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Margaret K 2020. 2. 1. 20:10

2020 2 2 주님 봉헌 축일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봉헌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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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40)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Mary and Joseph took Jesus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주님의 길을 닦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을 받은 이들을 도와주실 것이다(제2독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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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맞이하여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기억합니다.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며 가난, 정결, 순명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가난은 ‘나의 것’을 봉헌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정결은 ‘나의 사람’을 봉헌하여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고, 순명은 ‘나의 뜻’을 봉헌함으로써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가난, 정결, 순명은 비단 수도자만이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모두가 자신의 처지 안에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아드님을 봉헌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천상에서 영원무궁토록 찬미를 받아 마땅하신 당신의 아드님을 지상으로 보내시어, 여느 평범한 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이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인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감히 우리의 형제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바치는 봉헌의 의미를 새길 수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어떤 대가를 바라고 바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바치기에 앞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가 봉헌입니다.
그 감사함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봉헌은 시장 경제의 논리에 갇힌 투자나 거래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키엣대주교-


예수성탄이 지나 40일만에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님을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봉헌하신 성모님은 비록 당신을 빌어 태어나신 아드님이시지만 예수님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되새기고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기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아드님을 봉헌하셨습니다. 천상의 귀한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이 땅의 평범한 요셉, 마리아에게 아드님을 맡기셨기에 우리는 감히 예수님을 형제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촛불의 향연’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촛불행렬을 하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1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제대 위에 타고 있는 초처럼 자신을 불태워 이웃을 밝혀주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의 결심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은 보다 철저한 봉헌생활을 실천하는 수도자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시므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이 바로 빛이며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의 시작은 많은 어두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연약한 빛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사업을 파괴하려는 수많은 그림자가 언제나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권력 상실의 두려움에 가득 찬 헤로데 왕의 잔인한 어둠과 하늘 나라 왕국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들의 우매한 그림자, 믿음에 대한 불확신으로 숨어드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의 그림자 그리고 굴욕적인 죽음의 그림자까지 수 많은 그림자가 주위를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에 대항하는 ‘빛의 수호자’이십니다. 성난 폭풍과 거센 바람 속에서도 빛을 보호하셨습니다. 거센 바람이 칼날이 되어 성모님의 영혼을 찌르고 찔러도 성모님은 인내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바로 성모님과 같이 자녀와 세상을 보호하는 수호자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자녀를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나의 자녀는 바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을 나의 뜻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 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을 통해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자녀의 미래를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구 드리십시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제단을 둘러싼 유아 세례를 받는 어린 아이들의 하얀 손과 작은 볼이 마치 부드러운 새싹과 같습니다. 반짝 반짝 빛나는 눈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세상을 밝히고 있는 아름다운 아기 예수님을 봅니다. 세상을 밝히는 믿음의 시작을 알리는 빛, 하얀 빈 종이처럼 순수하고 정결한 지혜의 빛입니다. 죄 없는 영혼의 가장 선한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은 새싹을 말라 죽이고, 물질적인 어둠의 유혹은 빛을 가려버립니다.

당신에게 맡기신 귀중한 선물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되는 믿음의 빛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과 악에 대항하려면 성모님처럼 상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모님을 통해 자녀를 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축복을 강구해야 합니다. 오늘 하느님께 봉헌한 주님의 자녀인 당신의 아이는 주님의 은혜로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하느님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성모님, 저희 자녀가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십시오.

2. 주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은 무엇입니까?

