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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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
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코 6,17~29)
knowing him to be a righteous and holy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마르코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무시와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1-13 참조) 그리고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이야기와 빵의 기적(마르 6,14-16.30-44 참조)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 임금을 매개로 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마르 6,14-16 참조)을 함께 놓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여 세례자 요한에게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아 있는 형제의 부인과 혼인을 시도하는 것을 근친상간이라 하며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8,16; 20,21 참조). 헤로데는 비록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바로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며 때로는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고는 하였습니다. 오히려 입장이 불편하였던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회는 쉽게 왔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춤에 넋이 나가 허튼 맹세를 지키고자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인식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사명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의로웠습니다. 담대히 진리를 외치고 또 증언함으로써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속 권력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 잔칫상에 사람의 목을 잘라 올렸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어 하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 주십니다. 요한의 죽음과 연결된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의 의미를 더욱 잘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참가자에게 양초 하나, 압정이 가득 들어있는 작은 상자, 성냥개비 몇 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초가 탈 때 촛농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끔 양초를 코르크 벽에 고정해 보라고 지시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정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압정이 가득 들어있는 작은 상자에서 압정을 모두 빼냅니다. 그리고 빈 상자를 압정을 이용해서 코르크 벽에 꽂고 양초를 상자 안에 세워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상자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압정을 담아둔 상자는 그저 압정 상자로만 그 용도를 제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압정과 상자를 분리해야지만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마음이 문제의 해결을 막아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도,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문제 해결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나야 할 고정관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큰 것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지금의 말과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올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통해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라고 맹세한 헤로데였습니다. 그렇게 맹세한 그에게 헤로디아의 딸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청하지요.
이 청을 헤로데는 어떻게 했습니까? 세례자 요한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건네줍니다.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 소식을 듣고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았났다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헤로데는 죄를 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헤로데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기준을 먼저 생각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는 일을 부단히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세우러 속을 헤맨다(이기주).
비교는 그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나눠주었습니다. 이 가정통신문 안에는 부모님의 직장을 적게 되어있었고, 사는 집의 형태, 또 집에 있는 가전제품을 표시하는 항목도 있었습니다.
만약 지금 이런 가정통신문이 온다면 난리가 날 법도 하겠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또 친구의 가정 상태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다 비슷하게 어렵게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친했습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남과의 비교가 너무나 익숙한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불행을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비교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고유한 나와 고유한 타인을 떠올리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갉아먹는 비교는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잘못을 충언하다 목이 잘렸습니다. 한두 번 이야기하고 그만두었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만, 워낙 성인들은 고집이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언자직인지, 나의 욕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해 줄 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요한 세례자의 경우를 보면 예언자직은 목숨을 잃을 때까지 옳은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부분 예언자직이 아닌 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녀나 남편 혹은 아내에게 어떤 것을 고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고쳐지지 않을 때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소리소리 지르다가 그래도 변하지 않을 때는 ‘내가 말을 말자!’라며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은 예언자직이 아닙니다.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나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편해지면 금방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은 멈춤이 없이 목소리의 톤이 변하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한 번도 사제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게 사제가 되라고 결코 목소리를 높이신 적은 없었습니다. 일이 년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죽하면 대학 입시 시험을 보러 가는 날, 떨어지라고 미역국에 달걀 반찬을 싸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설마 제가 대학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가 신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학 다니면서도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어머니는 끝까지 원하신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25살 때 마음을 고쳐먹고 26살이 되어서야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하지만 지칠 줄 모르던 그 말씀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저를 바꾸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 뒤에 숨은 하느님의 뜻이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언자직은 “나는 당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바꾸시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잘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로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한 직업군인 크리스 브래니건(40)은 희소병을 앓는 하스티란 딸이 있습니다. 하스티는 성장 지연, 골격과 행동 장애 등이 나타나는 코넬리아디란지증후군(CdLS)을 진단받았습니다.
치료를 위한 기초 연구비만 40만 파운드(약 6억 2천만 원)가 듭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딸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만들고 25kg의 완전 군장을 하고 맨발로 1,127km에 달하는 행군을 시작합니다.
발바닥은 찢기고 곪았습니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유리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7일 만에 소중한 딸을 만날 수 있었고,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여 62만 파운드(약 9억 6천만 원)를 모았습니다.
크리스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딸을 위해 1,127km를 맨발로 행군한 아빠’, 비디오 머그, 유튜브]
오늘 요한 세례자는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물론 실패한 듯 보이나 미래의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참 예언자직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언자직은 잔잔한 울림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예언자직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잔소리가 아닌 예언자직이 되려면 내가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바꾸기 위해 나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신학생 때입니다. 돌아보니 저는 활동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신학교 매점에서 4년간 일했습니다. 선배와 후배를 많이 만났습니다. 신학생들이 많이 찾던 음료수, 담배, 과자, 필기구, 노트, 세면도구를 팔았습니다. 매점에 있기에 매일 외출도 할 수 있었습니다.(일종의 특혜) 타종부에도 있었습니다. 아침 삼종기도에 맞추어서 종을 쳤습니다. 제가 종을 치면 삼종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늘 성당에 일찍 갈 수 있었습니다. 조금 늦은 신학생들은 저의 타종 소리를 서운한 마음으로 들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례부장 신학생에게 한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연극부에도 있었습니다. 무대를 만들고, 의상을 구하고, 효과음을 찾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단역이었지만 무대에도 2번 올랐습니다. 1년에 한번 축제 때에 연극을 올렸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시를 쓰고, 노래하는 모임도 있었지만 기회도 없었고, 찾아가기도 않았습니다. 4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드러나는 곳에서 활동했다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노동 문제를 연구하고,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함께 있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학교 내에서 폐지와 병을 모아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식사 후에 식탁 정리를 하고, 주방의 자매님들을 도와주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의무실에서 아픈 친구들이 오면 도움을 주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서고를 정리하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 위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물 밑에서는 열심히 움직이는 발이 있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일정 액수를 어려운 곳을 위해서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오랜 시간 빈민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연잎 위에 떨어진 빗방울은 진주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지치고 힘든 세상에서 기꺼이 연잎에 되어서 누군가를 진주가 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17-29: 요한 세례자의 죽음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였던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요한 세례자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됐다.
