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9. 2. 05:44

2020 9 3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1-11)

 

“Master, we ha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 caught nothing,
but at your command I will lower the ne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얕은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얕은 곳은 군중이 몰려들어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예수님의 말씀이 흩어지고 소모될 뿐입니다. 밤새 어두운 곳에서 어쭙잖은 옹졸함에 파묻혀 헤맬 뿐입니다. 얕은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매번 우리의 인생은 소모적인 갈등과 분쟁으로 지저분해질 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십니다.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많고, 물고기를 끌어 올릴 사람도 많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풍성함과 죄의 고백이 서로 만나는 깊은 곳, 그곳에 대한 묵상을 겸허히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누리려 덤빌 때마다 우리는 얕아집니다. 얕은 곳에서 발버둥 치듯 경쟁하고, 경쟁할수록 우리는 깊고 넓은 풍성함을 누릴 이유와 지향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깊은 곳에 놓이면 허우적대며 가라앉습니다. 빈약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얕은 곳에서 살아서인지, 깊고 풍성한 삶에 대한 준비와 이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생존이라는 현실에 세뇌되고 마비된 것일지 모릅니다.

죄의 고백은 자신의 얕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죄의 고백입니다. 더불어 죄의 고백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많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당연한 현실로 주어져 있습니다.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굳이 일등을 하지 않아도 저마다 누릴 풍요로움이 예수님 덕분에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천국이라 하지요. 천국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노를 저어 나가는 죄인들의 회개로 이루어집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에는 길을 잘 몰라도 자신 있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떤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도 가지 못해요. 그래서 가까운 거리를 가도 항상 내비게이션을 켜야만 합니다.”

내비게이션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어서, 혼자 하는 운전이 자신 없는 것입니다. 사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기 전에는 지도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운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 만이 아니라, 지도 전체에서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를 인식하면서 운전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시야를 지니고 있기에 길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하다 보면 조그만 화면상의 안내만을 듣고 충실하게 따라 할 뿐입니다. 전체적인 시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밖의 일이 내게 주어져도,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서 앞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앞의 일만을 바라보면서 쉽게 좌절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는 말씀을 따랐을 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조언에 고기를 잡고 있었던 제자들은 기분이 안 좋았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어부인 자신들이 전문가인데, 비전문가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알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따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봤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세상 기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하느님 기준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베드로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일 순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나요? 나의 일 순위에 주님을 두고 있나요?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나의 시야를 넓혀줄 것입니다.
당신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당신은 과거 속에 살게 될 것이다(피터 엘리아드).


한국에서 외국인과의 대화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온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외국인을 만나면 외국말이 아닌 한국말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국인의 나라에서 공부하셨는데도, 한국말로 질문하시고 답변하십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신부님, 저 외국인이 사는 곳에서 공부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한국말을 쓰세요?”

신부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그 나라 말을 쓰면, 저 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말 연습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사실 외국인에게 대부분 영어로 말하지 않습니까? 한국말을 사용하는 한국인데도 말입니다. 이 외국인을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기 위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의 처지가 아닌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나의 목소리와 주님의 목소리 구별하는 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타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배는 보통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좁게는 우리 각자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것이 하느님의 목소리인가?, 내 목소리인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극단적인 모습과 또 오늘 복음 말씀에서의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상황을 비교하며 내 안에서 울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는 저자가 어떻게 자아의 목소리에 휩쓸려 조현병까지 가게 되었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 안의 자신의 목소리를 ‘선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배에서의 선장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선장으로 할 때 어떠한 모습인지 레우뱅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레우뱅이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할 때 이 고민을 멈추게 해 준 장본인이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선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선장은 레우뱅이 다시는 혼자가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냥 자기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선장 없이 떠돌던 배 위의 작은 아기는 그 선장의 말에 솔깃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숙제를 조금 더 하는 게 좋겠다”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레우뱅은 한 번 더 했습니다. “아직도 별로인데”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고. 아직 좋아지려면 멀었어. 한 번 더 해!” 레우뱅은 선장을 믿었기에 숙제를 다시 했고, 참고 서적에서 다른 사례들을 찾아 전체를 한 번 더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 참고로 레우뱅은 조현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일정 기간은 우등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직이야. 넌 진짜 멍청하구나. 내가 옆에서 도와주기에 망정이지. 한 번 더 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하라고.” 하지만 더는 무리였습니다. 새벽 4시였고 세 번을 다시 하다 보니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말했습니다.

