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8. 16. 05:43

2020 8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16-22)

 

“If you wish to be perfect,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있다, 없다.’입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100대는 무엇이 없을까요? 답은 ‘다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많아서 평생 힘들게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런데 세대별 있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10대는 ‘끼’가 있다, 20대는 ‘젊음’이 있다, 30대는 ‘짝’이 있다, 40대는 ‘폼’이 있다, 50대는 ‘멋’이 있다, 60대는 ‘가족’이 있다, 70대는 ‘쉼’이 있다, 80대는 ‘추억’이 있다, 90대는 ‘소망’이 있다, 이제 마지막 100대는 무엇이 있을까요? 답은 ‘천국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별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계속해서 바뀌어 나간다는 것이지요. 지금 세대에 필요한 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필요 없을 수도 있고, 또 지금 세대에 필요 없는 것이 과거나 미래의 세대에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없다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있다면서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서도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자 젊은이가 주님을 찾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선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젊은이는 이제까지 다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부족함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질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했던 이 젊은이는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것을 주님 때문에 버리는 것을 늘 주저하게 됩니다.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신학자는 무릎을 꿇고 신학을 연구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연구는 쓸모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음악과 인생.


꽃길을 걸을 때는 라르고(largo)
꽃들과 눈 맞추고 얘기하며 ‘매우 느리게’ 걸어가요.

산행을 할 때는 안단테(andante)
하늘을 보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느리게’ 한발 한발 디뎌요.

일상의 삶은 모데라토(moderato)
게으름과 성급함은 버리고 ‘보통 빠르기’로 생활해요.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는 알레그로(allegro)
재지 말고 멈칫하지 말고 ‘빠르게’ 내밀어요.

어쩌다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면 비바체(vivace)
두려워 말고 ‘빠르고 경쾌하게’ 행동해요.

인생의 시간은 프레스토(presto)
바람같이 쏜살같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니까요.

음악과 인생이 이렇게 연관 있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하나 봅니다. 정연복 시인의 ‘음악과 인생’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찾게 됩니다.

 

'댐'이 되기보다 '폭포'가 되리라!

-전삼용신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경우도 많습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분들은 마치 ‘댐’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텃밭의 호박을 보았습니다꽃이 피더니 드디어 호박이 열렸습니다. 2개가 옆집 울타리를 넘어갔습니다참 사람 마음이 요상합니다우리 울타리에도 넉넉하게 호박이 열려있었는데 옆집으로 넘어간 호박이 아깝게 여겨집니다호박은 굳이 울타리를 가리지 않고 생긴 대로 열리는데 나는 왜 울타리를 가리는지 모르겠습니다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모든 것이 소유가 있고권리가 있는 세상입니다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세상입니다커다란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우지만 부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거스를 수 없다면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바늘귀처럼 작게 보일 뿐입니다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8차선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일 것입니다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우리 울타리의 호박은 내가옆집으로 간 호박은 옆집에게 나눠주어야 하겠습니다.

 

지붕 공사로 비용이 제법 들어갔습니다정부의 지원금으로 해결 할 수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나눔의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의 평생구독자이신 어르신께서 노안으로 신문을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또다시 구독료를 보내 주셨습니다코로나19로 남미로 가는 신문의 발송이 중단되었습니다그럼에도 어르신께서 후원금을 가져오셨습니다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손수 운전하셔서 신문사로 오셨습니다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던 것처럼 어르신들께서 보내주신 구독료와 후원금은 딱 지붕 공사의 비용 만큼이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만화인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천국과 지옥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모든 상황은 똑같았습니다밥이 있었고숟가락이 있었습니다다만 숟가락이 몹시 길었습니다지옥은 긴 숟가락을 자기 입에 넣으려다보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대부분 흘리고 말았습니다사람들은 숟가락을 탓하며 불평하였습니다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이웃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습니다이렇게 서로의 입에 밥을 먹여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천국과 지옥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배려해주는 나눔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합니다복음을 읽어보면 청년은 아주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계명을 잘 지켰고그릇된 길은 가지 않았던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어쩌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칭찬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릅니다청년의 대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계명들을 잘 지켰고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그렇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그런 다음 나를 따라 오시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퍼져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어떤 분들은 나이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사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어떤 분들은 가족들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하지만 가족은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어떤 분들은 두려움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두려움은 사실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마음의 상태일 뿐입니다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걱정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재물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그는 이미 완전한 자 되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위의 예수님 말씀을 들으시고, 나름 지닌 재산으로 인해, 복음서에 등장하는 젊은이처럼 슬퍼하거나 실망하고 계시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너무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울며 가슴치면서 예수님이나 교회 공동체를 떠나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일 배우자와 여러 명의 성장기 자녀들, 연로하신 부모님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계신 가장께서,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셔서 즉각적 행동으로 옮긴다면 큰 일 날 일입니다. 

 

본인이야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십자가나 속세의 질긴 인연들 훌훌 털어버리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버리면 마음이 홀가분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게 될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겠습니다. 

