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22-36)
Immediatel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and said to him,
"O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멍에는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로, 마차나 쟁기처럼 짐을 당기거나 무거운 짐을 옮길 때 힘을 분산시켜 작업을 좀 더 수월하게 수행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멍에는 ‘예속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에는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것만을 전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의 멍에가 부수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주신 진실을 전하며, 정복자의 나무 멍에가 부수어지지만 실제로는 부수어지지 않을 쇠 멍에로 바뀌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1,30 참조).
그렇다면 가혹한 현실 속에 죽음의 파멸로 이끄는 쇠 멍에가 아닌, 녹록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이야말로 그 답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서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외치며,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실 때는,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하느님께서는 가장 강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낙담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다면, 믿음의 여정을 멈추지 말고 계속 가야만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이 약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용기를 내어 다가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참된 신앙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섬기는 일은 예속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안에서 자신을 기꺼이 내놓는 일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교에서도 1년에 한 번씩 개교기념일에 맞춰 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체 학년이 준비하는 ‘거리극’입니다. 거리를 걸어가다가 지정된 포스트에서 각 학년이 준비한 연극을 보는 것입니다.
저학년 때에는 우리 반에 나이 많은 형님이 연출을 맡아서 멋진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저희 반에서 이 거리극을 온전히 맡아서 연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준비를 하면서 서로 의견도 많았고, 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때를 기억해보면 가운데에 서서 이끌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서 이끌고 가는 사람을 믿고 따라주는 사람 역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든 문제들도 거뜬하게 해결할 수 있으며, 더욱더 편하게 지금을 쉽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모두가 가운데에 서서 이끌고 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끄는 사람을 믿고 따라줄 사람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지금 내가 나서야 할 때는 용기 있게 해야 하며, 다른 이가 나설 때는 끝없는 응원과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서야 할 때는 뒤로 빠져서 숨으려고만 하고, 다른 이가 나서면 잘 난 척만 한다면서 비판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십니다. 이 모습에 베드로는 감동하였나 봅니다. 평생 어부로 살았던 베드로로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이고,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부러움의 순간이었겠지요. 그래서 주님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주님의 허락을 통해서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면서 물에 빠지고 말지요.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따른다면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함께 하지도 않는다면, 불안과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바닷물 속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요? 베드로처럼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고, 주님께서 내미는 손을 꽉 붙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행운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실제로는 운이 아니다. 기회를 붙잡고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하워드 슐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
아마 박수로 “짝짝짝~~ 짝짝~~” 이렇게 치면 우리나라 사람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월드컵 응원 박수 소리인 것을 알 것입니다. 워낙 익숙한 리듬이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1990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뉴턴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게 한 뒤, 역할을 두드리는 자와 듣는 자로 나눴습니다. 즉, 두드리는 자는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고, 듣는 자는 그 리듬을 듣고 맞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워낙 유명하고 잘 알려진 노래이기에 쉽게 맞출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못해도 50% 이상은 맞추지 않겠냐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성공률이 2.5%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은 알고 있으므로 상대도 자연스럽게 알 것이라고 착각하는 현상을 ‘지식의 저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지식은 오해와 갈등이라는 저주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무언가를 잘 아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모르는 상태를 상상하기 어렵게 됩니다. “너 그것도 몰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
-전삼용신부-
요즘 코로나 때문인지 우울증 비슷한 무기력감에 빠졌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좀 시작해보면 어떠실까요?”라고 말하면, “옛날에 다 해 봤어요. 지금 제 환경에서는 불가능해요. 안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삶이 우울해요. 무기력해요. 나이만 먹고 있어요!”라고 또 말합니다. 어쩌라는 말입니까?
삶의 에너지는 ‘행복을 좇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가젤을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표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표범에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가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행복은 생존입니다. 그 행복에 다다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행복을 향한 목표 없는 삶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안 돼!”라는 원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삶의 의욕을 되찾고 지금의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은 것은 그 법칙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톰 빌리유’는 연설가요 퀘스트란 다이어트 식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대표입니다. 그는 병적으로 뚱뚱한 집안에서 자라 엄청난 뚱보였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는 패스트푸드를 들고 계셨고 누나는 살에 묻혀 몸조차 가누지 못한 채 침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물론 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먹는 유일한 야채는 패스트푸드 안에 있는 양상추가 전부였습니다. 매일매일 나빠지는 건강상태를 보며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매일 운동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권고하는 대로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운동량’만을 지속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몇 달을 꾸준히 운동했으나 체중이 더 늘었습니다. 운동하니 그 만족감에 식욕이 더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도전으로 몸과 마음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톰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에 만연한 비만이라는 질병과 싸우기 위해 ‘퀘스트’라는 식품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연속적인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난이었고 ‘너무 큰 목표를 꿈꾼 것은 아닌가?’라는 회의감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문득 엄마와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퀘스트 시제품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 아직 더 버틸 수 있어!’라고 다짐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버티고 노력하다 보니 누나는 회사가 시작한 시점에서 54kg을 감량했고, 회사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참조: ‘자신의 임계점을 찾는 법’,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선 ‘더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것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어야 행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성취에 목마르고 배고파야 합니다.