3.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는 봉헌되는 사람

-강석진 신부-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오늘은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1997년부터 지내기 시작한 이 날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지정하셨습니다. ‘주님 봉헌’과 ‘수도자의 봉헌’! 넓은 의미로 생각할 때, ‘봉헌’에 관한 비슷한 개념이라 ‘주님 봉헌’에서 ‘봉헌 생활의 날’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중요한 묵상 거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봉헌’은 주님께서 자신을 봉헌했던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봉헌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봉헌’은 요셉과 마리아가 절차 없이 예수님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레위기(12,1-8)에 있는 정결례 규정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아기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습니다. 또한 ‘주님 봉헌’을 위한 여정은 산모였던 마리아와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요셉의 인도에 따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부터 150km나 떨어진 먼 길을 걸어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 봉헌’은 주님이 양부모에 의해 봉헌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와 함께 수도자들은 주님의 모범에 따라 자신이 잘 봉헌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저는 수도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나를 주님께 봉헌했다’는 생각에 무척 우쭐거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 한 해를 넘기면서 점차 목에 힘이 들어가고 삶에도 무게가 잔뜩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수도자로 10년, 20년 살다 보니, 무게감 때문에 힘들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나를 봉헌하기에도 버거운 수도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봉헌’이라는 말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이라는 사실을. 또한, 수도자는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봉헌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기 예수님이 부모에 의해 봉헌되듯, 우리 또한 공동생활 안에서 형제들에 의해 봉헌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도 생활이란 결국 공동체가 형제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나를 잘 봉헌할 수 있도록 내 힘을 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이 나를 주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무게를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삶의 힘을 빼고, 마음의 무게를 줄였더니,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필요 이상의 긴장감도 줄어들고, 사도직에서 만나는 사람들 또한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봉헌 생활’은 결국 ‘나 중심의 무게’를 줄이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봉헌되는 사람답게 잘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비둘기 한 쌍의 속죄 봉헌물을 하느님께 바쳐줄 것입니다. 아멘


봉헌은 주님 우선이며 나보다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장재봉신부-


오늘 말라키의 예언에 마음이 솔깃합니다. 우리 모두가 애타게 그리며 “찾던 주님”께서 홀연히 오실 것이며 그분께서 손수 “레위 자손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마침내 주님 마음에 쏙 들게 해주실 것이라니, 진정 든든해집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더 잘 이루시도록 좁은 마음을 찢어 넓히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지난해 연말 부산교구에서는 네 분의 사제가 나셨습니다. 사제서품은 교구의 가장 큰 경사인 만큼 모든 교구민들이 기도드리며 기뻐했는데요. 우리 본당은 울산에 있는 만큼 부산 주교좌남천성당에서 거행되는 서품식 참례를 위해서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음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하셨더군요. 하지만 새 사제를 위한 교구의 잔치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새 신부님의 출신본당에서 바쳐지는 첫 미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성 신자도 많고 각지에서 이어지는 새 신부님들의 미사도 인기폭발, 북새통을 이루니까요. 좋은 일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속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속이 거북했던지, 여태 기분이 씁쓸한데요. 오늘, 주님께 몽땅 봉헌하는 마음으로 그 얘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몸이 편찮으신 자매님은 성지에서의 새 사제미사를 꼽아 기다리셨답니다. 그런데 딱 네 분이신 신부님들이 그 많은 신자들에게 안수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수고로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새 사제 안수를 사양하는 마음으로 대신에 새 사제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치고 오셨다더군요. 행복했답니다. 저는 자매님의 배려 깊은 마음이야말로 사제를 위한 참된 봉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복된 이야기의 행복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마을버스에서의 일이랍니다. 기사님께서 소리를 치더랍니다. “카드 찍고 타세요.” “카드 찍고 타세요.” 확실히 버스에 올라서는 사람보다 카드 찍히는 소리가 드물더라는데요. 빡빡한 버스에 재빠르게 오르며 카드를 찍지 않는 할머니가 꽤 계시더란 얘기였죠. 기가 막혔습니다.

