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7. 29. 06:04

2020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마태오 13,47-53)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net thrown into the sea,
which collects fish of every kind.
When it is full they haul it ashore
and sit down to put what is good into buckets.
What is bad they throw away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하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그물과 같습니다. 고기잡이를 생각해 보면, 그물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이 그물의 역할입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충만해질 때까지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 아직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면, 그때에 비로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종말에 있게 될 심판을 언급하여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하늘 나라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지금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셈입니다.

왜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살고,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편하고 행복해 보이는지, 하느님의 심판은 어디에 있는지, 왜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 답은 하느님이 아닌, 내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도 죄를 짓고 실수를 하지만 지금 심판받지 않고 용서를 체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장점은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게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의 뜻을 고민하고 그 의미를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미사 강론 중에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해도, 또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똑같이 무표정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반응이 없는지….’를 당시의 본당 신부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저한테 뿐만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강론에도 똑같이 반응 없음이었거든요.

본당 신부님께서는 “원래 그래.”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점잖은 것이 우리 사회의 미덕처럼 되어있어서 반응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혼란이 왔습니다. 응원하는 우리나라 국민은 전혀 점잖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신나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원래 그렇지 않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을 읽고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법을 배우고, 코칭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원래 그래.’라는 말로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원래 그래.”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장 다양한 모습으로 또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인데 말입니다.

주님은 원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분이십니다. 이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겸손하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은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선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맞이하게 될 우리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 안에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우리 역시 이렇게 구분되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악한 자들이 갈 곳은 불구덩이 속으로, 이곳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주님의 강한 경고 말씀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을 높일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삶을 살면 늘 내가 기준의 우선 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면 늘 주님이 기준의 우선 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논어, ‘선진’ 편 중에서).




고통을 넘어 열정으로...


고통의 라틴어는 ‘Passo’입니다. 그런데 이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가 Passion, 즉 열정입니다. 열정이 고통 없이 생길 수 없음을 이 단어를 통해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열정과 고통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단지 열정이 커져서 고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하는 운동량은 정말로 많고 그래서 힘듭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어서 이 모든 훈련량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긴다고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고통 속에 매여 있다고 생각되면서 좌절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순간에 나의 열정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 열정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고통 그 자체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열정을 키워줄, 또 발견하게 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역할을 담당해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먼저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열정을 부활 사건 안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물인 이유

-전삼용신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고 밀과 가라지와 같고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고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하늘나라의 여러 비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른 비유 말씀들의 결론과 같은 것으로서 하늘나라가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고기를 그 종류별로 가려서 어떤 것들은 하늘나라로 어떤 것들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는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세히 보면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좋은 물고기들이 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그물 자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에는 좋은 물고기도, 나쁜 물고기도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이들은 밀과 가라지처럼 마지막 때에 쫓겨날 수는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악한 물고기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물고기가 마지막으로 가는 행선지가 아니라 그물 자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프링 벅’(Spring Bog)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에 서식하는 영양 가젤의 일종입니다.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집단으로 생활하는 스프링 벅은 한 번에 3m이상 높이 뛸 수 있고 시속 88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민첩한 그들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강물에 휩쓸려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조한 풀을 무리가 함께 뜯어먹다 보니 뒤처져 뜯어먹는 스프링 벅들은 이미 앞서간 스프링 벅들이 먹은 잔풀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때는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재빨리 달려야만 합니다. 만약 몇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뒤에 있는 것들은 이번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러다 절벽이 나타나거나 강물이 나타나서 멈추려 해도 뒤에서 달려오는 것들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 밀려버리는 것입니다.

 

