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그리스도, 우리의 행복 --M. Hubaut, 신수영 대건안드레아 ofm 역

Margaret K 2020. 4. 16. 03:08

Michel Hubaut, 「그리스도, 우리의 행복」, 신수영 대건안드레아 ofm 역 .
**프란치스칸 사상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에 여러 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것입니다.


제1부 내적 생활의 기초


제1장 내적 원천의 발견

1. 행복에 대한 충족되지 않는 욕망

성서의 시편 작가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 지도 천이백여 년이 넘었다.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을 찾아 헤매려는가? ...뭇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말아라. '그 누가 우리에게 좋으느 일을 봉줄까'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시편 4).

사실 얼마나 많은 헛된 꿈들과 쓸데없는 환상들이 있는지! 또 행복에 대한 이러한 열렬한 추구에 있어서 출구없는 막다른 길목은 또 얼마나 많은지! 바로 오늘도 여러 가지 선전도구들은 행복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들을 쏟아놓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현대인들의 이러한 욕망을 항상 만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 책에서 그들의 삶을 행복의 찬가로 꾸려갔떤 두 존재를 만나보기를 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제시할 어떠한 기적의 비결도 지니지 않는다.
단순히 그들은 장막과 시련과 그 극복, 그리고 또한 기쁨과 광채로 씨 뿌려진 여정을 걸어갔을 뿐이다.
명백히 행복이 환상이 아니라 발견되고수용되고 생활된 것을 사람들에게 있어 이 두 사람은 생생한 증거가 된다. 이들은 그 어느 것도 이론화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살과 마음으로 그토록 단순하고도 그토록 강렬한 체험을 살아갔으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안에서 그것을 연습해 보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13세게 이탈리아 의 조그만 도시에서 12년 차이로 탄생하여 행복에 목말라 했던 두 사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각각 서양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빛줄기-남성적 여정, 여성적 여정, 하나의 공통된 추구, 하나의 형제적 동반 관계, 그 앞에서 다른 모든 善들은 해돋이 앞의 별들처럼 빛을 잃고 마는 그러한 항구적 행복에 대한 놀라운 발견-를 그어 나가게 된다.


2. 자신을 점점 빠져들게 하는 욕망의 수렁

옷감장사의 아들, 젊은 프란치스코는 흥을 깨는 사람과는 정반대였다. 인생계획이 넘쳐 났다.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들 또한 지니고 있었다. 부유하고 지혜롭고 상냥스럽고 유쾌하고, 그의 삶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자기 아버지의 상점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승리했다. 돈, 재미있는 친구들, 세련된 잔치, 광란의 밤거리 순례 등,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에의 욕망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젊은 상인은 끝내 이런 것들에 싫증을 내기에 이른다. 이미 꾸며져 있는 어떤 실존이 갑자기 소름끼치도록 그를 위축시켰다. 성취감이 충만한 어떤 삶을 열정적으로 원하는 프란치스코의 마음과 얼굴은 그것을 거스르려 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기사가 되려는 꿈을 꿨다. 계획이 무르익고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 돈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자마자 다시 한 번 이러한 명예의 가도는 중단된다. 어떤 내적인 낯선 목소리가 그를 뒤쫓는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의 성령이 이끄시고 그의 ‘행복의 욕망’을 깊이하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직 그분의 부르심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무한의 욕망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밀스러이 그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3. 동굴의 상징 혹은 마음의 여정

이러한 욕망의 필수적이고도 쉽지않은 변화를 위해 성령께서 그에게 가난한 이들과 기도와 침묵이라는 두 가지 교사를 보내주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자기 욕망을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배우는 두 학교였다.

나환자들 가운데서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기도와 침묵 안에서 그는 삶의 욕망은 하느님에의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안에 계신 하느님에의 욕망이신 성령의 안주를 결정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회개의 시초부터 그는 점점 더 자주 한적한 들에 나가 홀로 있거나 세상의 어지러움과 거래 중심의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기도의 침묵 안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생각과 중얼거리는 말 저 너머의 것을 듣기 위하여 입을 다무는 것을 배웠다. 같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이 질문하시도록 가만히 있는 것을 배웠다.