새 사제의 정성 어린 미사에 참례해서 과연 무엇을 얻으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사제의 강복을 받은 이유가 오직 남보다 더 복을 받겠다는 욕심이었다면 거짓 은총에 매달렸을 뿐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나보다 남을 섬기는 마음에 주어지는 하늘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인간이 자신의 것을 주님께 준다고 여기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다. 주님을 소로 만드는 우상숭배일 뿐이다.”라며 그런 심보는 카인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신을 잡아 바치지 못한 봉헌은 감사가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봉헌은 어떤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오직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 겨워 봉헌할 때에만 아벨의 봉헌처럼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 단언하셨습니다. 골백번 공감하여 제 마음에 쏙 담겼던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 모두가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라 믿어져 전해 드립니다.

한스 홀바인의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 바침(1500-1501년)’.


주님을 향한 봉헌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에 기초합니다. 세상에서 치사하고 유치한 모습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남보다 더’ 복을 챙기겠다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아무리 좋은 축복도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면 어떤 희생도 주님이 아닌 나를 위한 봉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질 것을 의심치 않는 것임을 일러줍니다. 성령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던 노년의 시메온과 온 삶을 주님을 향한 흠숭과 기다림으로 채워 지냈던 과부 한나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약속에 근거하여 시메온처럼 “그 말씀에 따라 살았으므로 후회가 없다”는 마지막 고백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스스로의 봉헌을 꼼꼼히 자세히 상세하고 세밀히 살피며 신앙점검을 하기 바랍니다. 시메온처럼 성령의 약속 가운데 굳건한 삶을 살아가는 참 봉헌의 사람인지를 철저히 따져보기 원합니다. 성모님처럼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는 삶만이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 살아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진리는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뚜렷하고 명료하며 분명하기에 진리의 삶은 먼저 나를 비우는 말끔함에서 비롯됩니다. 하찮은 것에 매이지 않는 넉넉한 자유로 우리는 탐욕과 집착을 털어내는 맑고 향기로운 신앙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분, 저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새 사제 네 분의 안수를 몽땅 받으려 분주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제의 수고를 덜어주는 마음으로 안수를 피했던 마음을 훨씬 소중히 봉헌 받으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기껏 거룩한 미사에 참례한 후에 혼잡을 틈타 돈 천원을 아꼈던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 성스럽고 복된 미사의 은총을 다 잃었을 테니, 어서 회개하실 것을 촉구합니다.

저는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봉헌이 아벨처럼 주님께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특별한 봉헌 축일에 치사하고 졸렬하며 비좁고 누추했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말끔히 씻어 봉헌하시길, 그리하여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정한 봉헌자로 돋움하시길, 소원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1테살 5,23)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못난 우리가 모두, 당신처럼 거룩해지리라는 기대를 결코 접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주님처럼

허남호신부-


  “물건을 받들어 바침,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 사전에서 정의하는 ‘봉헌(奉獻)’의 의미입니다. 봉헌 이 봉헌다운 이유는 정성과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주일미사에서의 봉 헌도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봉헌이 아니라 단순한 기부나 참가비 납부가 될 뿐입니다. 우리 봉헌의 기원이 되신 예수님의 봉헌을 보면서 우리의 봉헌은 어떠한지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전에 바쳐지는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십자가의 봉헌으로 그 의미가 이어진다는 것이 시메온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전적으로 다 바치며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온 우주를 연결 하는 십자가의 봉헌은 또한 전적인 ‘자기 비움’입니다. 생명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내어 놓는 자기 비움은 또한 전적인 ‘내어 맡김’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자기를 전적으로 비우고, 아버지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김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요? 하느님께 좋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전적인 자기 봉헌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 만을 가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부분들까지도 하느님께 바치게 될 때, 전적인 자기 봉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고 외면되어 있는 상처는 어 쩌면 제일 먼저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 장소, 사건,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거 부감이나 싫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그 장소, 그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이 지닌 윤리나 도덕적 인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자체로 소중한 나 자신입니다. 갓난아기를 다루듯이 자신의 상처를 대하며 하 느님께 바칠 수 있다면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 ‘치유의 해’를 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이 그러하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죄와 그 상처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올바른 관계, 곧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에만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온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나"

