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21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8. 20. 06:31

2020 8 21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구원과 희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라는 표현은, 새로운 신탁 또는 새로운 장을 나타내며, 상징적 표현인 ‘바싹 말라 버린 뼈들’은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구원과 희망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인간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만이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제시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지만, 그 관계의 회복은 온전히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다시 불어넣으시어 말라 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던 창세기를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7 참조).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더 절실한 오늘날에 다시금 그분의 ‘숨’이 우리 안에 불어넣어지고,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내리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를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싼 가격과 간단한 조리법으로 인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주식 겸 간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서 엄청난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라면’입니다. 1인당 기준으로 1년에 70~90개 이상의 라면을 먹으면서 전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은 음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인스턴트 라면은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의 발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 후 미 군정 지배 때의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남아도는 것을 보고 지금의 튀긴 라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미국에 갔다가 사람들이 면을 부숴서 머그잔에 넣고 물을 부어 먹는 것을 보고는 지금의 컵라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면이기에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개발한 모든 라면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라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기 위한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에,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라면이 된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늘 주저합니다. 사랑하고 나면 행복한데, 그전까지 세상의 기준이 내 앞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부조항까지 613개의 율법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계명을 우선하여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탈출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쓰인 말씀들은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지극할 때, 아내의 소망은 작아진다(안톤 체호프).



고통을 피하지 마세요.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있는 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거의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어떨까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절대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고통의 시간은 있습니다.

“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어라.”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상처와 별은 철자 하나 차이입니다. 즉, ‘Scar’와 ‘Star’입니다.

아름다운 진주도 상처의 고통으로 생겨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은 상처의 고통으로 만들어집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고 정리해 주십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율법 교사가 진정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 교사라면 평생을 율법에 대해 가르쳐 온 사람인데도 왜 이것을 모를까요? 십계명에서 613가지의 율법 조항, 그리고 관습법과 전통법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 교사는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면 율법 규정대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율법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율법을 이해하고는 싶었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아 사랑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해하지도 않으려 한 것입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다 이렇습니다. 알게 되어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친구로부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 받았습니다. 몹시 기뻤던 그는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사냥개들은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사냥개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에게 화를 냈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그러자 놀란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사냥개들은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받은 개들입니다.”

 

