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Margaret K 2020. 8. 15. 05:47

2020년 8월 16 연중 제20주일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 21-28)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The canaanite woman's fai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를 떠나시어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민족의 땅으로 가신 이유는 오늘 복음의 앞선 내용들을 짚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그 나라의 풍요로움을(마태 13,1-53; 14,13-21 참조)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과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마태 14,22-36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셨습니다(마태 15,1-20 참조).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갈릴래아에서 이민족의 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말을 해도 소용없고 기적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들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민족 가나안 여인이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기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외쳤던 ‘다윗의 자손’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나탄 예언자가 하느님의 집을 지으려던 다윗 임금에게, 희망의 구원자가 바로 그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작에 이스라엘에게서 나왔어야 할 신앙 고백이 이민족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예수님의 칭찬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입술로만 공경하는 위선이 아닌, 강아지에 비유하며 무시하시려는 예수님께 ‘강아지처럼 주인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먹겠다.’ 하는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그분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구원에 대한 희망과 참된 믿음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강아지가 주워 먹을 부스러기만큼의 믿음이라도,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희망의 틈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키엣 대주교-


주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나라에 퍼져나갔고 오늘은 이민족 가나안 여인이 에수님께 와서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녀는 주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들은 것밖에 없는데도 주님의 자비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다음에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거절을 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냉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간절하고 끈질기게, 그리고 너무나 지혜롭게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지만 믿음이 넘치는 말입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영혼과 깊은 “믿음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귀에 시달리는 딸을 고쳐줄 사람을 찾아 헤매었고 끝내는 금단의 지역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한 간절함으로 세상 사람들의 배척과 모멸감을 참았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참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딸을 주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셨고 행복의 양식, 구원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교도 여인은 주님의 가족이 되었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빵 뿌스러기를 기다려야 하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빵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주님과 동행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계획을 바꾸어 이교도인에게도 하늘나라로 오르는 길을 열어 주게 한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냉담한 가족과 이웃의 굳게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와 같습니다. 또한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키입니다. 오늘 이교도 여인의 모습에서 성모님을 떠올립니다. 자비의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행복이라는 맛있고 구수한 구원의 빵을 주신 인자한 어머니이십니다. 이 빵을 주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셨는 지 성체 성사를 통하여 성모님의 고통과 자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성모님, 저희가 성체성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이교도 여인이 예수님께 드린 희망은 무엇입니까?
2. 이교도 여인의 간절한 도움을 통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3. 성체성사를 모시면서 성모님의 고통과 사랑, 믿음에 대해 잠시 묵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장재봉신부-

 

어제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을 축하드리며 기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하늘의 어머니께 경하 드리는 그 벅찬 기쁨이 주일을 맞는 우리 마음에 그득하여, 곱절로 행복한 주일이 되시길 빌어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 땅이 아닌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는데요. 티로와 시돈지방은 예언자들로부터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곳으로 지명된 곳입니다(이사 23장 참조).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굳이 그곳을 찾으신 사실이 의아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자비는 넓고 깊어 한계가 없다는 것,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리려하신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바로 그때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겐네사렛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베푸셨던 이후라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굳고 단단한 편견에 쌓여 시종일관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냉대에 지쳐서 내린 결단일 것만 같아 마음이 아릿합니다. 쓸쓸히 이방인의 땅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셨을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 죄송함이 차오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고맙고 고맙습니다. 막무가내였던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테니까요.

오늘 듣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마음을 숙연케 하는데요. 어쩌면 그날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가 듣는 것과 똑같은 주님의 이야기를 묵상했던 게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만 같은 겁니다. 이미 심판을 받을 곳으로 선포된 고장일지라도, 비록 멸망당할 죄를 지은 인간일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고히 깨달았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 크신 사랑에 감읍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이방인의 복음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때문에 더욱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린 현실이 아파서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소원했을 것이라 어림하는 것입니다.
 

후안 데 플란데스의 ‘그리스도와 가나안 여인’(1500년).