-이지목신부-


신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치른 논술 시험의 질문이었습니다. ‘복음삼덕’에 맞추어 자신의 사제 상을 서술하시오. 시험장은 도서관의 미디어실입니다. 칸막이 책상에 앉았고, 먼저 복음삼덕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습니 다. 다행히 그것이 성직자, 수도자들과 같이 봉헌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임을 기억해 내었습니 다. 그것은 세 가지 덕목입니다.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입니다.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세 가 지 덕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 풀이를 했습니다. 가난한 삶과 순결함,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떠올 랐습니다. 불현듯,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떠나셨던 수녀님이 떠오릅니다. 새벽 미사를 마치고, 바퀴가 달린 가방 하나를 끌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나갔기에, 버스에 오르시는 수녀님을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홀연히 부름을 받고 떠나시는 수녀님의 단아한 미소가 인상적이었 습니다. 짐은 보잘것없이 적었고, 가벼웠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저의 마음과 달리 평온하고 나긋한 목소 리에서 갈라지지 않은 초연한 마음을 엿보았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곳이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불러주셨고 이끌 어 주신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지금은 주문진에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뒤에는 소금강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처음의 시험 문제를 다시 읽고, 이제껏 잘 써 내려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깊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옆 창문으로 사목 센터를 내려다 봅니다. 선배 신부님을 떠올려 봅니다. 공소에 계신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올해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주교 님 사진도 봅니다. 옆에 교황님도 봅니다. 죄송합니다. 떠오름 안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이 들립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바쳤으니, 더 가질 것도, 마음이 갈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더욱이 내 주 하 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이니 기쁘게 받아들이셨을 터, 이 세 가지 덕은 결국 한 가지를 봉헌함으로써 주어지는 은총이겠습니다. 봉헌 축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여러 단체와 모임뿐 아니라 평일 미사 참례와 아침·저녁 기도를 바침과 같은 노력이 그렇습 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어 매우 값진 사랑으로 받아서 후하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 러니 아기를 봉헌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간직하십시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덕행을 이어가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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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젊은 사람이 등산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등산하는 젊은이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때에는 젊은 청년이었기에 등산을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방학 때에도 혼자서 등산을 하러 갔고, 친구들과 놀러 가도 주로 산에 갔습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방학 때에 설악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오색약수로 올라가서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전날 산 밑의 민박집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산을 오르는데 다들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차피 내려갈 건데 그냥 내려가자. 너무 힘들다.”

이 말에 모두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 옆으로 한 무리의 등산객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등산객은 모두 젊은 여성들로, 아마도 우리처럼 동아리 MT를 온 것 같았습니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등산객을 보고서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원래 계획대로 설악산을 온전히 등반할 수 있었습니다(참고로 이 여학생들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힘내어 산을 오르는 여성 등산객들을 보면서 우리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를 떠올려 보니, 우리 삶 안에서는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해버리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려고 했을 때 뜻밖의 변화도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 열심히 하는 누군가로 우리 모두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서도 누군가가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율법의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라는 기록을 따라 예수님을 봉헌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굳이 봉헌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자기가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정결례를 통해 깨끗해져야 한다고 율법은 말합니다. 그런데 남자의 씨를 받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성모님을 어떻게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는 하느님이 아닙니까?

율법 위에 계시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셨지만, 우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이십니다. 이는 우리 역시 그 겸손의 모범을 세상에 실천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그 명령을 기억하면서 겸손의 모범을 세상에 보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 깨달음을 얻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란걸 선물을 사면서 나는 알았어. 이 행복한 마음, 바로 네가 준 선물임을 그때 나는 알았어(신달자). 



싸가지

한양도성을 건립할 때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따라,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고 해서 ‘홍인지문’, 서대문은 의(義)를 두텁게 갈고 닦는 문이라고 해서 ‘돈의문’,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고 해서 ‘숭례문’, 북문은 지(智)를 넓히는 문이라고 해서 ‘홍지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운데를 뜻하는 신(信)을 넣어 보신각을 건립했습니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 다섯 가지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기초해서 건립한 것입니다.

