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9. 1. 05:55

2020 9 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열이 가시고 질병이 사라지는 일은 기적이지요. 삶이 힘들 때마다 성경 안의 기적이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럼에도 성경의 기적은 글 속의 이야기일 뿐 우리의 현실 삶과는 연관이 없는 듯 건성으로 읽히고 곧장 잊혀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기적은 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다시 곰곰이 따져 봅니다.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입니다. 오직 마귀들만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합니다.

가까이 가는 이와 멀어지는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기적은 멀리서 가까운 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있어야 일어나는 이른바 연대의 사건입니다. 멀어지고 외면한, 그래서 입을 다물고 떨어져 나가는 곳에는 멸망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에 가까이 다가가셨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은 풍성히 베풀어집니다. 멀리서 바라는 기적은 요행이고 우연일 테지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신기하겠지만, 기적이 제 삶과 인연을 맺을 일은 없을 테지요.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기적은 지금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지금의 삶에 함께하는 이들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이에게는 매일의 삶이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나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맙게 사랑스럽게 함께하다니요. 이렇게나 기쁜 소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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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며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한다면?

-전삼용신부-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 사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 그 부족한 사랑을 내가 만나는 사람, 특히 새로 이룬 가정의 가족들을 통해 채우려 합니다. 특히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모기처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 모기가 엄마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한 자녀는 커서도 또 다른 모기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 안의 악한 본성을 명확히 지적해주고 그것과 싸우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을 지적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심리 상담가 박우란씨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이대로 가면 도무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찾아왔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잘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루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느 선을 넘어갈 수 없는데 그 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학생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데는 엄마의 태도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는 분위기로 말하지만, 딸은 숨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 안에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엄마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딸은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넌 그걸 하고 싶니? 꼭 하고 싶다면 해. 근데 그걸 진짜 원하기는 하는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정확히 좀 말해줘.”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난 그저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돼.”

      남들이 하는 만큼은 어느 만큼일까요? 명확한 선을 지어주지 않으니 아이는 답답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싶습니다.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그것이 고마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여기까지 큰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주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신 안의 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이 명확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열’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을 꾸짖지 않고 열을 꾸짖었습니다. 사람 안에다 선을 긋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구분하셔도 양심의 가책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자신 안에서 그렇게 선을 긋고 사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아의 명확한 구분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고바라 스즈꼬’라는 사람의 『숨은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즈꼬는 부모로부터 ‘예!’라며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요즘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선을 긋지 못하면 자녀에게도 그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자신 안에서 먼저 구분하지 못하면 자녀에게서도 선을 그어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먼저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앗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구약성서의 무대가 되는 세상보다도 1,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그리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문자로 남겨진 작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중국의 고전인 논어맹자장자노자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학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우리는 고대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여름휴가에 시간이 있다면 4,000년 전의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아마 그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의 내용은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죽음의 강 건너에는 대홍수를 피해서 살아남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구약성서의 노아와 같은 사람입니다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길가메시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노인의 지혜와 경륜이 젊음을 만나는 것입니다불로초의 모습은 가시나무였다고 합니다이 가시나무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떨기나무가 되었고이 가시나무는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렸던 가시관이 되었습니다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메르의 뒤를 이은 아카디아의 왕 중에는 사르곤’ 왕이 있었습니다사르곤 왕은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기에 사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사르곤 왕의 어머니는 신전을 지키는 사제였습니다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바구니에 아이를 넣어 유프라테스 강에 흘려보냈습니다강 위를 떠오는 바구니는 아카디아의 공주가 발견하였고아이는 왕궁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이 이야기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합니다구약성서는 아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를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 수용했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다릅니다사르곤 왕은 스스로 높은 자가 되었고정복하는 왕이 되었지만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었고 하느님을 높였습니다모세는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이처럼 다른 문화의 이야기를 수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탈신화화라고 말합니다독일의 신학자 볼트만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탈신화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그러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고린토의 신자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그런 일을 하라고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그런 일을 하라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 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긍정적인 자세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이제 막 시작된 곳에서는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둘째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겠습니다아는 것은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깨어있어서