      스프링 벅의 이야기와 ‘그물’로 비유되는 하늘나라의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만약 스프링 벅을 그물로 잡을 수 있다면 그것들이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먹기 위해 달리고 싶은 욕구를 잃습니다. 여기저기로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잃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더는 펼칠 수 없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그물’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사춘기가 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습니다. 30일 동안의 부모를 칭찬하기 위해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한 달 동안의 감사를 위한 노력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와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신데, 그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비처럼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만이 아니라 불과 사람을 파먹는 벌레, 심지어 불소금에 절여진다고까지 하십니다. 이원론이 아니라면 우리 종교는 그저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한 상담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그물’로 표현하신 이유는 내가 튀어 나가려는 이전의 방향성을 제한하고 당신의 방향성에 우리를 묶어두기 위함입니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지옥에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유로움을 주님께 봉헌하여 하늘나라에서 끝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위로를 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라 그 방향성을 꺾고 주님의 방향에 나를 맡길 힘을 얻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구도 좋고, 저 욕구도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가르침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물’이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이라는 한 방향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사람만 머물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일 아침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걷다보면 같은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오래된 정원을 새롭게 단장하는 집을 보았습니다처음에는 철망으로 된 녹슨 담장을 걷어냈습니다바닥부터 벽돌을 쌓았습니다한 달 넘게 같은 길을 걸으면서 벽돌이 담장이 되는 걸 보았습니다담장 가운데는 계단이 생겼습니다무더운 날 땀을 흘리며 벽돌을 쌓는 분을 보았고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을 만드는 걸 보았습니다정원이 마무리되는 날이었습니다새로 지은 집과 정원이 잘 어울렸습니다정원 계단에는 예쁜 화분이 놓였고마당에는 파란 잔디를 심었습니다제가 사는 집이 아니었는데도하루하루 예쁘게 변하는 걸 보는 것은 산보의 또 다른 기쁨입니다.

 

마당의 정원을 꾸미는 것이 정성과 시간이 필요했다면 한 나라를 통합하고하나로 만드는 것은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흑백의 차별에 저항하며 27년간 감옥에 있었던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된 후에 흑백의 화합과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영화 '인빅터스(Invictus) : 우리가 꿈꾸는 기적은 흑백간의 갈등을 넘어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낸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럭비 팀의 이야기입니다백인들로 이루어진 럭비 팀에 대해서 흑인들은 같은 나라임에도 다른 나라 럭비 팀을 응원했습니다대통령은 럭비 팀에게 우승할 것을 부탁하였고럭비 팀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 개최된 럭비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는 이야기입니다자국 팀 임에도 백인이라는 이유로 응원하지 않던 흑인에게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번에는 당신들이 틀렸습니다.’ 영화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응원하면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럭비 팀 주장에게 감옥에서 읽었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의 시를 들려줍니다시의 제목은 영화의 제목과 같은 인빅터스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온통 지옥 같은 암흑

신들이 어떻게 하든지정복되지 않는 내 영혼에 감사하여라.

잔인하게 쓰러진 상황에서도나는 움츠러들지도 크게 울지도 않으리.

내 머리에 피가 나도록 위협해도나는 굽히지 않으리.

분노와 비탄 너머에어둠과 공포만이 거대하고

오랜 세월의 위협에도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

문이 좁은 것은 중요치 않다어떤 벌도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내 영혼의 주인나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곳간에서 옛것도 꺼내고 새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무엇이 옛것일까요집을 새로 지었지만 낡은 담장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옛것입니다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옛것입니다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시련과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옛것입니다. 무엇이 새것일까요집을 새로 지었으니 낡은 담장을 헐어버리고 아름다운 담장을 만드는 것이 새것입니다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새것입니다. 27년 감옥에 있었지만 분노와 원망을 버리고 일치와 화합을 위해 손은 내미는 것이 새것입니다.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랜 세월의 위협에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문이 좁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어떤 벌도 문제되지 않는다나는 내 영혼의 주인나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런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진흙 한 덩이일 뿐입니다!

 -양승국신부-

 

별것 없으면서 큰 소리 뻥뻥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특징이 말은 뻔지르르 하지만 뒷감당이 안됩니다. ‘나야 나! 내가 해줄 수 있다구! 나만 믿고 따라와!’ 철석같이 굳게 믿고 따라가보면...결과는 허당입니다. 쫄망입니다. 짙은 실망감과 허탈함만이 남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 엄청난 것이 사실입니다. 불과 50년, 100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전화한다는 것,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줄 알았는데, 지금 스마트폰 없으면 사람 취급도 못받습니다. 한 식당에 갔더니 로봇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더군요. 로봇이 주문을 받고, 로봇이 배달도 해줬습니다. 

 

다방면에 걸쳐 최첨단을 달리다보니 은연 중에 인간의 머릿속에는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팽배합니다. 다양한 분야에 슈퍼맨들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초스피드로 충족시켜줍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하느님의 영역이 축소되는 듯 합니다. 자연스레 하느님 현존이나 영적인 삶, 신앙이나 희생, 봉사나 헌신 같은 개념들이 뒷자리로 물러납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난다 긴다 할지라도, 최첨단의 일선에서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한다 할지라도, 무소불위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 할지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그만입니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여기 저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서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인간만사 부질없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라든지 인생의 절정기가 영원할 것 같지요?

