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5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2. 4. 19:59

2020년 2월 5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They said, “Where did this man get all this? 
What kind of wisdom has been given him? 
What mighty deeds are wrought by his hands! 
Is he not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the brother of James and Joseph and Judas and Simon? 
And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께서 내리시려는 재앙에 괴로워하면서도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겸허하게 받아들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단순히 당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이기에 그러합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지만 몇 가지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은 손뼉이 마주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 가정 환경, 친인척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고 예수님께 믿음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우유 시음 실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기자 몇 명이 우유를 마시고 그것이 마치 상한 것처럼 구토를 하자 다른 참가자들도 우유를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우유가 상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우유의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유 자체는 맛과 영양을 지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우유를 마시고 독만 얻었습니다.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사랑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손을 통하여 기적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고, 그 열매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 기적은 무용지물, 더 나아가 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이 계셨는데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분께서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쓸데없는 검사만 실컷 한다고 말하고,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독약이라면서 먹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을 자녀들이 억지로 데려간 것입니다. 이 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지 않겠다, 의사 앞에 내 몸을 보여줄 필요 없다면서 실랑이를 계속해서 벌였습니다. 몸이 너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또 몸을 보여도 주지 않으며 약을 비롯한 처방도 거부한다면 병이 나을 수 있을까요?

자연히 치료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를 불신하면서 멀리한다면 치료될 수 있는 병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주 위중한 병을 극복한 사람을 보면 의료진을 불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굳게 믿고 의료진이 하라는 대로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러나 아주 훌륭한 의료진이 투입되어도 믿지 않는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굳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보다, 협박과 공갈의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이거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다.”, “주님, 이거 안 해 주시면 저는 이제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면, ‘그의 믿음’을 보시고 또는 ‘주변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자는 믿음이 그리고 의사에게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처럼, 우리의 굳은 믿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는데 사람들의 믿음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전해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고,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려고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믿음 없는 고향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예수님 기적의 수혜를 입어야 할 사람이 주변의 ‘믿음 없음’으로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 없음’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까지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무언가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당신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노먼 빈센트 빌).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

요즘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옛날과 다른 풍경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모습이 참 아쉽습니다.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는데, 제가 서 있는 근처에 앉아 있었던 분이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내서 읽는 것입니다. 괜히 반갑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이분에 대한 호감도가 계속 증가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단순히 책을 꺼내 읽을 뿐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까요? 또 어떤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바라보실까요? 당연히 당신의 뜻에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좋아하시는 주님과 달리,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산다면 전혀 관심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주님과 달리, 자신의 영광만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심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함께 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처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라

-전삼용신부-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의사가 저런 상태에서 베토벤을 죽였다면 그가 작곡한 음악은 하나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느님도 가능성을 열어놓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이 깜짝 놀라는 이유는 ‘새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대패질을 하며 사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잘하시고 기적도 행하시게 되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기로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은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에 놀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만 믿으면 그 은혜를 주실 텐데 억지로 믿지 않아 그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이런 믿음만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게 만들고 결국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맙시다. 그러면 정말 새로 태어나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의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오기 전에 저는 교구 성소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성소국에서 하는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예비 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매월 예비신학생을 위한 모임이 신학교에서 있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부제님들이 예비신학생 모임을 준비하였고, 함께 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을 선별하고 추천하는 일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업과 수련을 마친 부제 후보자와 사제 후보자의 서품식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매년 2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부제 서품식과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서울대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9년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 분들은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기도를 소홀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제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 적도 많았습니다. 몇 번 넘어졌지만 성모님의 전구하심과 부모님의 기도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등경위의 등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겁니다. 새 사제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반영억신부-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요,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우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나자렛에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는 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존경을 받으려고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마르 10,45).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끝부분에 있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로 해석됩니다.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인데,
믿는 것도 거부하고 구원받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도,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거부하고 배척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도 안 받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집안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알고 있다.’ 라는 그 생각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입니다.
(혹시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한다.”,
또는 “목수가 어디 감히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가?”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당시에 그곳에서는 목수는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한 일은,
나자렛에서만의 일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흔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또 예수님만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도들, 예언자들, 선교사들도 흔하게 당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 사람이
나보다 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학력이 나보다 모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나보다 못났었다는 기억만으로,
그의 약점과 그의 과거를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비웃고,
그러면서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이것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즉 무심코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내가 아는 그대로, 또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 사람을 그렇게 대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 라고
따질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아닌지,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또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과연 그 사람의 전부일까?
모르고 있는 것들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더 많지 않을까?
어떻든 어떤 경우든지 간에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교만죄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잘난 체 하는 것만 교만죄가 아니라,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도 교만죄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의 첫 번째 죄는 교만죄입니다.)

‘교만’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짓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고, ‘거짓 겸손’이고, ‘위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똑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 앞에서도, 나의 후배인 사람 앞에서도,
아랫사람 앞에서도, 나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도,
또 내가 그의 약점과 결점을 알고 있어도, 그의 과거를 알고 있어도,
나를 낮추고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 당신을 낮추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장).
심지어 유다가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유다 앞에서 당신을 낮추셨고, 그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한상우신부-

모질고 질긴
고정관념의
폭력입니다.

