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내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은 ‘내가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부가 될 자격이 제게는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신부가 되면 교회에 큰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신부님이 되고 싶었고 이렇게 매일 기도했습니다.
‘제가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 작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존재라도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나름으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저 자신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함 그 자체였지만 주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신학생 때에 가졌던 순수하고 겸손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지면서 이상한 마음이 제 안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비판의 마음입니다. 다른 신부의 모습을 비판하고, 신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또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만 가득히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받지 못한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나중에 똑같은 임금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른 아침에 나왔던 일꾼들은 투덜거립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분명히 공정하지 않은 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맨 처음부터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이었다면 어떨까요? 이 공정하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 따질까요? 데모라도 해야 할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대접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까요?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했던 일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일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감사했을 것이고, 더 열심히 일해서 주인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가졌던 순수함과 겸손함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순수함과 겸손함은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열정은 노력의 어머니다. 어떠한 일도 열정 없이 성취된 것은 없다(랄프 월드 매머슨).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걸어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던 한 순례자가 길에서 마차를 만났습니다. 오랜 순례로 인해 다리가 너무 아팠던 그는 마부에게 태워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마차에 태웠습니다. 얼른 마차에 탄 나그네는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멉니까?”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이 말의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순례자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겠다고 생각하다가 피곤함에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마차의 덜컹거림에 놀라서 깬 순례자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30분 정도 온 것 같은데, 예루살렘 근처에도 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예루살렘은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지금 30분 지났잖아요.”
그러자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즉, 우리 삶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우리는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새기며 정확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감사는 태도다
-전삼용신부-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난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종은 아무리 가져도 부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방법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중에서도 나중에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 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지 못하고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려 한다면 어차피 갈 것, 꼴찌보다는 첫째가 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늦게 와서 가장 먼저 돈을 받고 간 이들이 가장 감사할 줄 알았기에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일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약속하여 받은 ‘한 데나리온’만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제 방에서 운동합니다. 절 운동과 팔벌려뛰기를 합니다. 처음 팔벌려뛰기를 할 때는 50번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번씩 2세트를 합니다. 그래도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근육이 조금 붙어서 나아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운동하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엔 벽을 보면서 했다면 지금은 ‘십자가’를 보면서 뜁니다. 100번쯤 뛰면 힘이 듭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면 ‘이것 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뛰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감사의 힘일 것입니다.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나를 똑같이 대우하는데, 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한 일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을 바라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데나리온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성체, 성혈’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주인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때만 보지 말고 우리 삶에서 그분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갑자기 불림을 받아 하루 일했는데 10조 원을 받았다면 누가 1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2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체의 가치를 모르니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가 없으면 지옥행이어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그냥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고정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께 해 드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조재형신부-
호수에서 오리 가족을 보는 것이 작은 즐거움입니다. 2달 전에 16마리의 새끼들과 오리가 호수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어미 오리가 앞에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잠시 멀어졌다 싶으면 쏜살같이 어미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2달이 지난 지금 새끼들은 제법 컸습니다. 이제는 새끼들이 앞에 있고, 어미는 뒤에서 새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끼들을 믿고, 새끼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셨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새끼오리들처럼 예수님의 곁에서 보고, 듣고, 따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고,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뒤에 오는 강물에 자리를 내주고 더 깊은 바다로 가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오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강물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탓하기보다는 다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큰 지혜입니다.