프란치스코는 침묵 안에서의 사랑이 사랑의 침묵에로 이끈다는 것을 감지했다. 우리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을 존중하기 위해서 침묵하는 것, 창조주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가만히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에 앞서 가시고 그를 지켜주시는 내적 성소인 “마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내 안에 나의 창조주께서 “거하신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기도의 삶에 도전하게 한 최초의 그리고 결정적인 체험이었다. …

만일 하느님의 원의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감히 기도하려 하지 못할 것이고 기도 안에 머물 수도 없다. 나는 그 성령의 원천이 아니라 성령이 솟아나는 장(場)인 것이다.


4. 우리 욕망의 성령의 뜻에로의 변화

인간은 스스로 절대적 중심, 자기 욕망의 유일한 목표가 되고 신기루 같은 행복에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사실 우리는 여러 방향으로 발사된 욕망들을 향해 던져져 있다.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뜻을 가리고 위압하는 여러 가지 욕망들에 의해 우리는 분열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들이 ‘악의’, 방향을 착각한 욕망들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종종 권고한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회개 시기부터의 개인적 체험이 담겨 있는 글에서 놀랄 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의 악의와 교활함에 대하여 극히 주의합시다. 사탄은 인간이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그 기억에서 질식시켜 죽이고 세속 일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하여 인간의 마음을 눈멀게 하며 결국 자기가 그 자리에 머물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떤 보상이나 업적이나 이익을 얻을 핑계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주님한테서 떨어지게 하거나 떼어놓지 않도록 힘써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봉사자들과 다른 형제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온갖 근심걱정을 멀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님이 무엇보다도 요구하시는 일, 즉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흠숭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와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합시다.”

사실 성서는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데 있어서 무능력함을 증명해 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에 의해 전해진 놀라운 약속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뭇민족 가운데서 데려내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에제 36, 24 이하).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이 약속을 유지하고 실현하셨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의 내밀한 대화를 인간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오셨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고 부활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해방하고 새롭게 방향을 잡아 주셨다.

상징적으로 복음서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때”-에 대해 전하면서 대사제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던 성전, 지성소의 장막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는 장막을 제거하셨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창조 이래 거하시기를 원하신 성전-인간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계시가 프란치스코를 덮쳤다.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침묵 안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는 모든 열린 인간은 하느님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성부와 성자 간의 영원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이처럼 휘황찬란한 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창조의 모든 역사를 비추는 것이다.

성서 자체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대화에 대한 다양한 색깔의 가르침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 찬란한 결말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에서 발견될 수 있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성 바울로는 이렇게 쓴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5. 하느님이 다른 모든 선(善)보다 더 바랄 만한 선이 될 때

따라서 기도는 욕망의 변화의 근본적인 용광로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기도는 성령의 “방문”의 때이다. 정화와 동시에 조명의 원천이다. 항상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시는 하느님의 애정을, 성령의 이 부드러운 숨결이 그에게 계시하였다. “당신은 우리의 온전한 감미로움이시나이다!”

그의 전 생애는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기도를 최초로 만들어내신 하느님의 이러한 호의, 섬세하심에 경탄되어 유지될 것이다. 이것이 그를 태워버린 불, 그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고 자신이 발견한 숨겨진 보물을 친구에게 외쳐 알리고 싶게 한 의욕을 갑자기 그에게 준 기쁨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참된 행복을 발견하였다.

그의 마음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었던 것-다른 모든 선보다도 더 바랄만한 분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그리 멀리에서 찾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하여 그는 그렇게도 자주 사용하였던 중심적인 단어 “욕망”에 대한 참되 신학을 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글들에 자신의 체험의 빛을 받아 그 내용들을 주워 모았다.

