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Margaret K 2020. 7. 31. 05:40

2020 8 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This man is John the Baptist.
He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경험했을 때, 그 원인을 외부의 어떤 사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건의 결과로 자신이 기쁘다든지, 화가 났다든지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대학에 합격하면 기쁘고, 떨어지면 우울하다. 회사에서 승진하면 기쁘고, 승진에서 탈락하면 슬프다.’

당연합니까? 당연하게 보이는 인과 관계이지만 사실 사건을 바라보는 자기 생각과 신념이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최종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는 어떨까요? 지금의 점수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어서 하향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합격했어도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 때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게 되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면, 실망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두려워합니다. 헤로데는 목 베어 죽인 요한이 되살아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엘리야의 영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부활했기에 더욱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이라면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불합리한 생각이었고,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꾸짖는 세례자 요한만 없어지면 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맹세를 거두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생각 등으로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역사상 잊히지 않는 큰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니 임금의 분노를 사는 편을 택했지요. 헤로데는 맹세를 깨뜨리는 것과 손님들의 눈을 겁냈지만, 사실 이보다 훨씬 무서운 하느님을 겁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바로 하느님 편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백처럼,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예레 26,15)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선포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더라도 한 가지는 남는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선택할 자유, 자기 방식을 결정할 자유가 그것이다(빅터 프랭클).

 


나를 만든 어머니의 입맞춤.


외출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집이 완전히 난장판입니다. 그것도 집안 전체가 물감투성이로 되어있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분명히 깜짝 놀라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난장판의 주범이 집을 지키고 있었던 어린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음에 똑같은 말썽을 부릴 수도 있어서 아마 따끔하게 혼내는 것이 정상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미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장을 보러 외출한 사이에 여동생 샐리를 돌보다가 그림물감을 발견하고는 동생 초상화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물감으로 장난을 쳤습니다. 그래서 집안 전체가 물감투성이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림 종이를 집어 들고는 “참 근사하게 그렸구나.” 하면서 아들에게 입을 맞춰줬다고 합니다. 벤저민은 훗날 인생을 전환점을 가져다준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어머니의 입맞춤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자녀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인해서 자녀의 성공을 가로막았던 것은 아닐까요?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전삼용신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조재형신부-

 

1986년 군에 입대하였습니다군 생활은 내무반 생활이 중요합니다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내무반의 질서와 군기를 주도하는 상병실질적으로 내무반의 일을 실행하는 일병이제 막 내무반으로 온 이등병입니다제게 내무반은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신발을 정리하고맨 구석에서 눈치를 보면서 지냈습니다일도 일머리를 알아야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리모컨이 있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TV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1986년에는 86 아시안 게임이 있었습니다지금도 기억납니다담배를 피우던 병장이 채널 좀 돌려봐라.’라고 말하였고저는 뛰다시피 가서 채널을 돌렸습니다채널을 볼 수 있는 주도권은 병장에게 있었습니다병장의 관심사에 따라서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던 축구경기는 함께 보았고늦은 시간이라도 일직하사가 눈감아 주었습니다돌아보니 아득한 추억입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사회는 무선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텔레비전선풍기에어컨이 무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빨간색 공중전화동전을 넣고 통화하던 공중전화는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예전에는 공중전화 때문에 다투기도 했었습니다스마트폰은 이제 움직이는 컴퓨터가 되었습니다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은행업무쇼핑예약까지 할 수 있습니다젊은이들에게는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임기도 되었습니다저도 스마트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줌으로 화상회의도 하였습니다무선으로 연결되는 것 중에는 블루투스가 있습니다컴퓨터스피커자동차스마트폰을 연결해 주는 기능입니다코로나19로 비대면 사회(Uncontact Society)가 가속화 될 거라고 합니다그러나 이미 우리는 비대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입자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파동으로 된 세상에서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입자는 서로 연결되어야만 형체를 이루고변화되고생성합니다원자세포조직은 이렇게 형성되고 있습니다그러나 세상은 파동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우리는 그것을 에너지라고 하고()라고 합니다태양은 입자가 아니어도 에너지를 지구에 보내고 있습니다파동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무선으로 연결되는 전기는 파동으로 전해집니다신앙 안에서 비대면 사회를 생각합니다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하느님의 에너지가하느님의 기운이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도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말씀으로 풍랑은 조용해졌습니다말씀으로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말씀으로 귀머거리는 듣게 되었습니다말씀으로 물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의 힘을 믿는다면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표징을 당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예언자입니다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예언자입니다옳은 일을 하였고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은 권력의 힘에 의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고억울하게 죽었습니다세례자 요한 이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세례자 요한 이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는 어리석을 수 있고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물리적인 법칙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교회는 순교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순교하였던 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었고우리는 그분들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으며우리의 신앙은 그분들의 피와 땀으로 전해졌습니다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분들의 순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많은 표징을 보여 주었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분노를 분노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용서하였고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세력은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력은 지금 모두 잊혀졌습니다하지만 용서를 하였고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교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살아가면서 억울하고속상하고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일들을 만납니다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려하면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용서와 이해사랑과 평화만이 나를 참된 안식에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알폰소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는 살아생전 다양한 병고에 시달리며 큰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92세 나이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성모님의 각별한 보살핌에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제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 저의 회개와 성소 여정,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은총들은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은 제가 모든 것 위에 어머니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또 원하십니다. 제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 대해 가르치며 당신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심을 모든 영혼 안에 심고자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구원에 합당한 것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 날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괴로워하는 척 했을 뿐이다그는 교활한 사기꾼이며능숙한 암살자이기 때문에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는 척 했던 것이다헤로데는 참으로 잔인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그는 괜한 맹세를 하여 소녀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그래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무엇을 괴로워했던가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우선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길한 길에 들어섰고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했으며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의 왕위도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봉사직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 뿐 아니라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4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8월 1일 토요일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마태오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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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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