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Margaret K 2020. 2. 8. 20:17

2020 2 9일 연중 제5주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참된 단식은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신앙으로 우리가 잘 다듬어지고, 성장하게 되고, 무엇인가 나아지게 되면 그때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과 빛은 먼 뒷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 자신이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예전에 썼던 제 강론들을 찬찬히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습니다.
글이 참 형편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글에 맞갖게 살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웠습니다.
또 이런 글들을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강론하는 것도, 강론 원고를 기고할 자신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부족하여도, 모자라도 그냥 올리자.
내 입장에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주님께서 알아서 이 글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제가 보기에 너무나 부끄럽다고 하여도 나름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오늘 복음 말씀처럼 저 자신이 소금이요, 빛이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더라도, 주님 말씀을 믿고 소금처럼, 빛처럼 노력하자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빛을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일어나 비추어라

-임상만신부-


예수님의 ‘산상설교’로 구성된 마태오 복음 5―7장은 ‘참행복 선언’을 비롯하여 내용 전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여덟 가지 복’으로 사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시며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강조하신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께 선택받았고, 이를 축복으로 받아들여 사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참행복 선언’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일깨워주신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참행복 선언’으로 하느님 백성이 되었기에 이미 세상에 속해 있지 않지만, 아직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는 다르게 드러내야 할 사명과 정체성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사명과 영향력이다. 소금은 세상의 어떤 물질로도 낼 수 없는 독특한 짠맛을 가진다. 사실 이 짠맛 자체는 통증에 가깝다. 하지만 소금의 짠맛이 음식에 스며들면 그 음식 맛을 원래 맛 그대로 맛나게 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음식 맛을 좋게 내는 소금처럼 흰 ‘MSG’라는 조미료가 있다. MSG가 들어가면 모든 음식 맛이 좋아진다. 하지만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것을 넣지 않는다. MSG는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죽이고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빛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빛의 밝힘으로 세상이 의미를 가지며, 어둠을 넘어 서로의 정체를 깨닫게 해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향력을 보이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다. 소금은 음식의 참맛을 낼 뿐 아니라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맛과 빛으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영향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영향력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신학자 한스 큉은 “사제들이 교회를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면,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파견된 모든 분야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참행복 선언’이 완성되며 세상의 복음화가 이뤄진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며 당신 제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이르신다. 소금으로, 빛으로 세상에 합당한 영향을 미치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식탁 위 소금통에 소담스럽게 담겨 있을 때가 아니라 콩나물국에 적당히 들어갔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빛은 됫박으로 덮여서가 아니라 등경 위에서 주위를 밝힌다. 우리도 세상에 스며들고 세상 비추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 익숙해져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며 살지 않기를 노력해야 한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빛과 소금의 방식

-김혜윤수녀-


왠지 저항하거나 거역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담고 있는 얼굴, 환한 햇살 같은 미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온화함…. 오늘 복음은 그런 ‘빛’을 머금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고 간직해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구현해온 사람에게서 발현되는 삶의 거룩한 열매가 바로 그러한 ‘빛’이고 그 빛으로 생산된 삶의 분말들이 ‘소금’입니다.

■ 복음의 맥락
연중 4주간에 이어서 연중 5주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교훈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무엇이 진정하고 참된 행복인지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여 알려주신 연중 4주일 본문(올해에는 ‘주님봉헌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다른 본문을 읽었지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애쓴다면…(마태 5,3-12 참조),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이미지는, 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개발 지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구체적으로 해주어야 하는지 철저히 타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맛있게 하고 사물을 밝혀주기 위해서 스스로는 소멸되어야 하고, 그 소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 방식,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묵묵히 간직하고 걸어가야 할 삶의 지고한 신념입니다.

