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Margaret K 2020. 8. 1. 05:21

2020 8 2일 연중 제18주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마태오 14,13-2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우리 전통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상차림입니다. 밥과 반찬을 주로 하여 격식을 갖추어 내는 상차림은 상을 받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그 이름이 달랐습니다. 아랫사람에게는 밥상, 어른에게는 진지상, 임금에게는 수라상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먹는 사람 수에 따라서 혼자 먹는 밥상을 외상 또는 독상, 두 사람이 먹는 밥상은 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외상으로 차려진 반상에는 삼 첩, 오 첩, 칠 첩, 구 첩, 십이 첩이 있는데, 당연히 임금의 수라상에는 십이 첩이 올려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세상을 구원하실 임금이시니 십이 첩은 기본이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가장 간결한 차림으로 평민이 먹었다는 삼 첩 반상보다 빈약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과와 제자들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모두를 배불리 먹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풍성히 남았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 먹었고, 남은 것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기꺼이 내놓음은 물론 분배자로서도 봉사합니다.

임금의 생일로 십이 첩 수라상에 궁중 연회까지 더해진 헤로데의 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이 죽으면서 그의 잘린 목이 쟁반에 담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한 밥상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배고픈 백성을 향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생명이 넘치는 풍성함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빵의 기적은 단순히 식사를 나누는 인간적 체험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려는 하느님 백성의 희망과 연결됩니다.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당신의 사랑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이웃과의 연대는 나눔과 책임입니다.

-키엣대주교-

 

연대의 시작은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가난, 굶주림에 시달리는 군중들이 애처로왔습니다. 그들은 그저 병을 치료하고 허기를 채우고 위안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 뿐입니다.

나와 이웃은 비록 남이지만 세상이라는 한 배를 타고 가는 형제와 같은 연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배불리 먹는 동안 누군가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행따라 옷을 바꿔입는 사람 때문에 저 사람들은 헐벗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관심이 부족하여 저 아이들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어른으로서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저 아이들이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내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 또한 나의 잘못입니다.

연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스승과 같이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들을 보았지만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오천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들을 돌려보내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고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아무런 대책없이 돌려보낸다는 것은 이웃과의 연대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들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은 허기진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웃의 고통을 느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정한 측은지심은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연대라는 것은 자기가 맡은 책임을 스스로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때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으려면 몇 개의 떡이 필요한지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큰 숫자는 현실성이 없을뿐더러 두려움만 더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식사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참으로 소박한 식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눔은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함으로써 그 일에 기여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함께하는 연대입니다. 연대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일을 스스로 하고 책임짐으로써 그 일을 같이 완수하는 것입니다.

연대라는 것은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 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심으로써 그 빵과 물고기를 영적인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직접 군중들에게 그 양식을 건네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셨고 제자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주는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나눔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보았습니다. 과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빵이고 나눔의 물고기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랑과 관심의 연대가 이루어졌기에 적은 양식이 풍부해졌고 오천여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조금씩만 나눈다면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 될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만 내 자리를 양보한다면 세상은 모든 사람이 앉기에 충분한 자리가 될 것이고 따뜻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함께 책임을 져야함을 알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열어 이웃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면 줄수록 많아진다’고 합니다. 경험해 보았습니까?

2. 이웃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3. 많은 것을 소비할 때 나보다 가난한 이웃들은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가진 것을 다 팔아

-임상만신부-


한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가 아주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너무 기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 유다인들은 대체로 귀한 보물을 땅속에 깊게 묻어두었는데 전쟁이 많다 보니 전사하거나 포로 혹은 피난 생활 후에 영구 귀가하지 못하는 경우로 인해 이 보물들이 다른 농부에 의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보물은 율법에 따라 현재의 땅 주인 소유물이기에 발견한 사람은 먼저 그 밭을 사야만 합법적으로 보물을 취득할 수 있었다.

