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0)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라고 답을 드립니다. 명칭은 각기 다르나 공통점이 있는데,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세상 마지막 날을 예고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 연이어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정답이 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때문에 마음과 마음으로 미소가 번집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들을 영산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말씀도 없이 연꽃 한 송이를 손가락 끝으로 잡은 채 제자들에게 보입니다. 다들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말 없이 스승의 손가락 끝에 들린 꽃만 보는데, 그 가운데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 짓습니다. 그래서 이를 ‘염화미소’라 하고, ‘이심전심’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법을 가섭에게 맡겼는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다고 하여 생긴 말입니다.
그동안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기적을 통하여 그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대답은 가섭의 미소처럼 완벽하였고,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는 가섭이 부처님에게 받은 법처럼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제2독서인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얼마나 큰 것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지키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키엣 대주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제자들은 나름대로 알고 있는 답을 합니다. “세레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라고 합니다”. 모두 하느님의 심판과 세상의 마지막 날을 예언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애매모호하고 맹신적인 믿음이 아닌 그 분의 존재를 정확히 아는 믿음이라야 그 믿음이 다시 세상을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나약한 사람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맨손으로 돌아오는 참혹한 실패를 수없이 경험했고 물위를 걷고 싶었으나 물에 빠지는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졸음을 참지 못해 스승의 죽음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나약함은 고난에 처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 성인의 실패는 어둠과도 밀접합니다. 어두운 밤 그물을 드리웠지만 실패했고 어두운 밤 물위를 걷다 빠졌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잠이 든 것도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 어둠은 바로 고통과 우매함으로 세상을 더듬거리며 헤매고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고 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나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나약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나약한 교회는 성령이 존재할 때만이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미사 중에 가슴을 치며 구하는 용서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위한 곳이기에 소통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 때 상대방의 나약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통은 형제와 이웃 간 서로에게 힘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소통과 겸손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약한 나도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육체를 지배하는 사람에겐 성령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육체가 지시하는 행동들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나 베드로 모두 인간의 나약함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어었습니다. 평생 성실한 삶을 산 모세도 여전히 한 순간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바오로 성인은 언제나 주님께 기도로 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드님’이십니다.
자신의 우매함을 알고 겸손과 소통으로 이웃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나약함을 아는 것이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시작입니다. 나를 비움으로써 성령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베드로 성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지만 그 교회를 지키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저희 교회가 진정한 하느님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교회는 나약한 곳임에도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2. 교회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교회는 사람을 위한 곳입니다. 사람의 교회가 되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국 문이 열려야 세상 문도 열린다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마태 16,13)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헤로데가 로마의 황제 카이사리아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이 도시 중심에 황제의 신전을 높이 세우고 숭배를 강요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시어 산 중턱에 높이 세워진 황제 동상과 그 맞은편에 나란히 서 있는 바알 신상을 바라보시며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누구냐? 사람들은 살아있는 권력,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거나 아니면 물질과 부요의 상징인 바알을 신으로 섬긴다.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내가 누구냐? 너희 인생의 주인은 누구냐?”하고 물어보신 것이다.
요즘 10대들은 미래 희망이 아이돌 스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서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욕망은 10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타고난 본능이다. 그래서 이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황제와 바알 신전에 나아가 숭배하며 청하면 원하는 욕망을 다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신전 앞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시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너에게 누구냐?’
베드로가 앞으로 나와서 말한다.“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택했다.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의 단답형이 아니라 로마 황제나 바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에서 나머지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세상 권력인 황제도, 부의 상징인 바알도 버리고 다만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다.
