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마태오 16,21~27)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thinking not as God does,
but as human beings do.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벌의 천적인 말벌이 벌집을 습격하면, 일벌들은 도망을 가지만, 파수병 역할을 하는 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덤벼듭니다. 그래서 이런 파수병 꿀벌에게는 ‘각오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수많은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파수병 꿀벌처럼 정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의 일은 없다고 하여도 크고 작은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파수병 꿀벌들의 각오 유전자를 빌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가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이 각오 유전자가 꼭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함구령을 내리신 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반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보면 믿는 이들의 버팀돌도 오히려 믿는 이들을 비틀거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생각하다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시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쉽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밝혀 줍니다. 누군가의 발이 걸리게 만들어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바오로의 권고를 각오 유전자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버림으로써 얻는 행복
-키엣 대주교-
인간은 이세상이 끝나면 저 세상으로 갑니다. 양쪽 세상에서 잃고 얻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은 바로 내가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현실이기에 사람들은 그걸 얻고자 열심히 쫓아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거기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기에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내 생이 끝나는 날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얻는 것은 영원합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은 결코 만족할 수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얻는 것은 완전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가치, 무한한 행복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치이기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얻는 법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아니 얻는 법을 알지만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세상의 가치일 뿐입니다. 다음 생을 위해 지금 내 손에 움켜 쥐고 있는 것들, 내 마음 속에 감쳐 놓은 미움과 욕망 등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버리고도 세상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면 잠시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상에서는 부족함 없는 행복을 얻릴 것입니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더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지금 버려야 합니다. 지금 잃었다면 다음에는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잃었다면 다음 세상에서는 얻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잃음으로써 신성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잃음으로써 영원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은 버림의 진리를 체험하신 분으로 불후의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을 버릴 때 비로소 영혼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을 잊을 때 비로소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며
용서를 할 때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죽음에 이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 나를 버림으로써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1.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한 버림’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 행복은 준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
-임상만신부-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성인에게 두 청년이 찾아와 입회를 청했다.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지금 내가 배추 모종을 심고 있는데 자네들도 같이 심어보게. 그런데 뿌리를 심지 말고 배추 잎을 땅에 심어야 하네.” 이 말을 들은한 청년은 시키는 대로 배추를 모두 거꾸로 심었다.그러나 다른 한 청년은“이 분은 기도만 하고 농사는 안 지어 보았나 보네. 이렇게 배추를 거꾸로 심으면 다 썩어버리지…”하며 지혜롭게 배추를 바로 심었다. 이 모습을 본 성인은 거꾸로 심은 청년은 수도회에 받아들이고 바로 심은 청년은 돌려보냈다. 성인이 보고자 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젊은이인가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어 순종할 수 있는가를 보려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대부분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이 먼저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들이 당연히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자기 방식이 아니면 어떤 것도 절대로 수용하지 못하여 불화를 일으키거나 심지어 공동체를 깨뜨리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이르시는 것이다.
얼마 전 은경축일을 맞은 후배 신부와 사목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사제가 50세를 넘으면 아무리 확신이 있는 일이라도 우기지 않는 게 가장 큰 덕목”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모든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겠지만 자기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무엇이라도 고집하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과 교회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사람의 일’에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대부분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노후 설계도 잘해야 성공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얻고 누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인데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으러 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계획은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일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면 원하는 것들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꺼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순간 가진 모든것들이 하느님께서주신 선물이라는것을깨닫게 된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늘 부족했는데 그것들이 사라져도 감사하고 살아가는 참 행복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확신하며 고집했던 ‘사람의 일’ 방식을 내려놓으면 하느님께서성령으로 더 채워주시고 덤으로 영원한생명의 길을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

십자가의 길이 참된 명예다
-김창선-
연중 제22주일의 말씀은 삶의 고통과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참된 명예를 누리는 길을 밝힙니다. 내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들에게 새 희망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로 결심만 하면 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듯이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지금도 코로나19의 재난과 경기침체 하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발자취를 따라 고통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인내와 용기가 지혜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 예레미아(기원전 7세기)가 내면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는 첫 고백에서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예레 11,19)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꾐에 넘어가 놀림감이 되고 조롱을 받으며, 주님 말씀이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토로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면 큰 부담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립니다. 때론 고통과 시련을 겪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인간적 고뇌에도 주님의 현존과 뼛속에 간직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결코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양과 염소와 같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일까요?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현세의 위선과 탐욕에 동화되지 않고, 새 정신으로 ‘의로움의 도구’나 ‘의로움의 종’(로마 6,13.16)이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은 기도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지 분별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 봉헌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십자가 수난과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일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교회의 반석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무엇이나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수제자 베드로(마태 16,16 이하)가 “맙소사, 주님!” 하면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즉시 돌아서서 단호한 어조로 반격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외면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마태 16,23)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변화시키려고 도전한 베드로는 ‘사탄’이고, ‘걸림돌’이란 모진 질책을 당합니다.
