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6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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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마르코 6,7-13)
Jesus summoned the Twelve
and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의 길을 걸으면 성공할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유언을 남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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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시속 48km의 속도에서 사고가 났을 때의 충격이 7층 높이에서 떨어질 때 받는 충격과 같다고 하지요. 그만큼 큰 위험에 있으므로, 스스로 보호하고 또 다른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안전띠는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조금의 편안함을 위해 생명을 담보로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가 분명합니다.
차에 탄 사람이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만 같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주님을 생각하면 사랑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놀고 싶은데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라는 것은 큰 구속처럼 보입니다. 나의 노력을 얻은 재화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떠올려 보면 당연히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야 할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전띠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은 부자 청년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더욱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주님이라는 안전띠는 완전한 사람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당신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안전띠를 매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의 굳건한 의지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모범을 떠올리면서 주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뜻을 잘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꾸준히 운동해서인지 불편함 없이 살고 있지만, 한때 제 삶을 힘들게 했던 신체 부위가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허리’입니다. 이 허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매년 병원에 입원하고, 어떤 때는 가벼운 것을 집어 들다가 또 어떤 때는 엉덩이로 차 문을 닫다가 삐끗해서 꼼짝 못 하게 되는 어이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처음 허리가 아파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때는 정말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다가 쓰러진 것입니다.
도토리는 아주 가볍습니다. 그러나 이 도토리를 줍다가도 병원에 입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허리 상태가 좋았다면 아주 무거운 것을 들더라도 아플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토리 하나에도 꼼짝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좌절이나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튼튼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에 집중할수록 주님한테서 멀어져서 약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마라
-전삼용신부-
어느 날 악마가 한 청년에게 나타났습니다.
“흐흐,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네 재산을 모두 내게 바치든지, 네 누이를 팔든지 아니면 큰 술잔으로 술 열 잔을 마시든지 이 셋 중의 하나를 행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 말은 들은 청년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내 다정한 누이를 팔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의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다. 애써 모은 나의 귀한 재물 또한 어찌 네게 줄 수 있겠느냐? 차라리 술 열 잔을 마시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 열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술을 즐겨마셨습니다. 늘 술에 취해 살던 그는 결국 가장 사랑스런 누이를 팔아넘겼고, 급기야는 재산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마의 뜻대로 그는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습니다.
악한 것들 중에 어떤 것만 안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으려면 다 끊어야합니다.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말아야합니다. 대죄는 내 안에서 성령의 귀한 은총을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조약돌 ‘다섯’은 ‘오감’, 즉 육체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주셔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조약돌이 매끄러웠다는 말을 굳이 쓴 이유는 다윗이 그때는 오감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영혼입니다. 많은 영혼을 주님께 바치려면 내 안에 주어진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여 적어도 대죄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합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입니다. 한 모임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2세의 어르신께서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1990년부터 작성한 ‘연도명부’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3458명의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명부에는 고인의 이름, 세례명, 나이, 장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고인의 유족들은 고인을 위한 기도를 들으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면 연도를 받고 싶어서 개종하신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3458명의 고인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시면 연도명부를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로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숨은 봉사자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90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고백성사를 원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미국에 오신지 오래되셨지만 영어가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어르신이 사시는 아파트 옆에는 미국 성당이 있어서 그곳으로 미사를 가지만 3년 동안 성사를 못 보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연락이 되었고, 저는 어르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는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오래된 가톨릭 기도서를 보았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당시에 새롭게 개정된 기도서였습니다. 기도서를 열어보니 1968년에 발간되었습니다. 52년 된 기도서입니다. 어르신께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기도서를 가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기도서는 진리가 담긴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낡았다는 이유로 보물을 너무 쉽게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진리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입원을 하신 교우 분을 위해서 봉성체를 하였습니다. 병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자매님은 저를 보면서 간절한 모습으로 부탁을 하였습니다. ‘오늘 암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신부님께서 기도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병원 복도에서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의 간절함을 기억합니다. 함께 기도를 하면서 자매님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매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술이 잘되셨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은 기억입니다. 사제가 된 보람을 느끼던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반영억신부-
여행을 하기위해 짐을 챙길 때에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돌아다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를 해야만 안심이 되는가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 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립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어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선포에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6,13)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데,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제자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 곧 증거가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선포자는 곧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 진정, 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이지만,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아 가서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이야기가 있는데,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마르 6,1).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신 일을
직접 생생하게 목격했을 텐데, 그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기가 꺾였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각오와 결심을 더욱 새롭게 했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기가 꺾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나자렛에서 겪은 일은,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가 아니라 고위층 사람이었다면,
또는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었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바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세속에서 높이 떠받드는 어떤 학위나 지위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정치적인 배경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박해를 안 받았을 것이고, 시련과 고난을 덜 겪었을 것이고,
선교활동을 편안하고 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세속에 속한 것들을 욕심내지도 말고 갖지도 말라는 명령이고,
오직 믿음의 힘으로만, 또 ‘하느님 안에서만’ 선교활동을 하라는 훈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세속의 그런 것들은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마르 4,19).