베드로의 선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는 말씀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할 때 하느님께서 큰 은혜를 주셨다고 알려주신다. 그것은 로마 황제보다, 바알 신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사람의 이성이나 지혜로서는 하기 힘든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고 한다. 이 말은 누구든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은총 속에 사는 특권과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선택해 우리가 받은 천국의 열쇠는 죽은 후에야 혜택을 받은 후불권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혜택의 공식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열쇠로 천국 문이 열려야 세상 문도 열리고 천국 문이 풀려야 세상일도 제대로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우선 믿음의 열쇠로 천국 문을 열어야 한다. 매 순간을 살면서 정말 안 풀리는 일들 때문에 고민이 많다면 눈앞의 우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선택하고 열쇠를 받아 천국 문을 풀면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우선 천국의 문이 풀려야 세상의 문도 풀리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그리스도는 혹독한 현재를 푸는 열쇠
-김혜윤수녀-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지인 한분이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게요, 하면서 사실 현재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와 너무도 길었던 장마, 그리고 기록적인 폭우, 상상하지 못할 만큼 불어난 실업과 실직…. 불안한 몰락을 역력히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부인할 수 없는 요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문제를 ‘묶고 푸는 열쇠’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열쇠를 받은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 열쇠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해결의 주체이신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절정이 되는 부분으로서(마태 16,13-20)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전반부(13-16절)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것으로, 후반부(17-20절)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신원을 알려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가 그리스도론적 고백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교회와 그 영원성에 대하여 “저승의 세력도 …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마태 13,18)이라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 하늘나라의 열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대체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중요한 만큼 난해하기에 오늘 본문 자체가 반영하고 있듯이(“세례자 요한이라고… 엘리야라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여러 답변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모든 신학적 주제의 기조가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서간을 집필하였고, 복음서의 작가들 역시 동일한 주제를 모색하며 복음서를 썼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 논쟁과 공의회 역시 이 질문에 집중하며 사활을 건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토록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질문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3.15) 이에 베드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 해당하며 ‘기름부음 받은 이’를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하여 그에 상응한 절대적 지위와 권한을 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시며 통치자임을 선언하는 내용인데, 여기에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초월적이고 신적인 호칭까지 첨부합니다. 구약시대 내내 이스라엘에게 계시되어 온 야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구현되고 드러났음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에 대하여 품고 있던 이러한 인식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귀한 은총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17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온전히 파악하는 지식은 지성적 능력이나 훌륭한 성품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고백한 베드로는 이제 반대로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신원을 부여받게 됩니다. “시몬 바르요나”(17절,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라고 불리던 베드로는 이제 ‘반석’(그리스어 ‘페트로스’/아람어 ‘케파’)이라는 이름을 받고 ‘반석’ ‘큰 바위’가 의미하는 것처럼 교회의 단단한 기초와 주춧돌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베드로에게 ‘열쇠를 줌’으로써 교회의 모든 것을 ‘매고 푸는’ 권력과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1820년).
■ 다윗 집안의 열쇠
이러한 베드로의 역할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제1독서)를 통해 예시된 것이었습니다.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시종장 세브나가 직권 남용으로 해임되자 엘야킴이 그 직무를 이어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엘야킴에게 “관복”과 “띠”(이사 22,21)를 주시며 세 개의 이미지를 통해 그의 권한과 직무를 알려주시는데, 그 첫 번째는 “백성의 아버지”입니다.(21절) 절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백성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통치가 갖는 내용이며 질서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 집안의 열쇠”로서(22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듯이 엘야킴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윗 집안의 열쇠”를 받습니다. 이는 다윗 왕조를 위한 모든 권한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이미지는 “말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23절) 박는다고 선언하시는데, 이 역시 복음의 ‘반석’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시대에는 은유적 표현 ‘바위’ ‘반석’을 하느님께만 적용시켰기에, 이사야서는 건물의 기초를 표현할 때 ‘말뚝’을 사용한 듯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교회가,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뚝’위에 세워진 천막으로 예표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열쇠를 받았지만 그 교회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듯, 정치는 국가의 수장과 공직자들이 하지만 그들이 구현해야 할 내용은 하늘의 뜻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이에 대한 정직한 감수성 없이 정치인 자신의 신념대로만 조직을 운영할 때 지나친 독선이나 참을 수 없는 무능함으로 모든 이의 상생과 공동선이 위협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독한 생태적 위기 속에 숨죽이며 혼란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의 열쇠는, 전우주의 창조질서와 그 비밀에 대한 직관,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충실함입니다. 혁명이나 개혁은 상대편 진영의 가식과 위선을 무찌르는 인간의 투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완성해 가시는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곳곳의 훼손과 붕괴에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감내하고 있는 우리의 지친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며, 예수님은 오늘도 간절하고도 처연하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영재신부-