부활성야미사 빛의 예식 중 사제가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두 개의 상징적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역할을 설명해주십니다. 소금은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정상적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면 소금 없는 집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신체에도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빛’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물이고,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은유를 제시하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이며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15절)로 설명하신 부분입니다.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집 안에서도 등불이 등경 위에 있을 때 주변 전체를 볼 수 있어 일상이 아무 충돌 없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빛이 되려면
제1독서는 세상의 빛이 되는 방식을 정확히 제시해줍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7)입니다.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기본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 하느님의 힘
바오로 역시 자신의 연설이나 활동이 하나의 ‘의견’ 혹은 ‘사회적 담론’에 머무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1코린 2,5)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모든 활동이 인간의 언변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힘”(5절)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4절)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활동했던 헬레니즘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추종하고 찬양했던 ‘지혜’(소피아)를 배격하고 ‘하느님의 힘’을 강조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맺음을 통해, 그러한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짐을 당당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생활 안에서 크고 작은 혁명을 주도한다고 해서 공동선과 구원이 쉽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조직과 사회적 연대로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고 구현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지적 협약 이후에도 여전히 도래하는 갈등과 모순, 파괴와 소외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구체적 노력과 정성이 실종된 채, 공동선이라는 이념만으로 미화된 사회적 제도들은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이기주의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미화된 가식과 위선으로는 결코 인간을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왜곡되지 않게 보존하고(소금) 밝히 드러나게 하여(빛) 인류가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이러한 진리의 증거는 온전히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을 빛나게 할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과 소금의 방식입니다. 


눈먼이에게 눈을!

-신희준신부-


여덟 번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에 바로 이어진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절로 두 번째 행복 선언이 연상됩 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슬퍼하는 사 람들’이란 표현 대신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울고 있는 사 람들’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는데, 

저도 이 표현이 너무 나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 성공 지향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요즘 세상의 주된 흐름에 반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 주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축복해주신다는 말씀에 용기 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나인’이라는 마을에 들어서다가 

외아 들이 죽어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어느 과부의 안쓰러운 모습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함께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과부에게 다가가 위로해주 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루카 7,11-17 참조). 


동시에 교황님께서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며 안아주시는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교황님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이 빛나는 걸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나는 능력이란 바로 ‘공감’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타인 의 고통에 공감하고 

약자를 돕고자 하는 ‘공감 능력’이 사 람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영장류학 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예컨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코끼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짓밟거나 자기 것만을 챙겨 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협동하고 공유하면서 살아남는 다.” 

이렇게 약자를 돕는 모습을 동물 사회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 인간은 공감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크다면, 너무 지나친 걱정일까 요?


 적어도 교황님은 비슷한 걱정을 하고 계신 듯 싶습니 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 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 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 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 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복음의 기쁨」 2항)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황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 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 도록,

 …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 지도록”(「복음의 기쁨」, 3항) 권고해주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조금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사랑과 자 비의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아줌마가 하느님의 부인이에요?"

-박명수신부-


어느 겨울 저녁 맨발의 어린 소년 하나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불이 환하게 켜진 신발 가게 진 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중년 부인이 지나가다가 소년을 보고 다가가 물었습니 다. “얘야, 뭘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니?”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께 신발 한 켤레만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에요.”부인은 소년의 손목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양말 과 신발을 달라고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원에게 세숫대야와 수건을 빌려 소년의 발을 씻긴 다음 양말과 신발을 소년의 발에 신겨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런 부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습니 다. “아줌마가 하느님 부인이에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예화인데, 오늘 복음 말씀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 늘 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 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변하지 않을 소금이 된다 는 것, 또 누군가의 앞을 밝혀주는 빛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며 향기 로운 삶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부인”처럼 살아가기를 희망해야 하고, 희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부인”처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 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7) 사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이지만 오늘 복음에 비춰 본다면 좀 더 깊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율법에 따라 단식한다면서 서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는 유다인들에 게 그게 무슨 단식이냐고 지적하면서, 주님께서 반기시는 참된 단식은 굶주린 이들과 양식을 나누고 가련한 이들을 잘 대접하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고 혈육과 원수가 되지 않는 것, 또 한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의로운 것을 행하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식을 행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빛이 주 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행하는 것이 곧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 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 라”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빛과 소금

-백명흠신부-


 우리는 지난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이 날 초를 봉헌하면서 초와 같이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는 삶 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생각 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큰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고 오늘 연중 제5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 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금은 모든 음식의 간을 맞추는 조미료의 역할을 합니 다. 우리 신자들도 소금과 같이 이 세상에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조미료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음식 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소금과 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하느 님 나라를 건설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은 자신을 태워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는 인류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큰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태워 예수님의 큰 빛을 이 세상에 전하는 작 은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타협 하고 잘못을 범하고 하느님을 멀리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방황하며 살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썩어가는 이 세상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어둠 속에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 빛이 필요합니 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 금이 제 역할을 하려면 빛은 자신을 태워야만 그 빛을 세상에 비출 수 있습니다. 소금도 자신을 녹여야만 조미료와 방부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할 때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 를 맺는다.”(요한 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나는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이 세상에서 내가 해 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다.”