코로나19로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받은 것은 전 국민에게 주는 지원금이었습니다. 은행계좌로 1,200불이 왔습니다. 잘사는 사람도, 보통인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재난지원금이 있었습니다. 은행계좌로 3,000불이 왔습니다. 직원 일인당 1,000불씩 주어졌습니다. 사장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세금을 내는 직원이 3명이라서 3,000불이 나왔습니다. 직원급여 지원금도 나왔습니다. 2달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왔습니다. 25,500불이 은행계좌로 왔습니다. 코로나19로 홍보할 기회가 없었는데 정부의 재정지원 정책은 제가 일하는 신문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도 정부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미국처럼은 아니지만 전 국민에게 일정액수의 지원금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기도 하고, 미국에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화살의 종류가 아닙니다. 화살을 쏜 사람이 아닙니다.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에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도 미국과 비슷하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재정지원을 하였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 공급, 소비는 경제의 3가지 축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는 시기에는 과감한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일당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하루 생활에 필요한 금액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만큼은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은 오후에 와서 일한 사람이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일당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기준으로 일당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능력, 재능, 외모와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찍찍이(velcro)' 같은 것이어서 우리 신경계통에 즉각적으로 단단히 둘러붙는 반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선하게 보는 것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테플론‘ 같은 것이어서 신경계에 잘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우리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을 적어도 15초 이상 우리 생각 속에 붙들어 둘 때는 이 감정들이 신경계통에 더욱 단단하게 둘러붙는다고 합니다. 관상은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형제들과 함께 모여 ‘원장 직무 수행’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원장 매뉴얼’이란 책을 통독하다보니, 원장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과중하던지, 합당한 원장 후보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0여년전 돈보스코가 청소년 구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살레시오회를 막 창립하던 초창기 무렵의 일입니다. 1863년 돈보스코가 48세 되던 해, 첫번째 사업체였던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가 넘쳐나는 아이들로 인해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돈보스코는 미라벨로라는 지역에 두번째 오라토리오를 만들었고, 그 오라토리오의 원장으로 애제자였던 미카엘 루아 신부를 임명했습니다. 당시 원장으로 임명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습니다.
돈보스코 입장에서 걱정이 많이 되었겠지요. 아직 젊고, 병약하며, 경험도 일천한 루아 신부의 어깨에 너무나 과중한 직무를 얹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돈보스코는 그를 파견하면서, 친필 편지를 하나를 써서 건넸습니다. 원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었는데,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분노하지 마십시오.
☞ 원장의 고행은 부지런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타인이 주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 경건하고 열성적이며, 주의를 집중하여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십시오.
☞ 매일 아침 묵상과 성체조배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명령을 내리거나 훈계를 할 때는 늘 사랑과 인내로써 하십시오.
☞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언제나 잠깐이라도 하느님과 상의하십시오. 보고를 받을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기 전에는 잘 경청하고, 진위관계를 반드시 파악하십시오.
결국 원장은 명령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장은 첫째가 아니라 꼴찌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복음 말씀 말미에는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20장 16절)
지금 이 세상에서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눈만 뜨면 거듭 성찰하는 노력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때, 행동 하나를 할 때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일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유심히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권위가 혹시라고 크게 변질되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권위중독증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요즘 제일 조심해야 할 갑질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오늘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쥐꼬리만한 권위를 부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듣기 위해, 더 자주 자신을 개방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 거듭 성찰하지 않고, 부단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꼴찌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가장 부끄러운 꼴찌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라고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를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 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댓가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영적인 시기
-김찬선신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요?“
얼마 전에 인천 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나
그 과정에서 불공정이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얘기가 오늘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얼마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분히 사회주의적입니다.
일을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잘했건 잘못했건 기본적인
소득을 똑같이 얻을 수 있게 하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자는 불로소득이 생기면
사람들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한 사람과 일하지 않은 사람 간에 공정하지 않다고
오늘 먼저 나와 일한 사람과 똑같은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 말씀은 이런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늘나라에서는 차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더 부자가 있고 더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고,
더 높은 사람이 있고 더 낮은 사람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유대인은 천당 가고
뒤늦게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이방인들은 못 가는 그런 일이 없음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유대인들은 윗자리에 앉고 이방인들은 끝자리에 않는
그런 일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드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을 독점하려는, 다시 말해서 천국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고픈 유대인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들은 오늘 비유에서 먼저 일하러 나온 사람들처럼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불평을 하고, 마침내는 못마땅한 주님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방인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느냐고
물으시는데 이런 영적인 시기가 세속적인 시기보다 오히려 더 고약합니다.
지금도 자기들이 믿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배제하고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종교를 열심히 믿고 자기 종교를 통해 하느님을 옳게 믿는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옳게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천국 문을 닫으려는 자는
그 사랑없음과 폭력성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세속의 시기자도 우리는 못됐다고 하는데
천국의 땅 한뙤기를 내주지 않으려는 영적 시기자는 더 못된 사람임을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깨우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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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 말씀은 이런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늘나라에서는 차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더 부자가 있고 더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고,
더 높은 사람이 있고 더 낮은 사람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유대인은 천당 가고
뒤늦게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이방인들은 못 가는 그런 일이 없음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유대인들은 윗자리에 앉고 이방인들은 끝자리에 않는
그런 일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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