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2005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 대축일에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Margaret K 2020. 4. 16. 03:19

로마, 2005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 대축일에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호세 로드리게스 까르발료 형제


2005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대축일에 보내는 총 봉사자의 편지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평화와 선!

 

예수 탄생의 거룩한 밤에,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가져온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쁜 소식 이었습니다:

 “오늘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으니, 그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참조. 루가 2,11).

오늘, 역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인간의 역사, 인간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역사-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밝혀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되셨고, 그분의 장막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참조. 요한 1,14), 모든 이들을 위한 영원한 빛이 되셨고, 정의의 태양이 되셨으며, 구원의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하심이 계시되었고(참조. 디도 3,4), 자비하심은 불쌍한 이들에게 미쳤으며, 깨끗하심은 더러움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고, 죄인들에게는 은총이 내렸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성과 성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며,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내려옵니다(참조. 시편 85). 실제로 예수께서는 탄생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다스리십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나심으로써 아기를 통해 기쁨이 우리에게 왔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의 아들은 우리의 평화이고 선이며, 구원이 되셨습니다(참조. 이사 9,5-6).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승리가 드러나셨고 땅 끝까지 그분의 승리를 보게 되었습니다(참조. 시편 98, 3).

오늘 우리는 육화되신 말씀과 하느님과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오신 그 분의 장막이신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아버지 외아들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됩니다(참조. 요한 1,14).

 

인간의 유한함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 청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우리에게 그 분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고, 우리가 기다려왔던 구원은 오늘 우리 앞에 실현됨으로써 이제 우리는 그 구원을 우리 신앙으로 부둥켜안게 되었습니다. 성탄, 하느님 얼굴의 진실함을 식별하는 신비 우상을 만드는 일은 위대해 지고자 하는 인간 욕구를 투사한 것으로 인간들의 영적 자만심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우리의 위선, 우리의 욕구대로 행하는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우리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이미 완전히 독차지함으로써 우리의 적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빼앗긴 그 순간 우리는 적 앞에 굴복하게 되고 우상의 숭배자가 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이후로 우리 또한 본성적으로 모사를 잘 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우상을 섬긴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가 적수임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성에 대한 어줍은 모사 일뿐 아니라 우리가 만든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에게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러 오십니다. 실재로, 우리가 묵상하는 성탄 전례의 신비는 하느님의 진실된 얼굴을 식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눈앞에 한 아기가 있습니다. 한 아기의 약함과 진실함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너무 가깝게, 작게 느껴져 한번 보기만 해도 우리의 부드러움으로 그를 감싸야 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진실함이요, 우리의 신앙이며 “영원한 영광의 광채 [...] 흠없는 거울”인 것입니다(4LtCl 14). 그 아기는 “그 아름다움을 천사의 무리들이 끝없이 찬미하며, 그의 사랑[...],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천상 예루살렘 모든 시민들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4LtCl 10-13). 그 거룩한 밤에 주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루가 2,1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 목동들처럼 아기를, 남자 아기를, 항상 침묵하시나 때때로 슬피 흐느끼시는 인간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기 전에,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참조. 레오 대교황, 논제 21,2). 우리 눈앞에 인간의 겸손과 하느님의 위엄을 관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나약한 아기를 볼 뿐이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 하느님의 능력을 흠숭합니다. 이 아기는 사랑으로 감정이 없는 하느님의 본성과 감정이 있는 인간의 본성(참조. 레오 대교황, 논제 21, 2)을 시간과 영원을 초월하여 통합합니다. 하느님, 우리 하느님 당신은 우리가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적수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우리가 반드시 돌봐야 할 작은 아기, 사랑해야 할 형제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탄, 인간 본성의 진실한 얼굴을 식별하는 신비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태초부터 인간에게는 매혹적인 유혹이었지만 정확하게 사랑이신 창조주 하느님같이 될 수는 없었고, 대신 하느님의 우상, 인류의 창조물, 죽음의 유일한 원천인 일시적인 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우리는 천국에 이르는 탑을 쌓았으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성탄의 신비는 이제 우리 눈앞에서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인간의 얼굴에 자리합니다.