이 예언자적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아왔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이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마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줄 정복자로서 예수님에게서 엘리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시다.
하여간에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죄를 짓고 쫓기는 마음으로 헤로데처럼 말할 것인가? 군중들처럼 현세를 위한 해방자인가? 아니면 진실한 믿음 안에 생명의 주님으로 대하고 있는가?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요한 세례자의 자세를 본받고,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마르 6, 27)
-한상우신부-
먼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게됩니다.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생명의
가치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생명 앞에서
너무나
이기적인
우리들의
욕망을 만납니다.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곧
나 자신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추악한 욕망에
쓰러져가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욕망을
바로잡으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살인의
역사로 얼룩져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로잡을
때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합니다.
그 희생이
생명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는
하느님을 향한
헌신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진실로 아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인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나눔의
소중한 관계임을
믿습니다.
누군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참된
기도의 시간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시지 않는데, 행간마다 예수님이 느껴집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예레 1,17)
예레미야는 박해받는 참 예언자의 전형입니다.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집권 세력의 구미에 맞지 않거나 왕궁 예언자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롱 당하고 죽음의 위험을 겪었지요. 바빌론의 압박과 맞물린 민감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미 백성들은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마음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그분의 뜻을 전하는 이는 신념을 잃어서도 기가 죽어서도 안됩니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느님의 현존은 예언자가 좋건 싫건 그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요새 성읍, 쇠기둥, 청동 벽"(예레 1,18)처럼 강하고 든든히 곁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덕분에 예언자는 불보듯 뻔한 백성의 거부와 조롱, 모욕의 포화 속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이 길의 끝이 죽음과 연결되더라도 그렇게 하지요.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의 저의 보호자시옵니다."(화답송)
이 시편 대목은 예레미야의 이야기기도 하고, 오늘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기도 하며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이야기기도 하지요.
창조 때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한결같은 관심과 인내로운 동반을 관상합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염두에 두시고, 어머니 배속에서 우리를 불러 보호하신 분, 그분의 눈길은 지금 여기까지 우리를 놓치지 않고 감싸주셨습니다. 그분의 기다림과 숙고, 끈기와 기대는 "반석, 산성, 바위, 보루"(화답송)처럼 든든히 우리를 지켜오셨지요.
"의롭고 거룩한 사람"(마르 6,20)
세례자 요한 역시 주님의 돌봄 속에 태어나 그분의 보살핌 속에 자라납니다(루카 1,66 참조). 악인인 헤로데에게조차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닦고 백성을 준비시킨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마르 6,25)
요한은 헤로데에게 직언한 대가로 결국 참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을 갑니다. 한 소녀의 춤값이 그의 목숨값이 되었지요.
악이 움직이는 과정을 바라봅니다. "곧", "서둘러", "당장"... 악은 자기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쾌락을 이용할뿐만 아니라 즉흥적이고 경솔하며 성급합니다. 숙고 없이 누군가의 피와 목숨으로 탐욕을 채우지요. 우리 일생 내내 발맞춰 걸어 주셨던 하느님의 기다림, 인내, 성실하고 고요한 동반과는 정반대로 거칠고 폭력적입니다.
오늘 말씀 속 예레미야의 고뇌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참 예언자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늘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 모든 피조물을 위해 기도하지만, 전방위적으로 불신과 폭력, 이기주의와 죽음의 위협이 난무하는 이때, 우리의 기도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우리 모두 미약한 존재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을 두려움 없이, 고요하지만 의롭게, 선하고 진실되게 확산시키는 참 예언자의 소명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기심과 두려움에 압도된 이들이 양심에 등돌리지 않기를, 공동선과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선한 의지를 되찾고 협력할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악은 선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입니다.
앙심과 양심 중에서
-김찬선신부-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겉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헤로디아의 앙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헤로디아의 앙심怏心 때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양심良心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앙심과 양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앙심과 양심 중에서 어떤 것을 더 따라 행동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헤로디아처럼 앙심에 따라서 행동하는지
세례자 요한처럼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지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양심에 크게 어긋나는 짓은 안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양심 때문에 세례자 요한처럼 거대한 불의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언하는 그런 대단한 양심의 소유자도 못됩니다.
앙심과 관련해서도 비슷합니다.
제가 인복이 많기 때문인지 제 주변에는 좋은 분들이 많아서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앙심이 없는 편이지만 앙심이 있다 하더라도
앙갚음하는 것을 제 양심이 허락치 않기 때문에도 앙갚음하지 않고
앙갚음하는 것이 제게는 더 큰 괴로움이기 때문에 못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행복을 꿈꾸는 사람을 소시민이라고 하는데
앙심 때문에 크게 나쁜 짓 하지 않고 크게 용기를 내지 않는 사람도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저는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앙심을 품지 않고 불의에 대해 크게 용기를 낼까요?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 불의에 대해 용기는 크게 낼 수 있을 것입니다만
사랑없이 정의감만 가지고는 앙심까지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앙심도 없애고 양심에 따라 크게 용기를 내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이 앙심이나 양심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랑 그것도 주님 사랑 때문에 순교한 거라고 결론 내리며 나눔을 마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29일 수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마르코 6,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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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직은 “나는 당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바꾸시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 세례자는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물론 실패한 듯 보이나 미래의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참 예언자직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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