그다음은 내가 바라는 행복을 긍정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 안에는 무조건 “넌 안 돼!”라고 말하는 자아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무조건 순응하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믿음’을 주는 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긍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믿고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엔 잘 안 됩니다.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도 살을 조금 뺐는데, 살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저의 생각을 바꾸었을 때부터입니다. 저는 살을 빼는데 ‘음식 20%, 운동 80%’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반대로 ‘음식 80%, 운동 20%’임을 알았을 때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감히 물 위로 뛰어내릴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넌 할 수 있어!”와 “어떻게?”가 함께 와야 합니다. 이것을 ‘은총과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정의 은총과 방법의 진리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꾸준함’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에서 비틀거립니다. 우리 믿음은 한순간에 크지 않습니다. ‘성장’합니다. 톰 빌리유가 어머니와 누나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었듯 우리도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패에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 목표에 다다를 날이 있습니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야 진정한 삶입니다. 의욕을 가지려면 행복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평생 목표, 10년 목표, 1년 목표, 하루 목표를 정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한번 해 보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은 항상 “해 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요?”라고 물으십시오.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젠 비틀거리며 믿음을 성장시키고 확인해가는 일만 남습니다. 이 메커니즘에 자신을 결속시킬 수 있어야 참으로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처럼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을 보았습니다. 음악도 좋았고, 화면의 배경도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대는 1900년대 초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러시아, 미국, 영국, 일본과 같은 강대국에 갇혀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이미 날개가 꺾여서 강대국이라고 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였고 양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러시아와 싸워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드라마는 약소국 조선이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보여주었습니다. 왕도, 신하도, 백성도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는 알고 있었습니다. 3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빼앗길 것을 알면서 바라만보는 사람, 빼앗길 것을 알기에 일본의 편에 서서 기득권을 얻으려는 사람, 빼앗길 것을 알지만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드라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라를 그냥 내어주면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없지만 저항하다가 빼앗기면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빼앗길 걸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개구리들의 왕 뽑기’입니다. 평화로운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재미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개구리들을 강하게 해 줄 지도자, 개구리들의 이익을 대변할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황새가 왔습니다. 개구리들은 환영했지만 황새는 배고프면 개구리들을 잡아먹을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이 왔습니다. 개구리들은 환영했지만 뱀 역시 개구리들을 잡아먹었습니다. 황새도, 뱀도 개구리들의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하늘을 날 수 있고, 날카로운 이빨과 독이 있어도 그것들이 개구리들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들의 지도자는 개구리 중에서 나와야 합니다. 조선이 힘을 합하여, 조금 더 일찍 개화의 길을 걸었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러시아도, 영국도, 미국도 결코 조선을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변했습니다.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전쟁에 맞서서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일어서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 문화, 정치, 철학은 스스로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변에는 늘 강대국이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것은 주변의 강대국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그러기에 주변의 강대국은 기회가 되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3부류가 있었습니다. 강대국의 침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강대국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전통과 종교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은 험난한 시간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간직하며 자신들의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에 의지하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물위를 위태롭게 걸었습니다. 바람은 강하게 불었고, 파도는 높았고, 물은 깊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파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깊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십시오. 언젠가 당신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매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세상을 떠나는 날은 그 말이 맞을 거라고 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우리가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베드로 사도,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교회의 반석, 초대 교황, 위대한 사도, 천국의 관리자...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더욱 존경스럽고, 더욱 정감이 가고,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인생사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흑역사들로 즐비했다는 것입니다.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한 오랜 신앙여정에서 수시로 흔들렸고, 나약했고, 갈등했고, 번민했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마태오 복음 14장 22~33절에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른바‘수제자 갈릴래아 호수 퐁당 사건’입니다.
사도단 일행이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맞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파도가 얼마나 거세던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배는 항상 그 자리였습니다.
기진맥진 탈진해져 제정신이 아닌 제자들 앞으로 예수님께서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스승이요 주님, 구원자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보고 사색이 되어 유령이라고 외쳤던 사도들, 그러나 막상 확인해보니 스승님이셨습니다. 무척이나 ‘뻘쭘’한 상황이요 어색한 순간, 가만히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베드로 사도가 또 나섰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가 용기백배해서 물위를 몇 걸음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아싸! 이제 나도 된다. 나도 스승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제자들 앞에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뻐겼을 것입니다. “자네들 나 봤냐? 나야 나! 나라구! 수제자!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그러나 팽배했던 베드로 사도의 자만심도 촌각이었습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잔뜩 기고만장해있는 그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십니다. 순식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베드로 사도 앞으로 보내십니다.
