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2. 7. 19:46

2020년 2월 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 6,30-34)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다른 축복도 약속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소임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중점을 두는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더 나아가 사목적으로도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자신의 속이 뒤틀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창 신부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기에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 때가 되어서 동창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가서 식사라도 하자. 이 근처 맛집이 있니?”

그런데 동창 신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없어.”

“아니 왜 없어?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맛집이 없으려고?”

“맛집은 다 서울에 있지. 실력 있는 사람이 시골에서 장사하겠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사람이 없어 소비가 많지 않을 테니 당연히 특색있는 맛집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함께 간 집은 아주 허름한 가게였습니다. 메뉴판도 없었습니다. 그날 준비된 재료로만 만들어서 파는 백반집이었습니다.

가게는 깔끔하지 않았고 사람을 끌 만한 특색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친구와 함께 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한 자리는 어떤 음식을 차려 놓아도 맛집 수준으로 올려놓습니다.

세상 사람은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맛집 소개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혼자 외롭게 먹는 음식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큰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전교 여행은 너무나도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가도 어떻게든 쫓아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기들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피곤하다고 사람들을 외면하는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사람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따르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람을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자신만을 먼저 바라보면서 그들을 오히려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늘 사람이 먼저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사람이 먼저라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스트레스다. 사랑하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열정이다(사이먼 사이넥).



지금 어떤 자리에 있나요?

1990년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밭농사를 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김매기’, 바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온종일 잡초를 뽑았는데, 다음날이 되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잡초가 나오더군요.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잡초를 그냥 놔두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잡초를 뽑아줘야 농작물이 잘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잡초를 뽑다가 쑥을 보았습니다. 쑥은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쑥은 그냥 놔둘까요?”라고 했더니, 여기서 키우는 농작물 외에는 다 잡초니까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밀밭에 벼가 나고 있으면 이 벼가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고 있으면 이 밀 역시 잡초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어떤 장소에 나느냐에 따라 필요 없는 잡초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잡초처럼 쓸데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내 존재를 귀하게 만들어 줄 장소에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 안입니다.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 것만 좋아한다면 내 존재는 보잘것없게 됩니다. 지금 어떤 자리에 있나요?                   

"몰랐다"는 핑계는 나를 계속 무식하게 만든다.

-전삼용신부-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합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그 섬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섬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6년,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는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몰랐어요!”란 핑계를 많이 댑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꼭 핑계가 될 수없는 이유는 알려고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면 지켜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몰랐어요!”의 핑계가 더 적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몰랐다는 핑계는 이렇게 계속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며 참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피곤한 상태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도 나오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끝까지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귀찮아하시지 않고 진리를 갈구하는 그들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피곤하니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제 서울 모 성당에서 저의 책을 일 년 동안 전 신자들이 영적독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해서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날씨도 추워졌고 더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신자들이 적게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자 강의를 듣기 위해 거의 교중미사 수준으로 신자들이 성당을 채웠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열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인 저도 그럴진대 하느님께서야 당신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이가 얼마나 짠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싶은 우리의 열망입니다. 그 열망만 있다면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분명 알 수 있었던 것들이기에 몰랐다고만 핑계를 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 천사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의 잉태를 예고했습니다. 요셉에게 나타나서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종교인 이슬람에서도 가브리엘 천사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함마드에게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승천할 때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때 하느님의 뜻을 전한 천사도 가브리엘이었습니다. BTS(방탄소년단)가 세계의 무대에서 인정받는 것이 기분 좋은 것처럼, 영화 기생충이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 기분 좋은 것처럼 저의 세례명이 이웃종교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신문을 홍보하는 일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소중한 일입니다. 짚신장수와 우산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성공, 권력, 재물, 명예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솔로몬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들어주셨고, 부와 명예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저의 쓰임, 재주, 본성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싶으신지요?


아버지의 뜻을 새겨

    -반영억신부-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상에 외딴 곳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군중들에게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기시고, 마치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양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던 것은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참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양인가?


진정, 우리가 그분의 이라면, 우리를 측은히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 34)

-한상우신부-

희망의 봄이
되시는 목자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목자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밤을 새우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마음 아파하시는
목자를 만납니다.

우리 삶을 비추어
주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그 목자는
희망의 빛이
되어주십니다.

말 없이
우리자신을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긴 시간을
뜨겁게
기다려주시고

아프게
사랑하여 주시는
목자께서 삶다운
삶이 사랑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말씀들로 표현된 하나의 본질을 만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첫 선교 여행을 떠났던 열두 제자가 이제 막 돌아와 스승님 주변에 모여듭니다. 피로도 잊은 채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마르 6,30)하며 그간의 희로애락을 나눕니다. 흥분이 좀 가라앉자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피곤한 기색을 읽으십니다. 하느님 일의 마무리는 세상 창조 때 그러셨듯이 "안식"이어야 합니다.