그런데 오늘 복음 얘기가 영 뚱딴지같습니다. 평소에 뵙던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당황스럽습니다. 마귀가 들어 고통을 당하는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청을 완전히 묵살하시니까요. 더해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시니, 진정 어이 이러시나?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현장의 극적인 반전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그토록 소원하던 딸을 치유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며 칭찬까지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는 “주님, 그렇습니다”라는 여인의 절대적 긍정을 들으신 후에 칭찬을 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박힙니다. 이야말로 하느님만 바라보는 순명의 고백이기에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의미라 새겨집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1독서 말씀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요. “정의와 공정이 그분 어좌의 바탕”(시편 97,2)이니, 옳고도 옳은 해석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마침내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뜻인 게지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무조건’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굳은 마음을 녹이고 거친 생각을 다듬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날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 새겨야 할 점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희망으로 무조건, 구하고 의탁하는 ‘기도’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 여인처럼 뚜렷한 믿음으로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맞장구쳐드리는 믿음의 배포를 키우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요. 하느님은 절대적 불공정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나요? 하느님께서는 애초부터 내어주기만 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에게 아무 값없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의 것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처럼 불공정한 삶을 살아가기 바라십니다. 매사에 조건 없이 내어주고 퍼주는 삶이야말로 당신 자녀의 조건이라 밝히십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공정을 부르짖는 세상에서 당신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당신께 거저 받은 은혜를 홀로 누리지 말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하십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닮기 위해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물러서 양보하며 손해 보며 감사하는 불공정을 살으라 하십니다. 이렇게 무조건 사랑만 하시는 하느님의 경계 없는 사랑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자녀인 나를 통해서 온 세상에 번져나가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과 절대적 신뢰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굳게 붙들어줍니다. 말씀을 따라 올곧게 살아갈 때에 건강하고 튼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굳센 믿음으로 다만 “몇 사람만이라도”구원하기 위한 간절함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부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어 너도 나도 기꺼이, 불공정을 살아내는 축복을 살게 되길 탐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늘의 어머니께 효도하는 귀한 자녀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내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해드리는 긍정의 지혜로 주님께 칭찬 듣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시길 간곡히 기도드립니다.

 

항구한 믿음

-유환민신부-

 

오늘 복음은 항구한 믿음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 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해서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은 아닙 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탄치 않음이 이야기를 더욱 빛나게 하고 우리 신앙에 대한 성찰과 울림을 선사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 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가나안 부인의 간 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뜻밖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 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선택 된 민족 이스라엘을 우선시했던 마태오 복음의 신학을 고 려한다 해도 이방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고 당황스럽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 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까지 하십니다. 헌데 그 순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 그렇습 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 기는 먹습니다.” 냉정하고 가혹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하 게 만드는 여인의 대응에서 큰 믿음과 간절함이 묻어납니 다. 여인은 예수님을 원망하거나 등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 히려 겸손한 모습으로 냉대와 거절의 시련을 받아들이고는 처음보다 더 작은 사람이 되어 주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내 맡겼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식사 때 작은 빵 조각을 비벼 손 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물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여인 이 말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란 먹다 흘린 음식이 아 니라 이렇게 손을 씻은, 어찌 보면 이미 음식이랄 수도 없 는 것이었습니다. 선택된 민족을 위해 마련된 위대한 섭리 까지는 아니라도, 그저 그 은총의 아주 작은 부스러기로도 제 딸에게 충분할 것이라 여인은 믿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 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방 여인의 겸손한 간 청을 받아들이시며 찬탄과 기쁨으로 그 믿음을 인정하십니 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사명의 강조로 시작된 대화가 이방 여인의 믿음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이미 그녀에게 성 취된 구원의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런 대화의 흐름은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담아내 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이방 인들이 어떻게 하느님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될지 예고합 니다.(이사 56,6-7 참조) 가나안 여인은 어느 것 하나 기대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그로 인해 멸시를 겪었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 까지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큰 믿음의 모범이 되었습니 다. 그녀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매달렸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이 여인의 위대한 신앙 때문에 그녀를 도우셨습니 다. 이처럼 확고하고 인내롭게, 조금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너무 빨리 포기하지도 않으며, 주님만이 도우실 수 있 다고 깊이 확신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습니다.