공자는 「논어」를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는 ‘배우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學而詩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배움으로 얻은 것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기쁨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발견하는 기쁨’이다. 발견하는 것이 배워서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비약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능력으로 배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기쁨은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참 진리와 보물인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없이 결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는 발견의 기쁨은 우리 인생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이시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보물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일상 속에서 엄청난 가치의 보물을 발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즉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일궈온 기존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래서 농부는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팔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우리도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부로서 가장 소중한 배를 버렸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한다.(필리 3,8) 이 같은 헌신을 통해 비로소 그들이 발견한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밭’인 교회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을 얻을 수 있도록 농부의 지혜로운 삶을 구해야 하겠다. 우선 교회에서 주님을 발견하여 온전히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지혜, 우리가 만난 주님을 소유할 수 있도록 자기 소유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깨닫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게 해 주셨으니 내 소유를 다 팔아 이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겠다는 고백보다 더 좋은 지혜로운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

 

사랑은 환대입니다.

-김창선신부-

 

연중 제18주일의 말씀은 우리를 주님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니 생기 돋아납니다.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성사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주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그 신비는 하늘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는 교회를 통해 드러납니다. 교회는 말씀의 씨앗이 자라 사랑과 정의의 열매를 맺고 하늘의 평화를 누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의 모습을 전한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가 알리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목마른 사람, 가난한 자, 고생하는 이들도 주님의 식탁에 무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변치 않는 자애’이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좋은 음식을 즐기는 ‘지혜의 잔치’이며, 살아계신 주님과 맺는 ‘계약의 잔치’(이사 55,2-3; 잠언 9,5-6; 2 사무 7장)입니다.

잔치를 베푸신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십니다.” 제때에 먹을 양식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손길, 가시는 길마다 의롭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신 주님의 자애에 감사드립니다(시편 145, 화답송).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밝히듯이 사랑의 힘은 강합니다. 사도께서 선교여행을 통해 체험한 환난, 역경, 박해, 가난, 파선을 포함한 온갖 위험을 극복한 힘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성사를 통해 지금도 계속됩니다. 삶과 죽음, 천사와 사탄, 현세와 내세, 천상과 지하의 어떤 피조물의 세력도 이 사랑에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요한 4,16).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발견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구원의 희망은 굳건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삶의 현실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신앙의 걸림돌마저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람베르트 롬바르트의 ‘오병이어의 기적’.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가져온 헤로데의 생일잔치(마태 14,3-12)와 갈릴래아 연안의 외딴곳에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사건(마태 14,13-21)을 대조시킵니다. 헤로데 잔치는 궁중에서 사전에 계획된 잔치로 교만의 분위기에서 요한의 죽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주님은 외딴곳 풀밭에 몰려든 군중을 따뜻이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사건은 네 복음 모두 자세히 전하는 주님 기적으로는 유일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외딴곳(벳사이다, 루카9,10)으로 물러가십니다. 여러 고을에서 소문을 듣고 육로로 모인 군중을 보신 주님은 연민의 정을 보이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 각자 사서 먹도록 건의를 드리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가진 것이라곤 어린이가 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 6,9)뿐인데 말입니다.

군중을 풀밭에 자리를 잡게 하신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봉헌물이지만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오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은 뒤, 제자들이 남은 빵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할 정도로 충만했습니다(마태 14,19-20).

빵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주시는 모습은 마지막 만찬의 정취(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1코린 11,23)입니다. 이 빵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일(탈출 16장)을 연상시킵니다. 이는 바로 성찬례의 예표이고, 하늘나라의 마지막 잔칫상(마태 8,11; 26,29)입니다.

미사성제에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특권을 누립니다. 성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놓으신 사랑의 환대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친교로 ‘한마음 한 몸’이 된 우리는 가슴에 사랑의 불꽃을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는 주님의 크신 사랑에 보잘것없는 사랑으로 보답하면서도 영적 기쁨을 누립니다. 가난과 질병, 불의와 재난에 희생된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한둘이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서로 밥이 되어주십시오” “나눔은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기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렵니다.”(요한 6,27) 축제의 날인 주일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하신 주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삶의 현장에 나아갑니다.