사탄(satan)은 ‘적대자’, ‘반대자’라는 의미의 히브리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과 대립하는 존재로 마귀, 악마, 더러운 영, 귀신 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마트 시대인 오늘날에도 악마는 존재합니다. 교황님께서도 “악마는 존재하고 우리는 악마와 싸워야 한다.” 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나 ‘세상의 우두머리’처럼 교만과 유혹으로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마를 막는 무기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호기심이나 재미로라도 악마에게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됩니다. 성자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40일간 단식하신 후 성부에 대한 충성심을 악마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 예수님의 생애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계획을 충실히 받아들여 자신을 버린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어야 산다’ 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잃고,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는다.”(마태 16,25; 마르 8,35; 루카 9,24) 자기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9)하신 겸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소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비움’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의 길은 약점과 모욕, 박해와 역경도 달갑게 여기기에, 악마도 두려워하는 은총의 길입니다(2코린 12,9-10).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면 어두운 세상에 별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선물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갑니다. 참된 명예는 고통을 피하고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세상의 방식은 거부하고, 자기를 비우고 사회가 부끄럽게 여기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소서. 성사의 힘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십자가의 분별
-손경락신부-
오늘 복음은 마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어 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신 뒤의 장면입니다. 위대한 이름들 과, 심지어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까지 나온 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에 대해 주욱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지만 예수님은 그에 아랑곳 않 으시고 오히려 그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누 구든지’라는 그 표현에서 무게감마저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 매일 살아내기도 바쁠 판국 에 어떻게 십자가를 지면 좋을까요? 한때는 신앙생활의 이 름으로 성당 활동을 하는 데에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여기 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서는 성당 활동이 중지되었으니 십자가를 질 수 없게 된 셈이겠지요. 어떤 이들은 매일의 삶 자체를 십자가로 해석하기도 합니 다. 그렇지만 매일의 삶은 신자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든 살 아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행한 내용보다 더 욱 십자가에 있어 관건이 되는 것은 제2독서에 나오는 ‘분 별’입니다. 분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충동이 이는 대로 살 수 없습 니다. 그보다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 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외관상 신자 비신자가 구분 없이 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나 그네인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갈 길을 구분해 내고, 결국에는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러다 보 니 어떨 때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내면에서부터 다른 마음 가짐으로 하고, 어떨 때는 바보 같아 보이고 져주는 선택, 배려와 사랑과 너그러움의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마음에 들겠기에, 선하고 더 완전하겠기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살
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 분별하 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 가를 지게 됩니다. 내게 무엇이 더 유익한가 하는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무엇이 더 좋은가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결국 주님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그 마음 안에서 기꺼이 십자가 를 지셨으니까요. 부지런히 분별해내고 그 판단에 따르기 싫어하는 나 자신과 싸우는 무장한 삶이 곧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입니다. 그 분별의 출발은 계명이나 의무에 연관된 것이기보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연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지금도 나를 이 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자, 그분 마음에 들 도록 살기 위해 마음을 쓰는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김광근신부-
“맙소사, 주님!”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수난을 반대하며, 베드로가 내뱉은 말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100점짜리 신 앙고백으로 제자 중의 으뜸이 되더니, 오늘은 정반대로 사탄이라는 심한 꾸중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는 입으로는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고 고백을 했지만 정작 구세주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제대로 이 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주님 대전에서 “믿습니까? 믿습니다.” 라는 100점짜리 신앙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 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깊이 묵 상하면서 스스로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말미암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동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없었고 지금은 그나마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조심스럽게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혼란을 틈타 혹여나 우리는 신앙생활에 소홀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 금은 우리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아닌가? 라고 생각해봅 니다. 참된 신앙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니라 달거나 쓰거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 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은 필연적으로 십자가의 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에게서 인정받고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고백한 것처럼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 어도” (예레 20,8)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값지고 소중한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갖은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하며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 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야” (로마12,1-2)합니다. 신앙생활은 순간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이나 욕심대로만 산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자신을 버 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마태16,24) 합니다. 아멘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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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기간에 가장 싫어했던 것이 ‘산악 구보’였습니다. 산에 가는 것에 큰 기쁨을 얻었던 저였지만,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산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이라 생각하면 고된 노동이 되겠지만, 즐긴다고 생각하면 일도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 선수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어떤 상황이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루에 책을 350페이지 정도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보고서 힘들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책 읽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다면 우선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분명히 즐길 수 있는 길이 있으며,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말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탄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단순히 고통 속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이 세상 삶을 마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얻기 위해서 고통이나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나의 십자가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순간으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새똥이 내 눈에 들어갔다
평생 처음
내 눈을 새똥으로 맑게 씻었다
이제야 보고 싶었으나
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풍경을 보지 않게 되었다
고맙다.