      자 여기에서 진실을 한 번 찾아봅시다. 알렉산더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성급한 마음인가요?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진실로 숨기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훌륭한 개를 주었을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개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여 그 귀중한 선물을 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가 그런 사람이고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물의 목을 칩니다. 알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닫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고 단순하게 가르칩니다.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아씨시의 친구들과 먹고 놀고 즐기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서 거지의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만이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도 악영향을 미칠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진짜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 미소를 짓고 한 번 안아주고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살짝 엿본 친구는 그제야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기쁘게 안아줍니다.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말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당에 안 나온다고 수없이 설득합니다. 당연히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고마우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을 더 신뢰합니다. 가슴부터 점령해야 머리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더운 여름입니다산보 시간을 앞당겼습니다아침 6시에 물 하나 들고 길을 나섭니다묵주기도를 마치면이어폰을 연결해서 음악을 듣습니다자칫 무료할 수 있는 산보가 음악이 함께하면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여행이 됩니다노래의 제목도 감미롭습니다.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를 들었습니다멀리 다리가 보이고다리 아래에는 바닷물이 반겨줍니다바다와 노래는 더위를 잊게 하고잠시 지난날을 돌아보게 합니다가사도 좋습니다. ‘그대와 나 만약에 사랑을 할 때제가 먼저 사랑할래요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주는 마음도 햇살입니다생각나면 둘러봐요조그만 길모퉁이 찻집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하늘가에 피어나는 무지개 따라 지나버린 그 시절 돌아가고파.’ 오늘은 뉴욕에 온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공항에서 내렸을 때의 느낌은 덥다는 거였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역시 덥습니다작년의 더위가 막연한 걱정과 긴장이 함께한 더위였다면 지금의 더위는 넉넉한 여유와 웃음이 함께하는 더위입니다. 2020년 코로나19와 함께한 날들이지만 내년에는 코로나19도 먼 옛날의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그리고 내 백성아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30일 피정을 할 때입니다학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서 묵상합니다큰 주제는 두개의 깃발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겸손의 3단계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입니다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3주간이 끝나면 오늘의 성서말씀인 에제키엘 37장을 묵상하도록 하였습니다피정을 통해서 지난날의 모습을 새롭게 개선(Reformation)하고개선된 모습으로 변화(Transformation)되고변화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Conformation) 것입니다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30일 피정을 통해서 학생들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나눔의 우산사랑의 우산을 기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성당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많은 분들이 나눔의 우산을 기증해 주셨습니다본당에서 준비한 사랑의 우산을 쓰면서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외로움의 비를슬픔의 비를고통의 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우산을작은 봉사의 우산을희생의 우산을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이웃을 도와주며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1년을 돌아보는 제게 예수님께서는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신발 끈을 다시 매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양승국신부-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역사 안의 여러 인물들이 잘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로 인해 선량한 소시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영화 ‘대부’의 실제 인물이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조폭 두목 알카포네(1899~1947)는 지하 암흑 세계의 일인자로서, 평생토록 도박, 밀주, 매춘, 폭력, 탈세 등등으로 얼룩진 인간 말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실한 납세자였으며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최근 나라 전체, 국민 모두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고 있는 ‘국민 민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남을 죄짓게 만드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는데, 그는 지금 존재 자체로 사람들 입에서 자동으로 욕이 나오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드니, 그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릇된 신념에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 더해지만 백퍼센트 IS라더니, 전광훈이라는 자가 꼭 그꼴입니다. 그런 자의 뒤꽁무니를 깃발 높이 쳐들고 쫓아다니는 분들의 인생 역시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 시대 때도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던 사람들,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이던 사람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번갈아가며 공격했습니다. 때로 합심해서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런 흔적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마태오 복음 22장 34절)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예수님이셨지만 이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공격 앞에 끝까지 대적하시며,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나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릇된 신념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위선적인 삶, 타성에 빠진 신앙, 정성이나 영혼이 사라진 예배,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이중적인 삶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들의 하늘을 찌르는 교만이었습니다. 장황하고, 잘난체 하며, 고리타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경직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화의 대가였습니다. 그 어떤 가르침이든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습니다. 당연히 구름 군중이 몰려왔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시기 질투는 커져만 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616항이나 되는 율법조항들과 알을 까고 새끼를 친 수많은 규정들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시니,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초청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초청장은 유효기간이 있지만 신용장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장 큰 계명 ♣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일이 완성될 날이 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다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선(善)이고, 선을 지향하며, 선의 실현을 위한 노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선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내놓는 일입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5-36)”

여기서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논쟁하려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가 말한 ‘가장 큰 계명’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 계명인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는데,
계명들을 중요도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중요한 계명을 먼저 지키고,
덜 중요한 계명을 지키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무시하겠다는
속마음이 숨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율법 교사는 그 말씀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계명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계명의 근본정신’으로(또는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는 ‘황금률’을 계명의 근본정신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두 해당됩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분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라는 말에서,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모하고 섬기는 일”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는 신앙인의 ‘아가페’뿐만 아니라
세속에서의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을 “모든 것을 바쳤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버린 것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전부를 버렸고, 또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
바오로 사도는 ‘잃었다.’ 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바친’ 것입니다.
쓰레기로 여긴다는 말은,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즉 “주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하려는 것입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하게 되는 계명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용된 말이고, 뜻으로는, “신앙이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이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사랑은 원래 기쁨과 행복의 씨앗입니다.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과정에서 아픔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 아픔마저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당연히 이웃도 사랑합니다.
(두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와 똑같은 자녀이고,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22,34-40: 가장 큰 계명

예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우러러보았다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한다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무리로 그분을 이겨보려고 한다그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예수께서 계명을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스승님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도 그분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고 말씀하신다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는 것이다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둘째 계명으로 입증된다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모든 것 위에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는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하느님-인간-세상 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다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상대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한상우신부-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향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시끄럽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이기에
서로를 살립니다.

사랑은 이웃과
하나되게 합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대답하십니다.

사랑은 먼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에 참된
사랑이 없음을
반성합니다.