 

만민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정비오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심을 알려준다. 하느님은 선인이 나 죄인이나 인종과 종교와 스펙과 관계없이 누구나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자기 자 신만 혹은 같은 민족이나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은 버려 야 한다.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든지 주님 말씀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산다 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의 종이 되 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 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인들도 주님을 섬기고 또 사랑을 실천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외친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만민의 구원자이심 을 확실하게 알려주신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는데,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를 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 다.”하고 대답하신다. 하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신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구원은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닌 이방인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 만이 아니라 만민에게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말씀인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 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여 만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오 늘의 로마서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열린 구원

-김종기신부-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은 출신 성분이나 특정 민 족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계명에 충실하면 그 어떤 이방인도 성전에 모일 수 있다는 내용을 들려줍니 다. 이것은 기원전 500년 언저리의 이야기인데, 그 때 이미 구원은 유다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도 열려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이스라엘 백성만 이 하느님의 백성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다인들의 불충실과 배신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유다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도 확대됩니다. 이 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을 다시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와서 예수님께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 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가나안 부인을 마치 개처럼 무시하며 거절하십니다. 하지만 그 가 나안 부인은 예수님의 무시하는 말을 인정하며, “강 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먹 습니다.”라는 말로 예수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그 말 을 듣고 예수님은 부인에게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 나!”라고 대견해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티로와 시돈은 가파르나움에서 서북쪽으로 약 50 ㎞ 떨어진 해안에 있는 이방인 지역으로 우상숭배 가 심했던 곳인데, 예수님께서 왜 그곳으로 가셨는 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예수님 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과는 달리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곳의 이방인 여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자신의 간절한 구원을 청했습니 다. 그 여인의 태도는 ‘개’라고까지 천시받는 모욕을 참고 끈질기게 예수님께 매달리는 대단한 믿음이라 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의 아이러니이며, 그 믿음으로 그 부인은 소원을 이 루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 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만하면서도, 하느님 의 계명을 지키는 데는 충실하지 못하였고 하느님을 배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유다인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메시 아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하느님의 백성이요 자 녀가 되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임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하겠 습니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구 원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예 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인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은 유다인이라 해서, 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라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은 총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메 시아로 믿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가 르침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함으로써 구원 의 은총을 얻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 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올해 5월, 교육 콘텐츠 전문 회사 스쿨잼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산다고 하니까 최신형 스마트폰을 예상했습니다. 혹시 게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저의 예상과 달리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응답자의 23.7%가 대답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다음 순서를 알려 드리면, 2위가 용돈, 3위가 애정표현, 4위가 선물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더 최고였습니다.

칭찬이나 애정표현은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의 가치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를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함께 따라와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이 없다면 또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기 원하며, 이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믿음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마음이 가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기에, 제자들 역시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면서 소리를 지르는 여인을 예수님 곁에 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합니다. 예수님 역시 아주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방인을 빗대어 강아지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십니다.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모욕적인 말도 인정하며 주님께 다가섭니다. 주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주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로마 11,32) 주님의 사랑을 말씀하셨듯이, 이방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전해줌으로 인해 그 여자의 딸이 바로 나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결국, 가나안 부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바라는 대로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믿음을 보일까요? 주님 사랑이 내게는 늘 부족하다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평생 하루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토머스 에디슨).



어떤 계획을 세우십니까?


중국 송나라에 ‘주신중(朱新仲)’ 이라는 학자가 인생에는 다섯 개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생계(生計), 둘째는 신계(身計), 셋째는 가계(家計), 넷째는 노계(老計), 마지막은 사계(死計)입니다.

생계(生計)는 내 일생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고,
신계(身計)는 이 몸을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계획이며,
가계(家計)는 나의 집안, 가족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노계(老計)는 어떤 노년을 보낼 것이냐에 관한 계획이고,
사계(死計)는 어떤 모양으로 죽을 것이냐의 설계를 말합니다.