세계 4대 성인을 찾아보면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분 인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명언 중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이 말을 접 하고, ‘누가 자기 자신을 모를까?’라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원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나 를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제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전합니 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 로에게 교회의 반석, 기초가 될 것을 약속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선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 원에 맞게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성부의 뜻에 따라 봉헌하셨고, 베드로도 이를 증언하며 교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 봅시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변 본당에서 걱정 이 많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신자들이 많이 줄었다고요! 그러나 저는 희망을 갖습니다. 현재 성당에 열심히 오시는 더 많은 신자분들을 보면서요. 이분들도 코로나19에 대한 위험성을 알고, 집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이라면 당 연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모든 신자분들, 힘내세요.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이미 베드로 사도께서 받으셨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열어주실 겁니다. 파이팅! 참, 절친 중에 주일미사에 안 나오시는 분들께 전화 한 통 해 주세요
내 가슴 속의 주님
-정기원신부-
코로나 때문에 신자들을 만나는 사목적 활동이 줄어들자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어떤 날은 충만한 평화와 위로를 느끼며 주님께 많은 것을 말하지만, 어떤 날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기도 합니다. 사제생활 30년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약하고 부당한 저를 통해 영원하신 분이며 하느 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오심을 믿고 고백해왔으며 그리 고 그 예수님이 바로 차디찬 금속으로 된 감실 안에 머물러 계심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면 “나는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믿고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살아계 신 분으로 믿는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믿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봅니다. 대중가요 중에 ‘가끔씩 하느님께서도 우신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주님으로 느끼 지 않고서는 그런 감성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겪듯이 세월이 갈수록 세상을 떠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그리고 죄송함 이 점점 커집니다. 그리고 요즘은 자주 마음속으로 부모님께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살아계셨 을 때는 전화가 있고 직접 뵐 수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내가 그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에게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 나 이 세상에 있지는 않지만 내가 그를 기억하고 그와 말을 한다면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 여러분! 제가 볼 수 없는 부모님과 자주 대화하며 부모님께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계 심을 느끼듯이,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기 위해서는 주님과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주님과 대화할 때, 그것이 주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내가 믿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15)하고 물으셨듯이 지금 저에게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과거에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겠지만, 지금은 고개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라고 대답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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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있는 갑곶 성지에서는 지난 5월 4일부터 봉안당을 운영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클지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칠 테니, 죽음 이후 자신이 안치될 장소를 찾아서 많은 분이 오십니다. 저희 성지의 장점이라면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특히 매달 돌아가신 분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는 것, 무엇보다 봉안당 장소가 성당에 붙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권 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봉안 시설이어서 그런지 장례가 나면 무조건 저희 성지로 연락이 오고 그래서 거의 매일 안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매일 죽음을 봐야 하고 또 이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봉안함 크기는 가로세로 30cm가 조금 넘습니다.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조그만 공간 안에 유골함에 담겨 안치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 있을 때 떵떵거리며 살았던 사람도 조그만 유골함에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곁에 갈 때 자신이 모은 재산을 1원이라도 가져갈 수가 있을까요? 자신이 누렸던 지위를 하늘나라에서 보장해 달라고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모두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한 여정만이 남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여기에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후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예수님한테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고백을 해야 하며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가장 행복한 삶이 됩니다. 베드로의 칭찬을 우리 역시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헬렌켈러).