소금의 가치

-키엣 대주교-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설교하신 후 ‘소금과 빛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고 빛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의와 양심 보다는 돈과 쾌락을 쫓는 혼돈의 세상에서 믿음과 진실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행복’에 이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소금은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존재했던 소금은 녹아버리면 사라져 버립니다. 이처럼 소금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의 존재를 버리면서도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고 음식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소금의 ‘적극적인 자세’가 ‘존재의 가치’를 높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야말로 소금의 가장 귀한 가치입니다.

겸손함과 희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의 가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소금의 짠맛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과 타인을 포용하는 사랑으로 주님의 ‘참 행복’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존재의 가치’입니다. 복음의 짠맛을 지니고 자신을 희생할 때만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짠맛으로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때만이 주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주님의 빛과 소금입니다.

거짓과 혼란의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명했기에 그 분이 있는 곳은 언제나 복음의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계신 곳이 바로 ‘존재하는 곳’이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인은 돌아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고 그 후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주님 당신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엘리야도 ‘주님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를 따르는 황폐해 가는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렙타의 과부에게 ‘빛과 소금’을 주어 그녀의 황폐해 가는 영혼을 깨우고 그녀를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는 타락해 가는 사회에서 물질을 쫓지 않고 주님의 예언자로서의 희생과 임무를 수행한 진정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에 주님은 ‘참’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믿어주시고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간절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향기로운 사랑의 삶을 살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아주 작은 소금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다른 사람을 높이기 위해 낮추는 기쁨을 느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터넷에서 제 관심을 끌 만한 영상 하나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제목 하나만으로도 곧바로 클릭하게 했습니다. 영상의 제목은 ‘글씨 잘 쓰는 법’입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저로서는 관심이 아니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제시하는 글 잘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로획을 길게 써야 시원하게 보인다. 2) 세로획은 똑바로 써야 바르게 보인다. 3) ‘ㄱ,ㄴ’ 의 경우는 각이 없이 부드럽게 써야 글씨가 예뻐진다. 4) ‘ㅇ’은 예쁘게 쓴다. 너무 작아서 무슨 글씨인지 모르게 써서는 안 된다.

모두 맞는 말이었고 왜 제가 글을 잘 못 쓰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기억하며 신경 써서 글을 쓰는 데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악필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쓰면 빨리 쓸 수가 없다 보니 다시 예전처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쁜 글씨가 나오지 않습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알고 그 앎을 내 몸으로 살아야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제맛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믿음과 거룩한 지혜를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주님 곁에서 머무를 수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필요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빛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서 다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냥 주님의 말씀만 기억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스스로 그렇게 소금과 빛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따라야지만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목격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진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어라. 안 되면 믿는 척이라도 하라. 그러다보면 정말 믿게 될 테니까(비너스 윌리엄스). 


긍정적인 말과 행동

솔직히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좀처럼 긍정적인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송만 봐도 그렇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인신공격적인 발언은 너무나 듣기에 거북합니다. ‘정의를 위해서 하는 말.’, ‘국민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등의 표현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늘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고함을 치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히려 인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자기 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안하무인으로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고운 말만 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의 틀 안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정적이고 상처 주는 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서 후회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보면 힘이 빠집니다. 그래서 스스로 긍정적으로 보면서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습만이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된다

-전삼용신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프라 윈프리, 다이에나 황태자비 등 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고, 베스트셀러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책으로 수많은 세계 독자의 삶을 바꿔놓은 토니 로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를 물었을 때 만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토니 로빈스는 넬슨 만델라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문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말로 사람들 안에 있는 거인을 깨우려합니다. 분명 만델라에게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의문하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 낼 수 있을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의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그 오랜 세월을 이 감옥에서 견디어낼 수 있을까?’를 의문하겠지만, 믿음이 있었던 만델라는 ‘분명히 건강하게 걸어 나갈 것인데 그러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하지?’를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70이 넘어 감옥에서 나와서도 건강하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유일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며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라고 말합니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빛이라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될 수 있느냐고 의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믿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겠습니까? 그것에 따라서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합니다.

      소금의 짠 맛과 빛의 밝음은 생겨날 때부터 가진 ‘본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만 밖으로 나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자신이 늑대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을 가지게 되고 늑대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 아이가 인간의 본성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그 전에는 인간의 행위가 절대 안 나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걸으려고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걸음마도 하게 만들고 옹알이도 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와서 이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믿음에 도달할까를 질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나지.”, 혹은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면 절대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 내가 예수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이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나오는 행동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 슈퍼맨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이렇습니다.