 

“너는 멍청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

선장은 레우뱅의 뺨을 몇 차례 때렸습니다. 학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서도 손찌검을 했습니다. 물건으로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레우뱅은 분명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이것은 잘못한 자신에게 당연히 가해지는 선장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성적도 곤두박질치고 레우뱅은 정신병원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끌어줄 선장을 찾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뱀과 같은 자아가 자신을 조정하게 됩니다. 그릴 믿어버리면 이제 혼자 힘으로는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반대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우선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내 생각과 반대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자아는 숙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약돌로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분을 의심하고 또 자아에 빠져 병적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두 선장의 목소리는 항상 반대되기 때문에 한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목소리는 죽습니다. 모세의 목소리를 따르면 파라오의 목소리는 죽고, 파라오의 목소리를 따르면 모세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내 생각과 항상 반대됩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과정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하든 둘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분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지만, 파라오의 명에는 엄청난 노예살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면 한 번만 던지면 됩니다.

 

      결과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자아를 따른 사람은 ‘자책’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목소리를 따름은 항상 더 큰 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두 선장의 목소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선택했느냐는 처음과 과정과 결과에서 모두 명확히 구분됩니다. 내가 지금 따르고 있는 목소리의 선장은 누구인가요?


-조재형신부-


지금은 익숙한 이름이지만 40년 전에는 낯설었던 이름이 있습니다. ‘콘도입니다콘도는 산과 바다 등 경치가 좋은 곳에 있습니다직접 짓거나 사려면 비싸지만 회원권을 사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장소에서 휴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콘도에는 각종 편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건물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건물에 대한 이용권만 있기 때문에 건물을 관리하는 부담도 없습니다저도 10년 전에 친구의 부탁으로 회원권을 하나 마련했습니다자주 가지는 않지만 적은 비용으로 산 속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소유라는 개념에서 이용이라는 개념으로 생각을 바꾸면 편리한 것들이 많습니다요즘은 사무실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업무의 대부분을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사무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됩니다사무실을 유지하고 임대하는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서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 부동산입니다평범한 사람이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이는 부동산을 소유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부동산을 재산을 증식하는 투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부동산을 이용의 개념으로 생각을 바꾼다면 한국의 부동산 문제도 해결 될 수 있을 것입니다정답은 알면서도 소유와 재산에 대한 애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쉽게 해결 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합니다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과감하게 실속 있는 임대 주택을 대량으로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30년 임대를 2번까지 연장할 수 있다면 굳이 내 집을 마련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주택이 없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분양 받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그렇게 하면 주택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시장의 가치에 따라서 주택을 살 것이고주택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큰 부담 없이 평생 집을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콘도가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언젠가 임대주택도 자리를 잡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세상도 생명도 죽음도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소유가 아니라 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교회가 권력과 소유에 집착할 때면 언제나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권력과 소유는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입니다교회가 비움과 나눔을 실천할 때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그 향기가 좋아서 모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소유하려했던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그러나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는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세상도생명도현재도미래도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고하느님의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 아무런 표징도, 특별한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순명했습니다!

 -양승국신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안그래도 밤새 헛탕 치고 돌아온 베드로 사도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신 예수님,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꽤나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분이 지금 뻔데기 앞에 주름잡고 계시네!’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 사도는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아마도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 이래봬도 전문직 어부 입니다. 이 근방에서 저 모르면 간첩입니다. 제 어부 경력이 30년입니다. 안될 것 뻔히 알지만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예의상,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그물을 쳐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홀로가 아니라 팀으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두척의 배 사이에 긴 저인망 그물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배를 이동시켜, 바닥을 끌면서 고기를 잡는, 이른바 저인망 어선을 몰았습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적어도 4명의 어부가 필요했습니다.