-반영억신부-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고(요한 1,4),
사람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을 많이 하신 것은,
바로 그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그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그 자체로 ‘복음 선포’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씀’으로도 이루어지고, ‘치유’로도 이루어집니다.
병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이고,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은 그 자체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새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병이 낫지 않고, 병 때문에 생을 마치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병자 자신보다 병자의 가족이 더 큰 고통과 절망을 겪을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도, 가족들도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새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고통과 절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별은 슬프지만 잠깐 동안의 이별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셔서 병이 낫고, 건강을 되찾은 경우에는,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고, ‘몸의 생명과 건강’보다
‘영혼의 생명과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몸’은 이승에서 잠깐 지내는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2코린 5,1).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 덕분에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자만심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몸의 건강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병장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날은 분명히 안식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그 부인을 고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이니 안 된다.” 라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회당이 아니라 개인의 가정집이라서 그랬을까?
루카복음 13장에,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라는 말이 나옵니다.
병을 고쳐 주는 일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단히 싫어하셨던 율법주의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집에 혼자 누워서
열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병 때문에 못 지킨 것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들’에게도 주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40-41).”

‘해 질 무렵에’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셨다는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도 넓은 뜻으로는 병자 치유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만 하는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2-44).”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마르 1,35).
일 때문에 아무리 바쁜 때라도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거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고을로 가시는 것은 ‘이 고을’을 버리고 떠나시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곳,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붙들면 안 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라는 말씀은, 이 고을에서 하신 일들이,
즉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이 사실은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냅니다.
아무도 주님의 복음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루카 24,47).
이제 그 일은 신앙인들의 임무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4,38-44: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병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성을 내는 열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는 것이다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학식이나 재능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우리의 신앙이다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신부-



기쁜 소식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아픔을
걷어내시는
기쁜 소식의
주님이시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계신다.

기쁜 소식은
기쁨으로
살게하는 기쁜
만남이다.

주님 친히
기쁨이 되시어

함께
우리 곁에서
기쁨으로
생활하신다.

기쁨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신다.

기쁨은
뜨거운
사랑이 되어
다가온다.

소란스러워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일을
하신다.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은
숨길수 없다.

기쁜 소식은
이론이 아니라
뜨거운 실천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의 소명은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깨어나게 한다.

우리의 시간에
이미 와 있는
복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파견 받은 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동선이 무척 분주하고 활동적으로 이어집니다. "회당"(루카 4,38)에서 "회당"(루카 4,44)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안에는, 개인 시몬의 집, 군중들 틈, 밖의 외딴곳, 다시 군중, 그리고 여러 회당으로 연결되는 숨가쁜 움직임들이 들어있지요.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가 그 사명을 수행하면서 겪는 사도직의 리듬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루카 4,40)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단 한 번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공동 치유가 가능하실 터이지만, 대개 육신의 치유는 마음의 위로가 병행될 때 진정한 회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마음을 기울여 어루만져 주시는 듯합니다. 

"외딴곳"(루카 4,42)

해 질 무렵부터 몰려 든 이들에게 치유와 구마를 베푸시며 분주한 저녁 시간을 보내신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러 외딴곳을 찾으십니다. 하느님과 독대하며 보내는 사랑의 시간은 예수님이 즐기시는 회복과 일치의 시간입니다. 파견된 이들은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활동을 하는 것과 비례해 더 많이 외딴곳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활동의 중심은 하느님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복음 속 군중은 무척 놀라고 또 행복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원히 자기들과 함께 계시면 더이상 불행이나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터입니다. 이른 새벽 외딴곳으로 가신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짦은 공백의 시간 동안 아마 그들의 불안과 조급함이 더 증폭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분열과 편가르기를 일삼는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는 사도 바오로의 엄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1코린 3,5)

아폴로 편이니 바오로 편이니 하며 갈라지는 교회의 모습에 바오로는 단호히 대응합니다. 이는 "육적인 사람"이 "시기와 싸움"을 일삼으며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이지요.(1코린 3,3 참조) 바오로가 특별히 애정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여 이끈 코린토 교회지만,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 하느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이"의 모습과 분명 거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7)

바오로도 아폴로도 주님의 사업을 위해 선택되어 파견된 훌륭한 사도들임에 틀림없지만, 각각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통해 교회 분열이 야기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 아님은 명백하지요. 오로지 모든 중심은 사랑과 구원이라는 당신 뜻을 이루시려고 일꾼을 파견하시는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복음 속 군중이 예수님을 붙들었듯이, 어쩌면 코린토 교회의 사람들도 제 뜻대로 무리지어 구성한 한 분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을 독점해 향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이라면 다 움켜쥐고 싶어하는, 바오로의 표현대로 육적인 사람이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일 겁니다.