정호승 시인의 ‘새똥’이라는 시입니다. 새똥이 눈에 들어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정호승 시인의 표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보기 싫은 인간의 풍경들이 많습니까? ‘지긋지긋하다’라고 할 정도로 보기 싫은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 눈을 감고 살 수 는 없는 법, 우연인지 필연인지 갑작스럽게 날아온 새똥의 공격으로라도 보지 않게 되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기 싫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신부-
코로나 재확산에 관련하여 YTN 뉴스에서는 ‘5월 이후 집단 감염 사례’를 말하며, “교회 관련 1,681명, 사찰 관련 92명, 이슬람 종교행사 관련 6명, 성당 관련 0명(7월 원당 성당 사례는 ‘방문 판매 관련’으로 분류)’로 나왔습니다.
가톨릭과 관련하여 집단 감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전날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가 모두 발언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 등 종교시설을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시민이 교회를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반 이상이 개척교회와 같은 어려운 현실이기에 대면 예배를 금지하면 현실적으로 유지가 힘든 교회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에 집에서 조용히 예배드리는 것이 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것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걱정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 걱정으로 본분을 잊고 자칫 사회와 하느님께 폐를 끼치는 일까지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도, 한 종교도 몇몇에 의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망하게 만드는 그 몇몇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다 보면 종교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백설 공주』의 이야기를 봅시다.
옛날 어느 왕국에 예쁜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를 낳은 어머니가 곧 죽게 되어 질투심이 강한 왕비가 들어옵니다.
왕비는 요술 거울에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었습니다.
거울은 “백설 공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찬 왕비는 노파를 시켜 백설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거울은 백설 공주라고 대답합니다. 왕비는 울부짖습니다.
“백설 공주는 내가 죽였어.”
거울은 백설 공주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백설 공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왕비님의 질투심입니다. 왕비님 자신이 나이 들고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백설 공주님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 걱정을 없애려고 본래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교황이 되지도 않는 싸움을 위해 십자군을 징집하여 수많은 이교인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수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로마 한복판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조건으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많이 고생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들을 영국으로부터 지켜낸 영웅 잔 다르크를 영국인들에게 잡혀 죽게 했습니다. 죄목은 하느님 계시를 사제를 통해 받아야만 하는데 직접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 걱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력으로 자신의 걱정을 해결하려다 보니 역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항을 깊이 우려하셨습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위하는 교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짐짓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죽기 싫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꾸중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자기 자신의 안위’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돈 생각, 먹고 마실 생각, 남을 판단하는 생각 등을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께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세속, 육신, 마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생각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관한 관심’입니다.
주님 뜻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 망치게 됩니다.
세계적인 외줄 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는 평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줄을 타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기다림일 뿐입니다.”
그는 외줄 타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위험한 곡예를 성공시켜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왈렌다는 1978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외줄 타기를 선보이다가 75m 상공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에 그의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곡예에서 남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석 달 전부터 그이가 ‘이번에는 어쩌면 떨어질지도 몰라.’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또 ‘만약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질문을 자주 했고요.”