힘을 빼는 말에 굴복하지 마세요.
가정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낙심한 어머니 역시 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는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두 떠나는 상황에서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은 뻔해.’라는 생각이 늘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모 집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 기타를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기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모는 너무 기타에만 빠져 있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타만 쳐서 절대로 큰돈 못 번다.”
그러나 아이는 이모의 말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기타를 쳤고, 구성원을 구성해서 시대를 휩쓰는 그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비틀스의 존 레넌입니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 어려워. 그만 포기해.”
이런 사회적 통념에 기가 죽고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힘을 주는 말입니까? 힘을 빼는 말입니까? 무엇보다 힘을 빼는 말에 굴복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전삼용신부-
현대는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창의적인 발상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창의력이 생길까요? 저는 ‘기분’이 창의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한 조증 환자의 사례가 나옵니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의 신경과 의사입니다. 그에게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겔이란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에게 동그라미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늠름하게 “이건 뚜껑이 열린 상자인데요, 그 속에 사과가 하나 들어있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엄청난 상상력이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동그라미 속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아, 이거요. 어떤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네요.”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증이 온 것은 신경을 훼손하는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올리버 색스는 역시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건 동그라미 속에 들어있는 엑스 표네요.”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에게 창의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창의력은 무엇일까요?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일까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발명했다고는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저 당시에 있던 전화기와 아이팟의 화면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창의력은 이미 존재하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아니,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베드로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의력입니다. 남들은 볼 수 없지만, 베드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자신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일까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좋은 기분입니다. 베드로의 창의력, 즉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신 다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분명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네가 깨달은 방식대로 깨닫게 하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본 것이 성령님 때문이지 누구에게 설명을 들어서가 아닌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어야지 설명으로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이러한 사례도 나옵니다. 성악가 출신 P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올리버 색스를 방문할 당시는 음악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습니다. 완벽한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던 P 선생, 그런데 그 일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보이지만, 누가 누구인지 인식 불가하였고 결국 목소리로만 학생을 구분해야만 했습니다.
가끔은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 길을 가던 중학교 학생들이 발견한 P 선생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너희 뭐 하니? 왜 그러니? 여기서 뭐 하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주차 정산기랑 소화전 앞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은 연기 연습하는 것이라고 하며 농담으로 간신히 넘어갑니다.
P 선생은 당뇨병으로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원인인 줄 알고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과에서는 눈의 질환이 아닌 것 같다고 신경 전문의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P 선생의 반사 반응 검사를 한 올리버 색스가 이제 신발을 신으라고 했을 때, P 선생은 자신의 발을 신발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P 선생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고 함께 온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멈추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고 그때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이지만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가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 전부라고 생각하고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질병의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물론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가끔 일어나는 익살스러운 실수를 빼고는.