평생을 계획안에 있어야 하겠네요. 지금 어떤 계획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시려고 합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전삼용신부-

 

성경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사람,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 하늘로 오르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는 가리옷 유다는 뱀과 같이 되었고, 아직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은 믿음이 있었다가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늘에서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 안에 이 세 부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귀 들린 딸과 함께 살 때가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겨 그리스도께 치유를 청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견뎌 기적을 얻어내었을 때는 하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비단 기적을 청하는 것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물고기만 들고 나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찾아 소명을 완수하고 그 열매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분명 그 소명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편한가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편할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이러나저러나 고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소명을 찾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믿음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사람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시작만 하는 사람,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좌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선물하십니다. 일단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데도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그다음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그다음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의 멸시까지 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하며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좋게만 끝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희 속담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말이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다 실패하면 죽이 됩니다. 그러나 죽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죽을 일부러 끓이기도 합니다. 죽만 파는 죽집도 있습니다. 죽도 잘 끓이면 멋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원예연구소에서 ‘희귀한 흰색 금잔화의 씨를 보내시는 분께는 큰 사례 하겠습니다.’라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잔화는 주황색이나 갈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흰색 금잔화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한 봉투에 흰색 금잔화 씨가 보내졌습니다. 70대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50대에 이 광고를 보고 흰색 금잔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금잔화 씨를 뿌려 주황색과 갈색의 금잔화 중에 색이 가장 옅은 것들의 씨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뿌려 또 색이 옅은 것들의 씨만 모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20년 거치다 보니 흰색 금잔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문 지식을 갖춘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보통 시골 할머니가 금잔화의 새로운 종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웨이슈잉’의 『한 번이라도 끝까지 버텨본 적 있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버티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말합니다.

“성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기 때문이다.”

 

      저는 요리를 못합니다. 하다못해 김치찌개도 끓이지 못합니다.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실패한 김치찌개의 모습부터 떠올리게 되니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김치찌개도 못 끓이지만 시도하고 끝까지 가면 김치찜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은 난독증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햄버거 가게에 알바로 취직하려고 해도 햄버거 종류를 다 외울 수 없어서 취직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카페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메뉴를 외우는 것도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원두 이름과 팥빙수 만드는 것만 배우면 커피숍을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기술 배우기가 끝난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미리 좌절할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면 실패는 없습니다. 밥 아니면, 어쩌면 밥보다 더 맛있는 죽이 됩니다. 끝까지 가면 밥 아니면 죽이지만, 시작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겸손과 비례하는 이유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 믿음을 꺾을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을 멈추었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실행하십시오. 그리고 실행했다면 반드시 끝까지 가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것을 시작할 때 큰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적어도 죽을 끓일 수 있는 기술은 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해군에서 36년 동안 근무했던 군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군인은 교관으로 훈련병을 가르쳤습니다훈련병을 가르치면서 얻은 교훈을 대학의 졸업식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훈련병들은 여섯 명씩 조를 이루어 보트를 저어야 했습니다가장 빨리 도착하는 보트는 키가 크고 체력이 강한 조원이 아니었습니다작지만 모두가 함께 열심히 노를 젓는 조원이었습니다노를 젓는 데는 학력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피부색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가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다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함께 노를 움직일 동료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행정부는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받는 유학생들의 비자를 연장하지 않고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발표하였습니다그러나 대학과 자치정부는 유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결국 행정부는 결정을 취소하였습니다유학생들은 비자연장을 받고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어려울 때 이웃을 내치기보다는 어려울 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길입니다오늘 제1독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훈련이 고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운동장에는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힘들면 종을 칠 수 있다고 합니다종을 치면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종을 치면 진흙 바닥에 구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종을 치면 힘들게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종을 치면 단체 기합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종을 치면 편하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종을 치면 귀신도 잡는 용감한 해병은 결코 될 수 없다고 합니다그러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종을 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교회의 역사에도 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신앙의 선조들은 배교의 종을 치지 않았습니다끝까지 참고 순교하였습니다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평등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습니다때로 모욕과 수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종을 치지 말라고 합니다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결코 종을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갔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새로운 권위를 지니셨고기존의 질서와 틀을 허물었던 예수님은 늘 당당하셨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어떤 사람일까요그렇습니다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성모님이십니다성모님은 예수님을 믿으셨고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부탁한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징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데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저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저의 말을 듣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여인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또 감동하셨습니다그리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밝혀줍니다곧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구원이 하느님에 의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불순종한 유대인들을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마침내는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30-32)

 

 

<복음또한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다윗의 자손”, 곧 이방인이면서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정작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러나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청하였습니다마귀 들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입니다제자들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하고(15,23 참조)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때가부르심의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바로 이 순간이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바로 이 순간에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마태 15,25).