인(仁)은 측은지심으로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이 여겨 정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의(義)는 수호지심으로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예(禮)는 사양지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하여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지(智)는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신(信)은 광명지심으로 중심을 잡고 항상 가운데에 바르게 위치해 밝은 빛을 내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종종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을 쓰지요. 그런데 이 싸가지가 바로 ‘인의예지’ 4가지를 말한다고 한답니다. 즉, 싸가지가 없는 사람은 ‘인의예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싸가지 있게 살아야 합니다. 

봉헌하지 않는 고통이 봉헌하는 고통보다 항상 더 크다

-전삼용신부-


어떤 나라에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드디어 스승과 제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저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호화로운 식탁을 확인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한 천국이다!”

      그들은 먹고 놀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그들은 따분해 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인간세계를 보여 달라고 하여, 인간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그래도 따분한 생각이 들어 다시 안내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기 보이는 지옥문을 열어 잠깐 보여줄 수 없소?”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옥이야말로 매일 노동에 시달리고, 혹독한 형벌에 고통 받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안내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곳일까요, 아니면 내어주어야만 하는 곳일까요?

      한 가족이 모두가 돈을 잘 벌어 부족한 것이 없어 자신의 것을 내어줄 필요가 없는 가정이 행복해보이나요, 아니면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먹을 것을 자녀에게 주고, 자녀는 부모를 위해 용돈을 아껴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가정이 행복해 보이나요?

      서로 부족한 것이 없어 자신을 내어주는 어떤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천국은 십자가 투성이인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내어주고 있어야 ‘사랑’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넉넉해도 내어주는 십자가 사랑이 없으면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도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내어줌과 받음의 사랑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내어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교회는 내어주어 가난해지기를 가르칩니다. 그래야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재물을 가진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이 가난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민하며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돈이 생겨서 이것을 어디 봉헌해야 할지 찾고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서 가난해지지 못한 것이 꼭 주님께 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가난은 외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부자라도 지금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들입니다. 따라서 그 욕구를 봉헌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굳이 봉헌하는 액수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욕구가 사라지면 더 많이 봉헌하게는 될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이고 그 욕구에 동의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까지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그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싸우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봉헌이고 자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런 자선이나 봉헌은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필요해서 봉헌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소유욕을 줄이라는 뜻으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은 그 욕구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라고 시작합니다. 정결례는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하는 행위인데, 그 정결례를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친 것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부모가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자녀를 주님께 바쳐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봉헌이 중요하냐면 ‘소유욕’과 싸우고 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르 4,19)고 하십니다. 이 욕구를 끊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도구가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은 당신의 소유라고 하시며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욕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쁜 욕구를 봉헌한 정결한 신앙인의 모습은 어때야할까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봉헌하셨지만 다시 어머니로서 예수님과 30년을 사십니다. 봉헌하든 안하든 외적인 것은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당신을 떠나시려 할 때 성모님은 붙잡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밑에서까지 “주님의 뜻대로!”를 외치십니다.

      이 아드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미 오늘 성전에서 예수님을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내어주신 봉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오늘 시작되지만 평생 이어진 것이며 그 봉헌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드님을 잃는 그 고통을 견뎌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서 그만큼 고통스러운 이유는 평소에 온전히 주님께 봉헌해드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봉헌의 연습이 잘 된 사람은 무엇을 잃어도 “주님 뜻대로!”를 외칠 수 있습니다.