요즈음 드러나는
종교인의 행태를
보면 사랑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아픔과
분노로 우리를
슬프게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내가 부서져서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진실한 사랑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에제 37,2)

주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보여 주신 뼈들은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뼈 안에 흐르며 양분을 나르던 윤기 가득한 생명의 힘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마른 뼈들이란 회복의 희망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흉물에 불과합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에제 37,5)

실제로 예언자 앞에서 뼈들이 서로 이어 붙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고 살갗이 덮였습니다. 또 그들 안에 숨이 들어가 제 발로 일어서서 살아 움직입니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한 일이 마른 뼈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7,14)

이 놀라운 광경은, 회복의 가망 없이 처절히 무너진 이스라엘이 다시 생명을 받아 되살아나리라는 당신 계획을 하느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지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4)

마른 뼈들은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대로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언자가 주님께서 예언하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고는 그 실행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그야말로 생생한 증인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효력을 지니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마른 뼈들이 다시 생명을 얻듯이, 이스라엘도 주님의 말씀대로 언젠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하느님 백성의 자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문답이 펼쳐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이 질문은 몰라서 하는 질문도 아니고, 더 깊은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싶어서 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을 시험해 올가미를 씌우려는 기득권자들의 음흉한 모략이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첫째 가는 계명을 물론 여쭙지도 않은 둘째 계명까지 친절히 일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정답을 콕 집어서 맞추신 것일까요? 오늘의 정황과 말씀에 머물러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세하게 곁가지를 치다 못해 덩쿨로 무성히 얽혀 버린 율법 조항들 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뿌리와 줄기를 짚어 주신 것입니다. 그건 그들이 잊어 버렸거나 간과했던 골수와 같은 본질인 것입니다.

정신은 희미해지고 형식이 방만해진 율법 조항들의 무게는 민중에게 과도하고 부담스런 짐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중요한 건 그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세부적 상황도 중요하고 구체성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이 모두는 중심이 되는 근본 원칙에 초점을 맞춘 다음의 문제지요. 그 근본 원칙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고 철저히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지향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영광이나 완벽주의적 성향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결여된 율법주의적 삶은 수분과 양분과 골수가 다 빠져나간, 바싹 마른 뼈와 다를 바 없을 뿐더러, 거기에는 생명력도 온기도 없습니다. 그저 흉물일 따름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짚어 주신 두 계명,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답변은 그 자체로 이미 그들과 우리에게 내리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님은 바싹 말라버린 뼈들처럼 되어버린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회복의 희망 없이 나락에 떨어진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희망을 안겨 주시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 "사랑"이라는 참 명령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오히려 온갖 형식의 잣대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라버린 생명 잃은 뼈처럼 되었다면 주님께서 주시려는 생명의 숨을 힘껏 빨아들여야 살 수 있습니다. 재기할 가망 없이 실패했거나 더 떨어질 수 없이 곤두박질 친 밑바닥이라도 주님 말씀은 우리에게 힘줄을 잇고 살이 오르게 해 주시는 생명의 힘이니까요.

모든 걸 다 잃었어도 사랑하고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 눈에는 실패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견고한 사랑으로, 세상 영혼들과는 애정어린 기도로 단단히 엮여 있으니, 오히려 더 생생히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지럽고 혼란하고 실망스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생기를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윤기 잃은 영혼 안에 사랑의 진액이 되어 흐르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서부터 다시 새 창조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아멘.

 

예배보다 더 중요한 사랑  


-김찬선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오늘 주님의 말씀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요한의 편지가
없었다면 저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고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었을 겁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한때 저는 그리스도교보다는
불교나 도교에 더 빠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뿐이겠습니까?
저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는 말씀과
그러므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가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코로나 감염과 관련하여 일부 개신교계의 대처에
염려하는 마음이 큰데 이것도 저뿐이 아닐 것입니다.
정부의 대면 예배 금지 조처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며 예배 참여를 독려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같은 예배를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과 같은 예배가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생명과 같은 예배보다 생명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느님 사랑입니까?
그리고 이웃 사랑입니까?

예배가 나에게 생명과 같이 중요하고 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해도 됩니까?

예배보다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임을 오늘 주님 말씀을 가지고
확신하고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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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아씨시의 친구들과 먹고 놀고 즐기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서 거지의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만이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도 악영향을 미칠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진짜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 미소를 짓고 한 번 안아주고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살짝 엿본 친구는 그제야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기쁘게 안아줍니다.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말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당에 안 나온다고 수없이 설득합니다. 당연히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고마우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을 더 신뢰합니다. 가슴부터 점령해야 머리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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