행복하면 보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며 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먼저 성령을 주려고 해야지 지식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대더라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그분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성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학교를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신부님은 성당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것이 옳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보이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종교들이 세상에 해악을 입히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성당은 크게 지으면서 성당 옆에 있는 가난한 이들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훨씬 먼저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는 복제를 하지 못하지만 숙주가 되는 생명에서는 세포 속으로 들어가 복제를 한다고 합니다. ‘스페인 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바이러스는 변이가 생기고, 변이 중에는 인간의 몸에 큰 피해를 주는 바이러스가 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가 인간에서 동물로 옮겨지는 과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류가 양, 소, 돼지, 닭, 말, 개와 같이 가축을 기르면서입니다. 이런 동물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바이러스는 백신도 있고, 치료제도 있어서 어느 정도 예방도 가능하고,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야생동물을 먹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도 하고, 서식지를 잃어버린 박쥐와 같은 동물이 인간과 가까이 있는 가축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전파되기도 합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그 원인이 가축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야생동물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 있다고 합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70억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에 모여 사는 것도 바이러스에게는 복제를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된다고 합니다. 원인을 알았으면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약을 만드는 것은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습니다. 엄청난 경제적인 피해와 희생자가 나온 뒤에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RNA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변이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백신과 치료제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미연에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다른 생명도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듯이 발전과 개발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명상과 성찰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봉쇄와 단절만으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여권 없이도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정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피해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연대와 협력으로 바이러스를 검사하고, 추적하고, 치료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한국은 국제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따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잘 지킨 나라는 피해자도 적었고, 확진자도 적었고, 확산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 왔을 때입니다.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운전면허증’입니다.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운전을 했지만 뉴욕에서는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필기시험이고 다음은 실기시험입니다. 필기시험을 위해서 예상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한국과 뉴욕은 교통법규도 다른 점이 있고, 신호체계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필기시험은 합격했고, 임시 운전면허증이 나왔습니다. 실기시험 당일에 1시간 정도 실습을 받았습니다.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고 사제인 제게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긴장되고 떨리던 마음이 진정되었고, 실기시험도 통과하였습니다. 몇 주 뒤에 5년 동안 미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면허증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운전을 오래했어도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면허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답변을 하였습니다. 누가 가장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필기시험에는 만점을 받는 답변이었습니다. 실기시험에서도 만점을 받는 실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이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운전면허증 대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고백성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는지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요?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양승국신부-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눈코뜰새 없이 분주하셨던 예수님께서 적막하기 그지없는 요르단 강 상류 헤르몬 산 아래 위치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달하시자, 고요함 속에서 당신 제자들을 향해 결정적인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복음 16장 15절)
제자단을 대표해서 수제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을 하는데, 그 대답이 예수님 마음에 쏙 드는, 기다리시던 대답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간략하고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인류 역사에 대대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위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 유다 회당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로, 이스라엘 한 민족의 소명에서 온 세상 만민의 소명에로 넘어가는 대전환이 이루어진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기초로 당신의 교회를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나약하기 그지 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오직 주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으로 인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길 안에 머무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날 교회 및 사회 지도자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송영진신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 라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 부활 후에 토마스 사도가 하게 됩니다(요한 20,2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라는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 나옵니다.
이 증언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이름밖에 없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버리고 ‘예수’ 라는 이름만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야훼’와 ‘예수’ 라는 이름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라는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사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깨닫게 되다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겪은 후에 마침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깨달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머리글에 있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라는 선언은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3-16).”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더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으신 것은 아니고,
이 질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는
제자들의 대답은 당시의 소문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분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믿고 있느냐?” 라는 뜻인데, 몰라서 하신 질문은 아니고,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41),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은 것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고 말했습니다(마태 8,27).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하면서 차츰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말은,
“저희는 스승님께서 야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똑같은 신성과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너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신앙생활로 발전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복이나 비는 생활에서 멈추어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아닌,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궁극적인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축복하시면서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은(마태 16,17), 그의 신앙이 올바른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고,
그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앞으로 전체 교회가(모든 신앙인이)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마태 16,20), 당신의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인데(마태 17,9), 예수님은 그냥 구세주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구세주이고, 또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이에 따른 교회 전체에 대한 특별 ‘권한’이 주어지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총괄하는 듯한 장중한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메시아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교회가 이제 존속하기 위해서는 봉사와 직무는 베드로 안에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독서에는 권한의 이양에 대한 개념이 많이 들어있다. 그 중에도 ‘열쇠’라는 개념은 더 높은 사람에게서 받은 충만한 권한을 말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회’라고 하는 당신의 ‘집’의 책임자로 세우신다는 의미로 베드로에게 그 의미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 마태16,13-20: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론적' 관점 외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에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는 것보다도 사도들이 당신의 '신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질문이다. '사람들'의 말은 당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한다.
