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4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22-36)
Immediatel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and said to him,
"O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 보면, 어떠한 명의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음식을 적당히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네 번째는 음양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입니다. 다섯 번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을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을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고 아무도 돌볼 수 없으며 정부들에게 잊힌 백성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상처의 치유자로 나서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신탁은 마무리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처가 회복되더라도 재발하여 불치병이 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보다 문자에 얽매여 조상들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들 때문입니다. 이 불치병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입 밖으로 내보낸 데서 비롯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럴싸한 위선으로 ‘하느님께서 심으신 나무의 햇순’(이사 60,21 참조)을 뿌리째 뽑힐 초목으로 모두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불치병은 위선과 아집으로 무장된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의사로 나서시더라도 우리가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참 많이 혼내셨던 것 같습니다. 늘 손에는 체벌할 몽둥이가 들려 있었고, 실제로 저 역시 많이 맞았습니다.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해서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우리는 모두 그러려니 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자극되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큰 상처를 받았고 기가 죽어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다른 친구가 상처받은 친구에게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분인데 뭐~~~”라고 이야기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자퇴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이 친구가 유별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쌍둥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한 마디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누구는 똑같은 말에 절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일반화를 시켜서 대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에 맞춰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권능에 경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니라, 따지려는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어깁니까?”라고 묻지 않고,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하느님 계명이 아니라 조상들의 관습을 어긴 것 때문에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과 다르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다름을 모두 인정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사랑을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를 만나면서 보여주셨던 치유의 방식이 모두 다른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모습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게 됩니다(예레 30,22 참조).
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주님과도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돈을 잃는 것은 가벼운 손실이다. 명예를 잃는 건 꽤 큰 손실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건 모든 걸 잃는 것이다(괴테).
필요하지 않는 것에 구속되지 않기.
법정 스님의 책 중에서 ‘무소유’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님께서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불필요한 것들을 갖게 되므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물건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물건이었고, 제게 꼭 필요할 것만 같았습니다. 곧바로 주문을 넣었고, 며칠 뒤에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설명을 통해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전화로 문의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온종일 끙끙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었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에 종일 시간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박스 안에 넣어 반송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에 구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물건만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만나는 법; 불가능에 도전하라!
-전삼용신부-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본 적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로, 신학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직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신학교에서 예수님 음성을 들은 때가 가장 인격적으로 만난 때였던 것 같습니다.”라고만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저 역사 안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왔어도 아직은 깊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청한 이것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저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꿈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그분이 함께하셨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이룰 꿈은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성취될 것이기에 지금부터 돈을 조금씩 모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통장은 어느 선 이상은 돈이 넘지 못하게 스스로 그 액수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형에게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성장 가능성이 큰 종목의 주식에 그 돈을 조금씩 넣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을 준비하다 보니 불가능한 것을 청하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내는 일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을 알고는 형을 통해 저축하는 일을 멈출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제로서 재물을 모으는 일은 자신을 이기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할 만큼만 가지고, 생존할 만큼만 먹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루를 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지, 무조건 세상을 바꾸려다가는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이때 함께 금경축을 맞는 몇몇 사제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은 학자셨습니다. 자신이 50년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며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선정된 분은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이신 ‘안톤 룰릭’이었습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료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6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저의 사제적 희생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함께 금경축을 맞이하는 여러분들과 아주 다르겠지만 반드시 특이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50년 동안 수천 명의 사제가 오직 사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경험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성품 성사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의 삶을 바치고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밤새 기도를 해야 조금씩 마음이 누구러졌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세례와 동시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이 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본인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용서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물 위를 걸어보아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제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물 위를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이 되지 않으면 그분을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우리의 궁극적 길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이기는 불가능의 길을 시작하며 우리도 주님께 청해봅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조재형신부-
오늘은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이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비안네 성인은 성전 건축을 잘 하지는 않았습니다. 강론을 잘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특별한 사목적인 재능으로 신자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신자들에게 성서공부를 시킨 것도 아닙니다. 비안네 성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부님을 찾아오면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무슨 이야기든지 끝까지 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특히 ‘고백성사’를 잘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먼 곳에서도 찾아왔습니다.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본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19로 사제들이 많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감염의 위험이 있는 걸 알았지만 병원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갔고,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합니다. 거리두기를 하고,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병원을 나중에 찾아가고, 고백성사도 나중에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제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신자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고백성사를 주었고, 사제들 중에는 코로나19에 감염된 분들도 있었고,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판단과 결정을 어리석다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신자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동체 미사를 마치고 제의실로 오는 중에 제게도 교우 분들이 찾아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구지침으로 고백소에서 성사를 주지는 못하지만 면담실에서 성사를 주었습니다. 