"따로"
이 분리는 제자들을 일과 관계와 성과주의로부터 떼어놓습니다.
"외딴곳"
이 매혹적인 장소는 제자들을 하느님과 친밀히 머물게 합니다.
"쉬어라."
이 쉼의 권고는 예수님의 짠한 연민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이 휴식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게 하고, 그간의 일을 하느님과 잘 정리하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그런데 웬걸!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따라잡습니다. 뒤쫓아오다가 아예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기다립니다. "외딴곳"이 마치 "장터"처럼 되어버립니다.

"가엾은 마음"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며 "오죽하면"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셨을 것 같습니다. 한눈에도 보이는 그들의 절박함,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시달리는 병고, 더러운 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굶주림과 죄의식...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에수님 일행의 목적지였던 "외딴곳"은 복음 선포의 현장으로 바뀌고 제자들의 쉼은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계획을 바꾸신 것은 그분이 우유부단하거나 목적의식이 희박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목적이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하신 여정이 군중에 대한 사랑으로 옮아가며 확장된 것입니다. 사랑에서 출발한 여정은 사랑을 향하기에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도 여전히 사랑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 내용이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시간보다 일에 매몰되고 성과 중심으로 흐르는 일부의 민낯을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안식은 창조 이야기에 드러나듯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신 무릎 앞으로 오다 말고, 군중에 대한 연민의 사랑으로 잠시 지체한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더 그리워하고 더 설레고 더 흐뭇히 당신 차례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솔로몬 임금과 하느님 사이에 오간 다감하고 친밀한 대화를 들려줍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으시는 하느님께 솔로몬이 답합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들어 높일 부와 명성과 얕은 지력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청한 것입니다. 그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 줌으로써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려 합니다.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1열왕 3,12).
그가 청한 분별력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청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겠다고 하시네요. 솔로몬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백성의 기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듣는 마음, 분별, 지혜, 가엾은 마음, 가르침..."
이 모두는 사랑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따로, 외딴곳, 쉼"
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개인 소명을 "지금 여기" 삶 안에서 실현하는 여정에서 이러한 사랑의 다른 표현들을 적절히 조화롭게 구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건너뛰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지만, 각자에게 조금 더 강세가 붙는 개별적 은사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주님께서 오늘 새로이 벗님에게 물으십니다. 중심 잘 잡고, 방향도 잘 잡고, 존재 저 깊이에서 우러나는 답을 한번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안위에만 코를 박고 사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 되었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것이니 우리의 청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멘.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 
-김찬선신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열왕기가 시작되고 다윗에 이어 왕이 된 솔로몬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청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솔로몬은 다른 것을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이라는 표현이 오늘 제게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 한국인이 언뜻 생각하기에 마음이란 자기가 먹는 것인데
왜 하느님께 주십사고 청하는지 그것이 생각을 하게 한다는 뜻이지요.

흔히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우리는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되는데 먹을 마음이 없으니
먹을 마음을 주십사고 청하는 걸까요?
먹고 싶은데 먹을 음식이 없으니 음식을 달라고 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각이나 의지는 있지만 마음이 동하거나 내키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마음이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감성이나 의지는 듣고 싶지 않아 마음을 먹지 못할 수 있고,
의지까지도 들으려고 하나 나의 감성이 듣고 싶어 하지 않아
마음을 먹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상태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이기에,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을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은 어떤 말도 듣기 싫은'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이 두 가지 그러니까 들을 수 없거나 듣기 싫은 두 경우,
스스로 듣는 마음을 먹을 수 없기에 듣는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튼 듣는 마음만 있으면 끝인데 이때 듣는 마음이란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만 있으면 열린 마음으로 좋은 얘기를 다 들을 것이고,
그렇게 잘 들어주면 좋은 얘기를 해준 사람들은 나의 우군이 될 것이며
그들이 해준 얘기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해준 얘기가 다 좋은 얘기이냐 그것인데
좋은 얘기인지 나쁜 얘기인지, 옳은 얘기인지 그른 얘기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다음 이어서
분별력을 주십사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그렇습니다. 듣는 마음만 있으면 인간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인간의 도움이나 조언은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합니다.
사실 인간에게 청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도 지혜인데
솔로몬이 처음에는 하느님께 청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래서 영적으로 지헤로운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말년에 변절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시 말해서 기도하지 않고
사람의 말 그것도 이방 여왕의 말을 듣습니다.

듣기 좋은 말에 교만해지고 미혹이 되어 영적인 지혜를 잃은 것인데
좋은 말이 아니라 듣기 좋은 말만 듣는 어리석음에 우리도
빠지지 말아야 함을 솔로몬에게서 교훈삼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마르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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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한재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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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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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열왕기가 시작되고 다윗에 이어 왕이 된 솔로몬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청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솔로몬은 다른 것을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듣는 마음이란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만 있으면 열린 마음으로 좋은 얘기를 다 들을 것이고,
그렇게 잘 들어주면 좋은 얘기를 해준 사람들은 나의 우군이 될 것이며
그들이 해준 얘기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해준 얘기가 다 좋은 얘기이냐 그것인데
좋은 얘기인지 나쁜 얘기인지, 옳은 얘기인지 그른 얘기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다음 이어서
분별력을 주십사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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