갑자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는 여지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자신감, 당당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고 큰 두려움에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마치도 개그 프로그램 한 코너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수제자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주님 부재시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 위로 승선하실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게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을 내려 깊은 물 속을 바라볼 때, 갑작스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4,22-36: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23절)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것은, 조용한 곳에서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외딴 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때가 많다. 우리도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는 한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다. 광야라는 것은 우리를 모든 소란에서 구해주는 고요함이요 은신처이다.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파도에 시달린다. 맞바람이 불어오자 제자들의 배는 폭풍 가운데에서 마구 뒤흔들린다. 배는 풍랑 속에 있어도 그대로 배이다. 이 배는 제자들을 태우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이 배는 그럼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이 배로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은 크나큰 어려움에 처해 안절부절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는 “나다”(27절)하고 말씀하시며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버리실 것이다.
이 배는 유혹의 맞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바다의 모든 파도, 즉 이 세상의 모든 권능 위를 걸으시는 영광스런 주님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26절).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라고 하였다.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갔다(29절).
그러나 베드로는 호수와 바람을 보고는 어지럽고 겁이 났다. 그래서 물에 빠졌고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30절)라고 소리를 지른다. 베드로는 물위를 가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자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바람이었다. 호수가 바람보다 더 위험한 데도 호수와 싸우면서도 바람의 세차게 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주님께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미신다. 그러고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해주셨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한 사람이 죽음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물결이 그쳤다. 그들은 모두 경탄하며 “참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하고 주님께 절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양떼를 그에게 맡기시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하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배 안에 있으면서, 즉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처럼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 주님께로 정진하려는 사람이다. 계속 새로이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쓰러질 수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며,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
-한상우신부-
이 순간이
믿음의
순간입니다.
믿음은
모든 순간들을
지나가게 하는
힘입니다.
이제야
풍랑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풍랑은
사라져가지만
믿음은 남습니다.
두려움을
부수는 믿음을
만납니다.
호수 위의
거센 바람은
우리 믿음을
세차게
깨웁니다.
거센 풍랑은
믿음과 의심을
가려내는
은총이 됩니다.
두려움이
믿음이
되게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언제나 거센 바람이
있고 버거운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어우러지는
깨달음이 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와 믿음이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됩니다.
풍랑길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믿음의
무늬들을 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풍랑과 믿음의
여정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위로의 두 양상을 만납니다. 거짓 위로와 진정한 위로입니다. 대체로 거짓 위로는 인간적 욕망에 화답하고, 진정한 위로는 하느님에게서 오지요.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예레 28,2)
예언자 하난야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사제들과 온 백성에게 전합니다. 이미 주님의 집 거룩한 기물들과 백성의 유력자들이 바빌론으로 치욕스럽게 끌려간 뒤의 일입니다. 얼핏 들으면 하난야의 예언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법한 내용입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예레 28,9)
하난야에 맞서 예레미야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유다에 내리신 바빌론 유배라는 징벌은 아직 채워야 할 시간이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허우적댈 때에는 당장 듣기 좋은 말에 혹할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위로는 마약과 같아 결국 더 큰 고통을 끌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누구의 예언이 위로가 될지 보다는, 어떤 말씀이 진정 주님에게서 온 것인지 진위를 가려야 할 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배웅과 기도를 위해 남으시고,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며 맞바람에 시달려 몹시 고생하는 중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시자 제자들이 유령으로 오인해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미 파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에 겁까지 질려 혼이 쏙 빠진 듯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위로는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그 옛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자기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탈출 3,14 참조). "나다." 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건,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용기가 솟을 일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예수님 현존에 힘입어 호기롭게 물 위를 딛고 선 베드로가 몇 걸음 못 걷고 그만 물에 빠집니다. 주님의 오심과 격려로 엄청난 위로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믿음이 받쳐주지 못한 듯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태 14,36)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도움이 필요한 병자들을 예수님께로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면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고 간청하지요. 그리고, 과연, 그대로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위로는 귓가를 맴돌며 기분만 좋게 하다가 금새 사라지는 거짓 위로와는 차원이 달라 열매가 있습니다. 당장 고난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더 힘겨운 멍에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은 위로의 진정성을 알아듣고 믿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우리의 믿음과 함께 연주될 때 아름답고 진실한 구원의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진정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 위로의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위로가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진정시키고 잠시나마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용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만든 건, 그분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 즉 연민하는 분이시고(마태 14,14), 기도하는 분이시며(마태 14,23),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러한 진정성을 단순하고 소박한 군중도 알아듣지요.
우리는 날마다 죄와 나약함에 넘어지지만, 날마다 주님의 위로에 힘입어 새로 태어납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사람과 사건으로 우리게 다가와 저마다에게 꼭 필요한 위로를 건네시지요. 당장 마음을 다독여 주실 때도 있지만 도전과 직면을 던지기도 하십니다. 거짓 위로와 진정한 위로를 분별하는 기준은 전하는 이의 "연민"과 "기도"와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두 살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불안해하고 분노합니다. 분열을 조장하고 차별을 심화하는 말들이 위로의 탈을 쓰고 사방을 헤집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진정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위하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위로인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진정 연민하고 진정 기도하며 진정 희생하는 이를 통해 전해집니다. 우리 또한 연민과 기도와 작은 희생을 통해 그런 주님의 위로의 통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게임 체인저이신 주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519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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