성사를 보시는 분들은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리적이고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방송의 토론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언변과 치밀한 말이라고 해도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상대방도 같은 언변으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감성과 감정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불길로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의 격정적인 이야기,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음을 움직이고, 지갑을 열도록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닐지라도, 가슴을 움직이는 따뜻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행동에서 드러나는 인품과 인격입니다. 모세는 말을 잘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품과 인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었습니다.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께 충실하면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이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우에 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와 미움, 근심과 걱정이 내 마음에 생기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좋은 집도, 아름다운 경치도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면 고통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성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님(1786~1859)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는 첫 주임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신자들이라 해봐야 농사짓는 시골사람들 230여명밖에 안 되는 공소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더구나 본당 신자들의 신앙심은 밑바닥이어서 동료 신부들이 다들 부임하기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아르스에 부임해가면서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두렵고 감지덕지해서 몸까지 떨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제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따라서 비안네 신부님은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서품 즉시 시작된 가난하고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봐야 5분 내외였답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
-반영억신부-
비안네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혁명으로 정상적인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대신학교에서도 학과 성적이 모자라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지도교수 아베발레 신부님의 지속적인 도움으로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지도에 뛰어 났는데 특히 훌륭한 강론과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연2만여 명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받았고 하루18시간이나 고해성사를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공부도 못하고 그야말로 자랑할 것도 없는 바보였는데 그 어떤 훌륭한 신부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두려워해도 사람들은 신부님을 존경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 맞는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데 쓰십니다.“하느님께서는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끊임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삼아 하십니다. 부족함과 허물이 많은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원의를 찾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에 눈이 멀어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십니다. 그래서 손 씻는 일보다 마음 닦는 일이 더 소중함을 일깨워주십니다. 이를 명확히 하시기 위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0). 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실행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태 15,1-2)”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0-14)”
여기서 ‘조상들의 전통’은 '할라카' 라고 부르던 '생활 행동지침'을 가리킵니다.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그 지침 가운데 일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어기는 것을 ‘종교적인 불경죄’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지 간에
정결 예식을 행해서 몸만 깨끗하면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형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속은 깨끗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또 속은 깨끗하지 않은데도 겉이 깨끗하다고 해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잘난 체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5-28).”
하느님은 우리의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물질’이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식적인 정결 예식만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라는 말씀은,
죄의 원인은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으로부터 깨끗해지려고(거룩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이 뒤의 17절-20절에 나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배 속으로 갔다가 뒷간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7-20).”
하느님 앞에 참으로 깨끗한 사람으로 나서려면 마음을 먼저 씻어야 합니다.
마음을 씻는 방법은 ‘회개’와 ‘보속’입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 준수를
강조했지만, 그들 자신들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그들의 율법 실천은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율법주의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포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 일은 모두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시키려고 타이르고 꾸짖어도,
고집이 너무 세서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지만 그들 자신들도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눈먼 자들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가 율법을 모르는 자를 인도하면
둘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자라면,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짓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짓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을 모르고,
그래서 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위선자라고 판단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겉으로만 깨끗한가? 겉과 속이 똑같이 깨끗한가?”)
사실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더 엄격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나를 칭찬할 때,
또 ‘거룩한 사람’이라고 나를 존경할 때, 그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바로 그때 마귀의 유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또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그리고 비난을 받는 것보다는 존경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더 좋다.’는 그것이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지기 전에 자기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5,1-2.10-14: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예루살렘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분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권능에 경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유대인 조상들의 관습 한 가지를 어긴 것에 대하여 따지러 왔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2절) 하면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율법이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것임을 잊고 문자에만 집착하는 모습이다.
하느님께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사는가를 보신다. 손은 씻었지만 양심이 더럽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깨끗했고, 때 묻지 않은 양심의 인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씻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목욕을 한 이는 온 몸이 깨끗하니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가까이 불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도 못하지만, 거룩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어떤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이다. 음식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면, 주님의 몸을 부당하게 먹은 사람도 거룩하게 하고, 이 음식은 아무도 ‘약하게’ 되거나 ‘병’들거나 ‘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으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사악한 생각으로 더러워진다고 하신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 마음에서 나오는 비뚤어지고 사악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마태 15,19절)이 사람을 더럽힌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못마땅해 한다고 제자들은 주님께 말씀드렸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13절) 터무니없는 교만에 빠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칙을 ‘심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심은 그들 또한 주님에 의해 뽑힐 것이다. 그 초목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악마의 것이며, 신앙과 유익함에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뿌리 뽑혀 영원한 불에 던져져야 한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14절) 이 말씀은 불신앙이라는 오류로 인해 눈이 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진리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여 눈이 멀었고, 그러기에 그들이 인도하는 사람들은 멸망으로 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눈먼 이들에게 인도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우리도 눈먼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의 인도를 받으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주님 안에 항상 깨어있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 14)
-한상우신부-
따뜻한 사랑에
목마른 우리들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르스의
시골사제를
찾습니다.
정성어린
고해성사와
미사로 하느님
사랑을 기쁘게
나눕니다.
사랑을 나누는
그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됩니다.
부족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이 아파한 삶이
부족한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제로 만듭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사제가 되어
주저앉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일으켜세웁니다.
어쩔수 없는 우리의
부족함과 아픔에
따뜻한 시선과
응원의 마음이
함께하길
기도드립니다.