 

행복에 이르는 비밀

-최일호신부-

 

 몇년 전(2014년 8월 2일) 모 중앙 일간지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복 십계명이라는 제목으로, 행복에 이르는 비밀 열 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중에 세 가지 계명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 “다른 이의 믿음을 존중하고 개종시키려 들지 말자. 교회의 성장은 개종 시도가 아니라 매혹시킴을 통해 가능한 것” 이라며 나는 당신을 설복시키기 위해 말한다는 태도야말로 최악의 종교적 태도라고 지적하셨습니 다. 그러시면서 2) “마음을 타인에게 열자. 마음을 닫는 순간 자기중심적으로 되며, 고인 물은 썩는다.”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교황님은 3) “삶에 여유를 두자” 소비주의가 불안과 스트레스를 초래하고 건강한 여가 문 화를 앗아갔습니다. 일하느라 아이들과 놀 시간을 갖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반드시 시간을 내야 한다고 했 으며,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자, 식사 때에는 꼭 TV를 끄고 대화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오래전 개신교의 한 선교회에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떠들썩했던 “휴거”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간혹 시내 번화가를 걷다 보면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예수 천당, 불 신 지옥” 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것이 목격됩니다. 이렇듯이 종말이 온다거나, 예수 천당이니 하는 이런 주 장에는 자기네들 종교만 옳고, 타 종교는 다 악마의 소산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개종 중 심의 선교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이기주의적 사고방 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천당, 예수를 모르면 지옥 간다느니 이런 신성 모독이 또 어디 있겠 는가 말입니다. “왜 사랑의 하느님을 돌팔이 잡신으로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비 무당으로 만드는 것 인지 모르겠다.” 라고 어느 개신교 목사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는데, 그 체험이 얼 마나 강했는지 오늘 2독서에서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환란,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또 세속의 그 어떠한 영광도 미래에 올 영광도 하느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빵을 먹었다는 기적을 듣습니다. 이는 빵으로 배불리 먹은 것도 먹은 것이지만, 단지 빵 만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으로 배를 가득 채웠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TV 광고에 “음식이 맛있어, 뭘 넣었길래” 라고 했더니, “정성” 이라고 하였는데,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배를 가 득 채우는 양식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사랑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신앙인입 니다. 즉, 그 사랑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신문지상을 통해 교황님께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바로 그것이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의 비밀은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피력하셨습니다. 막연하게 사랑, 사랑 운운하지 말고 확고한 믿 음을 갖고 구체적으로 교황님께서 제시하신 것들을 실천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멘.

 

빵의 기적, 영원한 생명에의 초대

-정순택주교-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 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입니 다. 이 ‘굶주리고 가엾은 군중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 는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서 지치고 굶주리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만나와 메추라 기로 먹이신 체험을 떠올리게도 하며, 또한 종말에 있을 영 원한 천상 잔치의 예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 ‘성찬례’의 예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 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동작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이 표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만찬에서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사용하시는 것과 같은 단 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빵의 기적 이야기가 성찬례의 예표 로 드러나게 해 줍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을 1독서, 2독서와 연결해서 읽어 보면, 특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초대(1독서)에로 초점이 맞추 어지며, 그 영원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2독서; ‘예수님에게 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오늘 1독서(이사야 55장)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 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 은 소위 ‘제2 이사야서’의 끝부분으로서 바빌론 유배 말기 에 쓰여진 부분입니다. 유배라는 쓰디쓴 역경 중에 있는 당 신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계약’에로 부르시고 ‘영 원한 생명’(‘너희가 살리라.’) 에로 초대하십니다. 어찌 보면, 세 상살이의 고단한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 느냐?” 결국은 다 지나가고 말, 썩고 마는 세상 것들, “양식 도 못 되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세상 것들이 아니라, 하느 님께서 직접 주시는 “좋은 것”, “기름진 음식” 곧 ‘영원한 구 원’을 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지나가고 말 세상적 인 가치들에 어리석게도 연연하고 있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의 2독서는 우리가 현재 통과하고 있는 여러 난관들과 역경들이 쓰리고 힘들지라도, 결국 십자가 에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 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을만큼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늘 우리와 함께 있 음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용 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이 오늘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의 나라’를 건 설하라고, 오늘도 당신의 성체로 우리를 배불리시며, 우리 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미사 때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부터 가지?”