      버스가 추락한 곳에서 며칠 뒤 한 남자가 투신자살을 하였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아내가 사망한 곳에서 자신도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래전 여렸을 때 본 뉴스였고, 참으로 마음이 안타까운 소식이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그것 때문에 부부사이도 멀어지고 가정이 지옥같이 변하는 가정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에도 대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봉헌’밖에 없습니다. 미리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겨야 잃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소유욕이 크면 무엇을 잃지 않아도 그것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잃는 고통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내야 합니다. 항상 봉헌하지 않는 고통이 봉헌하는 고통보다 더 큽니다. 다 주님 것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봉헌은 무언가를 바치면서 하는 것이지만 결국 내 안의 소유욕을 끊는 연습인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원로배우 신구 씨가 한 말입니다. 먹어봐야 그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광고였습니다. 제품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기도가 지상 최대의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누려 합니다. 나눔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은 기회가 되면 또 가려고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맛은 새벽 묵상입니다. 1995년부터 시작했으니 25년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25년이 지났어도 질리지 않는 걸 보면 제게는 꿀맛인가 봅니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맛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을 그림에 있어서 다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용의 눈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숙소에 머물게 됩니다. 침대, 옷장, 책상, 냉장고도 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샤워기가 작동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세면대에 물이 잘 안 내려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직접 사용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화려한 건물, 오랜 역사, 교계제도, 율법과 계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필요한 건 성령께서 함께하는 겁니다. 가진 걸 함께 나누는 친교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다인들의 정결례법에 따르면, 산모가 아기를 낳고 출혈을 하면 불결해진다고 여겼습니다. 33일간 집 안에 머물러야 했고, 제물로 바쳐질 고기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정결예식 전까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요즘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없고 웃기는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은 모든 맏아들과 동물들의 맏배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탈출기 13장 12~13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 했습니다. 그 첫아들은 하느님의 소유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성전에 가서 사제에게 다섯 세켈(Shekel)을 지불하고 아들을 찾아오는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한 세켈은 통상 일반 노동자의 4일 품삯에 해당되니 약 20만원 정도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찾아오려면 다섯 세켈, 약 100만원 가량의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이 그리 넉넉치 않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속량세로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구세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입니다. 당신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고 속량세를 바치고 찾아올 하등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봉헌을 받으셔야 할 주체이자 수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전에 봉헌되시고 속량세를 지불하시니,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할례식, 정결예식, 속량예식, 세례식, 공생활 기간,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없이 깊은 겸손의 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카이사르의 칙령에도 복종하여 모든 법 앞에 자신을 굽히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맏아들이신 예수님 대신에 속전이 치러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데려와지셨고, 그곳에서 봉헌되셨습니다. 그 봉헌은 하느님께 아들 예수님을 바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봉헌은 예수님께서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봉헌 예식이 이루어진 성전에는 두 거룩한 노인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의롭고 독실했으며, 간절히 구세주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보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시메온은 예수님께서 장치 겪으시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겪을 고통까지 알아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34~35절)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 초기부터 이미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께서는 극심한 고통에 젖으셨고,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마음도 찢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람들의 증오보다도 더욱 강한 사랑의 위대한 희생을 치르실 것입니다.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나타내고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냅니다.”(암브로시우스 교부)


기다림의 기쁨

 -반영억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눈이 당신구원을 본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는 주님봉헌축일봉헌생활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1)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도록 주어진 성령의 선물에 따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22)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1)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4)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44)<봉헌생활>(26)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봉헌  

-송영진신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2-23).”

1) 봉헌의 기본정신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모든 은혜와 앞으로 주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그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즉 어떤 소원을 빌면서 바치는 ‘청원 예물’도
사실은 ‘감사 예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청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것과,
또 우리가 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직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믿음만 있다면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것과 같고,
그렇기 때문에 ‘청원 예물’도 사실상 ‘감사 예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그저 예물을 많이 바치기만 하면, 그것에 비례해서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바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예물을 바쳐야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만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이 정하신 때에 가장 좋은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한 일에도
‘감사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겉으로만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봉헌한 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에도 역시 ‘감사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감사.)