 

가장으로서 그보다 더 무책임한 모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복음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며,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나 품위를 저버리는 악덕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한 가정의 가장은 정직하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재물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한 시대 앞에서,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안정적 재정 확보를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그리스도인 가장으로서 취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과도함’ ‘지나침’에 있습니다. 뭐든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재물에 목숨을 걸며, 재물을 하느님 위치로 격상시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재물이라는 탑에 깔려 제 명도 못챙기는 사람 참 많습니다.

 

평생 한눈 한번 안 팔고 기를 쓰고 쌓아올린 천문학적 액수의 재물을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채,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사람들, 한 마디로 열심히 죽쒀서 개주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넉넉해졌다면 주변도 한번씩 돌아보면 좋겠습니까? 재물의 결핍으로 인해 하루 하루, 아슬아슬,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드는 이웃들을 위해 관대히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자세야말로 제자됨의 모습이고, 완전한 자 되는 지름길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외치며, 돈을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서 최고로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던 지닌 삶을 가슴치며, 늦었지만 돈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다른 무엇에 앞서 좋으신 주님과 신앙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자 되는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다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가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간음해서는 안 된다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는 것이라고 하신다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준다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고 한다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한상우신부-

긴 장마가
끝났습니다.

오랫만에
맑은 날씨속에서
산길을 걸었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계곡의 물길을
보았습니다.

계곡의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모양의
나무토막과

찢겨져
떨어져내린
수많은 나무가지들을
만났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로
잘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가야
썩지 않습니다.

흘러가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내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로막는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이
앞에 계셔도
재물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이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하느님께 중심을
두는 아름다운
결단입니다.

집착과 지나친
욕심으로는
우리 영혼이
자유로울 수 없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있어야 할
우리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따른다는 것은
절제와 절도를
일깨워줍니다.

압박과 강요가
아닌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됩니다.

나눔은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께로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오늘도
하느님께로
흘러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미 규정하고 있으니, 그의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심판과 보상은 우리 계산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의 합리성이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성조들 시대부터 통용되어온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스라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계명들을 제시하십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이 젊은이는 율법의 눈으로 보아 꽤나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에 대해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각 선언할 수 있다는 건, 늘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힘을 쏟던 사람이던가, 아니면 아예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막 살던 사람의 농담이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그런데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꺼내십니다. 스스로가 이미 최대한 노력하고 있음을 자신하는 젊은이에게 최종적으로 도달하고픈 고지는 하느님의 완전함임을 예수님이 간파하신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젊은이가 더 분발해야 할 단계는 없어 보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은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특별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물이 우상 자리를 꿰어차고 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어려운 도전이 될 권고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멸망과 한탄을 자기 삶에 끼어든 사건으로 생생히 보여 줍니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에제 24,21)

주님께서 벌이실 이 비참한 사건은 이미 예언자가 아내를 잃고도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미리 예견됩니다. 성전은 율법, 경신례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랑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무한히 교만했던 그들이 성전을 잃는다는 것은 하느님 현존이 그들을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멸망하여 유배를 가게 될 것이고, 유배지에서 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도 조상 대대로 지켜온 관습에 따른 애도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나라와 자기 신을 잃은 백성에게는 이 모든 게 사치일 뿐이니까요. 성전은 무너지고, 율법은 잊혀지고, 경신례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을 떠받치던 기둥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 참 중요합니다. 모든 국민이 법을 준수하고 불법을 삼가야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안전이 유지되듯이, 신앙 생활에서도 계명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질서를 지켜줍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가 보여 준 모범처럼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만만 해도 사실 훌륭하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삶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들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다가 잃어버린 성전과 율법과 경신례처럼, 엄밀히 말해 없어도 살 수 있는 비본질에 가깝습니다. 성전이 없다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율법이 없다고 사람 사이의 도리와 양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또 경신례가 없어도 하느님 은총의 기억과 감사가 우리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면 언제 어디에 있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처음 젊은이가 던진 질문 속 "무슨 선한 일"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사랑"이라고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마태 19,17)는 예수님의 대답 속의 그 "한 분"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자 젊은이는 자기 질문에 돌아온 응답이 너무 버거워 슬픔 중에 떠났지만, 괜찮습니다. 비록 그가 지금 최종적 고지에 도달할 수 없긴 하지만, 아마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해답이 계속 그의 가슴에서 메아리칠 것이고, 언젠가는 그를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아니어도 되고요. 꼭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어도, 꼭 사랑의 실천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책임감과 의무 이행이 사회의 기본을 구성하는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에 있어 그리 째째하신 분이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에게는 무엇을 바라시는지 헤아려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원칙과 기본에 성실한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시는지,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선한 일"로 한 걸음 더 나아오기를 바라시는지, "사랑" 때문에 전적으로 봉헌하고 헌신하길 원하시는지...

자비롭고 자유로우신 주님의 구원은 한 도식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을 듯합니다. 조금 더 욕심이 난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면 되겠지요 나에 대한 주님의 바람과 지금의 나의 방향성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면서 우리의 순례 여정은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얼치기와 양다리 걸치기의 슬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773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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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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