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영성-호명환 가롤로 신부 ofm

Margaret K 2020. 4. 16. 03:22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영성
호명환 가롤로 신부 ofm

들어가는 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특별한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2-1126)가 주님의 은총에 이끌려 선택한 복음적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교의 어느 영성이든 그 영성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께 두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지만 크나큰 변동과 갈등, 고통과 전쟁의 상황에서 참으로 살아가야 할 바를 찾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의 전체를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이 복음적 삶은 전통적인 수도승적 삶(vita monastica)과도 다르고 당시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던 삶의 양식인 (활동)사도적 삶(vita apostolica)과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 양식(혹은 그리스도교 생활양식)을 형성하게 되었기에 그 기원이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신 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은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은 형제들의 삶의 지침으로 작성하여 교회의 인준을 받은 생활양식(1223년 회칙) 1장 첫 문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작은 형제들의 삶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적 삶의 영성에 있어서의 특징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1. 말씀의 육화와 복음적 삶의 출발점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의 세상으로 들어오심은 그분 온전한 사랑에 의한 것이고 그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선으로부터 나온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이기에 작은 형제로서의 삶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충만한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육화야 말로 우리 인간에겐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는 이 선물을 통해 존재 전체가 이미 하느님 선의 선물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연약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2고린 8,9)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 우리의 창조주를 드러내 주고 있으며, 그분의 어떤 권능과 지혜, 사랑을 계시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나서,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일그러졌다거나, 무식하다거나, 죄 투성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삶의 시작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당신 사랑과의 깊은 일치에로 부르시며 늘 상 일하십니다. 그분은 내 맘 속에서 당신의 지혜를 나누시면서 조명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내가 인간 존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과 선성을 나누시며 나의 정감들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분은 세례를 통해 나와 일치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이나 타락한 상태보다도 우리 창조의 모형인 선성이 바로 그 출발점이고,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더욱 더 크나큰 선과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화가 바로 그 시작점인 것입니다.
이 시작점, 즉 출발점은 늘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고 그분의 선과 사랑과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가 아니고, 나의 죄성에서부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게 엄청난 위안이 되는 것이고 엄청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에게 자각시켜 주는 사건이 바로 말씀의 육화인 것입니다.

2. 복음적 삶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나눔 - 소유 없이 살아가는 삶
이처럼 프란치스코가 삶의 전부로서 만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작은 형제들의 삶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형제들의 삶에는 어떤 사도직(소임)이나 육신적 공동현존(공동전례나 기도 등)과 같은 것이 삶의 핵심이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만남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 복음적 삶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작은 형제회는 창설 이후 800년 동안 한 번도 어떤 사도직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작은 형제들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일을 하고 교회의 수도자들로서 공동으로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이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런 일들과 기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나눔의 과정과 열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우리의 일들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열매들은 하느님의 선으로 돌리는 일이 복음적 삶의 중요한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소유 없이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말씀들과 행위들을 아버지께 돌리셨던 겸허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작은 형제들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살아가는 것임도 분명하나 프란치스코 자신이 가난이라는 말보다도 '소유 없이'라는 말을 선호하여 사용하듯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으로 돌리고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겸허한 종의 자세가 매우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고도 분개하지 않고 흥분하지 않는 종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작은 형제들은 늘 자기의 것을 채우려 하고 악으로 기울어지는 연약하고 악한 인간 조건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당신의 선으로 변화시켜 가시도록 오신 구세주께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 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언 전체에 걸쳐 이렇게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혹은 '주님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을 수차례에 걸쳐 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함과 동시에 이런 부족함을 당신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분의 안배하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포함해서 작은 형제들에게 바랐던 '소유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인 것입니다.

3. 말씀의 계속적인 육화인 더욱 작음을 살아가는 삶 - 형제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형제회의 라틴어 이름은 Ordo Fratrum Minorum입니다. 그런데 우리 수도회의 이름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더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에 나오는 minorum이라는 단어는 비교급 형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 무엇과 비교하여 더 작은'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에 작은 형제들은 다른 어떤 존재, 특히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때 더 작은 형제로 자처하는 이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육화, 즉 하느님의 높으심에서 인간의 작음을 취하신 모범을 따르는 일이고 그분의 이런 작아지는 신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음을 깊이 인식한 프란치스코의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체험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권능으로가 아니라 '가난', 즉 '작아지심'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회칙(인준 받지 않은 회칙) 16장에서 사라센인들과 비신자들에게 가는 형제들에게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1베드 2,13 참조)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칸 체험은 형제적 관계에로 연결됩니다. 즉 진정한 형제애란 '사람은 힘없고 약하고 가난하기에' 한 형제가 기꺼이 모든 이 밑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한 올 한 올 이어지며,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께서 선이라는 것을 모범으로서 빛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께서 인간의 약함을 취하시면서 동시에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여 세상의 시선을 아버지께 돌리셨듯이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약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 밑에 들어가 이 사람들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선에 의해 우리 인격의 완성, 즉 그분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형제애의 근본인 것입니다.

4. 육화의 다른 모습인 성체성사에로 초점을 맞추는 삶 -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은 성체성사, 그분의 몸과 피를 통해 오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육화인 것입니다. 육화의 목적이 우리의 진정한 기원(본래의 모습)을 찾고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선물의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이라면 성체성사의 목적 역시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이를, 모든 존재를 그분의 선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 모든 이를 선물로 인식하고 살아갈 것을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사의 삶, 성체성사의 삶은 성체성사에서 시작하지만 이 성사가 실현되는 장은 바로 우리 삶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체성사 자체는 달리기를 할 때의 준비 자세와 같은 것이고 성체성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이 바로 달리기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이와 마찬가지의 이치로 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삶은 바로 복음을 살아가는 삶인 셈인 것이고 성체성사는 작은 형제들의 삶 한 가운데 늘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온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거룩하신 몸과 피에 대해 이렇게 찬탄하고 있습니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며!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위에서 언급한 작은 형제들의 진정한 형제애를 가능케 해주고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이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늘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작은 형제들은 연약함과 가난의 상징인 성체성사에 시선을 두고 사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성체성사는 힘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기력함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무기력함의 표상인 성체성사는 가난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을 나누는 성사인 것입니다.
이 성체성사의 삶은 결국 육화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상의 제사를 통한 파스카에로 이어지게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에 시선을 두는 삶은 성체성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늘 주님의, 혹은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구체적인 단어, 육화의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육화와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상의 제사는 함께 연결되어 있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 할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취하신 그분의 육화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죽음이라는 한계성을 넘어서는 신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거룩하신 몸과 피를 통해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받아 모셨으며 이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동일화(identificatio)하였습니다. 동일화의 사건은 그의 생애 말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게 된 오상(stigmata, 1124년)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작은형제회의 영성이 추구하는 바의 끄트머리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동일화가 가능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취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을 수용하고 그분의 선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성체성사적 삶에 투신하는 일입니다.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부족하나마 간략하게 소개한 작은형제회의 영성은 사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갈구했던 복음의 이상을 삶 속에 육화하려는 그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가 애초부터 일정한 목적을 지닌 어떤 수도회를 창설하기 위해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참 삶으로 이끌어가도록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는 가운데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고 여기에서 자신과 후에 이 삶에 합류하게 되는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에 시작한 이 복음적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사람에게 열려있는 프로젝트이고 아직도 완성을 향해 전개되어 가는 프로젝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프로젝트에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지금도 초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