2) 봉헌 가운데 최고의 봉헌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예물 가운데 최고의 예물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은,
‘목숨’을 포함해서 자신의 모든 것, 전 생애, 온 삶을 뜻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온 삶과 목숨을 모두 봉헌한 분들입니다.)
탈출기 13장 2절을 보면, 첫 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이 있는데,
실제로는 아들을 진짜로 바친 것이 아니라,
민수기 18장 15절-16절의 규정에 따라 ‘은 다섯 세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돈을 바쳤다는 말이 없고,
예수님을 주님께 바쳤다는 말만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돈으로 봉헌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직접 바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온 삶’은 처음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도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의 전 생애는(‘온 삶’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하느님께 바쳐졌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전부 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되고 축성되어서 거룩해진 사람들,
즉 ‘성도들’이라고 불립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성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항상 거룩해야 하고,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만, 또 성당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고,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늘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3) 십자가는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봉헌이었지만,
십자가에서 그 봉헌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봉헌의 절정에, 또는 완성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내용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은 모두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끝에 구원과 생명과 참 기쁨과 영원한 행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4) 봉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의 것입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기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그러니 생색내지 말아야 하고, 자랑하지도 말아야 하고,
대가를 바라거나 요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이지만, 봉헌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만 해야 합니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봉헌하는 일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5) 우리 교회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을
예수님의 봉헌, 희생, 헌신, 사랑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예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셨음을 믿는다는 뜻이고,
그 빛을 향해서,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잘 받아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은, 또는 그 구원을 외면하면서 사는 것은,
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주는 등불로서 살아야 할 임무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빛 속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등불을 끄는 것과 같고,
자기가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기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한 것을 따라 참회행렬을 했었는데, 이 행렬에 사용된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으로 전례 안에 정착되었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이것은 또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그 대가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때에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의 칭송이나 칭찬을 바라게 되고,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기쁨이나,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 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봉헌된 이들의 전형이 보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3).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4).
"주님의 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루카 2,39).

먼저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두 분은 자신들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며 율법에 따라 아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선한 유다인입니다. 이처럼 봉헌된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특히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고통에 내맡깁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없이 구원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봉헌된 이는 타인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그 모습은 사람들 안에 잠든 선성(善性)을 일깨웁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 기다리는 이"(루카 2,25).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

시메온은 기다리는 이입니다. 그는 주님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믿었고 그 만남에 전 생애를 걸었지요. 긴 세월을 기다리면서 실망한 순간도 많았을 겁니다. 내노라 하는 학자나 임금들, 정복자들이 성전에 들를 때마다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기대했다가 이내 꿈이 거품처럼 스러지는 체험을 수도 없이 했을 터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로움과 독실함,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다림이 어느 한 순간에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의 여정 동안 이어지는 믿음의 수행이고 고요한 투쟁이기에 그렇습니다. 봉헌된 이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의 등불을 꺼버리지 않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한나 예언자의 온 생애가 봉헌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성전에 머무르며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은총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 욕망과 재물, 관계에 초연하기 위해 많은 좋은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좋은 몫을 택한 지혜로운 여인이지요.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한나는 자기가 만난 구원자를 제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나눕니다. 하느님을 홀로 독점하지 않고 구원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내어줍니다. 봉헌된 이의 체험과 이야기는 증언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오늘 봉헌되신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깨끗하게 하고 ... 정련하여"(말라 3,3).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실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불순하게 때묻어 뒤섞이고 오염된 우리의 영육을 정화하고 정결히 해주십니다. 이로써 깨끗하게 된 우리가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도우십니다. 봉헌된 이는 그 존재와 행위를 통해 세상에 순수함을 일깨웁니다.