어쩌면 그가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왕비와 같아집니다.
제 역할을 못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전광훈 목사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는 7가지 외에 최대한 생각을 끊읍시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시작은 생각을 못 박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묵상하며 자주 바치면 나 자신을 위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만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나는 너를 베드로(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답변을 하였기에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답변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고 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도 무너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 있습니다. 퀸즈, 베이사이드, 우드사이드,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입니다. 4곳에서 판공성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미사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퀸즈 성당은 오랜 역사가 있고,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큰 형님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베이사이드 성당은 성전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의방도 넓고, 제대도 화려합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은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가족 같은 공동체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도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으로 휴가를 가셨고, 요즘은 제가 주일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따뜻한 신앙공동체입니다. 본당 재정의 규모와 신자의 숫자로 비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큰 의미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바로 그곳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전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고, 순교하였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굳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고, 그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교회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모두 다락방에 숨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뜻을 따른 이야기도 숨김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교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밀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은총의 선물로 받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이나 친지들,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껏 대놓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텐데, 입을 다물고 있느라고 고생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놀랄 정도로 날이 잔뜩 서 있습니다. 거의 독설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간 공들여 쌓아올린 높은 탑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인재 양성의 대가였습니다. 제대로 된 제자 하나, 그것도 수제자를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화롭게 섞어가며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큰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지만, 절대 우쭐해지거나 기고만장하지 마라고 강력한 철퇴와 자극도 동시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수제자가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이요 걸림돌이라는 강력한 질책을 듣게된 가장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달콤함만 추구했던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희생과 헌신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세속적인 성공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들의 후계자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분신이요, 그분의 기쁨이고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그분의 걸림돌로서 사탄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생명수와도 같은 복음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민폐요 진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께서 그토록 혐오하시는 이 시대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대대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엄중하게 베드로 사도를 질책하셨고, 삶의 근본적인 태도나 노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오른팔이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요 사탄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가? 아닌가? 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 어깨 위에 얹혀진 십자가, 때로 포기하고 싶고, 즉시 내려놓고 싶은 생각 간절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길에 참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매일의 십자가를 짊어져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송영진신부-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쉽고 편한 구간도 나오고, 어렵고 힘든 구간도 나옵니다.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나면, “정말 이 길이 맞나?”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나?” 라는 생각에 다른 길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 어렵고 힘든 일은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을 참고 견디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믿음은 그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고,
사랑은 그 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제자들과 신자들은 메시아이신 분께서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고난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은,
당시의 제자들과 신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2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을 생각하면,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반대로 그들 손에 의해서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린 것도 같은 심정에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4,26).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으면 수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가는 한 과정일 뿐이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일은 아닙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네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제물로 삼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고, 그 일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는데,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의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의 행동이 걸림돌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아’ 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모두
사탄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나의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해한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 길 끝에서 영광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라도......)
처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내 의지로
내가 하는 일이지만, 일단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의 뜻과 의지를 버리고, 나의 판단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는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길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를 단호하게 물리치신 일도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고 싶은 소망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 소망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사탄은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가?
편한 길이 있는데도 왜 힘든 길로 가는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말린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그가 한 말에는 “꼭 그 길로만 가야 합니까?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습니까?”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은 사심 없이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탄이 유혹하면서 하는 말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자신을 버리는 일’에 속합니다.

-조욱현신부-
지난 주일과 오늘 독서들의 내용은 아주 대조적이다. 지난 주일에 ‘메시아’로 고백한 바위 같은 신앙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걸림돌’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대립적인 서술은 그리스도 신비 자체 안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대립적 실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처럼 펄쩍 뛸 수도 있는 것이다.