슈퍼맨은 자신이 슈퍼맨으로서 가진 힘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어떤 사람이 “네가 슈퍼맨임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슈퍼맨이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높은 곳에서 세 발짝을 뛰고 밑으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슈퍼맨은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오자 그 스승이 알려준 대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더니 밑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게 되고 세상을 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때 드러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 그 전에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일단락됩니다. 오직 하느님만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들은 겉으로는 선행 같아보여도 그것은 원숭이의 사람 흉내 내기에 불과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고 말한 것은 의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습니다.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했더니 성모님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믿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에 빛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의 믿음은 앞으로 내가 변하게 될 목적지와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분의 본성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계속 본인은 원숭이라고 믿으며 사람 흉내만 내다 죽습니다.

      우리는 믿고 오늘 빛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아 ‘저희가 정말 빛이 될 수 있을까요?’만을 의문하다 어둠으로 끝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하셨으면 이미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믿고 의문하는 삶이 아닌 질문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서울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이 있습니다. ‘3한강교라는 노래가 있었듯이 예전에는 다리가 3개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여개 이상의 다리가 있습니다. 한강 북쪽의 사람은 다리를 건너 강남으로 갑니다. 한강 남쪽의 사람도 다리를 건너 강북으로 갑니다. 명동에서 살던 저는 주로 한남대교를 이용했습니다. 오늘도 서울의 다리는 허리가 되어 경제, 문화, 예술, 사랑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뉴욕도 북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허드슨 강이 있습니다. 아직은 이름을 다 모르지만 조지워싱턴, 링컨, 로버트 케네디, 부르클린, 화이트 스톤으로 불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퀸즈에 사는 저는 주로 화이트 스톤 다리와 조지워싱턴 다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뉴욕 시민들이 다리를 건너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뉴욕의 문화, 경제, 멋과 맛을 즐기고 있습니다. 다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꿈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지친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Bridge of Troubled Water'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고 번역 되었습니다. 제목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내용에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지치고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 줄게요. 내가 당신편이에요. 세상이 거칠어지고 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뉘어 줄게요. 당신이 우울하고 지쳤을 때, 거리를 헤맬 때, 저녁이 너무 힘겹게 내려올 때 내가 당신을 위로할게요. 내가 당신편이 될게요. 어둠이 오고 고통이 가득찰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뉘어 줄게요. 계속 항해하세요. 은빛 그대여! 당신이 빛날 시간이에요. 당신의 모든 꿈이 다가오고 있어요. 보세요. 어떻게 반짝이는지, 만약 친구가 필요하면 내가 바로 뒤에서 항해할게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 마음을 위로해 줄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원로 사목자인 노 사제께서 후배 사제에게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도 깊이 공감하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다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교황을 뜻하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 설치하다를 뜻하는 파체레(Facere)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교황님을 다리를 놓은 분이라 칭했습니다. 사제 역시 다리를 놓는 소명을 지닙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이웃과 이웃 사이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께 백성의 청원기도와 다짐약속을 전달해 드리기도 하고, 또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백성의 잘못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백성을 위해서 신뢰와 놀라운 담대함으로 하느님께 탄원을 드렸듯이, 또 탈출기 32장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너의 백성을 모세는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이라 분명히 고쳐 말씀드리며 탄원했듯이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사제는 하느님 앞에 설 때 하느님 편에 설 게 아니라 백성의 편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제는 봉헌의 다리, 희생의 다리, 인내의 다리, 용서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리가 되어 줄 때 시련과 아픔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 시련과 아픔까지도 감수하는 것이 다리의 삶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다리가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이것이 다리가 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상의 소금과 빛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떤이가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려 빛(“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8,12).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빛과 소금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뱣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 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10).하고 기록한 대로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명절에 서로의 만남을 위해 모였지만 얼마나 많은 다툼이 많았는지....상처를 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모함하는 말을 내려놔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말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한답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소금이 쉴까라는 속담을 아세요? 어떤 일에도 절대로 굽히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틀림없어 매우 미더움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미더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8,10).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관심을 두면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갈지게 하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도 절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발휘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 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맛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해서입니까? 과학이 미발달해서입니까? 학문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삶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 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 수는 줄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열흘을 입원했대요. 특별히 아프지도 않은데 일행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답니다. 이쪽, 저쪽 보험금을 받게 되었는데 치료비를 제외하고 1백 여 만원씩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신자가 이정도인데.....사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어두움, 정신의 어두움, 마음의 어두움을 비춰야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에게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까만 밤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인가?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세상의 소금과 빛