오늘 복음의 고백은 다른 두 공관복음의 고백과는 다르다. 다른 두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만 고백하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도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를 통해서 더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 ‘믿는다는 것’은 순전히 이성의 힘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지성을 넘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그러나 이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항구히 바쳐져야 할 ‘봉사’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론적 내용이 교회론적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비록 나약하지만 큰 책임을 맡기겠다고 선언하신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를 당신 교회를 세울 주춧돌로 삼으신다. 주춧돌의 역할이 주춧돌만이 아니라, 결합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역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항상 새로이 제시하고 해석해줌으로써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18절) 라고 하시면서도 “세울 것이다.”(18절), “열쇠를 주겠다.”(19절) 라고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의 ‘봉사적 역할’이 영속적으로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베드로와 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이 교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다.
이러므로 인간의 구원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이 이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 믿음은 이제 여러 문화적 상황들과 접하면서 거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주 대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은 랍비적 형태의 표현으로 일정한 행동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권위 있게 선언하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표현은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권한 내지 받아들여 주는 권한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받은 권한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신비’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 주신다.
오직 믿음만이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해 준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베드로의 신앙 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베드로라는 주춧돌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한상우신부-
힘이 들때
예수님을 찾는다.
힘이 듭니다.
그분은 나를 그냥
받아들이신다.
그냥 함께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헤맬 때
예수님을 찾는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분은 길을 잃은
나를 기다려주신다.
뜨겁게 기다려주시는
기다림이시다.
아플 때
예수님을 찾는다.
많이 아픕니다.
그분은 실컷 울고
있는 나를 따뜻이
안아주신다.
그분은 아픔을
껴안아주시는
아픔이시다.
수도 공동체가 싫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예수님을 찾는다.
떠나고 싶습니다.
그분은 비겁한 나를
이해한다 말씀하시며
당신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신다.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첫마음의 주님이시다.
화가날 때
예수님을 찾는다.
화가 나 죽겠습니다.
그분은 화가 난
나의 분노를 끝까지
귀기울여 들어주신다.
그분은 작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내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마음의 참된 치유자시다.
닫힌 문을 여시듯
마음을 여시고
관계를 여시고
용서를 여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주님을 알기에
힘들어도
희망하고
희망하기에 다시
감사할 수 있게
하시는 감사의
주님이시다.
끄집어 내시고
일으켜세우시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가을은 더욱
알찰 것이다.
모든 계절의
주님이시며
아픔을 통해
성장을 이루시는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은 제삶의
빛이며 어둠이며
갈망이며 열정이며
기도이며 오늘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저를
사랑하게 하시는
벌거벗은 가난한
주님이십니다.
함께 징검다리를
건너고 함께
새로운 고개를
넘게하시는
새로움이십니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교회
새로운 계획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럼 당신과 함께 지내는 제자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제자들이 숙고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큰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되지요.
사람은 육적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감각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있기도 하고, 어떤 경로인지 인과 관계는 모호하나 영으로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영의 사정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야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 욕심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가 행복한 이유는 그가 자기 생각이나 견해로, 즉 살과 피로 주님의 신원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영감과 사랑으로 답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알려 주시는 바에 순종하여 그 자신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된 덕분이지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생각과 마음은 늘 우리를 앞서 가시면서 모든 것을 통찰하고 이끄시니 그 섭리에 영과 육을 내어 맡기고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됩니다. 우리 쪽에서 감히 그 지식과 지혜를 탐할 수는 없고, 제 것을 섞거나 마치 제 것인 양 표절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포한 베드로를 "반석"이라 칭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십니다. 반석과 열쇠의 의미는 오늘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 22,22-23)
사실 신탁은 대개 예언자나 임금에게 내리는데, 이 대목은 시종장 세브나를 대신해 앞으로 궁궐을 관리하게 될 엘야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주시겠다는 "열쇠"는 다윗의 집안(왕실)을 관리하는 직책을, 그가 굳건히 딛게 될 "말뚝처럼 단단한 곳"은 "반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는 엘야킴의 그것을 초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열쇠"로 다윗 집안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에 세워질 주님의 교회를 관리하게 될 것이니까요 또 결국 엘야킴의 집안도 패망하여 "단단한 곳"에서 떨어져 나갈 터이지만(이사 22,41 참조) 주님께서 기초로 놓아 주신 반석은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높이 계셔 낮은 이를 굽어보시고,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알아보시나이다."(화답송)·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분와 지혜와 지식은 완전하고 한계가 없으니까요. 우리의 얕은 꾀나 속셈, 야망과 탐욕도 한눈에 살펴 아십니다. 아시면서도 그저 쯧쯧... 안타까워 하시면서 모르는 체 참아주고 계시는 것뿐이지요. 우리 한계도 아시고 가능성도 아시니 유예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 어리석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당신께서 채워주시면 되니까요. 그러니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머무르고 새기고 나누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앎에 자기 영광을 섞으면 오염되어 버리니 조심해야 하지요.