은총이나 직분, 권한의 사유화는 분열로 이어져 차별을 낳고, 불일치를 촉진해, 와해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연대와 협력, 일치를 지향하는 공동체 모습에 역행하는 숨은 악의 얼굴이지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모두가 당신을 추종하기 위해 모여 든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냉정하리만치 담백합니다. 인간적 욕망이나 공명심이 티끌만큼도 묻어 있지 않지요. 그분은 당신이 파견된 목적, 곧 아버지 뜻이라는 중심과 원칙에 충실하실 뿐입니다. 후일 이 모습을 바오로도 따랐고 아폴로도 따랐을 것이지요. 이제 코린토 신자들과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처럼 또 바오로처럼 우리도 자신을 있게 하시고 "지금 여기에" 파견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중심을 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보다 나을 수 없으니, 사실 교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없지요. 또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까지 쏟아주신 주님의 무한한 신뢰와 자비를 깨달으면, 그분의 사랑이 타인에게, 원수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을 아쉬워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9)

이 말씀 안에 깊이 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옷깃을 여미게도 하고, 가슴을 쭉 펴게도 하며, 주변의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공공재 

-김찬선신부-


요즘 와서 제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오늘도 제 얘기를 가지고 오늘 나눔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저의 형을 저보다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여
할머니가 밉지는 않았지만 서운했고 형을 존경하면서도 미움이 있었지요.
할머니가 형을 더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더 책임을 맡기신 것도 잘 알고,
할머니가 저를 사랑치 않으신 것이 아님도 잘 알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 군대 친구가 있는데 유명한 제약회사 사장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형만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고,
그래서 자기는 편애하지 않기 위해 애를 하나만 낳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편애하지 않는 것이 저의 인생 철학 중의 하나가 되었고,
제가 공동체 책임자의 역할을 할 때 이점을 아주 중요시했지요.

그런데 제가 편애하지 않으려고 했고 적어도 제 사랑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와 더 잘 통하고, 제 마음에 더 드는 형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것이 그렇지 못한 형제들에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무튼 편애는 구약의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 예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형제들 간에 서로 시기 질투하게 하고, 
분열에 파당까지 짓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부모나 공동체의 책임자는 이것을 무지 경계해야 하지만
부모나 책임자가 편애하지 않아도 미성숙한 사람들은 서로 시기 질투하고
오늘 코린토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파당을 짓곤 하지요.

그러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바오로나 아폴로는 자기 중심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그것으로 자기 힘을 모으려고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지만
바오로와 아폴로를 내세워 파당을 짓고 자기들의 힘을 모으려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대다수의 우리 국민이 얼마나 훌륭한지,
어려움 앞에서 늘 한 마음이 되어 위기를 극복해왔음에 자랑스러워하는데,
이런 대다수 국민에 비해 일부 소수의 사람이 일제 때는 일본의 앞잡이가,
미 군정 때는 미국에 붙어 자기들의 힘을 모으고 권세를 부리곤 하였지요.

저는 이런 면에서 힘을 모으는 것은 비복음적이라고 비판하는 바입니다.
물론 힘이 없는 사람들이 거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은
정의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지만,이미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힘센 집단이 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은
비복음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몇몇 집단들이 국가적인 어려움 중에서도 어려움을 같이 헤쳐나가려
하지 않고 있고 그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일부 목사와 개신교들이
힘을 행사하며 생명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더욱 비복음적이고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개신교계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과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 힘의 결성과 힘의 행사는
그것이 비록 정의를 표방하더라도 자기중심이고 집단이기주의일 뿐입니다.
그러면 복음적이란 어떤 것입니까?

힘을 자기나 자기 집단을 위해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을 모으기도 해야 합니다.
왜? 공동선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요즘 의사가 공공재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물론 공공재로 자신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뿐 아니라 신부나 교사나 모든 사람이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공공재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랑이고 그럴 때 복음적입니다.

더욱이 신앙인인 우리는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라고 얘기하듯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자기를 공공재로 내놓아야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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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앗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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