그것은 우리 욕망들의 회개(변화); 인간의 온전한 행복이 되는 욕망에로 우리의 욕망들을 일치시키고 지향시키고 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의 욕망-성령을 받아들임 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우리 창조주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감미로우시며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인자하시고 무죄하시고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 회개한 모든 이들과 의로운 모든 이들과
하늘에서 함께 기뻐하는 모든 성도들의 모든 용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의 샘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말기를!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기를!
아무것도 그분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기를!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든지,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과 때에, 매일 그리고
계속해서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삼위이시고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당신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시작도 마침도 없이 변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이시고
표현할 수도 이루 다 말할 수도 없는 분이시며
이해할 수도 없는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찬양을 받으실 분,
지존하신 분, 높으신 분, 감미로우신 분, 사랑하옵실 분, 좋아할 만한 분,
무엇보다도 온전히 세세 영원히 바랄만한 분을,
진실하고 겸손되이 믿어 마음속 깊이 모시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찬미하고 찬양하며
영광과 영예를 드리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



6. 성녀 글라라 : 하느님께 열광하는 열망

귀족 오프레두치오의 파바로네의 딸 글라라는 조금 다른 여정을 취한다. 그러나 매우 여성적인 직관으로 회개한 청년 프란치스코의 깊은 욕망을 알아 맞히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모든 욕망들은 그녀를 매혹시키는 하느님에의 추구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결한 가문의 상당히 인간적인 계획에 용감히 대항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행운과 명성의 특전들을 넘치도록 충분한 행복이라고 여기는 가문의 분위기에 맞서 자신의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지켜내야 했을 것이다. 가족들의 분노와 폭력도 18살 처녀의 하님께 대한 욕망을 돌려놓지 못했다.
프란치스코를 매개자로 하신 하느님의 무상의 부르심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녀의 욕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완고히 지킨 그녀의 ‘성소’는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자기 인정의 근본적 동기가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유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자기 유언을 그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우리가 받았고 또한 매일같이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이렇게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지극히 합당한 모든 욕망들은 사랑이신 분의 무상의 부르심에 의해 통합될 것이다. 보헤미아 왕의 딸로서 프라하의 글라라회 수도원에 입회한 아네스에게 네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첫 번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한 분께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시작하신 그대의 거룩한 봉사 안에서 굳세어지십시오.” 두 번째 편지에서는 “고귀하신 여왕이여, .. 그대의 정배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 세 번째 편지에서는 글라라는 “구원을 이루신 그 님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기원하며 모든 소원이 성취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 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그대가 겸손과 믿음의 힘과 가난의 팔로 이 세상과 인간의 마음의 밭에 숨어 있는 비할 데 없는 보물을 안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네스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도록 초대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부요와 끝없는 영예를 바라보시고, 마음의 넘치는 갈망과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분께 이렇게 외치십시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님을 뒤따르게 해 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 방향(芳香)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참된 행복에 대한 욕망은 또한 명백히 글라라의 생애의 강한 탄력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사랑의 마음 안에 성령의 욕망을 해방시켰다.
프란치스코는 이 귀족 아가씨와의 최초의 대화 이래, 하느님의 강력한 원의 자체가 그 안에서 “거하는” 정신(精神) 자매를 그녀 안에서 감지하였다.


7. 성령의 불을 끄지 않음

비슷한 체험이 풍부하기에 주님의 성령을 받아들임을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자기들과 자기 형제 자매들의 삶의 유일한 이상. 프로그램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들은 이러한 열화 같은 초대를 각각의 회칙에서 보존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행복의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이것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이었다.오직 주님의 영만이 인간을 지향의 순수함과 단순함 가운데, 깨끗하고 곧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성령만이 우리의 온 삶을 유일하게 필요한 것, 절대적 행복, 사랑의 부성(父性)에로 지향시키고 활력을 줄 수 있다.