늘 어느쪽이든
치우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고정관념의 크기가
자아의 크기입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갇힌
우리들의 무지를
깨우십니다.

어제의 그 사람은
오늘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믿음은
가능성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닌
활짝 열어두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고향방문처럼

우리의 첫시작에서
하느님을 향한
첫마음을
새롭게하는 은총의
시간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놀라움'을 체험합니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마르 6,2).
고향 나자렛에 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특출한 가문도, 별다른 배움도 없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지혜를 풀어주니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못마땅함으로 흐릅니다. 사실 놀라움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예상치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을 만났을 때 솟아나는 순수하고 건강한 반응으로,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 놀라움이 경탄과 찬미, 감사로 흘러 흐뭇하고 대견하고 보람있는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거나, 아니면 선입견과 편견, 질투로 흘러 불신이 더 팽배해지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하면서 나름의 가치를 획득할 겁니다. 오늘 나자렛 주민들은 후자를 택했지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실망하거나 분노하신 건 아니지요. 그저 놀라셨습니다. 하느님의 경이로운 은총 앞에서 이토록 잽싸게 어둠으로 돌아서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에 놀라신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니 기적도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고 동력이라고 누차 밝히셨지요.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은 서커스나 마술 등 쇼에 불과할 뿐 하느님께 올리는 진정한 경탄과 감사를 낳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왕 다윗의 또다른 죄를 마주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인구 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정인데 왜 그것이 죄가 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신정 체제, 곧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독특한 혼합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 현존과 그분 능력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백성의 수는 곧 병력이니, 이스라엘의 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의 수와 전술과 전투 능력에 달리게 되지요.

놀라기를 거부하고 계산과 예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은 변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적정한 오차 범위 안에서 기쁠 일도 실망할 일도 없는 데이터 의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다윗의 죄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해 하느님께 경탄과 경외 드리기를 멈추고 그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영혼이 완고하고 무디어지지 않았다면 삶 속에는 놀랄 일이 참 많습니다. 사실 삶은 영혼 안으로 신선하게 밀려드는 새로움의 공기를 한껏 들여마시면서 매순간 새로이 하느님께 놀라고 그분 현존에 놀라는 여정의 연속입니다. 경박한 호들갑이 아니라 충만한 설렘입니다. 놀라기를 멈추는 순간 영혼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박제가 되고 화석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 시편 139,14).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하루, 우리 각자의 생명과 존재에 놀라고,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가난함에 놀라고, 그분이 이루신 속량의 부요함에 놀라며 감사하고 찬미드리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놀라움과 경탄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와 맞닥게 하고 관상에로 이끌어 올립니다.

천벌을 받겠다는 우리  
-김찬선신부-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며칠 전 저희 형제들끼리 대화를 나눴는데 한 형제가
자기에게는 하느님께 벌을 받는다고는 느낌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자비하셔서 그럴 리 없는데도 자꾸 그렇게 느끼니 자기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다른 형제와 얘기 나눈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듣고 다른 형제는 이렇게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련을 받는 것이라고.

틀린 말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도록 정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종합하면 이렇게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 정련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벌은 하느님의 자비인 것이요 자비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이 받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벌이라고
그렇지만 자비의 벌이라고 믿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가 받는 것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가 받는 벌이 천벌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라고 믿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처럼 이왕 벌을 받을 바에는 인벌을 받지 않고,
천벌을 받겠다고 해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우한 폐렴이나
내가 암에 걸린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두 가지인데
'자업자득이다.'와 '천벌이다.' 두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자업자득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하는 얘기이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으니 인간에게서 그 이유와 원인과 답을 찾을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잘못했거나 인간이 잘못해서 그런 병이 생긴 거라고 하거나
자연의 이치에 거스른 짓을 해서 그런 병이 생긴 거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이런 무신론적인 태도를 깨야합니다.
병이 하느님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벌도 하느님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깨야 할 또 다는 것은
천벌을 나쁘게 보고나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라구!'라는 말이 있고,
이 말은 아주 심한 욕이나 저주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천벌이 인벌보다 더 고약한 벌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벌을 주시지 않는다는 믿음이나
천벌이 인벌보다 더 무자비하고 고약한 벌이라는 믿음 모두 깨야 합니다.

인간이 무자비하지 하느님이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미움이나 분노 때문에 벌을 내리지 하느남은 그러시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자비로 벌을 내리시고 우리를 정련코자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천벌을 받겠다는 다윗에게서 이것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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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내 마음대로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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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곧 자신들의 고정관념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결국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하여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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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로 표기하고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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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의 크기가
자아의 크기입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갇힌
우리들의 무지를
깨우십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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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인구 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정인데 왜 그것이 죄가 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신정 체제, 곧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독특한 혼합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 현존과 그분 능력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백성의 수는 곧 병력이니, 이스라엘의 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의 수와 전술과 전투 능력에 달리게 되지요.

놀라기를 거부하고 계산과 예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은 변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적정한 오차 범위 안에서 기쁠 일도 실망할 일도 없는 데이터 의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다윗의 죄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해 하느님께 경탄과 경외 드리기를 멈추고 그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 시편 139,14).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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