  

사실 순식간에 다 지나갑니다. 마치 새벽녘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 한 방울 같습니다.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사라질 아침 안개 같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즉시 지나갑니다. 인간이 지나가면 마침내 주님이 오십니다.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진흙 한 덩이일 뿐입니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예레미야서 18장 4절)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셔서 우리를 물레 위에 고이 얹고 돌리면서 멋진 작품 하나 만드시면, 그걸로 감지덕지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만드신 작품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애써 만드신 작품을 순식간에 뭉개버리십니다. 뚤뚤 뭉쳐 멀리 던져버리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왜 그러셨냐고 따지거나 대들수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진흙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 손안에 든 한 줌 진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주님이신데,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를 거두어가신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사와 찬양까지는 힘들더라도 순순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한때 위풍당당하던 분들, 시대를 호령하던 분들, 하늘의 별까지 따올 것 같던 분들, 수직상승만 거듭하던 분들이 줄줄이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아무리 대단해보인다 할지라도 사실 까놓고 보면 별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이 지상에서 얼마간 권세와 영화를 누릴지 모르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상, 불멸의 대상은 오직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십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영억신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도 심겨져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함께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물의 비유 ♣
-송영진신부-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여기서 ‘하늘나라’는 뜻으로는 ‘교회’입니다.
그물을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이는 일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뜻합니다.
이 비유에서 그물 속에 들어 있는 고기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신앙인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좋은 것들, 의인들’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고, ‘나쁜 것들, 악한 자들’은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선교활동은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입니다.
입교를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세례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진 사람이고, 의인이 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세례성사로 깨끗해진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생활입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그 상태를 유지한다면 의인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길,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깨끗해진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3-4).”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동시에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일치가 곧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고,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인정받는 일입니다.
반대로,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더라도 예수님과 떨어져서 산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도 아니어서,
마지막 심판 때에 잘려나갈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이고, 예수님에 의해 거룩해진 사람들,
즉 성도들의 공동체인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죄인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사탄이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가 없고, 공격(유혹)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사탄의 공격 대상입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신앙인들을 유혹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고 방심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라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저승의 세력(악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것이었을 뿐이고,
그 세력의 공격이나 유혹 자체를 막아주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호와 우리의 노력이 합해질 때, 그때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든지 각 개인이든지 간에, 유혹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잃게 되고,
그러면 사탄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물의 비유’에 있는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라는 말에서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나쁜 것들, 악한 자들’은 하느님께도 쓸모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쓸모가 없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쓸모없는 상태에서 쓸모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일입니다.)
사실 ‘그물의 비유’는 종말의 심판 때에 밖에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지금 회개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물의 비유’를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세례를 받을 때의 그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예수님 안에 잘 머무르고 있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잘 가고 있는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이웃들과 나 자신에게 정말로 쓸모 있는 존재인가?”
(혹시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또는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밖에 버려진 다음에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난 다음에 후회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심판 전에 회개해야 하는데,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합니다.
(회개는 영혼의 건강진단 같은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건강진단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3,47-53: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으며온갖 고기가 들어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이 그물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졌다파도는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이 그물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을 그물처럼 모아들이셨다그리고 그 그물은 물속에 사는 온갖 고기들을 모아 물 밖으로 끌어내듯이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참 빛이신 주님 안에 데려다 놓는다빛 속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심판에서 빈틈없는 심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교회는 그물에 비유된다교회가 어부에게 맡겨졌고모든 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물속에서 그물에 담겨 영원한 나라로 끌어 올려진다이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다모든 사람을 죄의 용서로 부르기 때문이다이 그물은 마지막 때모든 인류를 모아들일 때가득차고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고 물가에 앉는다현세를 바다라고 하면 물가는 현세의 종말이고 심판의 장이다.