후에 자세하게 살펴 보게 되겠지만, 성령-사랑만이 우리의 인간적이고 영적인 능력들을, 그것들을 하느님의 원의, 즉 참된 행복에의 욕망에 봉사하도록 하면서 통합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것을 주님의 기도 풀이에서 쓰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주여,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힘과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따라서 형제들과 자매들의 활동들은 행복에로 이끄는 유일한 길인 성령을 받아들임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정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행위들의 방향을 잡아주고 우리의 분별력을 조명하며 우리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기도의 정신, 성령의 불을 꺼서는 아니 된다. 문자 그대로 참으로 카리스마적인 두 인물,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모든 그리스도적 생활의 기초인 성령께 대한 생활된 신학을 자기 글들에 남겨 놓았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을 조심합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지혜와 육의 정신에서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실상 육의 정신은 말을 하는 데 많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노력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신앙과 성화를 얻으려 하기 보다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신앙과 성화를 얻기 원하고 열망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다.(마태 6, 2)”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육신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은 겸손과 인내, 순수하고 단순하며 진정한 마음의 평활르 얻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성령은 모든 계책, 사회적 종교적 핑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를 어리석은 자만심, 헛된 영광, 형식적 종교로부터 해방시킨다. 성령은 참된 지혜, 사랑의 지혜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지혜-욕망과 세상의 지혜-욕망을 대립시킨다.
“육적인 욕망을 가지고 세속의 걱정과 살아갈 근심에 싸여 세상을 육적으로 섬기는 모든 사람들, 악마의 짓을 그대로 하고 악마의 자식들이 되 이들은 악마에게 속아서 눈이 멀었습니다. 참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참된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자기 안에서 모시지 않기에 영적인 지혜를 가지지 못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겸손과 마음의 단순성은 우리 안에서의 이러한 지혜의 현존의 첫 번째 표징임을 주목하자. 한편, 그에게 있어서 죄는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 자기가 행한 선을 오만하게 자기의 덕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안에서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심에도 말이다. 끝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근본적인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빼어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첫 동료들은 그의 태도를 잘 요약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박식한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현시에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발전시켰다”


8. 욕망이 기도가 될 때

의심할 나위 없이 하느님의 생명에로 지향되어 창조된 인간은 여기 땅 위에서 현실 조건의 한계 안에서는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에 대해서 어느 날엔가 생생하고도 고통스러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인간, 그에게 허여(許與)된 사랑을 지속하는 강들처럼, 그들의 삶은 우리 욕망의 깊이와 목표 - 창조주의 사랑을 드러내준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당신의 피조물들을 충만케 하는 기쁨을 누리시고자 그들이 욕망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으로 용해되고, 비가시적이고 충족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수수께끼를 밝혀준 이들이었다. 인간은 충만의 욕망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행복에 대한 그토록 소란스러운 추구 후에 “주님,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절부절 못하나이다.”하였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욕망을 하느님의 욕망, 무한에로 추구, 기도로 만들기 위하여 거기에 머무르시려고 오신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내적 생명은 물론, 그들의 극단적인 예수 그리스도 추종, 때로는 영웅적이기까지 한 충실성, 사랑하시는 선(善) 그리고 정배이신 분과의 친교, 그들의 삶의 전염성 강한 광휘(光輝) 등은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들이 성령께서 자기들을 빚어내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놓을 때 그분의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들 중 한 사람은 그에게 “성령 도유의 충만함”을 부여한다. 그리고 성녀 글라라는 성령께서는 그의 생애를 충만케 하고, 그 생애를 사랑의 역사로 변모케 한,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임을 확인하며 죽어 갔다. “평화로이 가시오. 당신은 훌륭한 호위를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창조하신 후에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작은 아기를 돌보듯이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칠 줄 모르고 행복을 찾는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분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일 때 우리가 주님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일 때 우리가 주님의 문을 두드린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존재가 되고 또 행복하게 살려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시려는 단 하나의 욕망을 지니시기 때문이다.

“들어라. 내가 문 밖밧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9. 성령의 불에 의해 정화되고, 조명되고, 불살라져....