여인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하시는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여인은 겸손과 인내믿음과 확신을 밝힙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여인은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하느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가나안 여인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13)라고 기도하는 세리처럼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또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믿음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했던 과부(루가 18,1-8)처럼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창세 32,25-27)처럼끈질긴 믿음의 인내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예수님께서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자가 아닌완전한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1고린 10,13)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은 <행전>에서 이렇게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34-35)

 

 

이토록모든 이에게 열리는 구원의 충만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그렇습니다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니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드넓으심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더구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우리의 자유를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으로 쓰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으로“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도와주소서.”를 간청하고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삶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이 침묵할 때 바로 그 순간이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는 순간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한 걸음 더 다가가 꿇어 엎드려 절하게 하소서!

바로 그 때가주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 안에서 겸손과 끈기와 믿음을 길러내소서!

오로지 당신 자비에 의탁하게 하소서아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
-송영진신부-

 

어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이야기는,
단순한 병자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이방인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방인 여자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의 딸이 나은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진짜로 치유된 사람은 바로 그 여자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설할 때, 여자의 간절함, 겸손, 믿음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은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아니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핵심 주제입니다.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으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의 변화는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가 한 말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1-23ㄱ).”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여자의 간청이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침묵으로써 여자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1) 그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강아지’로 표현하신 것은(26절)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우상들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또는 하느님을 그 우상들과 같은 급의 신으로
생각하고서 청하는 것임을 꿰뚫어 보셨고,
그래서 그 여자의 간청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우상들과 같은 급의 신으로 생각하고서 소원을 빌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2) 여자는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생각했을 것이고,
아마도 더 간절하게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여자의 간청보다는 신앙심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자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우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하고,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5,23ㄴ-24).”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그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22절)이라는
호칭은 믿음도 없이 그냥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호칭을
흉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민족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또는 ‘하느님의 백성’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고, ‘길 잃은 양들’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면서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은 ‘믿음, 회개, 실천’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자의 말에는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느님을 믿겠다는 말을 한 다음에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는 말은 아직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우상 숭배를 완전히 버리게 하시려고
조금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묵시록에 ‘개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묵시 22,15).
필리피서에는 ‘개들’을 조심하라는 말이 나옵니다(필리 3,2).
(성경에서 ‘개들’은 우상숭배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들’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셨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우상숭배를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7-28).”

여자는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고, 자기가 강아지라는 것을 깨달았고,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그동안 강아지로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지금부터는 자녀로서 살겠습니다.”로 해석됩니다.
‘부스러기’에 관한 말은,
“하느님은 강아지 같은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로 해석됩니다.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여자가
잘 따라온 것을(강아지에서 자녀로 변화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상 숭배와 양립할 수도 없고,
병행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을 믿으려면 우상 숭배와 미신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인이 미신을 믿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큰 죄’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하여 강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 여인의 딸을 낳게 해주시겠다고 하면서(마태 15,28)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다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복음 선포가 모든 인류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독서이사 56,1.6-7: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국가주의와 율법주의의 편협성을 버리고 보편적 구원론을 받아들이라고 한다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기에 외국인들도 개종하여’ 그분의 계시와 율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이리하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성전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6-7). 이러한 일치된 모습은 하느님을 모두 아버지로 깨닫고 흠숭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인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2독서로마 11,13-15.29-32: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렸고 그 메시아가 오셨지만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다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았다유다인도 그렇고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이다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지만그것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30-32).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안에”(32있는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종족을 따지지 않으시고 모두를 구원해 주신다.

 

복음마태 15,21-28: 가나안 여인의 믿음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마태오는 예수께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 여인에게 붙여지는 가나안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 여인이 이교도라는 것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그 이교도 여인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며 처음에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 오히려 사도들이 그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다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도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고 하셨다그런데도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더욱 가혹하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 이 표현은 이방인을 가리키지만경멸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신다이방인인 그 여인이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게 하는 그녀의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그렇습니다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거기서 그녀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서라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믿음에 탄복하시고(28그녀가 원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그 여인의 믿음을 갖게 해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여기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 여인의 믿음이라면 어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겠는가즉 구원의 조건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예수님의 모순적인 태도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에 투신할 힘을 발견한 것이다사도들은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능력을 부여한다이 믿음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바로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선포함으로써 새 이방인들’, 세례를 받았더라도 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우리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혹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굳게 믿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그리고 그 신앙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포기되지 않는 항구한 신앙이어야 함을 우리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보았다우리도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그리하여 끝까지 항구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 모든 교우가 그렇게 되어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도록 하자.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25, 15)

-한상우신부-

이제
부스러기를
숨기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제 삶의
부스러기입니다.

