥 나가지는 않고 그 사람을 내동댕이칩니다.
(예수님께 직접 달려들 수는 없으니 힘없는 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셨기 때문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마귀의 억압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괴롭힘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또다시 몹시 놀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놀랐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꼼짝도 못하고 복종한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사람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마귀를 쫓아내려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마귀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명령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같은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루카 9,1).
그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들, 즉 주교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귀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기는커녕 그들 자신들이
쫓겨 달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9,13-16).>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4,31-37: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 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파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보면서 또한 우리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한상우신부-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갑니다.
가을에는
더 좋아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 어둠속에서
더욱 빛나는
주님의 빛을
믿습니다.
어둡고 뒤틀린
우리의
현실 안으로
주님께서
오십니다.
알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고
알고 있지만
믿지 않는
우리들 안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의심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피조물을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피조물이듯
피조물을
더럽히는 것또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 삶을
깨끗이 하시는
피조물의
주님이십니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인 믿음은
나가야 할
피조물의 길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보호하고
보호받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올바로
믿고 올바로
실천하는 것이
피조물 보호를
위한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피조물의
보호자이신
주님께
이 어려움을
기도로
의탁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과 마귀의 영 사이의 긴장을 보여 주십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 카파르나움 고을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유다인 안식일 관습대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회당 안에까지 들어왔으나,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성정이나 분위기와는 계속 마찰을 일으켰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동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말씀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엿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복음 환호송)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넘어지는 누구라도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는"(화답송) 분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단초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1코린 2,12)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생각을 통찰하십니다. 세속의 영, 더러운 마귀의 영과는 섞일 수 없는 거룩하고 순수한 영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일치의 유대이십니다. 성 삼위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말씀은 그래서 사랑의 권위를 지니지요.
"자비, 어짊, 용서, 자애, 너그러움, 모두에게 좋으심, 참됨, 진실, 선하심"
오늘 미사의 입당송과 화답송, 영성체송 때 불리우는 시편들에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를 노래합니다. 주님 말씀의 힘은 세속적 힘 자랑이나 더러운 마귀의 영이 과시하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힘과는 다릅니다. 위로하고 존중하며, 격려하고 믿어 주는 권위, 용서하고 희생하고 속량해 주는 권위입니다.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루카 4,35)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짓밟는 더러운 마귀의 영을 단호히 꾸짖으시니 마귀는 쫓겨 나갑니다. 그 사람 안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거칠고 폭력적으로 요동치며 떠나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은 거룩한 주님의 영 앞에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영성 생활의 여정 안에서, 우리의 영혼에 어둡고 음습하고 파괴적인 힘이 밀려들 때도 있고, 헤어날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합니다. 하느님 현존의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슬픔과 절망에 무너져 버릴 때도 있지요. 악한 영은 한 영혼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을 원치 않기에 호시탐탐 그 사랑의 유대를 약화시키거나 끊어낼 기회를 엿보다가 작은 틈새라도 생길라치면 당장 치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의 악을 퇴치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서 악을 떼어내시는 예수님 곁에 머무른다면, 그분 말씀이 지니신 사랑의 권위가 그 악을 물리치고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설령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지더라도 아무 해조차 입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워져, 처음처럼 그분의 온전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입니다. 현세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비치겠지만 "권위와 힘을 가지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내어맡깁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1코린 2,16)으니 두려워 말고 주님께 의지해 남은 사랑의 길을 완성해 나갑시다.

선방의 죽비소리처럼 다가온 말씀
-김찬선신부-
오늘 일어나 독서와 복음 묵상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이런 질문이 마음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 위에 내려오시고 내가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 꼭 좋을까?
이런 생각이 올라온 것은 아마 성령이 주님 위에 내리심을 얘기하는
어제 복음에 이어 또 성령 얘기가 오늘 말씀들을 도배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쨌거나 이런 의문이 든 것에 제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은
저는 지금껏 성령이 제게 오시기를 기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제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이런 식으로
반복기도를 자주 바치곤 했던 저인데 어찌?!
어쩌면 정말 그것이 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악마가 은밀하게 유혹하는 소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전에는 사랑의 불이 제 안에서 타오르길 진정 원했지만
지금은 그 불이 타오르는 것을 제가 겁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의 불은 고통이 그 땔감이기 때문이지요.
소시민적인 안주가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저에게 그러니까 악마의 유혹을 은밀히 받는 저이건
아니면 편암함에 안주하려는 저이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저에게
쳐들어오실 터인데 그것은 제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자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 영을 제게서 추방해주시기 위해서일 겁니다.
더러운 마귀의 영은 현세를 너무도 사랑하고,
자기의 영역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안주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가는 것마저 거부하는 존재이지요.
그러니까 그가 더러운 영인 이유는 현세와 자기 영역을 더럽게 집착하여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 세상을 여기저기 떠돌고,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집적거리며 떠돌기 때문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라는 말이 우리말에 있는데 집착 때문에 죽어서
저승도 못가고 이승에 남지도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귀신을 말하지요.
더러운 마귀의 영도 이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구천이 아니라
아직 이승에 있는, 그것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회당에 가셨을 때 더러운 마귀의 영은 예수님께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셨는데 도둑이 제발 저리듯 스스로 찾아와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거냐고
애걸 반 협박 반 하고 있습니다.
이런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린 자와 같은 저에게도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의 더럽고도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정신을 차리도록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가 어떤 영을 받았는지 상기시키시는 것이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새벽녘 선방의 죽비소리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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