  

어부들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동이 터오는 아침 시간에 그물을 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습니다. 잘 잡히는 밤 시간에도 고기를 못잡았다면, 아침 나절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엉뚱한 시간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통해 시몬 베드로의 믿음, 그의 순응성, 스승을 향한 신뢰심 등등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실 때 조건 없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즉각적인 순명을 원하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는 낙관성을 바라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나자렛의 마리아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시몬 베드로가 보인 믿음을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동업자들은 잠시 후 엄청난 목격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물을 내린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깜짝 놀란 것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상에 머리털 나고 그렇게 많은 고기를 한꺼번에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속 고기란 고기는 총집합 한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터질 지경이었고, 고기들을 쌍끌이 어선 위로 끌어올리니, 수많은 고기들의 무게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 아무런 표징도, 특별한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순명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받은 소명과 자신의 생애에 걸맞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표징들을 통해 우리 인간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십니다.


버리고 떠나기

-반영억신부-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 놓으셨다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데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
-송영진신부-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의 목적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목적지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 같은 인생을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인생이란,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행이기 때문에 ‘나그네’ 라는 점은 같지만,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신앙인의 인생은 ‘유랑’이 아니라, ‘귀성 여행’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여행을 함께 하자는 초대입니다.
(특별히 사도로 뽑힌 사람들은 그 여행을 함께 하는 승객이면서
동시에 승무원의 임무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자마자 제자로 부르시고,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응답하고 따라나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요한복음 1장의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만나시고 나서
몇 달 후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면,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고 나서 몇 달 후에 응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와 따라나선 때 사이의 몇 달의 기간은,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준비를 하는 기간,
즉 일종의 ‘예비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부들은 그 기간 동안 충분히 묵상하고, 심사숙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4-7).”

어쩌면 예수님께서 먼저 어부들에게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 라고 물으시고,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한 뒤에,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고
말씀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바로 이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지상에서의 인생은 결국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끝나는 인생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다른 곳에서 새로 시도해 보아라.” 라는 뜻인데,
물고기를 잡는 일 자체를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을(허무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게 해 주겠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는 말은, 아직 정식으로
제자가 된 것이 아닌데도, 제자로서 스승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대답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부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냥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분명히 기적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기적을 일으키셨을까?
어부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 당신을 믿게 하려고 하신 일도 아닙니다.
(어부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은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며,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인간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기적이라고 해석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8-11).”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주님, 저는 주님 앞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고백하는 말이고,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또 먹고사는 일이나 신경 쓰면서 살고 있는 자기 인생이 참으로 초라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라는
말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으로, 같은 고백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너는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 즉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낚는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물(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물(죽음) 밖으로 끄집어낸다.” 라는 뜻이고, “사람들을 구원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어부는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입니다(마르 1,16-20).
그 자리에는 네 명의 사도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더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 네 명만 부르셨습니다.
<신앙인이 되라고 부르시는 일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사도)가 되라고 부르신 일은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차별 대우가 아니라,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뽑으신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회당에서 예수님을 쫓아내자 이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즉 복음 전파는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하신다베드로는 스승님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하고 대답하였다즉 인간적인 경험지혜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는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하고 실행에 옮겼다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그래서 예수께 주님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그래서 그렇게 말했다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하셨을 때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말씀을 강생시키는 삶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삶을 위해 주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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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두 선장의 목소리는 항상 반대되기 때문에 한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목소리는 죽습니다. 모세의 목소리를 따르면 파라오의 목소리는 죽고, 파라오의 목소리를 따르면 모세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내 생각과 항상 반대됩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과정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하든 둘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분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지만, 파라오의 명에는 엄청난 노예살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면 한 번만 던지면 됩니다.


      결과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자아를 따른 사람은 ‘자책’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게 됩니다.

-전삼용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