"자비, 하느님을 섬기는 충실한 대사제, 백성의 죄를 속죄, 고난 겪으심, 유혹 받으심"(히브 2,17-18).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낱낱이 언급됩니다. 그분은 자비를 베풀고 아버지를 섬기는 동시에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고난과 유혹을 겪으십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봉헌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봉헌은 제 영혼을 거룩히 하는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 미약하나마 기도와 보속, 희생을 그치지 않고 바칩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봉헌된 이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총애를 받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제도나 단체를 대상으로 하기 이전에 하느님께 드리는 전인적인 헌신이기에 그분을 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다 내어드리는 이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의 그 사랑이 하느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곧 총애의 열매이고 증거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를 넘어서 영으로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시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전하는 사람, 순결과 순수를 일깨우는 사람, 속죄와 희생의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가난하고 미소한 채로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며 영혼 가득 주님을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복한 축제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이 주어가 아닌 희생과 봉헌은 말자 
-김찬선신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올해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며 문득 떠오른 말은
'심청이', '희생', '한恨', 이 세 가지였습니다.

왜 심청이와 희생이 떠올랐냐 하면 요셉과 마리아가 주님을 바친 것처럼
심청이가 자신을 바쳤기 때문인데 그런데 심청이의 봉헌은 자기의
희생이라는 느낌이 컸기 때문에 희생이 자동적으로 떠오른 겁니다.

그런데 심청의 희생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바친 것임에도
원한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한스러움이 남아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했나?'라는 의문이 남기도 하고,
너무 애잔하기도 한 희생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늙은 아버지,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아버지를 위해 꽃다운 심청이가
피지 못한 꽃봉오리처럼 오히려 죽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슬픈 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부녀간의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데
이런 희생이 가치 있고, 숭고하고, 심지어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또 가치 있고, 숭고하고, 거룩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심청이의 봉헌이 한스러움이 남는 희생이냐,
거룩한 희생이냐를 가르는 것은 심청이 자신이고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남이 그것을 억울한 희생이다 아니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심청이가 스스로 그리고 정말로 기꺼이 자신을 바친 것이라면, 그래서
억울함이나 슬픔이 남지 않는다면 거룩한 희생, 행복한 봉헌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이 다 사랑이 아니고 그래서 억울하고 불행한 희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이 주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랑이 주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기에 희생해야지 희생해야 하기에 희생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희생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 희생이 사랑이 주어가 아닌 희생,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 희생이 많고,
그래서 희생을 하고 난 뒤에 손해봤다는 느낌만 있고 행복은 없는
희생이 많기 때문이고 이것을 요즘 제가 많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 저의 희생을 성찰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희생을 했고 많이 했는가?
나의 희생은 순수하고 진실했는가?
나의 희생은 행복한 희생이었나?
무엇보다도 나의 희생은 봉헌의 희생이었나?

희생을 하지 않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희생을 적게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었는지
그러니까 순수하고 진실한 희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희생이란 사랑의 희생인데
저의 희생은 불순물이 많은 희생인 것 같습니다.
사랑의 희생이라고 저 스스로 착각하거나
희생으로 위장한 자기 만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정련에 대해 얘기하고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그래서 저도 이제 다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봅니다.
희생을 한다고 생각지 말고 그저 사랑해보자.
요즘 계속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내가 되자고 생각하는데
희생도 남을 위한 희생을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희생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봉헌하는 희생을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2월 2일 목요일 주님 봉헌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40)


교회에서 말하는 가난은 외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부자라도 지금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들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이고 그 욕구에 동의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까지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그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싸우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봉헌이고 자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런 자선이나 봉헌은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필요해서 봉헌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소유욕을 줄이라는 뜻으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은 그 욕구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드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당신을 떠나시려 할 때 성모님은 붙잡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밑에서까지 “주님의 뜻대로!”를 외치십니다.

      이 아드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미 오늘 성전에서 예수님을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내어주신 봉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서 그만큼 고통스러운 이유는 평소에 온전히 주님께 봉헌해드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봉헌의 연습이 잘 된 사람은 무엇을 잃어도 “주님 뜻대로!”를 외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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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머리에서 가슴까지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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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나타내고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냅니다.”(암브로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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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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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봉헌이었지만,
십자가에서 그 봉헌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봉헌의 절정에, 또는 완성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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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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