부스러기를 통해
제자신을
보게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삶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부스러기와
마주하는 직면의
연속입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은총이 필요한
부스러기의
여정입니다.

부스러기같이
너무나 작은
우리들
믿음입니다.

부스러기는
겨자씨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 하나도
그냥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부스러기를
나누듯 주님께
우리의 아픔을
나눕니다.

부스러기를
아시고
부스러기를
믿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부스러기도
타오를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도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부스러기를
다시 찾습니다.

착하고 맑은
부스러기의
간절한 기도를
봉헌합니다.

부스러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름 없는
수 많은
부스러기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스러기도
기도 할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와 함께
살아갑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온 민족에게까지 확장된 하느님 구원 계획의 지평이 펼쳐집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7)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당신 기도의 집으로 몰려들 대상을 "모든 민족"으로 바라보십니다. 처음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이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시작으로, 종래에는 모든 역사와 지역을 아우르는 온 인류가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이사 56,6)

처음에는 하느님을 몰랐지만 섭리와 은총에 의해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도 당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듯,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주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느님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로마 1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는 유다인들은 바오로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방인 선교에 헌신적으로 투신하면서도 믿음을 거부한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늘 안고 있었지요.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로마 11,29)

하지만 사도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한번 시작된 구원의 여정, 한번 주어진 은사, 한번 부여된 소명을 하느님께서는 절대 거두시는 법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은 그들이 유다교의 고유성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폐쇄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주님께서 당신 계획을 완성하실 것이니까요.

복음은 우리가 자주 만나는 '어떤 가나안 부인의 믿음'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간청하는 이방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첫번째 도전입니다. 선조 시대에 하느님께서 누구보다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일깨우시는 듯하지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두루 품으시는 예수님의 성정으로 보아 거절 의사라기보다 '시작은 그랬다'는 일침으로 들립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에게 던지신 두번째 도전입니다. 이 여인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믿음을 다지느라 거쳐왔던 모진 평지풍파와 환난고통, 우여곡절을 한순간에 압축해서 직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인텐시브 코스, 집중 과정이라고 할까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이방 여인의 답이 참으로 겸손하면서도 담대합니다. 유명한 예언자로 불리는 한 유다인 남성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아픈 딸에 대한 모성 때문이겠지만, 그녀의 지혜와 포부는 무거운 가정사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미 구원이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꿰뚫고 있습니다. 그 부스러기를 얻어낼 수 있다면 강아지인들 어떻고 종인들 어떻겠습니까! 강아지에게도 종에게도 믿음이 있다면, 무한한 주인의 자비가 미치지 않는 대상이 없을 테니까요.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예수님께서 기쁨에 차 탄복하십니다. 첫 계약 당사자들의 불순종과 이방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크게 대조를 이루는지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큰 그림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흡족히 관상하시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의식의 빗장을 꼭꼭 걸어놓은 사이, 구원을 향한 믿음은 이미 혈통적 계보의 담장을 뛰어넘었습니다. 어느 한 민족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구원'은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 실려 온 세상의 대기 안에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멋 옛날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신 구원의 청사진이 차곡차곡 완성을 향해가는 중입니다.

예전에, 카나의 혼인잔치를 표현한 어떤 그림에서 식탁 주변 예수님 아래에 그려진 강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림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야 발견할 수 있는 디테일이었지요. 화가는 천상 혼인잔치를 묘사하면서, 비이스라엘 혈통의 이민족 신분인 우리 모두를 강아지로 그 자리에 새겨 넣은 것 같았습니다. 완성의 때에 천상 혼인잔치에 함께할 수 있다면 종인들 어떠하고 강아지인들 어떠하겠습니까!

이방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신분이나 위치, 소유 등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를 구원에로 이끈다는 확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처한 무겁고 힘겨운 내외적 조건을 뛰어넘어 주님께 겸손하고 담대히 믿음을 고백하고 자비를 간청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라 민족들의 하느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758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