사제는
사람들안에서
길을 내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사제는 사람으로
아름다운 길을
먼저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초라하고
낯선 길에서
풍요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뜻은
불확실한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당신 삶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을
향해 나가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사랑의 말씀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다시 낮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삶이
사제의 참된
모습임을 믿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에서
복음은 눈물겨운
희망이 되어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정화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마태 15,2)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손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드는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요즘처럼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해 서로의 건강을 염려해서 해 주는 말이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 그들에게 중요한 건 조상들의 전통입니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
예수님은 그들이 지닌 정결례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율법이 지켜져야 하는 건, 그것이 단지 조상 대대로 전해진 관습이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내용이 하느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움직이지요. 사랑은 고착되거나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집착해 겉을 그럴싸하게 유지한다 해도 내용에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의 법이 아닙니다. 형식은 오히려 내면의 더러움을 간과하거나 눈감아 버리기 좋은 환경이 될 수도 있으니, 형식에 기대어 의무를 때우고 싶을 때는 내면을 더욱 엄중히 살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극과 극으로 상반되는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해 내리십니다. 먼저 다시는 회복의 가망이 없는 듯 들리는 냉엄한 선고가 내려지고, 이어서는 놀랍게도 회복을 말씀하시지요.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예레 30,15)
이스라엘이 당한 상처와 부상, 종기, 버림받음은 우상을 사랑하고 섬긴 불륜의 대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신랑이신 하느님께는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부정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그들의 더러움은 영영 씻기기 어려울 것이고 용서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불가능처럼 느껴지지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예레 30,22)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생각을 돌이키시고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얻어맞은 이스라엘이 유배와 억압으로 숨도 못 쉬며 감히 용서와 자비를 간청할 수도 없을 때,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정화하시고 당신 신부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정화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마태 15,13)
복음으로 돌아가 예수님 말씀에 머무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요한 15,1 참조)은 포도나무인 당신 백성을 심어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을 일구십니다. 밤낮없이 뙤약볕과 비바람을 아랑곳않고 극진히 돌보시며 보호해 주셨지요. 진정 아버지께서 심으신 초목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듣습니다. 완전히 다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그저 눈길과 손길을 통해 전해진 사랑을 오롯이 기억하는 정도겠지요. 이미 온 존재에 하느님 사랑의 내용이 속속들이 각인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포도밭에서 그분이 심지 않으신 초목은 함께 어우러져 자라기 어려울 겁니다. 그 열매로 들포도와 참 포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이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 몸살하며 움직일 겁니다. 사랑을 의무와 규율로 환원한 이들은 제도 안의 안전지대에서 어느 선까지는 자리를 보전하겠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가 오면 뽑혀 밖으로 던져지고 말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를 깨끗이 하시고 거룩히 하시는 주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주님 덕분에 외부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사랑으로 정화되어 세상에 되돌려지게 될 것입니다. 미움과 무시, 분열과 조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느님 사랑을 아는 우리가 정수기처럼, 공기청정기처럼 세상을 정화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그리하여 우리 입에서 "감사의 노래와 흥겨운 소리가 터져 나오리라."(예레 30,19) 아멘.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집착의 포기
-김찬선신부-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시비 거는 바리사이들을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이 말씀이 얼핏 보면 사랑의 포기처럼 들리고,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조차 포기해버린 존재,
주님의 구원 대상에서 배제된 존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종종 포기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이 말씀이 그 포기를 합리화할까봐 겁나는데
그런데 이 말씀이 정녕 그런 뜻인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물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집착의 포기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고집과 집착이 얼마간 있고,
그중에서도 내 힘으로 사람을 옳게 바꾸려고 하거나
심지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려고도 합니다.
저만 봐도 이 나이 먹도록 집요하게
사람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 때 청원자들도 같이 걸었는데
청원장이 같이 걸었기에 제가 직접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도
자주 이 얘기 해주고 싶고 저 얘기 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남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지 말아야 함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포기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우리의 대부분의 의도와 시도에는 사랑과 욕심이 같이 있기에
포기하는 것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바꾸라고 요구할라치면 내 안의 욕심 때문에 말을 못하겠고,
상관치 않으려고 할라치면 사랑을 포기하는 것 같아 망설여지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문제인 경우이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경우 그러니까
쇠귀에 경 읽기나 깨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제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마치고 같이 걸었던 친구와 서울로 올라오며
이 얘기 저 얘기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얘기 중에 성공하는 사람의
세 가지 공통점을 제 친구가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공통점이란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자답게 호탕하게 웃는 것이며,
셋째는 남의 얘기를 잘 경청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제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제가 잘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경청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경청을 잘하는 신부들도 있겠지만
거의가 그렇지 않고 저라고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불경청이라는 면에서 지금의 신부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저희나 그들은 왜 그럴까요?
왜 예수님조차 포기해버릴 정도로 경청을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노상 가르치려고만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는 가르치는 사람이지 듣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한마디 해주면 그 말을 새겨듣지 않고 오히려
네 생각이 옳지 않으니 네 생각을 고치라고 가르칠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 예수님도 정말 어쩔 수 없으신데
예수님마저 어쩔 수 없어 포기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0) | 2020.08.05 |
---|---|
2020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0) | 2020.08.04 |
2020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0) | 2020.08.02 |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0) | 2020.08.01 |
2020년 8월 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0) | 2020.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