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8. 17. 06:18

2020 8 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오 19,23-30 )

 

"Amen, I say to you,

it will be hard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Again I say 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pass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에서 ‘부자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는 많이 가진 이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19,21)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인들이 있습니다.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900년대 테헤란에 살았던 이란 공주 ‘타즈 살타네 카자르’입니다. 당시 그녀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페르시아 귀족 남성 46명이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그중 13명이 거절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정도였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혹시 정보가 있을까?’ 하면서 ‘타즈 살타네 카자르’를 찾아보니 나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 아니라, 끔찍한 외모의 남성입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발목이 굵었으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습니다. 여기에 엉덩이 위로 치마 밑단이 꽃부리처럼 활짝 펼쳐지는 발레 치마를 입었습니다. 패션 감각이 전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제가 남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콧수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썹도 막대기처럼 짙어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이 외모가 당시 미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미의 기준은 이렇게 변합니다. 어쩌면 역사상 모든 기준이 바뀌고 있지 않을까요? 결국, 지금 우리가 내세우는 기준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준은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참 진리이며,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부자들은 많은 봉헌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지요. 그렇게 많은 봉헌을 하고, 또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 주님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분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티벳 속담).



똑똑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자기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으면서 상대를 설득합니다. 이런 사람은 똑똑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고 머리 좋은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똑똑함이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존 최고 경영자 제프 베로스의 말이 많이 와닿습니다. 그가 말하는 같이 일하는 똑똑한 사람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이해를 계속 수정한다. 이미 해결한 문제도 다시 고려한다. 새 관점, 정보, 생각, 모순, 도전에 열려 있다. 예전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언제든 바꾼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고, 이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부자를 구원하시는 방법-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은 이런 불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즉, 부자는 구원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부자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1,100명의 유태인 포로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끼려 했던 차와 금 배치를 보며 그것까지 팔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남아있는 재산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성경에서의 부자는 소유한 돈의 액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많을수록 부자입니다. 저는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행려자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신문지를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를 훔쳐 갔을 때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부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재산의 양을 줄여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회심기’란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먹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가 종단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 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 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것이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부자가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부자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자를 어떻게 구원해주실까요? 바로 당신이 ‘주(인)님이 되어주심으로써’입니다. 신문지 하나도 내 것이라고 믿으면 부자이고, 수억 원의 재산도 주님 것이라 믿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것의 주님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주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것’이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종은 아무리 가져도 그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는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믿음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받은 것 중 일부를 도로 봉헌함으로써 굳건해집니다.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방식이 새로운 계약을 위한 선악과인 ‘십일조’입니다.

 

-조재형신부-

 

방에 선풍기가 있습니다선풍기에는 전원시간속도회전의 기능이 있습니다가장 먼저 눌러야 하는 곳은 전원입니다회전을 먼저 눌러도속도를 먼저 눌러도시간을 먼저 눌러도 선풍기는 작동하지 않습니다기본으로 전원을 누른 다음에 다른 기능을 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가장 먼저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작동할 수 있습니다마음이 급하거나서두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저도 성격이 급한 편이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설명서를 읽어보면 방법이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공인 인증서도 차분하게 과정을 밟으면 5분이면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서두르다보면 10분이 걸려도 다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예전에 현명한 여인이 두레박에 나뭇잎을 넣었다고 합니다갈증에 지친 남자가 급하게 마시다 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병으로 고생하는 것도 힘들지만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깊어지고 있습니다미국은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이는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합니다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그렇지 않습니다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삶과 신앙이 하나였습니다밥을 푸기 전에 성호경을 먼저 그었습니다일이 생기면 먼저 예수마리아요셉을 불렀습니다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습니다가족들과 아침기도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기일이 되면 새벽미사에 모두 함께 갔습니다전날에는 가족들이 모여 연도를 바치고식사를 하였습니다여행을 가면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이 성당의 위치였습니다가족들의 이름도 세례명을 많이 부르셨습니다물론 신앙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찾은 적이 있습니다가난 때문에 양심을 속인적도 있습니다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과 다투기도 했습니다성찰하고 뉘우치며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판공 때면 길게 줄을 서면서 성탄을 기다렸고부활을 기뻐하였습니다코로나19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신앙의 기본기를 다잡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꼭 필요하지 않았던 일에 너무나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기도하고감사하고나누는 시간을 만들어가 가면 좋겠습니다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는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정녕 이 백성은 생각이 없고슬기가 없는 자들이다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낙타와 바늘구멍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울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못 들어간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12,20),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지나치게 강경하고,
또 자비로우신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것은
부자들의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으로,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을 어떤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하고,
그래서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낙타를 가장 큰 동물로 생각했고,
바늘구멍은 가장 작은 구멍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을 싫어하신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제대로 회개하고, 하느님만을 올바르게 섬겨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바리사이들은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느님의 복을 받았으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만일에 그 생각이 옳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혐오스러운 생각’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제자들이 몹시 놀란 것은,
그들도 그때까지는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셨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다는 뜻인데,
그냥 보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부자는, 즉 재물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은,
그 상태 그대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한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 집착, 소유욕 등을 버릴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부자였더라도 회개한 사람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베드로 사도의 말을, 예수님께 어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요구는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8-30).”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백 배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된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되고, 오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자동적으로 처지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고 하신다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다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한상우신부-