-송영진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이 말씀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제자들)’입니다(마태 5,1-2).
(산상 설교는 신앙인들에게 하신 설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라는 명령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등불이) 되어야 한다.” 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을, “‘나를 따르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등불이) 되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등불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맛있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남’을 맛있게 하는 일입니다.
등불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비추는 일이 아니라, ‘남’을 비추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앙인이 ‘남’을 위해서 소금과 등불로서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감수하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신앙인이다.” 라고 말하려면,
우선 먼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또 이 말씀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생활인데,
그 ‘믿음’과 ‘섬김’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남의 구원보다 나의 구원이 첫 번째로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남의 구원을 도와주려면 내가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방식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소금과 빛이 되어 주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나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이야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내가 구원받으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걷고 있는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골방에 숨어서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사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은 ‘사랑 실천’입니다.
원래 신앙생활 자체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이고, ‘위선’입니다.

< 반대로, 이웃은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경우에는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다가 방향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만 사랑하다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서 빗나가는 일이 흔히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앙인이 아니면서 신앙인들보다 더
사랑 실천을 잘하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따로 판단하실 것이고,
따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런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사랑 실천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결코 헛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인데,
소금 역할을 하지 않는 소금은, 즉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께도 쓸모가 없고, 이웃들에게도 쓸모가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지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금 계속해서 ‘사랑 실천’만 강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러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인가?”
(“‘믿음’은 소용이 없고 ‘사랑’만 필요하다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사랑을 통해서 믿음이 완성됩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에는 불우이웃 돕기뿐만 아니라, 선교활동도 포함되고,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순교도 포함됩니다.)  


세상의 빛인 신앙인들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이다. 그러나 이 의 의미는 연중 제3주일의 과는 다른 의미이다. 3주일의 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에서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수훈에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을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13)라고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갖게 해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짓밟힐 따름이다.”(13).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있는 마을의 비유(14)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소금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1독서: 이사 58,7-10: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1독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의식주의를 벗어나서 사랑의 실천 우위성을 강조한다. 즉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랑이 폭발하고 입증되고 받아들여지고 확신을 주게 될 때,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뜨겁게 하고 비추어주는 불꽃이 되며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증거가 되게 된다.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되거나 의식주의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그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10).

 

2독서: 1코린 2,1-5: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

이러한 교회의 사랑에 대한 소명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 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나약하고’ ‘무기력한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코린 2,4) 세상에 증거가 돼야 할 가장 큰 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

-한상우신부-

우리가 누군지를
일깨워주십니다.

빛처럼
뜨거워지는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빛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빛으로 존재합니다.

일상(日常)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소금과 빛은
하나입니다.

비우는 소금
비우는 빛입니다.

빛과 소금은
자신을
내어줍니다.

소금은 소금의
맛이 나야합니다.

깨소금같은
신앙생활을
희망합니다.

우리또한
가톨릭 신자의
맛이 나야합니다.

소금은
소금덩어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금은
녹아야합니다.