우리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앎'도 '소유'도 '관계'도 '소명'도 주님께서 주시는 만큼 감사히 받아 기쁘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살과 피의 차원을 넘어 사랑이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보내시는 주님의 이 격려에 힘 입어 오늘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는 그것으로, 그만큼 행복합니다.
혼자 풀지 않고 같이 푸는 것
-김찬선신부-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오늘 복음은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마태오복음 외에 다른 복음에는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그 내용에도 사실 논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정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가 주님께서는 당신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주장하지요.
주님은 당신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려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베드로의 수위권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오늘 복음을 갖고 베드로 곧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다른 종교들은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지요.
셋째는 고백성사 건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겼다는 말씀에서 가톨릭은
고백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죄를 사해주면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주장을 하지만
개신교는 하느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되지
왜 굳이 성사를 통하고 사제를 통하느냐며 반대하지요.
그런데 오늘 연중 21주일은 베드로의 하늘나라 열쇠의 권한,
그러니까 죄를 묶고 푸는 권한이 주제이기에 이 얘기에 집중하겠습니다.
첫째 독서에서도 엘야킴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권한이 하느님에게만 있음은 개신교나 가톨릭 모두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을 그러니까
위임하셨다는 걸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고
이에 사람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까?
이들의 말처럼 사실 용서란 하느님 한 분이 하시는 거지만 가톨릭의 주장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통해 오시듯이
죄의 용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시고 사제들을 통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핏줄이 대동맥, 소동맥, 모세혈관으로 다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가톨릭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지만 성인들의 전구를 통해서도 전달된다고 하는데
이 통공의 교리/'통하여' 교리가 죄의 용서, 고백성사에도 해당된다는 거지요.
통공과 '통하여'의 교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1대1로만 만나지 않고
집합으로 만나고 교회의 일원으로도 만난다는 교리이고,
프란치스코는 더 나아가 다른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 가고,
다른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도 사실은 베드로 개인의 용서가 아니라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의 용서를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은 오늘 16장의 복음에 이어진 18장의 복음에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베드로 혼자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푸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톨릭교회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 믿음을 믿듯이 교회의 믿음을 우리는 믿는 것이고, 교회의 용서를
우리가 받는 것임을 마태오복음은 얘기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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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이 육체를 지배하는 사람에겐 성령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육체가 지시하는 행동들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나 베드로 모두 인간의 나약함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어었습니다. 평생 성실한 삶을 산 모세도 여전히 한 순간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바오로 성인은 언제나 주님께 기도로 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드님’이십니다.
자신의 우매함을 알고 겸손과 소통으로 이웃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나약함을 아는 것이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시작입니다. 나를 비움으로써 성령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키엣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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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받은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 열쇠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해결의 주체이신 것입니다.
-김혜윤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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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오직 주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으로 인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길 안에 머무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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