혼잣말이라고 했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듣고 키득키득 웃습니다. 신부님도 이 말을 들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강론했습니다. 강론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말로만 말고, 하느님 나라가 왜 좋은지 증명해 보세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할머니! 올해 돌아가신 친구분인 마리아 할머니, 또 데레사 할머니 기억나시죠? 그 나라가 얼마나 좋으면 안 돌아오고 계시겠어요?”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절대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 사람은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를 압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의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눈이 뜨이지 않아서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듯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외딴곳에서 세상을 배불리 먹일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주님은 시간에 매인 분이 아니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유심히 보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늘 눈을 하느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우리가 묵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전해줍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바로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39 참조).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삶은 용기에 비례해 확장되거나 축소된다(아나이스 린).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한 부인이 신부님께 묻습니다.

“제 남편은 지독한 골초에 엄청난 주정뱅이예요. 그런데도 이 인간이 성당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녀요. 과연 이런 인간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모든 면에 있어서 세속적인 남편의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당만 열심히 다닌다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네요.

“모르긴 해도, 빨리 갈 것 같습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하니 건강에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갈 것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가고 싶다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피하면서, 건강하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 감사와 사랑의 봉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기적을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동네에서도 여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와 대화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로 심히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제 복음 묵상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말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제가 수천 명의 신자분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에 부끄럽지만, 그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힘입니다.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창백한 소년이 꽃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쁜 꽃들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토비’라고 밝힌 후 “앞으로 60년간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할 꽃다발을 미리 주문하고 싶어요. 엄마 생일이 9월 22일이에요. 매년 이날 배달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토비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던 여주인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했고 “30달러면 충분해.”라고 말한 뒤 토비를 돌려보냈습니다.

      두 달 후 토비와의 약속을 기억한 여성은 토비 엄마의 생일인 9월 22일에 꽃다발을 안고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꽃을 든 여성에게 “누구세요?”라고 묻는 소년의 엄마에게 “이 꽃은 토비가 당신을 위해 주문한 꽃이에요. 생일 축하해요.”라며 꽃을 건넸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란 토비의 엄마는 “제 아들이 저를 위해 주문을 했다구요? 정말이에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꽃집 여성은 “토비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며 60년간 매년 꽃다발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비의 엄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투병 중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전에 한번 생일날 꽃을 선물 받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했더니 앞으로 매년 꽃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했었어요.”

[참조: ‘(감동 실화)60년 동안 매년 엄마 생일에’, 유튜브 채널 ‘공감픽’]

      토비가 가진 것은 ‘30달러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서 30달러는 빵 5개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숫자 ‘5’는 인간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5가지 감각’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몸’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말씀과 성령’, 혹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끌어내는 것은 ‘감사’이고,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토비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꽃집 주인도 자비로운 분이라는 믿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작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수천, 수만 배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봉헌하지 못합니다. 그 작은 것을 지키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치며 더 많이 부풀려 달라는 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토비가 60년간 어머니에게 꽃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30달러와 어머니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톨릭신자로 유명 유튜버이며 작가인 ‘김새해 잔다르크’씨가 있습니다. 첫아기를 낳자마자 거의 회복될 수 없이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서 1년 이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랑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생각해서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으로 계속 되뇐 것입니다. 감사할 것도,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되뇌다 보니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왕성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해주셨습니다. 기적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하면 누구나 기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할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겠다는 사랑의 마음만 첨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진 것을 봉헌해 드리면 됩니다.

 

-조재형신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라면 내가 꿈꾸는 곳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합니다컴퓨터의 게임이 비슷합니다내가 있는 곳과 내가 꿈꾸는 곳이 공존하는 곳을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라고 합니다영화관에서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화면 안의 동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것을 혼합현실(Mixed or Merged Reality)이라고 합니다흔히들 4D 영화라고 합니다영화를 보면서 향기와 촉감을 느끼게 됩니다영화에서 비가 내리면 현실에서도 비를 맞고영화에서 장미향이 나면 현실에서도 장미향이 납니다.