자아가 녹아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자신을 녹이며
타오르는 등불처럼
비우지않고서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비울 때 사랑은
빛이됩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친히 소금과 빛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나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빛과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들을 통해 "빛"이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온통 "빛"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6).
빛은 어둠을 밝히고 감추인 것을 드러냅니다. 암흑에 묻혀 있던 것을 드러나게 하고 보이게 하지요. 빛은 작은 방 안에서도 많은 활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망망대해나 첩첩산중에서 멀리 보이는 한 점 불빛이 삶의 의지와 희망의 청신호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예수님은 물리적으로 빛을 낼 수 없는 우리 인간이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선함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선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주님과 내적으로 통교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 힘이 우리 육신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오는 것이 곧 "착한 행실",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착한 행실"은 행위의 주인공 내면에 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감추어 계실 수 없는 빛이시니 우리를 통해 그렇게 새어나올 수밖에 없으십니다. 진정 "착한 행실"은 자기에게로 시선을 모으지 않고 착함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행여 그 시선이 우리에게 멈추면 얼른 그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몫이지요. 거기까지 가야 "착한 행실"입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1코린 2,4).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아닌,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신 성령을 드러냅니다. 그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인간 바오로 사도의 전유물이나 발명품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그를 접한 이들의 "믿음"이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둘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착한 행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굶주린 이, 가련하게 떠도는 이, 헐벗은 사람, (곤란을 겪는) 네 혈육, 고생하는 이."
"착한 행실"의 대상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 가난과 질병과 고통이 없었던 적이 없으니, "인간의 하느님 모상다움"인 "착한 행실"도 역사와 맥을 같이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이사 58,8).
주님은 예언자를 통해 나눔과 희사, 자선과 선행을 하는 이에게 그 보상을 잊지 않으십니다. 착하게 산다고 삶의 고통이 비껴가지는 않으나 그 상처를 곧바로 치유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참 든든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가난한 이는 물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늘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작은 신음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시려고 집중하십니다. 언제라도 즉각 "얘야 나 여기 있으니 안심해라. 걱정하지 마라."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빛입니다. 참빛이신 주님을 담아내고 투영하고 반사하는 작은 빛들입니다. 이웃에게 딱히 그리스도를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아 손사래 치는 분도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주님 향한 내면의 불꽃을 끄지 않고 말씀의 빛줄기를 간직하고 있는 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빛이신 분께서 어느 틈으로든지 새어나와 당신을 드러내셨을 겁니다.

다급히 지나가는 구급차 소리에, 공사현장 높은 곳을 아슬아슬 오가는 노동자의 발걸음에, 골목을 누비는 배달 오토바이 뒷모습에 우리는 잠시지만 그들의 무사 안전을 위해 마음을 모읍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지갑을 열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에게 부러 다가가 눈맞춥니다. 작고 미소한 일상이지만 우리에게 집중해 귀기울이고 계시는 주님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엄청난 영웅은 못 되어도, 일상에서 바치는 소박한 전구기도와 정성된 나눔, 동행과 연대, 미소와 격려 모두가 참빛이신 분을 드러내는 작다란 빛입니다. 빛이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빛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등불   
-김찬선신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며 그러니 빛을
함지 속에 감추지 말고 등경 위에 올려놓고 세상을 밝게 비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독서도 굶주리는 이를 먹여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줌으로써
우리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등경 위에 올려놓지 않고 함지 속에 두는 사람은
자신의 등불을 등불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등에 불을 붙이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내가 등불이고 그러므로 나는 세상을 비춰야 한다는
자긍심과 책임감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그런 자긍심과 책임감이 없을 거면 왜 신자가 되었냐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등불이라는 것은 교만한 자의 자기 과시가 아니라
세상의 빛이신 주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과 책임을
주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인데 이것을 받겠느냐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라며 겸손을 떠시겠습니까?
그것은 겸손한 척하며 사명과 책임을 부담스러워하며 미루는 게 아닐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책임과 사명의 회피이기도 하지만 겸손치도 않은 겁니다.
나란 존재는 빛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받아 비추는 존재일 뿐이라고 진정
그리 생각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빛을 내가 감히 가두거나 덮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내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라는 것에 영광스러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지만 주님의 기도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빛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를 당신 빛으로 비추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 빛으로 두 가지를 비추십니다.
하나는 아버지 하느님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비추신다는 것은 "당신 빛으로
우리는 빛을 보옵니다."
라는 시편 말씀의 뜻과 정확히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티 없는 거울로서 하느님을 그대로 반사한다고
클라라가 얘기한 것처럼 성자께서는 빛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그대로 반사하심으로써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십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세상의 어둠은 그 자체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둠이 빛과 반대되는 실재Reality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어둠이란 실재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따라서 빛이 나타나면 즉시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상은 그야말로 대명천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빛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가져오지 않은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고,
당신 자신처럼 우리도 세상의 빛으로 삼아주신 주님을 착한 행실로 본받고
따르지 않는 우리 자신을 탓하며 아울러 빛이 되기로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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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빛의 밝힘으로 세상이 의미를 가지며, 어둠을 넘어 서로의 정체를 깨닫게 해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향력을 보이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다. 소금은 음식의 참맛을 낼 뿐 아니라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맛과 빛으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영향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영향력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신학자 한스 큉은 “사제들이 교회를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면,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파견된 모든 분야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참행복 선언’이 완성되며 세상의 복음화가 이뤄진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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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김혜윤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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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의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 낼 수 있을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이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나오는 행동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때 드러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 그 전에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고 말한 것은 의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습니다.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했더니 성모님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믿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에 빛을 전해 주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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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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