제1장을 프란치스코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중의 하나 그리고 아마도 13세기 영성 작품 중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서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내적 생활의 놀랄 만한 종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 때문에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불쌍한 우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에 불타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지존하신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당신은 완전한 삼위이시고 순수한 일체를 이루시며
그 안에서 생활하시고 다스리시며
세세대대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시나이다. 아멘“

하느님의 영원하신 전지전능 앞에 무릎을 꿇고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한계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지니고 있다. 창조의 정점에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인간은 유한성이 설정된 존재, 그 자신의 노력으로서는 무한자, 비가시적 실재와의 관계에 들어갈 능력이 없는 존쟁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이러한 극복불가한 심연을 채우시고 이러한 만남을 주도하시고, 당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러한 대하를 허용하실 수 있다. 모든 것은 은총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만을 청한다. 항상 하느님의 원의, 그분의 거룩한 뜻과 일치하여 있기를, 그리고 그것을 항상 이룰 수 있기를. 그의 기도는 사랑 안에서의 일치의 욕망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분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듣는 것 자체가 또한 거룩한 세 위격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적 생활의 삼위일체적 구조에 대해서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심오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문적 미묘함 안에서 길을 잃음이 없이 프란치스코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자들을 통하여 자주 개진된 내적 생활의 주요한 특성들을 단순성 안에서 재발견하고 있다.
정화, 조명, 사랑 안에서의 일치. 이는 빛과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에로 신자들을 조금씩 인도하시는 성령의 근본적인 열매들이다. 사랑은 인식의 길로 변하며 인식은 사랑의 길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이러한 역동성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자리한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영성생활은 우리의 형제요 주님이신 분, “매우 사랑받으신 분”을 따르는 여정이다. 그분의 유일한 사명은 우리를 하느님의 광채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위대한 신비가의 놀라운 일치에 감탄하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신앙에 의한 단 한 번의 시선으로 예수의 생애의 모든 단계를 관조하였다. 그의 기도는 결코 역사적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의 부활과 성부의 영광에로의 승천을 통합하였다. 그리스도 추종은 갈바리 산의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까지 튀어 오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적 생활의 이상은 사실 순수한 은총으로 인하여, 완전한 삼위이시며 순수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프란치스코적 영성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령을 받아들임을 요약하는 훌륭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성령은 이러한 모험에 대한 내적인 속삭임이요, 신앙 빛, 사랑 불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무 지워진 여정이시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최종목표이시다. 그리스도적 성성(聖性)의 모든 것이 여기 있지 않은가? 프란치스코가 기도 안에서 받아들인 은총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하느님께의 ‘복귀’가 불가능함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되새겨야 할 것이다.


사이 기도
내 삶의 명백성에게
----미켈리나 뒤베 수녀(글라라회)

(*역주 : 글라라라는 이름은 “맑다, 명백하다” 라는 뜻을 지닌다. 이 기도의 작자는 성녀 글라라가 자기 삶에 명백한 의미를 전해 주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밭의 보물을 내가 발견할수 있게 해주오
그대 정원의 태양은 그토록 아름다우니
나는 하나, 다나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손을 잡고 그대가 나를 이끌어주는 것.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발자취의 예술에 나를 길들여 주오
그대 영혼의 춤이 그토록 행복스러우니
나는 하나,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내 모든 것을 그 박자에 맞추어하는 것.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삶의 흐름에로 나를 이끌어주오
우리 자매 물의 흐름이 그토록 맑으니
나는 하나,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같은 샘에서 샘솟는 것.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얼굴의 신비에로 나를 받아들여 주오
그대가 기도할 때의 시선은 그토록 단순하니
나는 하나,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그대 빛의 빛줄기가 되는 것.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사랑의 향연(香煙)으로 나를 태워 주오
프란치스코 형제 안에 들려 준
그대의 노래는 그토록 감미로우니
나는 하나,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그대의 목소리를 영원히 하는 것.


글라라, 내 자매 글라라여
그대 가난의 전부이신 분께로 나를 이끌어주오
복음 안에서 그대 마음이 그토록 기쁘니
나는 하나,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어요
그대와 같은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