 

이 그물은 종말까지 모든 물고기를 모아들일 것이다그때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천사들이 모든 것을 끌어올려 놓고의인과 악인을 가를 것이다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살피는 사람들은 그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현세의 종말에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담기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48버려진다그물에 모아들여져 물가에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은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라고 하신 불구덩이를 말한다또한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3)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라고 하신다그 사람은 하늘 나라의 기쁨에 관한 새로운 것을 꺼내올 줄 알고구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이것은 자신의 삶으로써 그것들을 꺼내 오는 것이다마음의 곳간이 아니라가르치는 자신의 직무에서 그것들을 꺼내온다그가 꺼내오는 옛것들은 새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 48)

-한상우신부-

시시때때로
우리의 삶이란
생생한 날 것들과
마주하는 빛나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물처럼
자신이 몸소
던져 보지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아들여야
선택할 수 있고
끌어 올려야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끌어 올려지는
모든 것이

건져 올려지는
모든 것이

실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좋고 나쁜
것뿐이지
각별한
이 모든 것이
보잘것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늘 나라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주는
나라입니다.

그동안
일상이라는
그물을 던지며
건져 올려지는
많은 것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늘 나라는
중요하고 소중한
좋은 것들을 이제
보게되고 담게되듯
하느님 사랑을
간직하는
나라입니다.

그물을 던지듯
끊임없이 시도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옹기장이로 비유하십니다.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예레 18,4).

흙은 가소성(可塑性)이 있어 만드는 이의 의도에 따라 모양의 변형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옹기장이는 이를 잘 알기에 제대로 된 형태가 나올 때까지 계속 흙을 매만지지요.

일단 흙으로 빚은 그릇이 가마에 들어가 불에 구워지면, 그때는 형태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뒤늦게 결함이 발견되어도 수정이 불가능해서 결국 깨버리는 수밖에 없지요.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는 내 손에 있다"(예레 18,5).

그러니 우리가 아직 진흙 상태로 주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비록 흠 많고 일그러진 몰골이라도 우리를 포기해 내던져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심을 다해 재차 삼차 사차... 계속 다듬고 고쳐 주실 것이니 말이지요.

우리가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때까지, 하느님 모상성이 충만히 빛날 때까지 용서와 자비와 기다림의 주님 손길은 지치지 않고 무한 반복될 것입니다.

복음은 지난 며칠 동안 이어지던 하늘 나라 비유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하늘 나라는 일단 열린 상태의 그물입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가 다 들어 있지요. 세상 종말에 선별작업이 시작되면 그때에는 선인과 악인의 처지가 극명하게 갈릴 겁니다.

사후 세계를 믿는 우리에게 다소 긴장감을 형성하는 대목입니다. 신앙도 사랑도 희생도 나름 하느라고 했건만 자기가 백 프로 선인 축에 끼일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좋은 것들"을 먼저 골라낸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분명 좋은 부분이 다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먼저 고르고, 남은 것 중에서 비교적 좋은 것을 고르고, 또 나머지 안에서 그나마 좋은 것을 고르고 ... 이 작업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고기가 그릇에 담겨질 것 같습니다. 고기로 비유된 우리 중에 좋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영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고르고 고른 선별 작업 후에도 밖에 버려질 나쁜 것, 악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울면서 이를 갈 것"(마태 13,50)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통탄해서 울며 이를 간다는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늘 나라를 갈망했다면 비록 실수는 있을지언정 하늘 나라에 맞갖는 모습으로 살려고 애썼을 터이고 그 자국은 영혼에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하늘 나라에 어울리는 모습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적극적으로 그 반대의 길을 가던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있는 내내 하늘 나라에 속하기를 거부하며 하늘 나라에 속할 만한 이들과의 교류조차 불편해 했을 것이고요. 어쩌면 그들은 하늘 나라를 자기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바꾸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불평하고 분열시키고 분노하는, 울며 이를 가는 것이 매우 익숙한 이들일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좋은 것들을 골라내는 하느님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눈길을 바라봅니다. 행여 하나라도 놓칠까 주의를 기울여 살피고 또 살펴 좋은 점을 찾아내는 자애 가득한 시선입니다. 진흙이 제 꼴을 갖출 때까지 싫증 내지 않고, 노고를 마다 않고 다시 흙을 주무르는 옹기장이의 정성어린 그 손길과도 닮아 보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좋은 점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 더 좋게 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시지요. 좋은 것이 나올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껏 흙을 매만지는 옹기장이의 땀방울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맺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옹기장이 하느님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자애로운 그분 손 안에 있으니 모든 걱정 붙들어매고 믿고 감사하며 의탁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이 손수 빚으시는 멋진 작품입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오 13,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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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를 ‘그물’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