 

혼합현실과 네트워크가 연결되면 원격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공존현실(Coexistent Reality)이 된다고 합니다달나라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갈 수도 있고히말라야 산맥을 오를 수도 있습니다현실의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이는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쇼핑이나 운전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이것이 발전하면 천국현실(Heaven Reality)도 체험할 수 있고지옥현실(Hell Reality)도 체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돌아가신 분들을 만나는 체험도 하고성인들을 만나는 체험도 한다면 실제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가치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박해시대에도 없었던 미사 중단이 있었습니다사제들도교우들도 당황했습니다공동체 미사가 재개될 때까지 영상을 통한 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많은 분들이 본당 홈페이지를 통해서평화방송을 통해서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교황청에서도 성삼일 전례를 방송으로만 하였습니다주님의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젊은 신부님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성경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문제를 푸는 학생들에게는 피자를 배달시켜 주었습니다첫영성체 교리를 줌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하는 수녀님도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에 본당 신자들과 소통한 사제도 있습니다매일 전 신자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문자를 보냈습니다나중에 미사가 재개 되었을 때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동체 미사에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조금 늦게 공동체 미사가 재개된 뉴욕입니다비록 마스크를 쓰고성가도 없이 미사에 함께 했지만 성당에 온 교우들을 통해서 신앙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힘을 얻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가상현실증강현실혼합현실과 같았을지 모릅니다현실의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도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도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도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증강현실도 아니고혼합현실도 아니었습니다우리가 믿고따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나라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했고,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데,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은 보살피고 돌보는 이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양들이고,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양들이고,
이리 떼가 공격하면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양들입니다.
그 당시의 군중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와 신앙 없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만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하셨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주신 일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적인 배부름을 체험했을 것이고,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5-17).”

아마도 예수님도 군중도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을 말하지 않고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는 제자들의 말은,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인데, 무엇인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의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고,
군중이 오천 명 이상이었으니 그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고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면서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1) 만일에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식량은 아무도 독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 어디선가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선가는 식량이 남아도는 곳이 있고,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 상황은 분명히 부유한 나라들의 죄악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놓는 곳이 아닙니다.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부유하게 살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 의무만 있습니다.>

2)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한다고 포기하면 그만인가?
그럴 때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해결책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실지, 그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상황만 말씀드리면 되고, 해결 방법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루카 1,37).
<교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마태 14,19-20).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실제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시키시는데,
지시만 내리고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리신 다음에는
우리가 그 지시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 테니” 라는 말씀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생색 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는 원칙은
항상 지켜져야 합니다.>

빵의 기적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에서 음식’, ‘잔치’, ‘’, 그리고 물고기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징적 표징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그 사랑을 저버리지만 않으면 절대로 거두어지지 않는다.

 

1독서이사 55,1-3: 나의 말을 들어라맛좋은 음식을 먹으리라

1독서는 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들음과 귀 기울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계약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실성을 전제로 한다즉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잔치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잔치이다때문에우리가 말씀의 식탁’(계시 21)을 먼저 갖지 않는다면 성찬의 식탁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마태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말씀의 능력을 마태오는 빵의 기적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마태오는 그 기적이 외딴곳에서 일어났다(13)고 하면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5)라고 청하고 있다이렇게 말한 것은마태오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며 만나를 먹게 한 기적(탈출 16)보다 더 위대한 기적으로 백성을 배를 불리시는 새로운 모세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동참하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14)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이 가엾은이란 사람들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좌절의 상태에까지 확대한다(마르 6,34 참조). 빵의 기적도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궁핍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나타난다그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사랑으로 이해한 행위의 결과이다. “오천 명가량 되는”(21사람들은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허기지고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가까운 마을로 보내 먹을거리를 사게”(15예수께 말씀을 드리지만예수께서는 그들의 허기를 걱정하시고 특히 연약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신다(마태 15,32 참조). 그러므로 기적은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동참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기적은 함께 나누는’ 데서 일어난다즉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17)는 적은 것이고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함께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물론 기적을 이룬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지만그 기적은 나누려고 했던 마음 자세가 더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16-18).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누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주신다이렇게 하느님은 항상 우리 인간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16~18.)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가지셨던 가엾음을 가질 수 있다면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20-21). 남은 조각 열두 광주리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보상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 안에 들어가셨지만사도들과 또 그들의 사도직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계속 함께하실 것이다사도적 봉사란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베풀어주셨던 그 선물을 베풀어주는 것이다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몸과 피로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이 기적의 잔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정말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왕국이 될 것이다주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시대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만 것을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마음과 또한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이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주실 것이다이러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물질적인 음식보다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양식으로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항상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살면서 하나가 되어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여기서 거행하는 성체성사가 진정 우리가 모두 누려야 하는 진정한 사랑의 잔치이며우리에게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사랑으로 하느님 안에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로마 8,35.37)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에 장애가 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우리 자신이 언제나 주님 안에 살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한상우신부-

매순간이
사랑과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나눌 수 있기에
생명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존재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기쁨을 살아가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기심을
벗어나게 하는
사랑의 빵입니다.