제1독서: 예레 20,7-9: 주님의 말씀에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체험은 모든 신앙인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오늘 전례에 나타나는 예레미아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강하신 분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복음: 마태 16,21-27: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오늘 복음은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마태 16,21-23)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24-27절).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인간적인 베드로의 행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이 행위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십자가와는 무관한 영광과 권세로 가득 찬 현세적 ‘메시아 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나름대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은 더는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고 하신 것은 공생활 시작할 때, 예수를 현세적 메시아로 변질시키려 한 유혹 사화(마태 4,1-10)의 사탄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당하실 모든 것을 운명이나 숙명적 상황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뜻으로 인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미래의 영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베드로가 이제 스승을 따라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미구에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지만, 이제는 또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도 고백해야 하며, 또한 이 고백은 자신 역시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권고 내용은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이웃에게 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밖에 관심을 두셨고, 당신을 잃으셨으며,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셨고(필립 2,7-8) 당신을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지만, 부활 영광의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이웃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2,1-2: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에 덧붙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절). 자신을 이기면서 바치는 정신적 예배가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형제들에 대한 충실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진정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태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 27)
-한상우신부-
끝내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행실이 되고
행실이 십자가가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찾게되는
십자가가
생명이다.
십자가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모순의 굴레어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를
자연스레
질 수 있다.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기에
십자가가 있다.
흐르는 것이
십자가이다.
행실대로
갚아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끝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이다.
사람을 키우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줄
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갚아야 할
십자가의
빚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분을 만류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호되게 그를 꾸짖으시지요. 수석 제자가 한 순간에 "사탄"으로, "걸림돌"로 전락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같은 편에 있다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긴 어려운가 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안위와 만족을 지향하기에 보편적 사랑을 추구하는 십자가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자아로 똘똘 뭉쳐 있을 때에 십자가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형벌이고 성가신 짐 덩어리일 뿐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 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통과 나약함, 불합리성 등을 피할 수 없지요. 다만 십자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신앙인 역시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매일 매순간 마주하며 삽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그걸 버린다는 의미지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 다 움켜쥔 채 대충 가는 중이라면 아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인격적으로 직면하지 못한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볼멘 항변이 들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예언자는 주님을 말씀을 전하면서 날마다 "놀림감, 조롱거리, 치욕, 비웃음거리"가 되는 처참하고 고달픈 신세를 토로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제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그를 무시하고 박해하기 일쑤이니 그는 늘 외롭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자기를 불러 힘든 짐을 떠맡기신 주님 때문입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예레 20,9)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과 거리를 두고 그분 말씀도 전하지 않겠다고 힘껏 버텨 보지만, 주님 말씀의 열기를 속에만 담아두고는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까지 그 속에서 출구를 찾아 활활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모두에게 버림 받고 등돌림을 당하고 죽음까지 당한다 해도 내 것 아닌 것처럼 외면하거나 자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소명과 관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속의 원리나 인간적 욕망을 거스르지요. 베드로가 펄쩍 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피땀 흘리며 아버지께 기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자아 앞에서 고뇌하는 우리를 위해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로마 12,2)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람의 일"이 우선하는 자아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지요. 인간적으로는 택하고 싶지 않고,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도 하느님 때문에 감내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괜히 십자가라는 말이 붙은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었고, 수치와 버림받음, 저주와 모욕의 상징입니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그렇게 만류했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건, 억지로건 지고 가는 자신을 칭찬하고 위로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주님께 항변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버겁고 힘든 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저야 할 십자가가 너무 버겁고 힘드시나요?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저마다 힘껏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소박하고도 치열한 일상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희망"(복음 환호송)이 아직 건재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알고 주님도 알아 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며 오늘도 꿋꿋이 나아갑시다. 주님은, 세상은 우리의 희생과 사랑과 기도가 여전히, 너무도 간절히 필요하답니다.

-고인현 신부(OFM)-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기 버림과 일상에서 다가오는 갈등과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주요 골자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마음자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완전한 자아포기입니다.
이 일이 선결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단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자신을 내여준 빈 자리에 자리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제자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린 신앙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배제된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담겨진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거쳐서 들려오는 소리라야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고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의 메아리를 들으려는 불타는 갈망을 가졌습니다. 성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쁘고 황홀한 때는 순간에 불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년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맛보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마태오 16,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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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은경축일을 맞은 후배 신부와 사목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사제가 50세를 넘으면 아무리 확신이 있는 일이라도 우기지 않는 게 가장 큰 덕목”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모든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겠지만 자기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무엇이라도 고집하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과 교회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사람의 일’에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일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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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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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람의 일"이 우선하는 자아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지요. 인간적으로는 택하고 싶지 않고,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도 하느님 때문에 감내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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