“그래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선교활동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이 중요한 활동입니다.
(“복음을 ‘얼마나’ 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하는 활동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권력의 힘’이나 ‘정치적인 배경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그냥 세속의 정치활동입니다.
세속의 학위나 지위 같은 것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활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꼭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따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
령은, 그런 것들을 얻기를 바라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 ‘빈손’으로 떠난 사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고,
나누어 주는 사람 자신도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사도들이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믿음과 열정으로 가득 차서 떠났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날 때에도, 또 돌아올 때에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세속 회사들의 영업활동처럼 한다면,
신자 수를 늘려서 교세를 확장하고,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형 교회가 되고,
재산을 축적하고 증식해서 점점 더 부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러면 그 종교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선교활동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
그것만이 선교활동의 목표입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교회는 ‘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운영합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대해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삶’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인들이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재산을 낭비하는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참 생명, 사랑, 평화, 기쁨을 누리고 있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세속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두 벌을 껴입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풍습은 손님에게 친절히 접대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던 것이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마르9,37) 이것이 지금 사목을 하고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복된 삶으로, 생활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이기주의의 바람막이가 아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만 의탁하며 이 순간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한상우신부-
복음의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파견의 체험은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파견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하는지를
깨닫습니다.
파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파견은
둘씩 짝지어
보내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파견은 가장
직접적인
주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파견은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향하는
파견의 본질입니다.
파견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파견의 소명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파견의 삶입니다.

길 묵상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 비춰볼 때 인생을 참 잘못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도 하시고 머물라고도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떠나서 가라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하러 가서는 한 집에 머물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줄 알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지 못하고 역마살이 낀 사람 마냥 떠나려고 합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있던 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고,
떠나는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바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 또는 굴종이고
기꺼이 할 때만 순종이라고 할 때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특히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이 지금 머무는 곳보다 다 나은
곳이기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그곳으로 보내시는 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뒤집어 얘기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지로 밀어 넣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시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땅으로 보내시는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는
한 수녀님의 파견 미사를 제가 주례하기 때문인데
그곳에 가면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해도
그곳이 나에게는 더 나은 미래이고 행복이라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길을 더 힘차게 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새로운 길을 흔들림 없이 가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누누이 하는 얘기지만 사랑할 때에야 고통스러워도 그 길이 행복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행복하기에 그 길을 열정적으로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지요.
오늘 저는 길 묵상을 마치면서 다윗의 마지막 길을 묵상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르 6,7).
악에 대한 권한은 본래 하느님의 것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셔서 그 권한을 행사하시면서 이제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미처 만나러 올 수 없는 각 지방 곳곳의 사람들도 파견된 제자들을 통해 그 권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 임금이 왕위계승자인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 지켜라. 그러면 네가 ...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다윗이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국제 정세 읽는 법이나 외교술, 전쟁기술, 통치 노하우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지켜나가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며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새 임금에게 뼛속 깊이 새겨 주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화답송).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나 봅니다. 사실 아무리 건강과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 한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쌓고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만물과 나라와 권세가 주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복음 환호송).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 공간적 국가라기보다 선하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지요.
"빵, 여행 보따리, 돈, 옷"(마르 6,8-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선교 여행의 준비물 목록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하시는 하나하나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가리키는 본질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맡기고 훌훌 자유롭게 가라"는 것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하느님 주권을 인정하고 체험하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자들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될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느님 뜻대로 살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제자들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를 몸소 삶의 표양으로 보여 주고 계셨지요. 제자들에게는 실전에 임하기 전에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보고 배운 가난, 의탁, 비움, 버림, 자유 등을 한번 더 육성으로 확인하는 정도가 되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복음서 초반의 선교 여행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자들은 아직 미숙하고 준비가 미흡한 상태일 터인데,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실전에서 진짜로 하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스승이 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고 있기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말과 손끝과 행동을 통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심이 드러나는 중입니다.
비단 오늘 기념하는 일본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이지요.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영성체송).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보상은 그분의 잔치상에 참여하는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 춤을 추네"(입당송).
또 그분이 베푸신 향연에서 그분의 행복한 파트너로 함께 호흡하고 발맞춰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런 가슴 뛰는 보상은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죽은 뒤에나 맛볼 담보물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상태에서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온전히 내어맡기고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느님 주권 아래 존재하는 것입니다. 잔칫상에서 그분께 기대어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분과 춤을 추는 사랑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비운 자리에 성큼 들어와 건설되는 영적 실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마르코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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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은 부자 청년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더욱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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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조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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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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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 진정, 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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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떠난 사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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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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