사랑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낌없이
내어주기에
아름답습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빵이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
절실한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이
되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빵이 될 순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빵이 되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일상이며
일상의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예수님같이
기쁘게
주십시오.

사랑은
빵이 되는
기쁨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는 생명의 양식 이야기입니다.
 

"돈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와서 먹으라'는 주님의 초대가 울려퍼집니다. 대상은 목마르고 허기진, 가난한 이들입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어 궁핍한 이들뿐만 아니라, 아무리 소유하고 누려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까지도 포함된 초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이번에 주님께서 주실 양식은 입이 아니라 귀로 "먹는" 음식입니다. 바로 말씀이지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마태 4,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과연 그분께 다가가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따르는 이는 살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영적 육적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아무리 제 힘, 제 능력으로 땀흘려 벌었다고 큰소리 친다 해도 원천은 하느님이시지요. 당신 자녀들을 먹여 살리시는 하느님 마음의 동기는 바로 "가엾은 마음"(마태 14,14)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 마음을 지니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분"(화답송)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기의 뱃속 사정을 헤아리는 엄마처럼 섬세하고 자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고 계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군중을 보내어 스스로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의 말에 예수님이 단호히 답하십니다. 너희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우리"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군중을 먹이시려고 마음을 정하셨으니 제자들만 돌아서면 될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20).

이사야서의 주님 초대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목말라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들은 치유도 받고 배도 채우게 됩니다. 따뜻한 사랑과 돌봄에 영혼의 원기가 되살아나고, 식민지 백성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피폐해진 인간의 존엄성도 회복하지요. 군중이 충만해질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예수님은 하느님의 연민,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우리에게까지 와닿으셨습니다. 우리는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를 응시하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마음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배불리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으니 우리가 충만히 채운 바를 나누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으니, 연민의 사랑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기적으로 흘러나가길 소망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지만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고 흡족한 오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용서의 축제인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지냅니다. 저희 수도회의 요람인 아씨시의 조그만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 전대사를 받는 성당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작음을 경축하는 축제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큰 축복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받은 축복을 나누고 전합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줄 수 있을까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받은 축복을 나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담아 주시는 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먼저 내가 받은 축복과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시골에 있을 때 신자분들이 혼자 살고 있는 제가 걱정이 되어서 많은 반찬과 음식, 그리고 과일들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가져다 주셔서 때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먹을 거 많이 있다고 신자분들에게 이야기해도, 집에서 음식을 하시면 조금이라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다 먹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제가 아는 혼자 계시는 분들이나 필요한 분들에게 드리기 시작했고, 축복을 나누니까 저 뿐만 아니라 필요한 몇 분도 함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축복을 나만 누리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살이 많이 쪄서 건강해지지 않거나 음식이 썩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느님에게 어떠한 축복을 받았고, 그 축복을 나만을 위해서 쓰고 있는지 아니면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군중을 다 먹일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제자들은 아마도 자기 손에 들린 보잘 것 없는 것과 많은 군중을 바라보며 난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풍요를 담아 주십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한 것을 담아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모습이 있으면 어떨까..’ 합니다.

 

예전에 공소를 지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공소 신자들만으로는 할 수 없어서 모금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처음 간 본당에서 모금한 돈이 150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돈은 2억이 넘었습니다. 머리로 계산해 보니까 제가 있는 동안 줄곧 모금을 나가도 모으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금을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았는데, 빚 없이 건축을 마무리 하고 나왔었습니다. 물론 공소와 본당 신자분들의 노력도 많았지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손에 큰 은총을 담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리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가엾은 군중을 책임지시는 분이시고, 그러한 일을 하려는 제자들의 손에 필요한 것을 가득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 은총에 기대고 의지할 수 있다면, 주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받은 축복을 나누고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청하여 주님께서는 담아주시는 풍요로움을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하느님은 나에게도 아버지고, 할아버지에게도 아버지야?”

“그렇지”

“그러면 나중에 천국가면 할아버지랑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중에 천국가면 형이라고 불러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