은총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서
먼저
작아지십니다.

우리가
더 작아지면
못 빠져나갈
바늘구멍이란
없을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작아지는
삶입니다.

작아져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버려야
빠져나갈 수 있고
비워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버려야
하느님을 위한
빈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을
버려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나누어야
작아질 수
있습니다.

작은
바늘구멍을
못 빠져나가기에
우리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빈곤한 이가
있기에 부자가
있는 것입니다.

위 아래의
구분이 아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많이 지녀서
못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나누고 감사하는
기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작아지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은총이 됩니다

 

버리면 받는  

.-김찬선신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어제 부자 청년 얘기에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말씀에
주님 따르기를 거부한 부자 청년 얘기에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자기와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가 있는지 주님께 여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베드로가 의기양양하다느니,
대가를 바라는 속물이라느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해하는 차원에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정말 자기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여 순수하게 묻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대가를 바라는 것도 속물근성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순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면
따름의 대가라기보다 포기의 대가랄까 포상이 있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다만 그 대가나 포상이 뭔지가 문제이겠지요.

그렇기에 대가가 무엇인지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도
속물이라고 나무라지 않고 대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대가랄까 포상의 내용이 어마어마합니다.

1) 주님과 함께 열두 옥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
2) 부모 자식과 버린 재산의 백 배를 받게 될 것
3)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과 보장이 사이비 교주의 그 사기와 같은 것일까요?
또는 일부 개신교의 3박자 축복,
곧 구원, 재물, 건강의 축복과 비슷한 것일까요?
어쩌면 3박자 축복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에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버린 재물과 받게 될 재물의 의미입니다.
버려야 부모와 자식과 재물은 애착하고 움켜쥐고 있는 부모와 자식과
재물이고 그래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개 될 재물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움켜쥐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그런 것이며,
그래서 대가의 성격보다는 포상과 은총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버려야 할 부모나 자녀는 혈육이기에 애착하는 부모와 자식이고,
얻게 될 부모와 자녀는 영적인 의미의 부모와 자식입니다.
딱 맞는 예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제가 자식을 포기하니까
저를 아버지로 여기는 아이들이 제가 결혼해 낳았을 아이보다 많습니다.

그러므로 받게 될 백 배란 같은 것이 수량적으로 백 배라는 뜻보다는
영적으로 백 배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아버지를 포기하니까 영적인 아버지가 백 배로 생기고,

 

더 나아가 육신의 아버지를 포기하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로 소유하게 된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소유하게 되며,
육신의 자녀를 포기하니 영적인 자녀가 백 배로 생기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렇다면 재물은? 백 배의 재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내 욕심을 채우는 재물이 백 배나 된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닐 것이고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사업에 쓰일 재물이 아닐까 생각하는 오늘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21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