 

주님이 보낸 천사의 명령은 우리가 목동들과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참조. 루가 2,16).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느낌을 배웁니다: 거기서 모든 허영은 없어지고 모든 경쟁심이 사라집니다; 겸손은 가난으로, 겸손의 기쁨으로, 기쁨의 찬양으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거기서 사랑의 위안, 내적 열정, 영안에서의 친교가 우리의 손님이 됩니다. 우리는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우리의 구세주, 메시아,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을 만나기 위해, 지상으로부터 날아올라 평화의 비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오,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적 지혜의 신비여!: 주님께서 섬기러 오셨습니다; 메시아는 치유하고 해방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구세주는 아기로 태어나 우리를 매혹시키고, 우리의 작음과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육화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우리 창조주에게로 돌아 가게하고 그분을 인식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종이었던 우리가 우리의 불순종으로 그분과 멀어져 그분 집의 이방인이 된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올려졌습니다(참조. 레오 대교황, 논제 25,5). 이 거룩한 밤에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 닫힌 우리 마음의 눈을 은총으로 뜨기 위해 새로운 탄생의 신비를 봐야합니다: 질투하는 하느님 때문에 인류의 인간성은 부재하게 되었으나 하느님은 그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 안았습니다(참조. 필립 2,6-7). 성탄의 거룩한 밤에 작고 가난한 하느님을 묵상하며, 우리는 그분이 모든 작은 사람들안에 또한 인간의 모든 가난함 안에 계심을 깨달았고, 또한 베들레헴의 아기를 위한 애정어린 보살핌은 우리를 그분의 손안에서 굶주린 이에게 빵을, 헐벗은 이에게 의복을, 환자에게 간호를, 갇힌 사람에게 해방을,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게 하였습니다. 성탄, 우리 생활양식의 진실함을 식별하는 신비 우리는 누구나 서약을 통해 사랑하는 하느님께 우리 삶을 봉헌하고, 거룩한 성령의 활동에 우리를 맡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고,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고자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대로 서로 다른 방법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형제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식별의 방법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회개를 통해 우리가 식별의 삶으로 불리웠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형제회 창설 800주년 준비의 첫 번째 해에 우리의 형제이며 사부이신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급진적인 복음적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프란치스코에게 내렸다는 의미는 신적 의지를 알게 해주는 비추심과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전례 거행 때 선포되는 말씀에 의해 우리도 역시 하느님께 불리웠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 세라핌적 아버지의 말씀에서 주님 말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참조. 요한 8,47), 우리는 [...],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실천해야할 뿐만 아니라, 그릇과 다른 성물들이 담고 있는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스스로 감명 받기 위해 장엄한 우리의 창조주이신 분께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나의 형제들[자매들]에게 최선을 다해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경하도록 격려하고 권고하며[...], 말씀하신 주님을 말씀 안에서 공경 하십시오(참조. 1회칙 2,4).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많은 것이 거룩하게 되었고(참조. 1디모 4,5) 제단의 성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축성 됩니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34-37). 하느님의 말씀은 성체성사 안에서 선포되며 -매일의 전례거행 안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임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첫째요, 근본적이요, 필수불가결한 형태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없고, 주님의 몸을 모실 수 없고, 만일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영성체를 한다면: 또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몸을 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몸을 받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우리 마음을 행복으로 채우고, 노래로 자극하며, 변화하게 하고, 자아의 가장 깊은 내면에 도달하게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며, 주님의 몸과 함께 성사적 영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그분의 진실성이 충만한 말씀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분이 메시아 예수라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분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 성서는 그분에 대해 말씀하시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말씀으로서 육화되어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포된 말씀에 대해 의문을 느낄 뿐만 아니라 탐구하고 식별하기 위해 육화하신 말씀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시기인 거룩한 성탄에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아기에게,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준 아기에게 믿음의 눈을 고정시키도록 합시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모든 선의 어머니”(참조. 토마스 첼라노, 1생애 21)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며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도록 합시다(참조. 루가 2,19). 결론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이 교회의 기도를 마음에 지니기를, 변치 않는 대림의 자세를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오소서, 오 지혜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빛이 형제들을 비추소서. 그리스도의 축복이 그대에게 내리소서. 행복한 성탄 되십시오!

 

로마, 2005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 대축일에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호세 로드리게스 까르발료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